오랜 친구를 땅에 묻는 그 하루 동안 깨닫게 되는 자명한 사실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이따금 자유로워진다.
2008.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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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낙타를 타고 가고 있다. 두 사람은 아랄 출신의 한 까자흐인이자 삶이 산산이 부서진 상이군인 예지게이와 그의 아내 우끄발라, 다른 남자는 예지게이와 마찬가지로 까자흐 출신으로 지금은 사로제끄 사막의 간이역인 보란리-부란니에서 온 까잔갑. 보란리는 까자흐어로 ‘눈보라’라는 뜻, 부란니는 러시아어로 ‘눈보라’라는 뜻. 그러므로 눈보라-눈보라 역의 겨울 풍경이 어떨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을 듯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의 젊은 시절, 예지게이는 젊은 어부였다. 그의 눈에 비친 풍경은 다음과 같다.
예지게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바닷가의 스텝 지방 출신이어서 아랄 사막에 익숙해 있었지만 그런 사막일 줄은 예상을 못했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해안으로부터, 그가 자라났던 바닷가의 푸르름으로부터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이 죽은 지역으로 오게 되다니! 그가 여기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그들은, 나중에 가서 알게 되었듯이, 오랜 세월, 그러니까 그들의 나머지 모든 생애를 보내도록 운명지어진 곳으로 가게 됐다. 곧이어 해가 떨어졌고 어둠이 내렸다. 사로제끄의 밤하늘에서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보란리-부란니에 도착했다. 이 기나긴, 하지만 결국 하루 동안의 이야기는 스텝의 하늘에 뜬 무수히 많은 별들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별들은 눈에 보이든 눈에 보이지 않든 우리 머리 위에 떠서 우리의 삶이란 결국 하루 동안의 꿈과 같은 것이라는 걸 보여주니까. 그리고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꿈은 백 년보다도 길다.
사막에서는 다른 삶을 꿈꿀 수밖에 없다
사막에 가면 누구나 별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 역시 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별. 이 별은 스텝 한가운데에 외따로 떨어진 간이역 보란리-부란니 역처럼 고독한 별이다. 고독이 사람이라면 그는 무엇을 상상할까? 죽음이나 절망? 그럴 리가 없다. 고독은 사막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볼 것이며, 그 별들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삶을 상상할 것이다. 소설은 늘 다른 삶을 상상하는 고독의 상태에서 태어난다. 그런 점에서 『백년보다 긴 하루』는 한 권의 소설이랄 수 있다.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소설은 어느 날 예지게이가 먼저 죽은 까잔갑을 땅에 묻기 위해 보란리-부란니 역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나이만 부족의 아나-베이뜨 묘지까지 찾아가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다룬다. 이 하루가 왜 백년보다도 더 기냐면 그 하루에 예지게이는 모두 꿈결처럼 지나가버린 지난 시절을 회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하루 정도면 충분히 회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일까? 그런 예지게이의 머리 위, 별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우주비행사의 전언이 전파를 타고 지구에 전해진다.
얼마 전 우리는 외계로부터, 그러나 대부분은 지구의 전리층으로부터 발산되는 잡음과 방해 전파로 가득 찬 무수히 많은 전파 신호들 가운데서, 아주 낮은 주파수대에 있는―이 때문에 주파수를 맞추기가 훨씬 용이했습니다―편향된 전파 신호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호는 언제나 똑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간격을 두고 잡혔습니다. 처음엔 우리는 그 전파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만 그 전파가 분명히 우주 공간의 어느 정확한 점으로부터 발사된다는 사실이 계속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그 전파는 인간과 비슷한 생물체들이 사는 레스나야 그루지에서 온 것이었고, 우주비행사들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미지의 우주를 향해 출발한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관측창 밖으로 우주의 검은 바다에서 휘황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하지만 고독한 별 지구를 바라본다. 그들은 이렇게 궤도 정거장에 남겨놓은 편지에다가 이렇게 쓴다. 지구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푸르름과 어린아이의 머리처럼 섬세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 이곳에서는 지구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 모두가 우리의 형제 자매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고는 감히 우리 자신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명해질 사실들. 그런 자명한 사실들을 알기 위해 우리는 모두 우주비행사가 되어야만 할까? 그뢷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 자명한 사실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마도 까잔갑을 보내는 예지게이의 처지가 될 때.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기 위해 보내는 그 하루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역시 지구라는 거대한 별을 타고 우주공간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그런 여행이며, 죽는다는 건 그 짧고도 길었던 여행이 모두 끝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마흔한 개의 사랑과 희망이 밴 조약돌들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막에 가면 삶이 여행이라는 걸, 그것도 고독과 고통과 갈망으로 가득 찬 여행이라는 걸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건 낙타 때문이다. 나는 사막에 가서야 낙타의 별명이 ‘사막의 배’라는 걸 알았다. 그처럼 낙타는 사막 위를 걸어가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듯이 떠간다. 바람을 맞은 모래는 파도처럼 출렁인다.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지구 역시 별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지평선일 뿐이다.
예지게이에게도 당연히 낙타가 있었다. 그 낙타는 예지게이가 보란리-부란니에 도착했을 때 까잔갑이 준 것이었다. 열흘 전에 태어난, 머리가 검고 조그만 혹이 달린 작은 짐승. 어린애 같은 상냥함과 호기심으로 빛나는 아주 커다랗고 촉촉한 눈을 가졌으며, 때로는 제 어미 주위를 껑충껑충 뛰어 돌아다니며 익살맞게 달리고 울타리가 쳐진 목초지에서 어미 뒤로 처질 때면 아기 울음과도 흡사한 소리로 제 어미를 부르는 새끼 낙타. 이름은 부란니 까라나르. 하지만 장차 까라나르가 그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낙타, 지칠 줄 모르는 힘센 짐승이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예지게이는 아직 어린 까라나르를 쓰다듬고 껴안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린 꼭 한 젖을 먹고 자란 형제들 같아. 너는 하얀 머리의 젖으로 자랐고 나는 그 젖으로 전쟁 신경증에서 회복됐으니까. 언제까지고 이랬으면 좋겠구나. 너하고 내가 다른 건 너는 젖꼭지에서 젖을 빨았지만 나는 젖을 짜서 만든 슈바뜨를 마신 거지.”
언제까지고 이랬으면 좋겠구나. 아마 그래서 예지게이는 이제 까라나르가 사나워져서 불알을 까거나 두 다리를 묶어둬야만 하는 시기가 됐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예지게이에게 까잔갑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조용히 살고 싶다면 가서 불알을 까버리고 진정으로 영예를 원한다면 손대지 말고 놔두게. 하지만 그대로 놔두려면 큰 책임을 떠맡아야 할 걸세. 힘과 끈기가 있어야 하니까. 그놈은 한 3년 동안은 거칠겠지만 그 뒤로는 순순히 자네 뒤를 따라올 걸세.”
까잔갑이 말한 ‘큰 책임’이란 무슨 뜻이었을까? 나중에 예지게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빨치산으로 있다가 보란리-부란니에 정착한 아부딸리쁘가 관리들에게 끌려가 죽은 뒤, 그의 아내 자리빠를 향한 금지된 갈망에 시달린다. 그러자 낙타 까라나르는 마치 예지게이의 또 다른 분신이라도 된다는 듯이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를 무너뜨리고 사막을 달려간다. 그 다음날부터 기차선로를 따라 까라나르에 대한 소문이 들려온다. 말라꿈지샵에서는 두 마리의 수놈 낙타를 죽도록 짓밟았고, 다음에는 네 마리의 암낙타를 몰고서 스텝으로 달아났다는 등의 소문들. 결국 까라나르의 행패를 견디지 못한 한 사람이 예지게이에게 그 미친 낙타를 데려가라고 편지를 쓴다.
예지게이는 까라나르를 데려오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예지게이는 자리빠의 집으로 달려갔다가 조약돌들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마흔한 개의 사랑과 희망이 밴 조약돌들은 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예지게이는 우리로 들어가 자신을 학대하듯 미친 듯이 채찍으로 까라나르를 때리고, 두려움과 고통에 눈이 뒤집힌 까라나르는 제 주인을 넘어뜨려 눈 위로 끌면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얼마간 끌려가다가 예지게이만 혼자 남게 된다. 사랑했을 때, 우리가 지게 될 큰 책임이란, 그리고 예지게이가 보게 될 수백만 개의 눈송이 같은 것이리라.
모자도 양가죽 외투도 다 잃어버린 채 그는 얼굴과 손의 피부가 화끈거리는 중에도 채찍을 휘두르며 어둠 속을 계속 걸었고 그러다 갑자기 끝없는 공허감과 무기력감이 엄습해 오자 눈 속에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 없이 울었다. 사로제끄 한복판에서 오직 혼자 무릎을 꿇은 채 그가 들을 수 있던 소리는 스텝 위를 질주하거나 휙휙거리면서 눈을 휘젓는 바람소리, 그리고 점점 드세어지는 눈발이 내리는 소리뿐이었다. 조용히 사르락거리며 내려앉는 수백만 개의 눈송이 하나하나가 헤어지는 아픔을 덜어줄 길은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살아갈 도리가 없다고, 다른 아버지들이 친자식을 대하는 것보다도 더 애지중지했던 그 아이들이 없이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는 거기에서 죽어 눈으로 덮이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끝끝내 소망할 때
우르나. 내몽골 서남부의 오르도스에 온, 소녀의 얼굴을 하고 노파의 목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여자. 그녀가 2002년에 출반한 , 즉 ‘초원에서’에는 초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래가 담겼다. 그녀의 노래는 마치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기 분명히 바람의 소리는 들리는 것처럼. 그 앨범의 두 번째 노래는 ‘상지도르지’다. 상지도르지는 오르도스에서 가장 유명한 자유투사라고 음반에는 설명해놓았다. 그가 정말 자유투사라면 뻥 뚫린 초원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어떤 자유를 갈망했던 것일까? 우르나가 부르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를 위해 버터가 될 우유를 쏟아내는,
젖 짜기 좋은 암소를 가진 그,
선량한 마음을 가진 그,
아이들이 태어나 그의 일을 도우리라.
옥수수로 뒤덮인 초원은 하늘을 위해서.
살찐 고기와 진귀한 음식은 입을 위해서.
옥수수가 익으면 우린 그걸 수확하리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펼쳐지면 우린 그 뒤를 따르리라.
나는 상지도르지가 누군지 모른다. 초원의 한가운데에서 그가 갈망한 자유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다만 우르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가 젖은 눈으로 바라봤을 대초원을 상상했을 뿐이다. 언젠가 나는 대초원에 가면 가슴이 뻥 뚫린 정도로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대초원에서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자유는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관계를 벗어나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려면 결국 관계 속에서 자유로워져야만 할 것이다. 그게 대초원이, 혹은 별들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현대물리학이, 그리고 예지게이에게 남은 마흔한 개의 사랑과 희망이 밴 조약돌들이 가르쳐주는 것이리라. 죽은 까잔갑이 말한 ‘큰 책임’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투사란 삶의 투사이리라.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이따금 자유로워진다. 다음과 같이 아빠 아부딸리프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의 아이들이 예지게이에게서 배운 대로 마흔한 개의 조약돌을 던지며 이렇게 말할 때. 가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속인 삶을 한 번 더 속일 때. 그리고 그걸 사랑이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끝끝내 소망할 때.
“봐, 다울. 점괘는 대체로 나쁘지 않아. 조금도 나쁘지 않아. 이건 길이야. 하지만 길에 안개가 조금 끼어 있어. 안개가 끼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예지게이 아저씨는 그 정도의 어려움도 없는 여행은 절대로 없다고 했어. 아빠는 돌아올 준비가 되었어. 아빠는 안장에 앉고 싶지만 뱃대끈이 조여지지 않아서 좀더 조여야 돼. 그건 뭔가가 아직도 아빠를 붙들어 두고 있다는 뜻이야, 다울. 그러니까 우린 기다려야 돼. 자, 이제 다시 봐. 오른쪽 갈비뼈는 어떻고 왼쪽 갈비뼈는 어떨까? 다치지 않았어. 아주 좋아. 그러면 아빠 이마는 어떻지? 아빤 우리를 걱정하고 있어. 다울, 심장에 있는 이 돌을 좀 봐. 아빠 심장에는 괴로움과 그리움이 있어. 아빠는 우리 집을 굉장히 그리워해. 그런데 아빠는 곧 돌아올까? 곧 돌아와. 하지만 한 쪽 발굽이 좀 헐렁해. 그건 말굽을 갈아야 된다는 뜻이야. 우린 좀더 기다려야 돼. 안장 가방은 어떨까? 아, 안장 가방에는 아빠가 시장에서 산 물건들이 들어 있어. 그러면 이제 별들은 좋은 자리에 있나? 자, 이 별은 황금 굴렌데. 거기에 끈이 매여 있어.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아.―아직은 그건 아빠가 곧 말을 풀어서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야.”
예지게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바닷가의 스텝 지방 출신이어서 아랄 사막에 익숙해 있었지만 그런 사막일 줄은 예상을 못했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해안으로부터, 그가 자라났던 바닷가의 푸르름으로부터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이 죽은 지역으로 오게 되다니! 그가 여기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그들은, 나중에 가서 알게 되었듯이, 오랜 세월, 그러니까 그들의 나머지 모든 생애를 보내도록 운명지어진 곳으로 가게 됐다. 곧이어 해가 떨어졌고 어둠이 내렸다. 사로제끄의 밤하늘에서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보란리-부란니에 도착했다. 이 기나긴, 하지만 결국 하루 동안의 이야기는 스텝의 하늘에 뜬 무수히 많은 별들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별들은 눈에 보이든 눈에 보이지 않든 우리 머리 위에 떠서 우리의 삶이란 결국 하루 동안의 꿈과 같은 것이라는 걸 보여주니까. 그리고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꿈은 백 년보다도 길다.
사막에서는 다른 삶을 꿈꿀 수밖에 없다
사막에 가면 누구나 별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 역시 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별. 이 별은 스텝 한가운데에 외따로 떨어진 간이역 보란리-부란니 역처럼 고독한 별이다. 고독이 사람이라면 그는 무엇을 상상할까? 죽음이나 절망? 그럴 리가 없다. 고독은 사막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볼 것이며, 그 별들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삶을 상상할 것이다. 소설은 늘 다른 삶을 상상하는 고독의 상태에서 태어난다. 그런 점에서 『백년보다 긴 하루』는 한 권의 소설이랄 수 있다.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소설은 어느 날 예지게이가 먼저 죽은 까잔갑을 땅에 묻기 위해 보란리-부란니 역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나이만 부족의 아나-베이뜨 묘지까지 찾아가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다룬다. 이 하루가 왜 백년보다도 더 기냐면 그 하루에 예지게이는 모두 꿈결처럼 지나가버린 지난 시절을 회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하루 정도면 충분히 회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일까? 그런 예지게이의 머리 위, 별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우주비행사의 전언이 전파를 타고 지구에 전해진다.
얼마 전 우리는 외계로부터, 그러나 대부분은 지구의 전리층으로부터 발산되는 잡음과 방해 전파로 가득 찬 무수히 많은 전파 신호들 가운데서, 아주 낮은 주파수대에 있는―이 때문에 주파수를 맞추기가 훨씬 용이했습니다―편향된 전파 신호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호는 언제나 똑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간격을 두고 잡혔습니다. 처음엔 우리는 그 전파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만 그 전파가 분명히 우주 공간의 어느 정확한 점으로부터 발사된다는 사실이 계속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그 전파는 인간과 비슷한 생물체들이 사는 레스나야 그루지에서 온 것이었고, 우주비행사들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미지의 우주를 향해 출발한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관측창 밖으로 우주의 검은 바다에서 휘황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하지만 고독한 별 지구를 바라본다. 그들은 이렇게 궤도 정거장에 남겨놓은 편지에다가 이렇게 쓴다. 지구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푸르름과 어린아이의 머리처럼 섬세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 이곳에서는 지구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 모두가 우리의 형제 자매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고는 감히 우리 자신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명해질 사실들. 그런 자명한 사실들을 알기 위해 우리는 모두 우주비행사가 되어야만 할까? 그뢷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 자명한 사실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마도 까잔갑을 보내는 예지게이의 처지가 될 때.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기 위해 보내는 그 하루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역시 지구라는 거대한 별을 타고 우주공간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그런 여행이며, 죽는다는 건 그 짧고도 길었던 여행이 모두 끝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마흔한 개의 사랑과 희망이 밴 조약돌들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막에 가면 삶이 여행이라는 걸, 그것도 고독과 고통과 갈망으로 가득 찬 여행이라는 걸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건 낙타 때문이다. 나는 사막에 가서야 낙타의 별명이 ‘사막의 배’라는 걸 알았다. 그처럼 낙타는 사막 위를 걸어가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듯이 떠간다. 바람을 맞은 모래는 파도처럼 출렁인다.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지구 역시 별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지평선일 뿐이다.
예지게이에게도 당연히 낙타가 있었다. 그 낙타는 예지게이가 보란리-부란니에 도착했을 때 까잔갑이 준 것이었다. 열흘 전에 태어난, 머리가 검고 조그만 혹이 달린 작은 짐승. 어린애 같은 상냥함과 호기심으로 빛나는 아주 커다랗고 촉촉한 눈을 가졌으며, 때로는 제 어미 주위를 껑충껑충 뛰어 돌아다니며 익살맞게 달리고 울타리가 쳐진 목초지에서 어미 뒤로 처질 때면 아기 울음과도 흡사한 소리로 제 어미를 부르는 새끼 낙타. 이름은 부란니 까라나르. 하지만 장차 까라나르가 그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낙타, 지칠 줄 모르는 힘센 짐승이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예지게이는 아직 어린 까라나르를 쓰다듬고 껴안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린 꼭 한 젖을 먹고 자란 형제들 같아. 너는 하얀 머리의 젖으로 자랐고 나는 그 젖으로 전쟁 신경증에서 회복됐으니까. 언제까지고 이랬으면 좋겠구나. 너하고 내가 다른 건 너는 젖꼭지에서 젖을 빨았지만 나는 젖을 짜서 만든 슈바뜨를 마신 거지.”
언제까지고 이랬으면 좋겠구나. 아마 그래서 예지게이는 이제 까라나르가 사나워져서 불알을 까거나 두 다리를 묶어둬야만 하는 시기가 됐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예지게이에게 까잔갑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조용히 살고 싶다면 가서 불알을 까버리고 진정으로 영예를 원한다면 손대지 말고 놔두게. 하지만 그대로 놔두려면 큰 책임을 떠맡아야 할 걸세. 힘과 끈기가 있어야 하니까. 그놈은 한 3년 동안은 거칠겠지만 그 뒤로는 순순히 자네 뒤를 따라올 걸세.”
까잔갑이 말한 ‘큰 책임’이란 무슨 뜻이었을까? 나중에 예지게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빨치산으로 있다가 보란리-부란니에 정착한 아부딸리쁘가 관리들에게 끌려가 죽은 뒤, 그의 아내 자리빠를 향한 금지된 갈망에 시달린다. 그러자 낙타 까라나르는 마치 예지게이의 또 다른 분신이라도 된다는 듯이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를 무너뜨리고 사막을 달려간다. 그 다음날부터 기차선로를 따라 까라나르에 대한 소문이 들려온다. 말라꿈지샵에서는 두 마리의 수놈 낙타를 죽도록 짓밟았고, 다음에는 네 마리의 암낙타를 몰고서 스텝으로 달아났다는 등의 소문들. 결국 까라나르의 행패를 견디지 못한 한 사람이 예지게이에게 그 미친 낙타를 데려가라고 편지를 쓴다.
예지게이는 까라나르를 데려오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예지게이는 자리빠의 집으로 달려갔다가 조약돌들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마흔한 개의 사랑과 희망이 밴 조약돌들은 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예지게이는 우리로 들어가 자신을 학대하듯 미친 듯이 채찍으로 까라나르를 때리고, 두려움과 고통에 눈이 뒤집힌 까라나르는 제 주인을 넘어뜨려 눈 위로 끌면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얼마간 끌려가다가 예지게이만 혼자 남게 된다. 사랑했을 때, 우리가 지게 될 큰 책임이란, 그리고 예지게이가 보게 될 수백만 개의 눈송이 같은 것이리라.
모자도 양가죽 외투도 다 잃어버린 채 그는 얼굴과 손의 피부가 화끈거리는 중에도 채찍을 휘두르며 어둠 속을 계속 걸었고 그러다 갑자기 끝없는 공허감과 무기력감이 엄습해 오자 눈 속에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 없이 울었다. 사로제끄 한복판에서 오직 혼자 무릎을 꿇은 채 그가 들을 수 있던 소리는 스텝 위를 질주하거나 휙휙거리면서 눈을 휘젓는 바람소리, 그리고 점점 드세어지는 눈발이 내리는 소리뿐이었다. 조용히 사르락거리며 내려앉는 수백만 개의 눈송이 하나하나가 헤어지는 아픔을 덜어줄 길은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살아갈 도리가 없다고, 다른 아버지들이 친자식을 대하는 것보다도 더 애지중지했던 그 아이들이 없이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는 거기에서 죽어 눈으로 덮이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끝끝내 소망할 때
우르나. 내몽골 서남부의 오르도스에 온, 소녀의 얼굴을 하고 노파의 목소리를 내는 신비로운 여자. 그녀가 2002년에 출반한
그를 위해 버터가 될 우유를 쏟아내는,
젖 짜기 좋은 암소를 가진 그,
선량한 마음을 가진 그,
아이들이 태어나 그의 일을 도우리라.
옥수수로 뒤덮인 초원은 하늘을 위해서.
살찐 고기와 진귀한 음식은 입을 위해서.
옥수수가 익으면 우린 그걸 수확하리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펼쳐지면 우린 그 뒤를 따르리라.
나는 상지도르지가 누군지 모른다. 초원의 한가운데에서 그가 갈망한 자유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다만 우르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가 젖은 눈으로 바라봤을 대초원을 상상했을 뿐이다. 언젠가 나는 대초원에 가면 가슴이 뻥 뚫린 정도로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대초원에서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자유는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관계를 벗어나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려면 결국 관계 속에서 자유로워져야만 할 것이다. 그게 대초원이, 혹은 별들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현대물리학이, 그리고 예지게이에게 남은 마흔한 개의 사랑과 희망이 밴 조약돌들이 가르쳐주는 것이리라. 죽은 까잔갑이 말한 ‘큰 책임’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투사란 삶의 투사이리라.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이따금 자유로워진다. 다음과 같이 아빠 아부딸리프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의 아이들이 예지게이에게서 배운 대로 마흔한 개의 조약돌을 던지며 이렇게 말할 때. 가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속인 삶을 한 번 더 속일 때. 그리고 그걸 사랑이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끝끝내 소망할 때.
“봐, 다울. 점괘는 대체로 나쁘지 않아. 조금도 나쁘지 않아. 이건 길이야. 하지만 길에 안개가 조금 끼어 있어. 안개가 끼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예지게이 아저씨는 그 정도의 어려움도 없는 여행은 절대로 없다고 했어. 아빠는 돌아올 준비가 되었어. 아빠는 안장에 앉고 싶지만 뱃대끈이 조여지지 않아서 좀더 조여야 돼. 그건 뭔가가 아직도 아빠를 붙들어 두고 있다는 뜻이야, 다울. 그러니까 우린 기다려야 돼. 자, 이제 다시 봐. 오른쪽 갈비뼈는 어떻고 왼쪽 갈비뼈는 어떨까? 다치지 않았어. 아주 좋아. 그러면 아빠 이마는 어떻지? 아빤 우리를 걱정하고 있어. 다울, 심장에 있는 이 돌을 좀 봐. 아빠 심장에는 괴로움과 그리움이 있어. 아빠는 우리 집을 굉장히 그리워해. 그런데 아빠는 곧 돌아올까? 곧 돌아와. 하지만 한 쪽 발굽이 좀 헐렁해. 그건 말굽을 갈아야 된다는 뜻이야. 우린 좀더 기다려야 돼. 안장 가방은 어떨까? 아, 안장 가방에는 아빠가 시장에서 산 물건들이 들어 있어. 그러면 이제 별들은 좋은 자리에 있나? 자, 이 별은 황금 굴렌데. 거기에 끈이 매여 있어.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아.―아직은 그건 아빠가 곧 말을 풀어서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야.”
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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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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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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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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