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은 록큰롤에서 시작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논하지 않고서 록 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의 영향력이란 단순히 ‘대중음악’에 국한되지 않는다.
201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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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를 논하지 않고서 록 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의 영향력이란 단순히 ‘대중음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에 견줄 만한 인물이 있다면 60년대의 문화 영웅 비틀스와 밥 딜런 정도일 것이다. 그는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의 역사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의 미국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름이 사후 30주기가 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서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일 게다(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다만 결론부터 이르건대, 그는 전형적인 ‘굿 가이’로서, 도전적인 태도로 자신을 바꾸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을 지속시킬 만한 욕심과 재능은 결여되어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당대의 척 베리와 버디 홀리와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에 비해 평가 절하되곤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스로 이룩한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것도, 뛰어넘는 것도 불가능한 채, 평생 그를 착취하던 톰 파커의 지시 아래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육체를 힘겹게 이끌고 걸어가다 마흔둘 젊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35년 미시시피 주의 투펠로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그보다 35분 전에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숨진 쌍둥이 형이 있었다. 이름은 제시 개론 프레슬리였다. 어린 시절부터 성가대에서 가스펠을 부르던 엘비스는 점차 흑인의 블루스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그가 열셋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멤피스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지역 최대의 환락가이며 당시 흑인 문화의 최첨단을 달리던 빌 스트리트(Beale Street)는 어린 엘비스에게 최고의 놀이터가 되었다. 흑인의 힙한 문화에 흠뻑 빠진 그는 매일 밤 클럽에서 노래와 춤 실력을 갈고닦았고 화려한 재킷, 목걸이, 그린이나 핑크색 셔츠, 하이 웨이스트 슬랙스(이른바 배 바지) 등 최신 흑인 패션으로 무장하고, 머리엔 로얄 크라운이라는 흑인 전용의 포마드(이 제품은 같은 디자인으로 지금껏 판매되고 있다)를 아낌없이 퍼 바르고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195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엘비스는 여느 평범한 청년들이 그러하듯 먹고살 궁리를 하게 되었고, 곧 크라운 일렉트릭 사라는 운송 회사에 취직하여 트럭 운전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생일 선물로 줄 개인 레코드를 녹음하기 위해 멤피스 거리의 선 스튜디오를 찾았고(라고 알려졌지만 아주 확실하지는 않다) 4달러를 들여 「My Happiness」 「That's When Your Heartaches Begin」을 녹음했다. 당시 스튜디오의 사장이던 샘 필립스는 부재중이었지만 그의 비서인 매리언 케이스커가 그의 녹음을 지켜보게 된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와 모습에서 비범함을 감지하고 곧바로 테이프를 카피하여 이름과 전화번호 따위를 적어 보관을 해 두었다. 당시 이 둘 간에 오갔던 대화가 또한 전설적이라 하겠다.
매리언: 너는 어떤 종류의 노래를 부르지?
엘비스: 전 모든 종류의 노래를 다 부릅니다.
매리언: 어느 가수처럼 부르지?
엘비스: 누구와도 비슷하진 않은데요.
매리언: 힐빌리(컨트리 뮤직의 한 갈래)를 부르니?
엘비스: 네, 힐빌리를 불러요.
매리언: 그럼 힐빌리 가수 중 누구처럼 부르니?
엘비스: 누구와도 비슷하진 않은데요~
외출에서 돌아온 샘 필립스는 비서의 권유에 따라 엘비스가 녹음한 두 곡을 들었다. 샘 필립스는 백인 음반 제작자였음에도 흑인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이전부터 블루스나 리듬 앤 블루스를 그럴싸하게 소화해 낼 만한 백인 가수를 애타게 찾고 터였다. 만약 그것이 가능한 녀석이 있다면 대박은 두말하면 잔소리라 생각한 것이다. 엘비스는 그런 그가 찾고 있던 그 녀석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엘비스는 1954년 프로 데뷔의 기회를 거머쥐게 된다. 7월 5일 샘 필립스의 프로듀스 아래, 스코티 무어(기타), 빌 브랙(베이스)을 포함한 3인조 구성으로 흑인 블루스맨 아서 빅보이 크루덥의 「That’s Alright Mama」를 녹음하고 이것은 그의 첫 번째 공식 레코딩 세션으로 기록된다. 이틀 후 샘의 지인이던 디스크자키 듀이 필립스가 자신이 진행하던 멤피스의 지역 라디오 프로그램 <레드 핫 앤 블루>에서 「That’s Alright Mama」를 틀었다. 방송을 듣던 모든 사람들이 멤피스의 신인에 대해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흑인인가? 백인인가?(청취자들은 이 방송의 인터뷰에서 L. C 흄즈 고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 엘비스가 백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같은 라인업으로 남부의 소규모 클럽을 돌거나 지역 공연 활동을 시작하지만, 트럭 운전사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이 기간 중 엘비스는 유명한 컨트리 음악 프로그램인 <루이지애나 헤이리드>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것을 계기로 훗날 운명의 파트너가 되는 커널 톰 파커와 조우하게 된다. 그는 당시 최고의 컨트리 스타였던 행크 스노우(서수남과 하청일의 「서울 구경」을 기억하시는지? 그 오리지널이 행크 스노우의 곡)와 에디 아놀드 등을 거느리고 있던 꽤 끗발 있는 인사였다. 55년에는 행크 스노우와 함께 전미 투어를 도는 한편 드러머 J. D 폰태나를 영입하여 록큰롤 밴드의 대형을 완성한다. 투어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관능적이며 폭발적인 에너지는 그 이전의 백인 가수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엘비스는 백인의 몸으로 흑인 음악의 우월성을 입증해 보였다.(전에도 언급한 바 있듯, 초기 엘비스의 음악은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경계에서 정중앙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첫 싱글인 「That's Alright Mama」 「Blue Moon of Kentucky」는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앞면은 흑인의 블루스, 뒷면은 백인의 힐빌리의 구성으로서 당시로선 획기적인 시도였다.)
엘비스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수줍음 타던 빈민가의 촌놈은 어느덧 미국 연예계의 블루칩이 되어 있었다. 야심가이자 수완가였던 톰 파커는 약삭빠르게 엘비스를 낚아챘다. 그는 자신이 키운 컨트리 스타 행크 스노우와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며 계약을 체결한다. 1955년 8월에는 네 번째 싱글 「Baby Lets Play House」가 컨트리 차트 톱 텐에 진입함과 때를 같이하여 선 레코드에서의 마지막 싱글 「Mystery Train / I forgot to remember to forget」을 발매한다. 이 곡은 같은 해 11월 컨트리 차트 1위에 올랐고, 내쉬빌에서 개최된 연례 디스크자키 컨벤션 투표에서 엘비스는 가장 유망한 신인 가수에 선정되었다.
때가 왔음을 직감한 어느 날 톰 파커는 조용히 엘비스를 불렀다. “자네, 평생 이런 촌구석에서 뒹굴고 싶진 않겠지? 좀 더 큰물에서 뻑적지근하게 함 놀아 보자구~” 사실 톰 파커의 상품 홍보 능력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타고난 승부사였고 몇 군데나 되는 미국 굴지의 메이저 음반사가 엘비스라는 새파란 루키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끔 했다. 그 결과 신인 가수로서는 사상 유례없는 계약금 40,000달러, 보너스 5,000달러라는 파격적인 조건하에 선 레코드와 작별을 고하고 RCA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1956년, 모든 것은 시간문제였다. 엘비스는 새해 벽두부터 신곡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내쉬빌 RCA 스튜디오에서의 첫 녹음은 「Heartbreaker hotel」이란 곡이었다. 1월 27일 대망의 싱글 을 발매, 여세를 몰아 그 이튿날인 28일에는 전미 네트워크 방송국인 CBS TV의 에 출연하게 된다. 이것은 기념비적인 첫 번째 TV출연으로서 전 미국을 강타한 엘비스의 광풍의 단초가 되었다. 신곡 「Heartbreaker hotel」은 단 3주 만에 30만 장을 팔아 치우며 무려 8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에 머문다. 이것은 공신력 있는 각종 언론에 의해 단순히 일개 가수의 인기를 넘어선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비단 미 대륙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전 세계가 엘비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로 화끈한 공중파 데뷔 이후 그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었고 그것은 곧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영화 출연 섭외가 줄을 이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출연한 TV 쇼 <밀턴 벌 쇼>에서 선보인 「Hound Dog」은 록큰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기록되며 동명의 곡 또한 「Don't be cruel」과 더불어 ‘더블 A 사이드 넘버원 히트’(싱글의 앞?뒷면 곡이 모두 1위를 기록하는 것)가 되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명성을 손에 넣었지만 한편으론 백인 기성세대를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당시 엘비스와 록큰롤에 열광하던 이유 없는 반항아들은 시대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었으며 어른들에게 있어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사회 병리적 현상이었다. 엘비스 이외에도 영화계의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랜도 등이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대표로서 기성세대에 의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었지만 엘비스는 그런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대표뿐만이 아닌 흑인의 ‘저급한’ 문화인 R&B를 젊은 세대들에게 만연시키는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에 있어 R&B를 표방하던 백인 가수는 이미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페리 코모, 프랭크 시나트라, 팻 분 등으로 대표되는 어디까지나 R&B를 소프트한 백인 취향의 팝으로 변형시킨 음악들뿐이었다(대표적으로 당시 팻 분은 초기 록큰롤의 명곡인 리틀 리처드의 「Tutti Frutti」 그리고 R&B의 명곡인 패츠 도미노의 「Ain't that a shame」을 불러 히트시킨 바 있다. 일종의 거세 버전이랄까?). 하지만 엘비스는 그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그것이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간에). 적어도 록큰롤 전성기 그의 음악은 철저히 흑인다움을 매물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흑인 음악 본연의 에너지를 그 어떤 백인 가수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엘비스가 구현해 낸 180도의 방향 전환이야말로 대중음악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크게 흔든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엘비스의 혁명이 미국 전역을 강타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큰 역할을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TV의 존재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엘비스의 보컬 스타일은 이전까지의 백인 가수들에 비해 너무나도 흑인적 어프로치가 강한 것이었다. 라디오로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의심의 여지없이 흑인 가수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브라운관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Hound Dog」이나 「That's alright mama」를 노래함으로써 세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그들은 백인 청년의 흑인 노래 모방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TV 화면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은 그의 노래뿐만이 아니었다. 허리를 격렬하게 움직이는, 마치 성행위 시의 그것과도 같은 춤사위 또한 어린 시절 멤피스 흑인 구역의 환락가 빌 스트리트에서 갈고닦은 것이었다. 이것 또한 백인 어른들의 반감을 사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방송국에 따라선 그의 상반신만 방송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각 TV 방송국은 애초 엘비스의 TV 출연에 소극적이었다. 엘비스가 TV에서 허리를 흔들었을 때 여론의 반발을 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TV가 세상에 나와 겨우 안방극장에 퍼지기 시작한 무렵, 방영되는 프로그램은 적었고 젊은이들에게 먹힐 만한 프로그램 또한 그 수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음악 프로그램은 예산도 적게 들고, 립싱크를 사용하여 비교적 손쉽게 제작할 수 있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아티스트를 출연시키면 장땡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프랭크 시나트라나 앤디 윌리엄스, 팻 분, 토니 베넷 등의 성인 취향 엔터테이너를 중심으로 내세운 음악 프로그램이 차례차례 등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보고 싶어 한 것은 곧 죽어도 엘비스의 무대였다. 그러던 중가 과감히 그를 출연시키기로 결정한다. 첫 번째 방송의 대성공을 계기로 모든 TV 프로그램들이 엘비스를 위시한 젊은 록큰롤 가수들에게 빗장을 열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되어 엘비스가 출연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엘비스 같은 무뢰한은 절대 출연시키지 않겠다며 떠들고 다니던 에드 설리번조차 결국 자신의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엘비스를 초대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으로, 록큰롤이 백인 사회에 하나의 문화로서 정착하였음을 입증하는 예라 하겠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엘비스는 1958년 돌연 육군에 입대한다. 이는 사실 매니저인 톰 파커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기성세대들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의 이미지를 바꾸어 보려는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톰 파커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엘비스는 삽시간에 아름다운 청년의 표본이 되었다. 미 국방부는 그러한 엘비스를 육군 홍보의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엄청난 효과를 거두었다. 섹시하고 거친 록큰롤 스타의 이미지는 애국 청년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엘비스는 더 이상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상징이 아니었다. 엘비스는 에누리 없이 빡센 군 생활을 마치고 1960년 3월 제대한다.
2년간의 공백에도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이 역시 RCA와 톰 파커의 주도 아래 무려 앨범 6개분의 레코딩을 마치고 입대를 했던 덕분이다). 아니, 오히려 군 생활의 가산점까지 더해져 명실상부 전 국민적인 스타로서의 위치로 발돋움하게 된다. 엘비스가 제대 후 가장 먼저 출연한 TV 프로그램은 아이러니하게도 록큰롤은 가장 야만적이며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 양식이라 비난했던 프랭크 시나트라가 진행하는라는 쇼였다. 엘비스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활력으로 록큰롤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어덜트 컨템퍼러리를 부르는 성인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굳혀 가기 시작했다. 비틀스로부터 비롯된 영국의 침공 이후, 지각 변동이 일어난 음악 신에 갭을 느끼며 더 이상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기 힘들어졌고 소모적인 영화 활동에 정열을 낭비했다. 그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며 바깥세상으로부터 그를 철저히 격리시킨 멤피스 마피아(일종의 보디가드 조직)와 아방궁과도 같은 그의 대저택 그레이슬랜드에서 매일 밤 이어지는 약물과 섹스의 향연은 그의 몸과 영혼을 서서히 잠식해 간다. 아니, 그의 영혼은 이미 오래전 RCA라는 거대 레코드 레이블과 톰 파커라는 장사꾼에게 저당 잡힌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엘비스는 죽기 직전까지 각종 약물의 힘으로 연명하다시피 했지만 그를 도울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장기는 모두 망가져 버렸고 서 있기조차 힘들 만큼 건강이 악화된 와중에도 공연 활동을 해야만 했다. 모든 것은 계약 조항 때문이었다.
엘비스에게 있어 영광의 순간이란 역설적이게도 그가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영웅이었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후 엘비스가 영화배우로서, 라스베이거스나 하와이 무대에서의 초일류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가기를 택한 톰 파커의 판단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머니 트리가 된 미국 최초의 아이돌 스타이기도 하니까 말이다(이것 또한 혁신적인 것이었다). 엘비스는 후일담이 너무나도 긴 영웅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작 마흔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마치 고령의 나이까지 활동을 한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역시나 정점을 맞이했던 단 몇 년간의 세월이 너무나도 짧았기에, 그 후의 시간은 정체되어 보이는 까닭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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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는 1935년 미시시피 주의 투펠로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그보다 35분 전에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숨진 쌍둥이 형이 있었다. 이름은 제시 개론 프레슬리였다. 어린 시절부터 성가대에서 가스펠을 부르던 엘비스는 점차 흑인의 블루스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그가 열셋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멤피스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지역 최대의 환락가이며 당시 흑인 문화의 최첨단을 달리던 빌 스트리트(Beale Street)는 어린 엘비스에게 최고의 놀이터가 되었다. 흑인의 힙한 문화에 흠뻑 빠진 그는 매일 밤 클럽에서 노래와 춤 실력을 갈고닦았고 화려한 재킷, 목걸이, 그린이나 핑크색 셔츠, 하이 웨이스트 슬랙스(이른바 배 바지) 등 최신 흑인 패션으로 무장하고, 머리엔 로얄 크라운이라는 흑인 전용의 포마드(이 제품은 같은 디자인으로 지금껏 판매되고 있다)를 아낌없이 퍼 바르고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195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엘비스는 여느 평범한 청년들이 그러하듯 먹고살 궁리를 하게 되었고, 곧 크라운 일렉트릭 사라는 운송 회사에 취직하여 트럭 운전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생일 선물로 줄 개인 레코드를 녹음하기 위해 멤피스 거리의 선 스튜디오를 찾았고(라고 알려졌지만 아주 확실하지는 않다) 4달러를 들여 「My Happiness」 「That's When Your Heartaches Begin」을 녹음했다. 당시 스튜디오의 사장이던 샘 필립스는 부재중이었지만 그의 비서인 매리언 케이스커가 그의 녹음을 지켜보게 된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와 모습에서 비범함을 감지하고 곧바로 테이프를 카피하여 이름과 전화번호 따위를 적어 보관을 해 두었다. 당시 이 둘 간에 오갔던 대화가 또한 전설적이라 하겠다.
매리언: 너는 어떤 종류의 노래를 부르지?
엘비스: 전 모든 종류의 노래를 다 부릅니다.
매리언: 어느 가수처럼 부르지?
엘비스: 누구와도 비슷하진 않은데요.
매리언: 힐빌리(컨트리 뮤직의 한 갈래)를 부르니?
엘비스: 네, 힐빌리를 불러요.
매리언: 그럼 힐빌리 가수 중 누구처럼 부르니?
엘비스: 누구와도 비슷하진 않은데요~
외출에서 돌아온 샘 필립스는 비서의 권유에 따라 엘비스가 녹음한 두 곡을 들었다. 샘 필립스는 백인 음반 제작자였음에도 흑인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이전부터 블루스나 리듬 앤 블루스를 그럴싸하게 소화해 낼 만한 백인 가수를 애타게 찾고 터였다. 만약 그것이 가능한 녀석이 있다면 대박은 두말하면 잔소리라 생각한 것이다. 엘비스는 그런 그가 찾고 있던 그 녀석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엘비스는 1954년 프로 데뷔의 기회를 거머쥐게 된다. 7월 5일 샘 필립스의 프로듀스 아래, 스코티 무어(기타), 빌 브랙(베이스)을 포함한 3인조 구성으로 흑인 블루스맨 아서 빅보이 크루덥의 「That’s Alright Mama」를 녹음하고 이것은 그의 첫 번째 공식 레코딩 세션으로 기록된다. 이틀 후 샘의 지인이던 디스크자키 듀이 필립스가 자신이 진행하던 멤피스의 지역 라디오 프로그램 <레드 핫 앤 블루>에서 「That’s Alright Mama」를 틀었다. 방송을 듣던 모든 사람들이 멤피스의 신인에 대해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흑인인가? 백인인가?(청취자들은 이 방송의 인터뷰에서 L. C 흄즈 고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 엘비스가 백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같은 라인업으로 남부의 소규모 클럽을 돌거나 지역 공연 활동을 시작하지만, 트럭 운전사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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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수줍음 타던 빈민가의 촌놈은 어느덧 미국 연예계의 블루칩이 되어 있었다. 야심가이자 수완가였던 톰 파커는 약삭빠르게 엘비스를 낚아챘다. 그는 자신이 키운 컨트리 스타 행크 스노우와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며 계약을 체결한다. 1955년 8월에는 네 번째 싱글 「Baby Lets Play House」가 컨트리 차트 톱 텐에 진입함과 때를 같이하여 선 레코드에서의 마지막 싱글 「Mystery Train / I forgot to remember to forget」을 발매한다. 이 곡은 같은 해 11월 컨트리 차트 1위에 올랐고, 내쉬빌에서 개최된 연례 디스크자키 컨벤션 투표에서 엘비스는 가장 유망한 신인 가수에 선정되었다.
때가 왔음을 직감한 어느 날 톰 파커는 조용히 엘비스를 불렀다. “자네, 평생 이런 촌구석에서 뒹굴고 싶진 않겠지? 좀 더 큰물에서 뻑적지근하게 함 놀아 보자구~” 사실 톰 파커의 상품 홍보 능력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타고난 승부사였고 몇 군데나 되는 미국 굴지의 메이저 음반사가 엘비스라는 새파란 루키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끔 했다. 그 결과 신인 가수로서는 사상 유례없는 계약금 40,000달러, 보너스 5,000달러라는 파격적인 조건하에 선 레코드와 작별을 고하고 RCA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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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모든 것은 시간문제였다. 엘비스는 새해 벽두부터 신곡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내쉬빌 RCA 스튜디오에서의 첫 녹음은 「Heartbreaker hotel」이란 곡이었다. 1월 27일 대망의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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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화끈한 공중파 데뷔 이후 그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었고 그것은 곧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영화 출연 섭외가 줄을 이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출연한 TV 쇼 <밀턴 벌 쇼>에서 선보인 「Hound Dog」은 록큰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기록되며 동명의 곡 또한 「Don't be cruel」과 더불어 ‘더블 A 사이드 넘버원 히트’(싱글의 앞?뒷면 곡이 모두 1위를 기록하는 것)가 되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명성을 손에 넣었지만 한편으론 백인 기성세대를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당시 엘비스와 록큰롤에 열광하던 이유 없는 반항아들은 시대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었으며 어른들에게 있어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사회 병리적 현상이었다. 엘비스 이외에도 영화계의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랜도 등이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대표로서 기성세대에 의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었지만 엘비스는 그런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대표뿐만이 아닌 흑인의 ‘저급한’ 문화인 R&B를 젊은 세대들에게 만연시키는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에 있어 R&B를 표방하던 백인 가수는 이미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페리 코모, 프랭크 시나트라, 팻 분 등으로 대표되는 어디까지나 R&B를 소프트한 백인 취향의 팝으로 변형시킨 음악들뿐이었다(대표적으로 당시 팻 분은 초기 록큰롤의 명곡인 리틀 리처드의 「Tutti Frutti」 그리고 R&B의 명곡인 패츠 도미노의 「Ain't that a shame」을 불러 히트시킨 바 있다. 일종의 거세 버전이랄까?). 하지만 엘비스는 그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그것이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간에). 적어도 록큰롤 전성기 그의 음악은 철저히 흑인다움을 매물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흑인 음악 본연의 에너지를 그 어떤 백인 가수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엘비스가 구현해 낸 180도의 방향 전환이야말로 대중음악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크게 흔든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엘비스의 혁명이 미국 전역을 강타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큰 역할을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TV의 존재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엘비스의 보컬 스타일은 이전까지의 백인 가수들에 비해 너무나도 흑인적 어프로치가 강한 것이었다. 라디오로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의심의 여지없이 흑인 가수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브라운관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Hound Dog」이나 「That's alright mama」를 노래함으로써 세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그들은 백인 청년의 흑인 노래 모방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TV 화면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은 그의 노래뿐만이 아니었다. 허리를 격렬하게 움직이는, 마치 성행위 시의 그것과도 같은 춤사위 또한 어린 시절 멤피스 흑인 구역의 환락가 빌 스트리트에서 갈고닦은 것이었다. 이것 또한 백인 어른들의 반감을 사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방송국에 따라선 그의 상반신만 방송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각 TV 방송국은 애초 엘비스의 TV 출연에 소극적이었다. 엘비스가 TV에서 허리를 흔들었을 때 여론의 반발을 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TV가 세상에 나와 겨우 안방극장에 퍼지기 시작한 무렵, 방영되는 프로그램은 적었고 젊은이들에게 먹힐 만한 프로그램 또한 그 수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음악 프로그램은 예산도 적게 들고, 립싱크를 사용하여 비교적 손쉽게 제작할 수 있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아티스트를 출연시키면 장땡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프랭크 시나트라나 앤디 윌리엄스, 팻 분, 토니 베넷 등의 성인 취향 엔터테이너를 중심으로 내세운 음악 프로그램이 차례차례 등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보고 싶어 한 것은 곧 죽어도 엘비스의 무대였다. 그러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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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엘비스는 1958년 돌연 육군에 입대한다. 이는 사실 매니저인 톰 파커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기성세대들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의 이미지를 바꾸어 보려는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톰 파커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엘비스는 삽시간에 아름다운 청년의 표본이 되었다. 미 국방부는 그러한 엘비스를 육군 홍보의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엄청난 효과를 거두었다. 섹시하고 거친 록큰롤 스타의 이미지는 애국 청년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엘비스는 더 이상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상징이 아니었다. 엘비스는 에누리 없이 빡센 군 생활을 마치고 1960년 3월 제대한다.
2년간의 공백에도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이 역시 RCA와 톰 파커의 주도 아래 무려 앨범 6개분의 레코딩을 마치고 입대를 했던 덕분이다). 아니, 오히려 군 생활의 가산점까지 더해져 명실상부 전 국민적인 스타로서의 위치로 발돋움하게 된다. 엘비스가 제대 후 가장 먼저 출연한 TV 프로그램은 아이러니하게도 록큰롤은 가장 야만적이며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 양식이라 비난했던 프랭크 시나트라가 진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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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에게 있어 영광의 순간이란 역설적이게도 그가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영웅이었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후 엘비스가 영화배우로서, 라스베이거스나 하와이 무대에서의 초일류 엔터테이너로서의 길을 가기를 택한 톰 파커의 판단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머니 트리가 된 미국 최초의 아이돌 스타이기도 하니까 말이다(이것 또한 혁신적인 것이었다). 엘비스는 후일담이 너무나도 긴 영웅이었을지도 모른다. 고작 마흔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마치 고령의 나이까지 활동을 한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역시나 정점을 맞이했던 단 몇 년간의 세월이 너무나도 짧았기에, 그 후의 시간은 정체되어 보이는 까닭일 게다.
1개의 댓글
필자
차승우
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
물든
2010.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