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자와 독자에게 보내는 어느 심리학자의 편지
“내 명함의 타이틀은 ‘심리학자’나 ‘가족문제치료전문가’가 아니다. 내 이름 밑에는 이 한 단어가 쓰여 있다. ‘사람’.”
200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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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널리 알려진 책에 대한 리뷰는 부담이 따른다. 내 험한 붓질이 그 책 애독자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기에. 하지만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성뿐만 아니라 책에도 “다양한 (측)면이 공존”하거니와 흠잡을 데 없는 책은 없어서다. 그렇다고 억지로 흠을 잡아선 곤란하다.
심리학자 대니얼 고틀립(Daniel Gottlieb)의 『샘에게 보내는 편지』(이문재?김명희 옮김, 문학동네, 2007)는 할아버지가 외손자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이다. 서른셋에 교통사고를 당한 할아버지는 전신마비 상태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의 외손자 샘은 ‘전반적 발달장애(PDD)’ 진단을 받았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몸 상태만 보면, 편지글은 신파조로 흐를 경향이 짙어 보인다. 그러나 손자에게 주는 가르침이 담긴 외할아버지가 미리 쓴 편지 32통에서 ‘찌질거림’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자립적이고 강인해 보이는 사람들”에게선 거북함을 느낀다. 그들의 잘남을 시샘하는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도 그리 자립적이지 못하며 강인하지 않아서다.
“샘, 내가 삶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건 그래서이다. 내게 맡겨진 세상의 일부를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지. 더 크게, 더 좋게 만들려 하지도 않고, 바꾸려 하지도 않고 말이다. 나는 돌보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네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내게 맡겨진 삼 밀리미터를 돌보는 일 중의 하나이다.”
내가 맨 처음 줄을 그은 대목은 공감보다는 의심의 눈초리가 앞선다. 인용문을 대하는 나의 회의적 시각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명제에 경도된 탓이 크다.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세계를 설명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데 있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열한 번째)
연약함을 성찰하는 대목에 이르러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우리의 연약함은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마음도 열어준다.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슬퍼할 때, 또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슬퍼해줄 때,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변화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은 신뢰감을 더욱 다진다. “부끄러움은 살아가는 내내 다른 방식으로 계속 찾아올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때면, 너를 사랑하고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아가기 바란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자신이 드러났을 때 맺어지는 친밀감 속에는 놀라운 기회가 숨어 있다. 네가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그렇지만 대니얼 고틀립이 이스라엘에서 만난 나자렛 출신 아랍계 기독교인의 주장을 일반화하는 것은 꽤 문제 있어 보인다. 마르완은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아라파트가 죽은 후로 ‘평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호전적인’ 이스라엘 권력자들은 ‘평화의 사도’란 얘긴지?
하여 중동 문제를 둘러싼 대니얼 고틀립의 어정쩡한 마무리는 불가피하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평화롭고,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수백 년에 걸친 염원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반유대 감정을 지닌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한테 느꼈던 두려움을 술회하는데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선 약간 미심쩍다.
대니얼 고틀립의 옅은 유대인 정체성이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의 진심을 훼손하진 않는다. “앞으로 더 많이 잃고, 더 많이 아플 거다. 네가 상실감으로 아플 때, 그 아픔을 잊게 해줄 대체물을 찾지 않기 바란다. 그 아픔도 모든 감정들처럼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아픔을 겪으면서, 역경에 대처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샘, 살면서 상처를 입는 순간이 있다. 지금도 일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땐 마음의 상처를 받곤 할 것이다. 그렇지만 네가 그 상처를 너 자신이나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 바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네게 고통을 잊게 해주겠다거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귀 기울이지 말기 바란다. 고통을 없애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아무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샘에게 보내는 편지』의 속편격인 『마음에게 말 걸기』(노지양 옮김, 문학동네, 2009)는 전편보다 명징하다.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와 “모든 것이 변한다” 사이를 오가거나 ‘판단 정지’의 장점을 강조하는 것이 다소 아쉽긴 하다. 그래도 대니얼 고틀립의 인생철학은 쏙쏙 들어온다.
먼저 내 분수를 지키자. 주제 파악을 잘하자. “‘혹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원래 2분단 마지막 줄이 아니었을까?’ 사실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나도 거기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대체 뭐가 부끄럽단 말인가?” 맞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신경림, 「罷場」에서)
우리는 넘어지면서 배운다. 하지만 아이들을 몰아붙이면 “아이들은 오직 실패와 실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참된 교훈을 끝끝내 배울 수 없게 된다.” 넘어지면서 배우며 대니얼 고틀립은 그의 “인간성 안에 다양한 면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동의 화합을 위한 행사에서 성가대 지휘자의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에 화가 난 대니얼 고틀립은 지역신문 칼럼에다 그 사건을 다룬다. 칼럼이 지면에 반영되자 대니얼 고틀립은 독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는다. 죄다 부정적인 내용이었는데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말한 내용은 전부 옳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했다는 점은 잘못입니다. 당신 또한 당신이 비판한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신은 이 지역사회에 그의 이름을 나쁘게 퍼뜨렸으니까요.” 공감하기 어려운 발언이지만 대니얼 고틀립은 랍비의 지적을 수긍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것을 다른 이야기에도 썼던가?”(에필로그) 고교 시절의 스페인어 과목 학점, 유친(有親)한 부자(父子) 심리 상담 의뢰인, 150쪽의 유대 격언과 관련된 내용은 전편에도 나온다. 하지만 속편에서 그 내용을 구체화하기에 동어반복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니얼 고틀립은 ‘장애’가 “다른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저 잘났다 까부는’ 인간들이 유념할 대목. “아주 친밀한 관계에서도 ‘의존성’은 무슨 저주의 말처럼 쓰인다.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우리는 이러한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상호 의존’이라고.”
대니얼 고틀립의 ‘희망론’은 의미심장하다. “희망은 언제나 미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희망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희망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 내 인생을 바꾸어 주리라는 기대 속에 나를 가두어버리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희망 없음이 꼭 절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희망 없음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며 다음과 같은 삶의 가장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삶의 어려운 질문이란 바로 이런 거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 있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면 스스로 말하는 대니얼 고틀립의 정체는? “내 명함의 타이틀은 ‘심리학자’나 ‘가족문제치료전문가’가 아니다. 내 이름 밑에는 이 한 단어가 쓰여 있다. ‘사람’.”
아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룬 책”에서 곱씹어볼 만한 ‘단편’이다.
“별생각 없이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아이를 끌어가려고 한다.”
“사랑이 언제나 예쁘고 포근하고 사랑스럽지만은 않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다.”
“아이들이 먼저 요청하지 않는 한 절대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이 법칙은 10대 청소년기에도 적용된다.)”
“개인적으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원치 않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결코 좋고 나쁨, 쉽고 어려움의 이분법으로 나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인생이란 말하는 사람 혼자 재밌고 듣는 사람은 지루한 농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리학자 대니얼 고틀립(Daniel Gottlieb)의 『샘에게 보내는 편지』(이문재?김명희 옮김, 문학동네, 2007)는 할아버지가 외손자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이다. 서른셋에 교통사고를 당한 할아버지는 전신마비 상태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의 외손자 샘은 ‘전반적 발달장애(PDD)’ 진단을 받았다.
발신자와 수신자의 몸 상태만 보면, 편지글은 신파조로 흐를 경향이 짙어 보인다. 그러나 손자에게 주는 가르침이 담긴 외할아버지가 미리 쓴 편지 32통에서 ‘찌질거림’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자립적이고 강인해 보이는 사람들”에게선 거북함을 느낀다. 그들의 잘남을 시샘하는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도 그리 자립적이지 못하며 강인하지 않아서다.
“샘, 내가 삶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건 그래서이다. 내게 맡겨진 세상의 일부를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지. 더 크게, 더 좋게 만들려 하지도 않고, 바꾸려 하지도 않고 말이다. 나는 돌보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네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내게 맡겨진 삼 밀리미터를 돌보는 일 중의 하나이다.”
내가 맨 처음 줄을 그은 대목은 공감보다는 의심의 눈초리가 앞선다. 인용문을 대하는 나의 회의적 시각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명제에 경도된 탓이 크다.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세계를 설명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데 있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열한 번째)
연약함을 성찰하는 대목에 이르러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우리의 연약함은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마음도 열어준다.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슬퍼할 때, 또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슬퍼해줄 때,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변화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은 신뢰감을 더욱 다진다. “부끄러움은 살아가는 내내 다른 방식으로 계속 찾아올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때면, 너를 사랑하고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아가기 바란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자신이 드러났을 때 맺어지는 친밀감 속에는 놀라운 기회가 숨어 있다. 네가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가!”
그렇지만 대니얼 고틀립이 이스라엘에서 만난 나자렛 출신 아랍계 기독교인의 주장을 일반화하는 것은 꽤 문제 있어 보인다. 마르완은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아라파트가 죽은 후로 ‘평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호전적인’ 이스라엘 권력자들은 ‘평화의 사도’란 얘긴지?
하여 중동 문제를 둘러싼 대니얼 고틀립의 어정쩡한 마무리는 불가피하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평화롭고,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수백 년에 걸친 염원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반유대 감정을 지닌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한테 느꼈던 두려움을 술회하는데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선 약간 미심쩍다.
대니얼 고틀립의 옅은 유대인 정체성이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의 진심을 훼손하진 않는다. “앞으로 더 많이 잃고, 더 많이 아플 거다. 네가 상실감으로 아플 때, 그 아픔을 잊게 해줄 대체물을 찾지 않기 바란다. 그 아픔도 모든 감정들처럼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아픔을 겪으면서, 역경에 대처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샘, 살면서 상처를 입는 순간이 있다. 지금도 일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땐 마음의 상처를 받곤 할 것이다. 그렇지만 네가 그 상처를 너 자신이나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 바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네게 고통을 잊게 해주겠다거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귀 기울이지 말기 바란다. 고통을 없애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아무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샘에게 보내는 편지』의 속편격인 『마음에게 말 걸기』(노지양 옮김, 문학동네, 2009)는 전편보다 명징하다.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와 “모든 것이 변한다” 사이를 오가거나 ‘판단 정지’의 장점을 강조하는 것이 다소 아쉽긴 하다. 그래도 대니얼 고틀립의 인생철학은 쏙쏙 들어온다.
먼저 내 분수를 지키자. 주제 파악을 잘하자. “‘혹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원래 2분단 마지막 줄이 아니었을까?’ 사실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나도 거기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대체 뭐가 부끄럽단 말인가?” 맞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신경림, 「罷場」에서)
우리는 넘어지면서 배운다. 하지만 아이들을 몰아붙이면 “아이들은 오직 실패와 실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참된 교훈을 끝끝내 배울 수 없게 된다.” 넘어지면서 배우며 대니얼 고틀립은 그의 “인간성 안에 다양한 면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동의 화합을 위한 행사에서 성가대 지휘자의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에 화가 난 대니얼 고틀립은 지역신문 칼럼에다 그 사건을 다룬다. 칼럼이 지면에 반영되자 대니얼 고틀립은 독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는다. 죄다 부정적인 내용이었는데 한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말한 내용은 전부 옳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했다는 점은 잘못입니다. 당신 또한 당신이 비판한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신은 이 지역사회에 그의 이름을 나쁘게 퍼뜨렸으니까요.” 공감하기 어려운 발언이지만 대니얼 고틀립은 랍비의 지적을 수긍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것을 다른 이야기에도 썼던가?”(에필로그) 고교 시절의 스페인어 과목 학점, 유친(有親)한 부자(父子) 심리 상담 의뢰인, 150쪽의 유대 격언과 관련된 내용은 전편에도 나온다. 하지만 속편에서 그 내용을 구체화하기에 동어반복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니얼 고틀립은 ‘장애’가 “다른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을 가진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저 잘났다 까부는’ 인간들이 유념할 대목. “아주 친밀한 관계에서도 ‘의존성’은 무슨 저주의 말처럼 쓰인다.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우리는 이러한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상호 의존’이라고.”
삶의 어려운 질문이란 바로 이런 거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 있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면 스스로 말하는 대니얼 고틀립의 정체는? “내 명함의 타이틀은 ‘심리학자’나 ‘가족문제치료전문가’가 아니다. 내 이름 밑에는 이 한 단어가 쓰여 있다. ‘사람’.”
아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룬 책”에서 곱씹어볼 만한 ‘단편’이다.
“별생각 없이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아이를 끌어가려고 한다.”
“사랑이 언제나 예쁘고 포근하고 사랑스럽지만은 않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다.”
“아이들이 먼저 요청하지 않는 한 절대 충고하지 말아야 한다.(이 법칙은 10대 청소년기에도 적용된다.)”
“개인적으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원치 않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결코 좋고 나쁨, 쉽고 어려움의 이분법으로 나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인생이란 말하는 사람 혼자 재밌고 듣는 사람은 지루한 농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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