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강연회]‘메두사의 시선’ 을 이해하는 몇 가지 방법 - 『메두사의 시선』 김용석
철학자가 보는 메두사의 이야기는 어떠할까? 김용석 철학자는 메두사가 머리가 잘린 이후의 일에 더 주목한다. 페르세우스는 신들의 물건으로 무장을 하고, 메두사의 머리를 찾으러 간다. 그 잘린 머리는 어떻게 되었던가?
201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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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는 신화에 나오는 괴물 고르곤(그리스어로 ‘끔찍한 것들’이란다)이었지만, 두 언니와는 다르게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허나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이를 질투한 아테나가 메두사를 흉측한 괴물로 만들었고, 특히 아름다웠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꿈틀거리는 뱀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게다가 메두사의 무섭게 튀어나와 버린 그 눈에 저주를 걸어, 마주치는 모든 것이 돌로 변하게끔 했다. 아테나는 그러고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페르세우스를 사주해 메두사의 목을 치게 한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일까, 신에게 도전한 자의 처참한 최후일까? 메두사에 관한 유명한 이 일화는 많은 예술가와 신화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여기, 철학자 김용석도 이 신화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철학자가 보는 메두사의 이야기는 어떠할까? 김용석 철학자는 메두사가 머리가 잘린 이후의 일에 더 주목한다. 페르세우스는 신들의 물건으로 무장을 하고, 메두사의 머리를 찾으러 간다. 그 잘린 머리는 어떻게 되었던가? “그는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에게 바쳤으며, 아테나는 그것이 자신의 방패 한가운데에 통째로 붙였다. 바로 여기에 과학을 위한 흥미로운 메타포가 있다.”(p.22)
지의 여신, 아테나의 방패에 달린 메두사의 머리! “신화가 전하는 은유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은 태생적으로 메두사의 시선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메두사의 시선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단단한 형태로 굳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신화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만물에게 법칙을 만들어 내는 과학을 은유하게 된다.
이렇게 신화가 과학과 만나고, 철학과 접선을 시도한다. 과연 이러한 시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김용석 철학자는 “이런 글쓰기가 ‘역사’를 쓰는 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때의 역사는 “사건의 역사가 아니라, 상상력의 역사쯤 된다고 볼 수”(p.6) 있겠다. 신화와 과학, 철학의 만남이라, 과연 어떠한 스침과 부딪침으로 상상력의 역사를 그려갈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불필요하게 비관적이지 않을 뿐이다
2월 17일, 늦은 저녁, 신촌에서 김용석 저자의 강연회가 열렸다. 그는 『메두사의 시선』을, “이제껏 내가 쓴 책 중 가장 얇은 책이지만, 단단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또 이 책을 골프장의 작은 홀로 비유했다. “골프는 엄청난 면적의 골프장에서 이뤄지는 경기다. 골프공은, 넓은 벙커를 지나고 호수를 지나 결국 작은 홀에 공을 집어넣는다. 그 공을 담아내는 홀 컵은 엄청나게 응축된 공간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홀 컵이다. 독자들은 이 작은 구멍 속에 담겨 있는, 골프장만 한 사유를 풀어내야 한다.”
이 말인즉슨, 이 책이 그리 만만히 해독되는 텍스트는 아니라는 말씀. 저자 왈, “골프 게임을 거꾸로 한다고 상상하며 읽으면 도움이 된다.” 하니, 『메두사의 시선』과 한 게임, 어떠한가? 이날의 강의, 마치 게임의 워밍업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게임에 의욕이 돋게끔 감칠맛 나는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200여 페이지의 게임을 풀어가는 데 유용한 팁을 얻었다. 메두사의 시선을 반사해 낼 수 있는, 아테네의 방패라고나 할까.
그는, 오늘 이 강의를 준비하는 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YES24에서 강의 이전에 서평 이벤트를 진행했다. 여러분들이 써주신 서평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며 그는 직접 인쇄한 서평 글들을 보여 주었다. 메모와 밑줄 등 꼼꼼히 읽은 흔적이 눈에 띄었다. “서평을 보니, 독자들이 이 책을 딱 보고 ‘드디어 철학자가 질주하는 과학을 명쾌하게 비판하겠구나!’ 기대를 하신 것 같다. 유추해보건대,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명쾌한 과학 문명 비판을 기대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런 얘기를 했던 게 아니라, 오늘 기대를 저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그랬다면, 더욱 이 철학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과학 기술을 제어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미리 전제하지 않았다. 사실 상당수 동료 학자들은 질주하는 과학을 일단 제어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같은 학자를 설득하는 일도 어려울 때가 많다. 흔히 나를 낙관주의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불필요하게 비관적이지 않을 뿐이다.
‘질주’라는 말이 마치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보일 거다. 하지만, 질주하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누가 그랬나. 빨리 달리는 것이, 왜 무조건 나쁜가? 이 책에서 노골적인 비판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학 기술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거다. 그것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판단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좀 더 알아보자는 것이고, 이 책은 과학을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알아보고 아닌 것 같으면 비판하고, 좋은 것 같으면 병행해서 달려 보자는 거다. 각자의 생활은 빠름을 추구하고, 과학 기술의 이기를 추종하고 있으면서, 과학의 질주에 무조건 비관주의를 갖는 것은 모순이다.”
환원주의와 결정론의 차이점
그가 신화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과학의 방향이 신화에 일정 부분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화-과학-철학이 연계되어 있는 지점을 메두사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메두사의 시선의 상징성은, 표지에서 보이는 이미지의 강렬함만큼이나 흥미롭다. 이에 따르면, 과학 법칙이란, 메두사의 시선이 자연의 이치를 단단히 굳혀낸 것이다! “이론의 눈초리를 보며 자연의 일부는 단단한 ‘자연법칙의 조각상’이 된다. (…) 그러므로 과학에서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법칙들이 메두사의 시선에 붙잡힌 조각상처럼 선호된다. 단순함과 아름다움, 이 두 가지는 과학에서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 메두사의 시선, 그것은 과학 활동의 원천이다.”(p.17)
이러한 메두사의 시선은, 환원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환원주의란,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상이나 개념을, 기본적인 요소에서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이를테면, 고대에 만물을 물이나 불로 설명하려고 했던 시도를 들 수 있겠다. 저자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 때 이해를 시도하고, 출발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다뤄지는 결정론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더 쉽게, 이러한 예는 어떨까? “어떤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 남자의 정보를 알고, 기억하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어떤 아이콘을 만들게 된다. ‘어떠한 사람’이라고 환원시켜서 기억하는 거다. 내 지식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환원주의적 방법론을 쓴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콘이 그를 온전히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첫인상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결정론은 내가 만들어 놓은 이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환원주의와 결정론에 관해서 책 속에서는,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디오니소스적-아폴론적, 그 이분법의 오해
각 장의 도입부에는 인용문이 한두 개씩 걸려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에는, 인용문의 출처, 작가에 관한 이야기, 본문과의 연관성 등이 담겨 있어, 말 그대로 독서의 ‘도움말’이 실려 있다. 이 중, 제10장에 실린 인용문, “아름다움의 생물학적 기능을 이해한 철학자를 원한다면, 니체를 읽어라.”라는 제프리 밀러의 말에 대해 이날, 좀 더 자세한 주석을 달아 주었다.
“19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설파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를 넘어 존재와 세계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이자 형이상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철학사에서 니체로부터 그 용어와 개념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와 함께 ‘아폴론적인 것’의 의미 또한 새롭게 조명되었다.” 아폴론적이라는 것은 이성적이고 형식적인 것,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흔히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분류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19세기 니체의 저작에서 비롯된 것인데, 김용석 철학자는 이분법의 허점을 지적하며, 의문을 제시한다.
“놀랍게도 니체 자신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를 설파할 때나 니체의 해석자들이 그의 이론을 해석할 때나 어느 누구도 디오니소스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 요소, 곧 포도주의 의미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디오니소스가 주신(酒神)이라고 수없이 언급하면서도 아무도 그 의미를 포착하지 않았다.”(p.177)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술 먹으니까, 바른말 하네.’ 혹은 ‘야, 술 먹고 다 풀자.’ 등등. 그런데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웃음) 일상생활에서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하지 못한 걸 술 먹고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그건 술 취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술을 마시고 한 얘기는 술이 ‘매개된 진실’, 미디어화(Mediate)된 진실이다. ‘생’진실은 즉각적(immediately)이어야 한다.” 이때 술이 미디어, 매체에 해당하는 셈.
“현대 미디어 이론은 메시지가 마사지다. 두뇌를 마사지한다는 거지. 매개체가 내용을 결정한다는 거지. 전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마사지하듯 나에게 침투하는 것이다.” 이러하니, 술을 마시는 일은 결코 자연적일 수 없다. “술을 마시는 것은 자연적 의지가 아니라 문화적 의지의 표현이다. 술을 마시는 일은 문화적으로 유도되어야 한다.”(p.178) 책에서는 여기에 더불어, 아폴론적인 것이 단순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점까지 밝혀내고 있다.
태초에 수수께끼가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당연하게 배워 왔던 것들을, 다른 눈초리로 의심해 보는 것이다. 저자는 담론을 그대로 (당연하게) 답습하는 경향을 지적하며 “우리는 (정신적으로) 모두 젊으니까, 다시 잘 읽고, 충분히 해석해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생각하는 독서’를 추천했다. “모든 독서가 두뇌를 활성화시키지 않는다. 중요한 건 책을 읽는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을 읽는 것이다. 약간 어렵게 느껴지는 책을 읽어야 치매도 방지된다.”(웃음) 그러니까, 아까 그 게임, 홀 컵에서 골프장을 빼내듯 독서하라는 말이다.
제11장, 스핑크스와 인간의 초상의 도입부에는, 저자가 직접 지어낸 문장이 적혀 있다. “태초에 수수께끼가 있었다.” 여기에 이 책의, 신화와 철학의 비밀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성경 구절의 패러디이다. 이것은 누구든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것이 또한 실질적 ‘동어반복’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말씀은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분명히 주어진 답이 아니라 우리가 깨우쳐야 할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원리를 로고스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로고스는 언제나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 이전에도 몰랐고 듣고 나서도 모른다.’고 했다. 이는 로고스가 수수께끼같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일러준다. 말씀은 태초부터 언제나 있어왔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잘 모른다. 진리의 언어인 로고스는 숨바꼭질하기를 좋아한다. 의미의 숨바꼭질이 수수께끼이다.”(p.246)
지의 여신, 아테나의 방패에 달린 메두사의 머리! “신화가 전하는 은유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은 태생적으로 메두사의 시선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메두사의 시선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단단한 형태로 굳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신화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만물에게 법칙을 만들어 내는 과학을 은유하게 된다.
이렇게 신화가 과학과 만나고, 철학과 접선을 시도한다. 과연 이러한 시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김용석 철학자는 “이런 글쓰기가 ‘역사’를 쓰는 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때의 역사는 “사건의 역사가 아니라, 상상력의 역사쯤 된다고 볼 수”(p.6) 있겠다. 신화와 과학, 철학의 만남이라, 과연 어떠한 스침과 부딪침으로 상상력의 역사를 그려갈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불필요하게 비관적이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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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늦은 저녁, 신촌에서 김용석 저자의 강연회가 열렸다. 그는 『메두사의 시선』을, “이제껏 내가 쓴 책 중 가장 얇은 책이지만, 단단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또 이 책을 골프장의 작은 홀로 비유했다. “골프는 엄청난 면적의 골프장에서 이뤄지는 경기다. 골프공은, 넓은 벙커를 지나고 호수를 지나 결국 작은 홀에 공을 집어넣는다. 그 공을 담아내는 홀 컵은 엄청나게 응축된 공간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홀 컵이다. 독자들은 이 작은 구멍 속에 담겨 있는, 골프장만 한 사유를 풀어내야 한다.”
이 말인즉슨, 이 책이 그리 만만히 해독되는 텍스트는 아니라는 말씀. 저자 왈, “골프 게임을 거꾸로 한다고 상상하며 읽으면 도움이 된다.” 하니, 『메두사의 시선』과 한 게임, 어떠한가? 이날의 강의, 마치 게임의 워밍업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게임에 의욕이 돋게끔 감칠맛 나는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200여 페이지의 게임을 풀어가는 데 유용한 팁을 얻었다. 메두사의 시선을 반사해 낼 수 있는, 아테네의 방패라고나 할까.
그는, 오늘 이 강의를 준비하는 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YES24에서 강의 이전에 서평 이벤트를 진행했다. 여러분들이 써주신 서평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며 그는 직접 인쇄한 서평 글들을 보여 주었다. 메모와 밑줄 등 꼼꼼히 읽은 흔적이 눈에 띄었다. “서평을 보니, 독자들이 이 책을 딱 보고 ‘드디어 철학자가 질주하는 과학을 명쾌하게 비판하겠구나!’ 기대를 하신 것 같다. 유추해보건대,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명쾌한 과학 문명 비판을 기대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런 얘기를 했던 게 아니라, 오늘 기대를 저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그랬다면, 더욱 이 철학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과학 기술을 제어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미리 전제하지 않았다. 사실 상당수 동료 학자들은 질주하는 과학을 일단 제어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같은 학자를 설득하는 일도 어려울 때가 많다. 흔히 나를 낙관주의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불필요하게 비관적이지 않을 뿐이다.
‘질주’라는 말이 마치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보일 거다. 하지만, 질주하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누가 그랬나. 빨리 달리는 것이, 왜 무조건 나쁜가? 이 책에서 노골적인 비판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학 기술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거다. 그것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판단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좀 더 알아보자는 것이고, 이 책은 과학을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알아보고 아닌 것 같으면 비판하고, 좋은 것 같으면 병행해서 달려 보자는 거다. 각자의 생활은 빠름을 추구하고, 과학 기술의 이기를 추종하고 있으면서, 과학의 질주에 무조건 비관주의를 갖는 것은 모순이다.”
환원주의와 결정론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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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메두사의 시선은, 환원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환원주의란,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상이나 개념을, 기본적인 요소에서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이를테면, 고대에 만물을 물이나 불로 설명하려고 했던 시도를 들 수 있겠다. 저자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 때 이해를 시도하고, 출발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다뤄지는 결정론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더 쉽게, 이러한 예는 어떨까? “어떤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 남자의 정보를 알고, 기억하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어떤 아이콘을 만들게 된다. ‘어떠한 사람’이라고 환원시켜서 기억하는 거다. 내 지식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환원주의적 방법론을 쓴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콘이 그를 온전히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첫인상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결정론은 내가 만들어 놓은 이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환원주의와 결정론에 관해서 책 속에서는,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디오니소스적-아폴론적, 그 이분법의 오해
각 장의 도입부에는 인용문이 한두 개씩 걸려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에는, 인용문의 출처, 작가에 관한 이야기, 본문과의 연관성 등이 담겨 있어, 말 그대로 독서의 ‘도움말’이 실려 있다. 이 중, 제10장에 실린 인용문, “아름다움의 생물학적 기능을 이해한 철학자를 원한다면, 니체를 읽어라.”라는 제프리 밀러의 말에 대해 이날, 좀 더 자세한 주석을 달아 주었다.
“19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설파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를 넘어 존재와 세계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이자 형이상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철학사에서 니체로부터 그 용어와 개념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와 함께 ‘아폴론적인 것’의 의미 또한 새롭게 조명되었다.” 아폴론적이라는 것은 이성적이고 형식적인 것,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흔히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분류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19세기 니체의 저작에서 비롯된 것인데, 김용석 철학자는 이분법의 허점을 지적하며, 의문을 제시한다.
“놀랍게도 니체 자신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를 설파할 때나 니체의 해석자들이 그의 이론을 해석할 때나 어느 누구도 디오니소스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 요소, 곧 포도주의 의미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디오니소스가 주신(酒神)이라고 수없이 언급하면서도 아무도 그 의미를 포착하지 않았다.”(p.177)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술 먹으니까, 바른말 하네.’ 혹은 ‘야, 술 먹고 다 풀자.’ 등등. 그런데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웃음) 일상생활에서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하지 못한 걸 술 먹고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그건 술 취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술을 마시고 한 얘기는 술이 ‘매개된 진실’, 미디어화(Mediate)된 진실이다. ‘생’진실은 즉각적(immediately)이어야 한다.” 이때 술이 미디어, 매체에 해당하는 셈.
“현대 미디어 이론은 메시지가 마사지다. 두뇌를 마사지한다는 거지. 매개체가 내용을 결정한다는 거지. 전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마사지하듯 나에게 침투하는 것이다.” 이러하니, 술을 마시는 일은 결코 자연적일 수 없다. “술을 마시는 것은 자연적 의지가 아니라 문화적 의지의 표현이다. 술을 마시는 일은 문화적으로 유도되어야 한다.”(p.178) 책에서는 여기에 더불어, 아폴론적인 것이 단순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점까지 밝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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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수수께끼가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당연하게 배워 왔던 것들을, 다른 눈초리로 의심해 보는 것이다. 저자는 담론을 그대로 (당연하게) 답습하는 경향을 지적하며 “우리는 (정신적으로) 모두 젊으니까, 다시 잘 읽고, 충분히 해석해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생각하는 독서’를 추천했다. “모든 독서가 두뇌를 활성화시키지 않는다. 중요한 건 책을 읽는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을 읽는 것이다. 약간 어렵게 느껴지는 책을 읽어야 치매도 방지된다.”(웃음) 그러니까, 아까 그 게임, 홀 컵에서 골프장을 빼내듯 독서하라는 말이다.
제11장, 스핑크스와 인간의 초상의 도입부에는, 저자가 직접 지어낸 문장이 적혀 있다. “태초에 수수께끼가 있었다.” 여기에 이 책의, 신화와 철학의 비밀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성경 구절의 패러디이다. 이것은 누구든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것이 또한 실질적 ‘동어반복’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말씀은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분명히 주어진 답이 아니라 우리가 깨우쳐야 할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원리를 로고스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로고스는 언제나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 이전에도 몰랐고 듣고 나서도 모른다.’고 했다. 이는 로고스가 수수께끼같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일러준다. 말씀은 태초부터 언제나 있어왔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잘 모른다. 진리의 언어인 로고스는 숨바꼭질하기를 좋아한다. 의미의 숨바꼭질이 수수께끼이다.”(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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