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토니아의 현대음악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는 현존하는 작곡가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 어제(9월 11일)는 그의 90세 생일이었다. 지난 6월, 독일의 대표적인 클래식 음악 시상식인 오푸스 클래식(Opus Klassik)은 음악사에 남긴 업적을 기려 그에게 공로상을 수여했다. 오늘은 아르보 패르트의 생일을 기념하며, 패르트의 음악에 대해서 소개해 본다.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그의 이름은 다소 낯설 수 있으나,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영화 <그래비티>의 트레일러, <어바웃타임> 등에 사용된 ‘거울 속의 거울(Sipegel im Spiegel)’은 한 번쯤 들어본 유명한 곡으로, 2018년 슈퍼볼을 위한 지프 차량 광고에 삽입된 적도 있고, 한강 작가가 즐겨 듣는다고 이야기하며 국내에서 다시 회자된 바 있다. 또한, 영화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는 패르트의 '베를린 미사(Berliner Messe)'가, <퐁네프의 연인들> <화씨 9/11>에는 ‘벤자민 브리튼을 기리는 칸투스(Cantus in Memoriam Benjamin Britten)’가 삽입되었는데 이 곡도 많이 알려진 그의 음악 중 하나이다.
지금 그의 음악은 전세계적으로 많이 연주되고 사랑받고 있지만, 사실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독일의 재즈 및 현대음악 레이블인 ‘ECM’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CM’은 명상적인 음반 재킷, 특유의 투명한 사운드로 유명한데,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등 여러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가들도 ECM을 통해 여러 음반을 발매해왔다. 원래 재즈 음악을 소개하는 음반사였던 ECM이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게 된 데는 ECM의 설립자이자 프로듀서인 만프레트 아이허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이 계기가 되었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내가 전혀 모르는 음악이 나왔다.
그 음악이 마음에 확 와 닿았다.
미칠 듯이 좋은 그 음악의 정체를 모르는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만프레드 아이허, ECM 프로듀서/설립자)
그 음악은 바로 클래식과 현대음악을 선보이는 'ECM 뉴시리즈(ECM New Series)’가 시작된 계기가 된 ‘Tabula Rasa’다. 패르트가 1977년에 작곡한 'Tabula Rasa'(타불라 라사, '백지 상태'라는 뜻으로, 감각 이전의 상태를 의미)는 두 대의 바이올린, 프리페어드 피아노, 그리고 챔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에게 헌정되었다. 현대적이면서도 장엄하고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이 곡은, 현대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곡에 매료된 만프레드 아이허는 기돈 크레머, 키스 자렛 등과 함께 패르트의 작품을 처음 녹음했고 1984년 [아르보 패르트: 타블라 라사]를 발매하면서 패르트의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ECM 뉴 시리즈는 많은 현대 작곡가의 작품이 빛을 발하게 했을 뿐 아니라, 고전 작곡가들의 작품도 현대적인 해석을 통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아르보 패르트는 ECM의 음악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곡가가 되었다.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The Most Beautiful Sound Next to Silence)"라는 ECM의 모토는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을 설명하는 문구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영국 클래식FM은 패르트의 음악을 “독창적이며, 신비로운 울림으로 매혹한다”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그는 1976년 종소리에서 영감을 받아 ‘틴티나불리(Tintinnabuli, 종소리 기법)’라는 독창적인 미니멀리즘 양식을 발전시킨 독자적인 작곡법을 개발했다. 단순한 리듬과 선율 속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그의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치 맑은 종소리를 마주한 듯 깊은 울림을 느끼게 한다.
"나는 단 하나의 음으로도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르보 패르트
패르트가 말하는 ‘단 하나의 음’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곡이 바로 ‘알리나를 위하여(Für Alina)’로, 틴티나불리 양식의 시작을 알린 피아노 소품이다. 그는 이 곡에 대해 “모든 풀잎마다 꽃으로 피어날 수 있게 연주해야 한다”라며 음 하나하나가 지닌 의미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1977년에 작곡된 ‘Fratres’(라틴어로 ‘형제들’이란 의미) 또한 이 시기에 작곡된 대표곡으로, 고요와 긴장을 동시에 담아낸 오늘날 그의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다. 또한 영국 작곡가를 추모하며 쓴 ‘벤자민 브리튼을 기리는 칸투스(Cantus in Memoriam Benjamin Britten)’나, 요한복음을 텍스트로 한 장엄한 합창곡 ‘Passio’ 역시 패르트의 음악 세계를 대표하는 곡들이다. 이렇듯 단순함 속에서 숭고함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은, 현대음악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독특한 힘을 지닌다.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은 여전히 전 세계 무대에서 연주되며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단순함을 통해 본질을 탐구한 그의 음악은,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ECM의 모토처럼 우리 곁에 남아 오래도록 깊은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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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don Kremer 아르보 패르트: 타불라 라사 (Arvo Part: Tabula Rasa) 기돈 크레머, 키스 자렛
출판사 | ECM New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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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공연 기획사 '크레디아'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클래식 공연 기획자들이 직접 무대 비하인드 스토리와 음악, 예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