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밥 먹여 주랴!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든 ‘한번’ 기능직이 ‘두 번’ 사무직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는 건 여기나 저기나 다 마찬가지다. 물론 예외는 있다. 얼마 전, 국내 첫 ‘박사 집배원’이 탄생했다.
글ㆍ사진 최성일
200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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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든 ‘한번’ 기능직이 ‘두 번’ 사무직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는 건 여기나 저기나 다 마찬가지다. 물론 예외는 있다. 얼마 전, 국내 첫 ‘박사 집배원’이 탄생했다. “집배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고 개인적으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결실을 맺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한겨레> 2009년 1월21일자 22면)

스티븐 로(Stephen Law)는 집배원 출신 철학자다.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 케임브리지에서 우체국 직원으로 4년을 일했다. 이 시절에 독서를 많이 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다른 책을 계속 읽다가, 결국 철학책만 읽었다. 철학책이 정말이지 커다란 문제, 다시 말해 나를 늘 속 썩여온 문제들에 답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거다. 다른 학문들은 대부분 그런 문제를 비켜가거나 무시했다.

그러던 차에 런던의 시티 유니버시티에서 어렵사리 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1등을 해서 받은 장학금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 가게 됐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옥스퍼드의 여러 단과대학에서 강의를 맡았고, 지금은 런던 대학교 히스럽 칼리지 철학교수로 있다.”(『돼지가 과학에 빠진 날』 앞표지 날개의 ‘스티븐 로가 말하는 스티븐 로’에서) 스티븐 로의 이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돼지가 철학에 빠진 날(The Philosophy Files)』(오숙은 옮김, 김영사, 2001)은 두 가지 점이 의외다. 우선 이 책은 스티븐 로가 펴낸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우리말로 옮겨졌지만, 나는 그의 책이 세 권(번역서 기준)이나 더 번역된 연후에야 그런 사실을 안다. 그리고 꾸준히 간행되는 스테디셀러라는 사실이다. 나는 2008년 4월 27일 발행한 1판 19쇄를 구입했다.

이 책의 꾸준한 판매는 다소 의아하다. 내 독후감이 썩 시원치 않아서다.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스티븐 로가 케케묵은 낡은 틀과 어렴풋한 첨단과학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작과 끝이 영 마땅치 않은데 개인의 동질성과 ‘실재’를 논의한 1장과 2장을 보자.

“결국 개인의 동일성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나름의 기억과 성격에 있는 일종의 ‘영속성’인 것 같다”는 주장은 그런대로 수긍한다. 하지만 가상의 화성인을 등장시켜 두뇌이식과 브레인 스캐너를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것은 약간 유치하다. 머리를 열어 보인 바 있는, 그러니까 뇌수술을 경험한 필자는 짜증이 날 정도다.

또한 이게 과연 서양 현대철학의 실체인가라는 의구심이 인다. 물론 이 책은 청소년과 일반 독자용 철학입문서다. 삽화를 곁들여 “여러분이 스스로 질문하고 알아내도록 이끌어주는” 측면은 돋보인다. 그러나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를 통해 처음 접한, 플라톤의 실재론이라 할 수 있는 ‘동굴의 비유’는 다시 봐도 어정쩡하다.

스티븐 로가 여러 번 강조하는 ‘중립성’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종(種) 평등을 다룬 대목에서 육식을 즐기는 이를 노예 소유주에 비유한 것은 지나치다. 이런 식이면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침탈도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다.

나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종 평등이론을 처음 접하고 그것에 호감을 나타낸 바 있다. 그건 다분히 낯설음이 주는 충격과 종 평등이론의 주창자인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정연교 옮김, 세종서적, 1996)에서 받은 깊은 인상이 섞인 결과였다. 하지만 종 평등이론은 다소 한가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스티븐 로의 방식으로 계속 물음을 던진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말이다. ‘식물과 농작물을 꼭 먹어야 할까?’ ‘종 등이론이 생물에 대한 반차별을 동물로 제한하는 까닭은 종의 꼬리표가 붙어서일까?’ 나는 종 평등이론이 생태계 전체로 확산되길 바란다. 생태계 평등이론을 따르면, 우리가 마음껏 섭취할 수 있는 것은 공기와 물뿐이리라. 단, 물은 물에 함유된 플랑크톤을 걸러 먹어야 할 것이다.

가상현실을 다룬 6장은 만화 같다. 7장 「정신이란 무엇일까?」에서 “아무리 뇌전공 의사라 해도 내 정신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 한다”고 한 것은 내 경험에 비춰보면 무의미한 서술이다. “박쥐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박쥐의 정신 속에 들어가서 박쥐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이건 맞다.

“오늘날 전 세계 대학의 철학자와 과학자들도 우리의 정신과 물리적 신체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놓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으니까.” 이건 낙후한 상황 설정이 아닌가 싶다. 결정적으로, 유물론을 신봉(信奉)하는 나로선,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가 꽤나 불편하다.

선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나쁜 일에 대처하는 데 힘이 된다거나 “일부 사람들의 생활을 더 낫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이기적이고 잔인했던 사람들이 인정 많고 고결한 사람으로 바뀐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대단한 장점을 하나 지녔다. 먼저 나는 그 점에 대해 스티븐 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는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서양철학의 한계(아니, 철학 일반의 한계)와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본질을 꿰뚫게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라는 아주 유명한 철학자는 모든 철학 문제는 우리가 언어의 장난에 속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가 항상 철학적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건 언어가 쓰이는 방식의 차이점을 못 보고 지나치기 때문이다.”

왜 비트겐슈타인을 최후의 철학자라 하는지 이제야 안다.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서양철학의 ‘말장난’은 종말을 고한다. 2천 년 넘게 이어온 ‘말놀이’의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하여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철학은 엉뚱한 곳으로 이탈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철학의 모든 수수께끼가 단어를 비롯한 여러 기호의 서로 다른 쓰임새를 간과한 결과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과연 옳을까? 철학의 모든 수수께끼를 제거하는 길은 언어의 여러 쓰임새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걸까? 이것은 철학자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러분 생각은?”

나는 이제야 비로소 비트겐슈타인의 널리 알려진 명제가 무얼 뜻하는지 안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에서)

『돼지가 철학에 빠진 날』의 속편인 『돼지가 과학에 빠진 날(The Philosophy FilesⅡ)』(정병선 옮김, 김영사, 2008)은 “철학적인 난제들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돕기 위해 쓰여졌다.” 전편과 같은 형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읽은 바로는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다.

꽤 나아졌어도 내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여전해서다. “우리는 기꺼이 식물을 죽인다. 특히 먹어야 할 때면.” 하지만 사고의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육식과 채식은 둘 다 나쁘다. 내가 살아남고자 생물계의 일원을 포식하는 것이기에.

스티븐 로는 사형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유 가운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측면을 유치하게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살인의 억지 효과와 살인자들의 재범 방지 차원에 앞서 ‘응징 론’은 충분히 옳다. 적어도 살인마 급 살인자는 극형에 처하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돼지가 철학에 빠진 날』을 읽어본 독자들은 이 장의 첫 번째 논의가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장에는 중요한 새로운 주장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우주의 지렛대 논증, 단순성 이론, 제비뽑기의 오류, 신앙에 관한 새로운 두 주장 등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읽어보도록!”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익숙한 논의가 없지 않다. “실제로 종교적 신앙은 일부 사람들의 일생을 더 나은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켜놓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시간여행과 사람처럼 생각하는 가상의 ‘로보 브레인’에 대한 논의는 약간 짜증스럽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좀 더 엄밀하게 설정하는 게 좋지 않았므까.

스티븐 로는 인간중심주의와 과학만능주의에 조금은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인류는 달을 정복하기도 했다.” 달 현지 탐사를 달 정복이라 하는 것은 과장되고 맹랑한 표현이다. 그렇다고 스티븐 로가 창조론자처럼 기만적이거나 제 멋대로는 아니다.

“그들은 창세기의 내용이 은유이거나 신화일 뿐이라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혹은 과학이 발견한 사실과 부합시키는 방식으로 창세기의 이야기를 해석할지도 모를 일이다. 예를 들어 일부 기독교인들은 창조의 여섯 ‘날’들을 보통 알고 있는 24시간이 아니라 수백만 년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한 달 간격으로 출간된 스티븐 로의 『철학학교 1, 2(The Philosophy Gym: 25 Short Adventures in Thinking)』(하상용 옮김, 김태권 삽화, 창비, 2004) 가운데 첫째 권을 리뷰 한 바 있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2004년 7월20일자)에 실린 필자의 리뷰는 꽤나 호의적이었다.

“이 책은 주제와 주제를 구현하는 방식이 기존의 철학입문서와 확연히 구분된다. 옮긴이의 표현을 빌리면 ‘추상적이고 심오한 주제에 대해 이름 높은 철학자들의 이해하기 힘든 고견들에 대한 해설이 나열되어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지은이의 말대로 ‘시간여행과 우주의 기원처럼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직접, 그리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루는 책’이다. 나도 바로 이런 철학책을 원했다.

‘철학은 곧 활동’이라는 전제 아래 비판적 읽기와 독자 스스로 생각하기를 고무하는 점도 돋보인다. 각 장은 서로 다른 입장과 나름의 논증을 통해 철학적 주제를 소개한 다음, 핵심 사항을 간추리고 주제와 관련된 참고 항목을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철학 주제를 설명하면서 대화, 이야기, 사고실험 같은 다양한 형식을 사용한 점이 이채로운데 한국어판에서는 이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적절하게 번안했다.”

내가 같은 저자의 비슷한 주제를 다룬 책을 상반되게 평가한 연유는 뭘까? 실제로 생각을 이끌어내는 책을 원한 까닭일까?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사고 훈련을 쌓은 2008학년도 대학입시 응시자가 그 해의 ㅅ대 인문계 정시 논술을 치렀다면, 이 책의 ‘가르침’은 별무소용이었을 것이다. 모두 여덟 ‘문항’의 2008학년도 ㅅ대 인문계 정시 논술 문제는 까다롭기 짝이 없는데다가 어떤 방향의 정답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니면 『철학학교』의 번안이 잘되어 그럴까? 『철학학교』 한국어판은 원서의 분량을 고려해 둘로 나누었다. “번역서의 제목을 ‘철학학교’로 붙이긴 했지만, 원제목에 있는 ‘Gym’은 학교라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갈고 닦는 곳’에 가깝”다는 게 옮긴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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