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의 명인
전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저자들의 텍스트를 읽다가 문득 서로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유리알 유희가 작동하는 순간인데, 이때 상상력이 패턴의 유사성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를 여행하게 된다.
글ㆍ사진 진중권
201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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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2400년경에 카스탈리엔이라는 이상향에서 그보다 약 200년 전에 살았던 유희의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삶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소설에 따르면, 전쟁과 야만으로 점철된 세기가 흐른 후 인간 사회에는 가공할 정신적 황폐가 찾아온다. 이 와중에 몇몇 교양 있는 사람들이 다시 정신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해 카스탈리엔이라는 정신의 이상향을 세우고 그곳에서 ‘유리알 유희’에 정진한다. 헤세는 그곳의 수도승들이 했다는 유리알 유희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가령 유희는 어떤 별의 천문학상의 위치, 바흐의 푸가 주제, 라이프니츠 또는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초심자는 고전음악과 자연법칙의 공식 사이를 유희 기호에 의해 대비할 수 있고, 숙달된 사람이나 명인은 유희를 첫 주제에서 무한 편성까지 마음대로 진전시켰다.

이 고상한 유희는 상상력을 통해 인간이 이룩한 모든 정신적 업적들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패턴의 유사성에 따라 천문학에서 음악으로, 음악에서 수학으로, 수학에서 문학으로. 이 지적 유희를 ‘유리알 유희’라 부르는 이유는 이 세속적 종교의 수도사들이 패턴의 유사성을 가리키는 일종의 상형문자로 형형색색의 유리구슬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사들이 기도할 때에 사용하는 묵주나, 승려들이 염불을 외울 때 사용하는 염주와 비슷하다고 할까?

실제로 전혀 다른 두 영역에서 매우 흡사한 주제 패턴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칸딘스키가 음악과 회화 사이에서 유사성을 보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특히 공감각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텍스트와 이미지, 이미지와 사운드, 사운드와 텍스트 사이에서 공통의 패턴을 읽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저자들의 텍스트를 읽다가 문득 서로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유리알 유희가 작동하는 순간인데, 이때 상상력이 패턴의 유사성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를 여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여기에 전혀 다른 텍스트 세 개가 있다. 하나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로, 이는 인류학의 영역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로만 야콥슨의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이라는 논문으로, 언어학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마지막 텍스트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으로, 정신분석학의 대표적 저작으로 꼽힌다. 인류학, 언어학, 정신분석학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 세 텍스트의 주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문득 이를 의식할 때, 패턴의 유사성은 마치 웜홀처럼 다른 세 개의 상이한 우주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동종주술과 감염주술

 

먼저 『황금가지』의 기본 구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책은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수집한 원시적 주술에 관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저술의 바탕이 된 자료들은 모두 선교사나 탐험가들이 보내온 편지나 보고서들로, 정작 저자인 프레이저는 한 번도 현지조사(field work)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책의 제3장 「공감주술」에서 프레이저는 주술의 원리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마술의 토대가 되는 사유의 원리를 분석해 보면, 그것들이 두 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사는 유사를 낳는다, 혹은 결과는 그것의 원인을 닮는다는 것이다. 둘째, 한번 접촉했던 것들은 물리적 접촉이 끊어진 이후에도 원거리에서 계속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전자를 유사성의 법칙, 후자를 접촉 혹은 감염의 법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원리 중의 전자, 즉 유사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마술사는 자신이 그저 그것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그 어떤 효과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원리에 의거해서 마술사는 자기가 어떤 물리적 대상에 가한 일이 그것과 접촉한 사람에게 똑같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장희빈이 술사를 궁궐로 불러 중전을 그린 초상에 화살을 쏘게 한 것은 ‘유사성의 법칙’에 따른 마술이다. 특정인이 걸쳤던 옷, 혹은 그가 흘린 머리카락을 불태움으로써 그를 위해하려는 시도는 ‘접촉의 원리’에 따른 마술이다. 시대와 지역마다 마술은 매우 다양해도 모든 마술은 기본적으로는 이 두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레이저는 전자를 동종주술(homoeopathic magic), 후자를 감염주술(contagious magic)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원리와 유사한 것이 실어증 환자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유사장애와 인접장애

로만 야콥슨은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에서 언어의 두 측면, 어휘와 문법을 구별한다. 가령 말을 할 때 우리는 어휘의 시소러스(thesaurus, 내용 분류)에서 상황에 맞게 특정 낱말들을 선택한 후, 이것들을 문법에 맞게 서로 연결하여 문장을 만들어낸다. 흔히 발화 시에 낱말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축을 범렬축(paradigmatic axis), 그렇게 선택된 낱말들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축을 연사축(syntagmatic axis)이라 부른다. 야콥슨에 따르면, 이 선택이나 결합 중에서 어느 축에 교란이 생기느냐에 따라 실어증의 유형을 구별할 수 있다.

언어장애가 다양한 정도로 언어단위를 선택하거나 연결하는 개인의 능력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은 명확하다. 이 두 기능 중에서 주로 어느 것이 손상되었는가 하는 것이 실어증의 다양한 형태들을 기술하고 분석하고 분류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이분법이 아마도―언어교환의 두 기능, 즉 인코딩과 디코딩 중에서 특히 어느 쪽이 손상을 입었느냐를 가리키는―송신(emissive) 실어증과 수신(receptive) 실어증이라는 고전적 분류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선택의 축이 손상된 경우, 화자는 적절한 낱말을 떠올리지 못해 모든 명사를 대명사(가령 ‘거시기’)로 대체하게 된다. 반면 결합의 축이 손상된 경우, 선택된 낱말들을 결합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증세가 극단적인 환자가 발화하는 문장은 전보문에 가까워진다. 야콥슨은 전자를 유사장애(Similarity Disorder), 그리고 후자를 인접장애(Contiguity Disorder)라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꾸는 꿈 역시 실어증처럼 선택과 결합이라는 언어의 두 측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응축과 치환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이 만들어지는 몇 가지 기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치환(Displacement)과 응축(Condensation)일 것이다. ‘치환’은 하나의 대상이 꿈속에서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다른 대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꿈은 왜 대상을 직접적으로 표상하지 않고 다른 대상으로 치환하여 표현해야 하는가? 그것은 검열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치환은 꿈―생각이 검열의 영향 때문에 수행해야 하는 꿈―왜곡에 사용되는 주요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의 대상이 그것과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것은 유사성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것이다. 즉 하나의 대상은 뭔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꿈속에서 다른 것을 대리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우리는 꿈에 나타난 특정한 대상을 은밀히 감춰져야 했던 다른 대상의 기호로 해독할 수 있는 것이리라. 검열을 피하기 위해 꿈에서 남성의 성기는 뭔가 길쭉한 것으로, 여자의 성기는 뭔가 오목한 것으로 바뀐다고 하지 않던가.

한편, 응축의 원리는 하나의 꿈속에 여러 개의 사태가 하나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가령 꿈속에 나타난 한 인물 안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알고 지내는 여러 사람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 때문에 하나의 꿈은 여러 개의 사태를 축약적인(laconic)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왜 하나의 대상 안에 여러 대상이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 원리는 아마 인접성일 것이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상이한 대상들이 하나의 대상 안에 함께 모일 수 있었던 것이리라.


다시 유리알 유희로

이제까지 언급한 세 텍스트는 각각 인류학, 언어학, 정신분석학의 영역에 속한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전개된 이론들이지만, 그 구조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을 보았다. ‘유리알 유희’의 수도승이라면 여기서 패턴의 유사성을 상징하는 유리알 하나를 넘기며 인류학에서 언어학으로, 다시 정신분석학으로 유유자적 정신의 여행을 즐길 것이다. 하지만 유희의 명인이라면, 그 여행을 그저 인류학, 언어학, 정신분석학에서 멈추지 않고, 그 경계 바깥으로 상상력을 펼칠 것이다.

가령 야콥슨은 언어의 두 측면, 혹은 실어증의 두 유형에 관한 사고를 문학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이 원리를 산문과 운문의 구별에도 적용했다. 가령 시는 강한 은유를 사용하면서 문법의 결합 규칙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유사(선택)의 축이 발달한 대신에 결합의 축이 약한 문인은 시인이 된다고 한다. 반면에 산문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조밀한 결합을 추구한다. 이 때문에 결합의 축이 발달하고 유사의 축이 약한 문인은 소설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야콥슨은 이를 조형예술의 영역에까지 적용한다. 예를 들어 결합의 축이 발달한 화가는 입체주의자가 되고, 은유의 축이 발달한 화가는 초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정신분석학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 ‘응축’은 바로 입체주의의 조형원리다. 입체주의 회화는 다양한 시점에서 포착한 여러 장소를 하나의 장면으로 종합하기 때문이다. 반면 ‘치환’은 초현실주의의 조형원리라 할 수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에서 우리는 성적 상징들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유리알 유희’를 여기서 멈출 필요는 없다. 더 뛰어난 명인이라면 이 놀이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헤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숙달된 사람이나 명인은 유희를 첫 주제에서 무한편성까지 마음대로 진전시켰다.

당신도 유희의 명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언젠가 내가 독자에게 냈던 퀴즈의 정답을 밝힐까 한다. 몇 년 전에 발표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내가 만든 애너그램을 소개한 바 있다. ‘SIMULATE GRID.’ (‘GRID’는 다수의 PC를 연결하여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갖게 하는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그것을 ‘SIMULATE’하라는 명령은 개개인의 두뇌를 연결하여 초(超)지성을 이루라는 요청이었다.) 그것은 무엇의 애너그램일까? 정답은

MAGISTER LUDI,

즉 ‘유희의 명인’이다.
#유희 #유리알 유희 #헤르만 헤세
10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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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6.30

애너그램이 뭐지? 그리고 저 정답 독일어인가보네요. 그나저나 왜 꿈 꾸는 데 왜곡이 필요한 걸까. 생각해보면 신기하네요. 그냥 직접적으로 나와도 되지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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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1.12

예를 든 사례와 예시, 인용절보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의 유희를 읽는 편이 훨씬 이해하기 쉬울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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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umaru89

2011.06.17

'전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저자들의 텍스트를 읽다가 문득 서로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바로 그 때가 유리알 유희가 작동하는 순간이군요. 저도 저만의 필터를 통해 읽을 책을 고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전혀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공통점을 발견하곤 합니다. 바로 그것이 '취향'이겠거니 했는데, 이제 보니 그 공통점을 발견하는 게 유희의 시작이었군요. 그래서 독서하는 걸 그만둘 수 없나 봅니다. 각종 분야에서 저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는 기쁨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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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 국내에 있을 때에는 진보적 문화운동 단체였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간부로 활동했다.

1998년 4월부터 『인물과 사상』 시리즈에 '극우 멘탈리티 연구'를 연재했다. 귀국한 뒤 그는 지식인의 세계에서나마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과 논쟁의 문화가 싹트기를 기대하며, 그에 대한 비판작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변화된 상황 속에서 좌파의 새로운 실천적 지향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9년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겸직 교수로 재직 하였다.

그를 대중적 논객으로 만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박정희를 미화한 책을 패러디한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은 ‘박정희 숭배’를 열성적으로 유포하고 있는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과 작가 이인화씨, 근거 없는 ‘주사파’ 발언으로 숱한 송사와 말썽을 빚어온 박홍 전 서강대 총장,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한 작품 〈선택〉으로 논란을 낳은 작가 이문열씨 등에 대한 직격탄이다. 탄탄한 논리, 정확한 근거, 조롱과 비아냥, 풍자를 뒤섞은 경쾌하면서도 신랄한 그의 문장은 '진중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