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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목사가 암살된 날로부터 수일에 걸쳐, 전미 각지 120개소 이상의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흑인들에 의한 폭동뿐만 아니라, KKK 등 백인들에 의해 주도된 난동도 있었다). 진압을 위해 파견된 방위군의 수는 55,000여 명. 21,270명이 체포되었고, 46명이 사망했다. 암살 직후, 그러한 상황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던 제임스는 자신 소유의 라디오 방송에서 “평온을 유지함으로써 킹 목사의 유지를 받들자”라고 당부했다. 또한 이튿날 보스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콘서트를 굳이 중단하지 않고, 그 실황을 생방송으로 TV 중계하여(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일개 가수의 콘서트가 TV로 생중계된다는 것 자체가 빅 이벤트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외출하지 않도록 했다. 한편 콘서트에서는 킹 목사의 넋을 기리는 동시에 폭력 행위에 동참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 실황은 몇 번이나 재방송되었고, 다행히도 그 시각 보스턴 거리에서는 그 어떤 소요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그는 폭동이 격렬했던 워싱턴으로 가서, TV와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했다.
제임스 브라운의 대활약은 미국 정부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결국 백악관 주최 만찬에까지 초대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훗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될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와 공화당의 닉슨 등, 거물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America is my home」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발표된 곡인데, 그것은 놀랍게도 ‘국가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게다가 베트남까지 날아가, 참전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자청하기도 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그때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반전 운동, 공민권 운동가들이 등을 돌리게 되며, ‘블랙 팬더’(1965년에 결성된 미국의 급진적인 흑인 결사. 흑표당‘黑豹黨:Black Panther Party’이라고도 한다) 등의 과격파 세력으로부터 협박을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협박이 주효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1968년 그는 또다시 진로를 변경하여 충격적인 곡을 발표한다. 그 제목만으로도 유명한 역사적인 싱글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큰 소리로 외쳐라. 나는 검둥이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이 곡은 빌보드 알앤비 차트 정상에 무려 6주간이나 랭크됐으며 전체 차트 10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지만,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그의 강력한 블랙 파워 지지 선언에 그동안 애써 늘려 왔던 백인 팬들을 단숨에 잃고 말았다. 또한 FBI의 블랙리스트에까지 오르게 되며, 이후 국세청으로부터 세금 체납 등의 혐의로 철저히 추궁당하기도 한다. 혼돈의 시대였던 탓이리라. 그는 자기주장을 할 때마다 새로운 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만 것이다. 아마도 그가 정녕 말하고자 했던 것은, 1969년 발표된 「I don't want nobody to give me nothing」에 담겨있는 듯하다. “Open up the door, I'll get it myself…….” 이러한 맥락에서, 실은 그가 언제나 일관된 삶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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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비즈니스 세계 제1의 라이브를 위해 제임스는 밴드 멤버에 대해서도 타협을 불허했다.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동안 밴드의 일원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 자리에서 벌금 사인을 보냈다던 일화가 있을 정도이니…… 제임스와 밴드 멤버간의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1970년에 일어난 밴드 멤버 전원 교체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지아주 콜럼버스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던 제임스와 그의 밴드. 하지만 공연 당일 밴드 멤버 전원이 임금 인상을 요구, 파업을 시작하고 만 것이다. 저녁 6시가 되어서도 요구를 철회하지 않고 공연 준비를 거부했던 밴드에 대해 제임스는 그 자리에서 해고를 통보한다. 하지만 당일 콘서트를 중단한다면 엄청난 위약금을 물게 될 상황이었던지라, 그는 서둘러 대체할 밴드 멤버들을 찾는다. 그리고 그 당시 킹 레코드의 세션 뮤지션으로 일하고 있던 젊은 밴드 ‘페이스 세터즈’를 자신의 자가용 비행기에 태워 초청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날부로 제임스 브라운의 새로운 백 밴드로서 페이머스 프레임즈가 아닌, ‘the JB'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임시직 밴드에는 훗날 P-Funk(Funkadelic과 Parliament, 두 전설적인 펑크 밴드의 수장인 ‘조지 클린턴’이 주도한 펑크 뮤직의 한 조류. 혹은 조지 클린턴의 스타일 자체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의 중심인물이 되는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가 있었다. 그는 천재적인 그루브 감으로 제임스의 펑크 사운드를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나갔다. 결국 전대미문의 멤버 교체 사건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 (참고로 색소폰 연주자 ‘메이시오 파커’ 또한 곧 제임스의 품으로 돌아온다.) 역시 ‘소울의 대부’라는 호칭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새로운 밴드 JB's와의 협연으로 태어난 최초의 성과가 펑크의 역사적 명곡 「Sex Machine」 되겠다. JB's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그 후로도 그들이 단독으로 녹음한 여러 장의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그 곡들의 대부분이 현재에 이르러 ‘샘플링’의 보물 창고로써 다수의 DJ나 래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대표적인 음반으로서
1970년에 접어들어, 제임스는 킹 레코드를 떠나 거대 기업 ‘폴리돌’(Polydor)과 계약한다. 킹 시대보다 금전적인 면에서 풍족한 조건으로 이적했지만, 음반 제작의 자유도라는 측면에서는 크게 후퇴하고 만다. 더욱이 대중음악계 또한 다시금 지각 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는데, 펑크 뮤직의 인기가 차츰 시들해질 무렵, 사람들은 ‘디스코’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레코드 회사는 디스코 성향의 단조로운 리듬 패턴의 곡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밴드 사운드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부치 콜린스 그리고 메이시오 파커와 프레드 웨슬리가 당시 디스코의 아성에도 기세를 잃지 않았던 P-Funk 군단으로 이적해 버린다.
1977년 8월 엘비스 프레슬리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핀치를 맞고 있던 제임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둘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으며, 남부 시골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친구였다. 장례식에 참석한 제임스는 엘비스의 관을 앞에 두고 “왜 먼저 가버린 거야?”라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전까지 누구 앞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였기에 최측근들마저도 그 슬픈 모습에 사뭇 놀랐다고 전해진다. 계속되는 악재에 그의 마음도 많이 약해졌던 탓일까? 그는 그로부터 수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된다.
1980년, 두 명의 코미디언에 의해 부활의 계기가 마련된다. 제임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존 벨루시와 댄 에크로이드로부터 영화판 <블루스 브라더스>의 출연을 요청받은 것이다. 이 영화의 대박을 계기로 R&B의 붐이 일어났고 제임스와 그의 음악은 다시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게다가 영화 <록키 4>의 테마곡 「Living in America」도 대히트를 기록, 제임스 브라운은 순식간에 쇼 비지니스계의 정상을 탈환한다. 1984년에는 힙합 음악의 개간자라고 일컬어지는 ‘아프리카 밤바타’와의 협연을 가지며 앨범
초로의 길목에서 각종 명예의 전당에 오르거나 하는 수순을 밟으며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다. 스튜디오에서의 논쟁이 급기야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지며 체포되거나, 아내에 대한 폭력이 끊임없이 거론되었고, 2004년에는 자식에게 폭력을 휘둘러 또다시 체포되는 등, 그의 사생활에 관한 세인들의 평가는 최악 그 자체였다. 그의 삶은 철저히 ‘신분 상승의 욕구’에 의해 구축된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얻어 내야 했다. 그렇게 일구어 온 그의 업적이란 것은 어떤 의미, 그 자신의 피와 땀, 눈물, 그 모든 욕망과 분노가 한데 뒤섞여 생긴 응어리 같은 것일 게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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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투쟁했고, 전과자라는 편견과 투쟁했던,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내.
레코드 회사에 속고, 악덕 프로듀서에 속고, 풋내기들에게는 자신의 소중한 곡을 야금야금 도둑질 당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바로 잡았던 사내.
스테이지 위의 라이벌뿐만이 아닌 록큰롤이나 디스코, 힙합 등, 수많은 라이벌과 경쟁하는 가운데 독자적인 펑크 사운드와 스테이징으로 쇼 비지니스계의 제왕으로 우뚝 선 사내.
인종 차별에 맞서며 시대의 격랑 속에서 꿋꿋이 살아남아 ‘블랙 아메리칸’의 상징적 존재가 된 사내.
2006년 12월 25일, 제임스 브라운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차승우
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
앙ㅋ
201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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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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