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강연회]비싼 그림이 비싼 이유를 이해해 보기 - 『그림 쇼핑 2』 이규현
화가의 그림을 산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사치일 수 있는데, 그럴 때 눈에 띈 『그림 쇼핑 2』는 마치 그림을 사게 해 주는 티켓처럼도 느껴졌다.
201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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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이 열린 곳도 마침맞게 강남의 서울옥션이었다.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이 호가되며, 망치가 탕탕 두드려지며, 말로만 들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의 그림이 들고나는 곳. 강연장을 찾아가는 발길부터 설렜다. 그곳에 마치 내가 사고 싶어 하는 그림이 있기라도 한 듯. 그런데 막상 옥션은 벽에 꽤 귀한 그림들이 걸린 걸 제외하면 상당히 평범해 보였다. 생각 이상으로 편안하고 친숙한 느낌이었다. 필기를 하거나 오래 앉아 있기가 좀 불편한 건, 원래 강연장이 아니라 옥션이니까 그럴 것이었다.
경매가 최고 기록 경신한 자코메티 「걷는 남자」의 가격은?
남자 이름으로 오해하기 좋은 이규현 저자는 매우 슬림한 체형을 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조선일보에서 11년 기자로 일했고, 그 기간 동안 사회부에서 문화부로 옮겼고, 미술 전문 기자로 신문사 이력을 마무리했다.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처음에는 언론고시에 붙은 스마트한 사람이었다가 미술 애호가로, 미술 전문가로 변해 온 것이다. 이유는? 물론 그림이 좋아서다. 그림을 좋아하는 마음이 나름대로 이해가 됐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표정, 그런 게 저자에게서 보였다.
이날 강연은 뉴욕에서 아트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미술 미디어 경영 MBA 과정을 밟고 있다는 저자가 일부러 한국에 나와서 독자와 만나는 자리였다. 강연 주제는 ‘현대 미술과 미술 시장’. 예술가도 먹고살아야 하므로, 부자로 태어났거나 다른 직업을 겸하지 않는 예술가에게 작품은 결국 팔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따라서 모르긴 해도 미술 시장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을 것이나, 우리가 흔히 아는 미술 시장은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경매 회사의 이름과 함께 떠오른다.
저자도 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세계 미술 시장이 한창 불황으로 허덕대던 2010년 2월, 소더비 런던에서 갑자기 스위스 조각가 자코메티의 「걷는 남자」가 6천5백만 파운드(1억430만 달러)에 팔려 세계 경매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는 이야기. 그 이전까지는 2004년 소더비 뉴욕에서 1억410만 달러에 팔린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 최고였단다. 이 ‘사건’은 여러 의미로 읽힌다고 한다. 불황 중에도 미술 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 작가가 피카소나 고흐가 아니라 스위스의 자코메티라는 것, 유화가 아니라 똑같은 에디션이 6개 있는 브론즈 조각이라는 것, 그리고 뉴욕이 아니라 런던에서 기록을 깼다는 것 등. 뭔가 하면, 소더비가 추정한 가격을 세 배나 뛰어넘은 이 작품의 경매는 미국에 치우쳐 있던 미술 시장의 추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세계 곳곳에 숨어 있던 큰손들의 존재가 부각됐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취향이 다양해졌다는 것 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또한 그동안 세계 미술 시장을 미국 미술이 쥐락펴락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놀라운 얘기도 아니다. 앤디 워홀,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미국 미술의 힘을 미술에 관심 없는 사람도 알고 있으므로. 그런데 언제부터 미국 미술이 미술 시장을 주도했던 걸까? 고흐와 피카소가 언제부터 앤디 워홀이나 잭슨 폴록에게 자리를 내주었던 것일까? 예상했던 대로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과정과 그 이후부터였다. 두 전쟁을 치르면서 명실상부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그림 구매력을 키우면서, 미국 화가들의 그림이 급부상한 것이다.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소위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시대가 도래한 것.
즉, “미술 시장이라는 건, 단순히 돈이 아니라 미술을 둘러싼 사회 환경을 말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시대정신을 앞서 반영하는 그림이 사랑받고, 값이 오른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바닥에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캔버스를 펼쳐 놓고 물감을 떨어뜨려 뭔지 알아볼 수 없게 그린 그림이 사랑받을 만한 사회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던 것이고, 1940년대 중반, 전후부터 비로소 이런 식의 ‘내면’을 표현한 그림이 중심에 서게 됐다는 것. 그렇다. 전쟁이 얼마나 사람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지는 명약관화한 사실이니까.
세계 미술 시장을 쥐락펴락, 아모리쇼와 모마
물론 그 이전에는 저 유명한 아모리쇼가 미국 미술 시장의 기반을 닦아 놨다. “매년 3월 뉴욕 허드슨 강변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아트페어 아모리쇼는 1913년에 열렸던 역사적인 전시에서 이름을 따왔다. 1911년에 결성된 ‘미국화가조각가연합’이 “미국에 새로운 미술을 보여주고 팔자”라는 의도로 기획한 이 전시의 작품 중엔 앵그르, 들라크루아, 코로, 드가, 르누아르처럼 이미 미국인에게 잘 알려진 유럽 대가들도 포함돼 있었지만, 사실은 피카소, 세잔, 마티스, 고흐, 칸딘스키, 뒤샹처럼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생소한 현대 작가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p.14)
전시 기획자 중 한 명이었던 월트 쿤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써 있었듯이, 당시에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미래주의와 피카소의 입체주의조차 미국에서는 생소했고, 미국이 유럽보다 미술 트렌드에서 훨씬 뒤처져 있었지만, 이미 미국은 실험적이고 도전적이었던 유럽의 현대미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모리쇼는 한 달 동안 8천8백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시카고와 보스턴에서 연장 전시를 했으며, 칸딘스키의 1912년 작 「즉흥곡 27번」은 팔리기까지 했다. 즉, 미국이 생소한 미술 작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미국 미술 시장은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다. 제작된 지 20년이 지나지 않은 작품을 수입할 때는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고, 1929년에는 현대미술관, 즉 ‘모마’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아모리쇼 이후 현대 미술을 모으는 컬렉터들이 늘어났고, 모마는 컬렉터들이 만든 사립미술관이었다.
그리고 지극히 미국적인 추상표현주의가 자유분방한 미국적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미술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유럽을 벗어난 미국 미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팝아트의 시대. 저자는 팝아트를 ‘시장을 껴안은 미술’이라고 표현했다. 타인이 이해하지 못할 주관성을 배격하고, 대중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쉽게 다가가는 미술. 대통령도 마시고 거지도 마시는 코카콜라를 소재로 채용한 앤디 워홀은 또 다른 미국 정신의 표상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현대 미술의 역사를 훑어 내리는 저자의 말을 들으면서 ‘은근히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팝아트는 지금의 한국 미술의 한 흐름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각국의 화폐를 그린 화가의 전시회를 보고 온 일, ‘전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동양 화가의 전시회를 본 일 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퀴즈 하나. ‘시장을 껴안은 미술’의 다음에는 어떤 미술이 올까? ‘시장을 거부한 미술’이라고? 빙고. 다음으로 저자가 소개한 것은 대지 미술, 즉 예술가가 하늘, 땅, 바다 등의 자연물에 작품을 그리거나 새기고, 그것이 세월을 따라 쇠락해 가도록 내버려 두는 미술이었다. 팔고 살 수 없으며, 어느 순간에만 존재하는 대지 미술은 팝아트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다. ‘팝아트는 민주적인데 그 가격은 민주적이지 않다’고 누가 그랬다는데, 그러고 보면 저자가 소개해 준 로버트 스미스슨, 마이클 하이저,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등의 대지 미술가들은 필자의 생각으로 미술에서 돈을 빼버린 일종의 혁명가들이 아닐까 했다.
테마로 그림을 쇼핑하라
이어 저자는 지금의 현대 미술을 화가 중심으로 몇몇 소개했다. 유명한 제프 쿤스, 데미언 허스트, 윌리엄 켄트리지에서 우리나라의 서도호, 임상빈까지. 그런 뒤 중국의 고미술품 컬렉터이자 관푸박물관 관장인 마웨이두, 상여와 부장품을 모으는 취미가 결국 집을 박물관으로 변하게 이끈 쉼 박물관 박기옥 대표를 소개했는데, 이들은 한 가지 테마에 대한 미술품을 모으는 취미가 박물관을 만드는 단계로까지 나아간 사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저자가 기자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왜 이분들을 소개하는가 하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결국 소장 욕구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나만의 테마를 가지는 것이라는 걸 얘기 드리고 싶어서예요”라고 저자는 말했다. 저자 자신도 미술 애호가로서 테마를 가지고 미술품을 조금씩 사 모은다고 했다. 30만 원짜리에서 백만 원짜리까지. 아마 그 이상의 값이 나가는 그림들도 있으리라 짐작했다. 저자가 워낙 그림을 좋아하는 데다, 그림 옆에서 지낸 세월도 기니까.
아무튼, 저자의 테마는 ‘내 아이를 위한 그림’이라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위한 그림 컬렉션이라니 멋졌다. 앞서 이야기한 30만 원 주고 산 그림은 곰 인형이 붙은 금속으로 만든 작품이었는데, 햇볕을 정면으로 받지 않는 장소에 그냥 세워 두었더니, 어느새 아이가 금속 곰 인형을 괴력으로 떼었더라고 했다. 그래서 본드로 다시 붙였는데, 저자는 그 그림이 제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거라고 여긴다 했다. 아이가 그림과 함께 놀고, 즐거워했으니까.
저자처럼 테마를 정하고 나면 자신만의 컬렉션을 서서히 구성해 볼 수 있다. 시작은 그림이 담긴 엽서와 저렴한 액자여도 좋다고 한다. 만 원 정도를 주면 포스터를 살 수 있는데, 그걸 표구해 걸어 놓고 시작해도 충분하다고 한다. 중요한 건 그림을 향유하는 생활이므로.
또, 시간이 지나 정말로 화가의 그림을 살 때는 옥션의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해당 그림의 이전 판매 기록을 살펴보거나 추정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으며, 내가 사고자 하는 그림이 그 화가의 대표적인 스타일인가 아닌가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한다. 더불어 갤러리 전시나 아트페어에 갈 때는 가급적 화가가 있는 시간에 가서 직접 만나보고 얘기 나누는 것도 필요하다고.
사실 꽤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소품은 몇십만 원 정도 한다고 알고 있다. 마음을 크게 먹으면 누구나 조그만 그림 정도는 살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그림 한 점쯤 사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동안 그림에 대한 욕구가 모호했다면 좀 더 구체화된 느낌이었다. 집에 있는 취리히 풍경의 프린트 에디션 한 점에 이어, 해외 문화 도시의 풍경을 테마로 정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테마 컬렉션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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