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기간 중 키키봉의 심기는 불편했다. 한국전이 열리는 날이면 호텔방이 꽉 찬다는 기사도 못마땅하고, 더불어 월드컵 열린 다음 해에 출산율이 높다는 것도 심란했다. 다들 즐겁게 사는구나. 노총각의 소외감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평소 K리그에는 관심도 없다가 왜 월드컵 때만 되면 죄다 훌리건이 되는 거지? 여자들이 같이 안 놀아줘 잔뜩 뿔난 키키봉에게는 방송사의 독점중계도 거슬렸다. 방송사 간, 혹은 FIFA와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불만은 하나다. 선택의 여지없이 S사의 중계방송 시청을 강요당하는 것이 싫었다.
월드컵을 함께 즐길 애인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 축구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열정적 민족성이여, 영원하여라! 모든 공중파 채널에서 축구가 나오는 것보다는, 한 곳은 축구, 한 곳은 드라마, 한 곳은 교양 프로그램이 나오는 것이 합리적이지. (물론 축구경기를 번갈아 중계한다는 전제 하에!) 이것저것 투덜대봤자 결국 지지리 궁상 인증일 뿐. 키키봉은 일찍 귀가해 적막하고 우울한 신림동 다락방에서 슬로바키아와 이탈리아의 축구나 볼 참이었다. 조 최하위의 월드컵 첫 출전국과 디펜딩 챔피언의 박진감 가출한 경기를 말이다.
‘키키봉 오빠, 혹시 축구 봐요?’
수예에게 문자가 온 것은 경기 시작 10분을 남겨놨을 때였다. 키키봉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같은 커뮤니티의 동생이 보낸 문자가 대수로운 게 아닐 수 있겠지만, 수예와는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해본 사이였다. 소심하고 낯가리는 키키봉과 버금가게 수예 또한 내성적이기는 하늘을 찔렀다. 모임에 나가면 키키봉은 구석자리에서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수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미소를 짓는 게 전부였다. 둘이 친해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양궁팀에서 지옥훈련을 소화해낸 큐피드에게도 버거울 일, 혹시 잘못 보낸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키키봉 오빠라고 콕 집어 보내지 않았는가. 수예는 인구랑 친하지 않았었나? 결혼한 인구가 가족들과 함께 볼 거라 생각하고 대타가 필요했을까? 키키봉은 뜻밖의 문자에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수예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총각의 안테나를 곧추 세웠다.
‘수예가 문자를 다 보내고 뜻밖이네. 축구 좋아해? 난 지금 보려고 준비 중이지.’
‘누가 이길 거 같아요?’
키키봉의 복잡한 머릿속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이 수예는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문자를 보냈다. 대강 그림이 그려진다. 축구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지구촌의 축제인 월드컵에 동참하고 싶은 거구나. 키키봉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한 초보 축구팬에게 점수를 따는 방법은 친절한 해설로 자상한 남성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야구의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처럼 축구에도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룰은 얼마든지 있다. 축구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프사이드 같은 룰이나, 백패스 시 골키퍼가 손을 쓸 수 없는 룰 같은 건 해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키키봉은 오전에 봤던 인터넷 기사를 떠올리며 수예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탈리아가 이번 월드컵에서 좀 버벅대긴 해도 슬로바키아는 이길 거 같아.’
‘그렇죠? 아! 시작했다.’
비록 시청 앞에서 함께 보는 한국전은 아니었지만, 키키봉은 수예에게 받은 문자 두 통에 들떠 그 어떤 경기보다 들뜬 마음으로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전반전이 끝났을 때 문자를 보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경기가 끝난 후에 문자를 보내 며칠 후의 한국전을 시청 앞에서 같이 보자고 할까. 키키봉은 경기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수예와의 핑크빛 연장전만을 상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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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뻔한 반칙을 하면 당연히 옐로우카드 아닌가요?’
‘저건 칸나바로가 잘한 거야. 상대의 역습을 자신의 반칙 하나와 교환한 살신성인 플레이라고 할 수 있지.’
경기는 의외의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전반전 30여 분이 지난 시점에서 슬로바키아가 비텍의 한 골을 포함해 유효슈팅이 3개인 반면에, 이탈리아의 유효슈팅은 0개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팀이 빗장수비로 유명하다고 해도 공격까지 못하는 팀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또 하나 의외였던 것은 수예가 키키봉에게 경기 내내 문자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수예가 캐스터요, 키키봉이 해설자인 형국이다. 트위터도 부럽지 않을 실시간 문자대화, 둘만의 오붓한 중계가 시작되었다.
‘방금 카메라에 잡힌 상처 봤어요? 저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교체 안 하고 뛰다니 대단하네요.’
‘무한도전에 나왔던 쯔바사 선수의 말이 생각나네. 집념과 집념의 대결. 오늘은 슬로바키아가 더 군기 들었는데.ㅋㅋ’
‘경기에는 지고 있지만 이탈리아 선수들은 멋있는 거 같아요. 델 피에로는 왜 안 나왔는지...’
‘이탈리아 선수들 멋있지. 2002년에 우리나라한테 지고 호텔방의 가구들을 박살내고 갔다던데. 매너도 끝내주지.’
‘혹시 질투하는 거?’
‘설마!’
‘함식이란 이름은 정겹네요.’
‘대출 받고 싶은 이름이랄까?’
‘후반 피를로 교체 이후 이탈리아가 좀 살아나네요.’
‘응? 방금 콸리아렐라 슛, 들어간 거 아니었나?’
‘카메라 위치가...이탈리아 아깝겠네요. 에구’
‘들어간 거 같은데 판정운도 안 따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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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또 먹었어요.’
‘함식이의 논스톱 어시스트가 예술이네. 이탈리아 시망?’
‘이탈리아가 한 골 넣었어요.’
‘싸우는 거 봐.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 같다.’
‘왜 저러죠?’
‘빨리 공 갖고 가서 경기 시작하려는 이탈리아 공격수와 늦장 부리려는 슬로바키아 골키퍼가 충돌한 거지.’
키키봉은 정신없이 문자를 보내며 굼뜬 손가락을 원망했다. 한참 입력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상황은 바뀌어 있었고, 심지어 답 문자를 보내기 전에 새로운 문자를 받기도 했다. 언젠가 문자를 보내는 키키봉을 보고 한 후배는 ‘작곡하는 거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띵띵 소리를 내며 한 글자씩 꾹꾹 눌러 보내는 키키봉이 답답해서 그런 것이다.
경기는 슬로바키아가 한 점을 리드한 채 후반 4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공격을 할 것인가. 수비를 할 것인가. 이기는 팀은 이기는 팀대로, 지고 있는 팀은 지고 있는 팀대로 결정을 해야 한다. 공격을 선택하면 수비가 헐거워지고, 수비를 선택하면 상대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 슬로바키아와 이탈리아 감독의 복잡한 머릿속처럼 키키봉도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데이트 신청을 할 것인가. 젠틀한 모임 선배로 남을 것인가.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는 키키봉, 그러나 슬로바키아와 이탈리아의 경기는 단 1초의 빈틈도 없이 숨 막히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후반 43분에 추가골이면 끝난 거죠?’
‘메시가 와도 힘들지 않을까?’
‘이탈리아 대단하네요. 한 점 더 넣으면 16강 진출인가요?’
‘응. 이게 바로 펠레 스코어야.ㅎㄷㄷ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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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쉽다. 끝났네.’
‘페페 귀국하면 돌 맞겠다. 저걸 못 넣네.’
‘재미있었어요. 저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수예의 레드선 문자에 키키봉은 엘리스 파크 스타디움에서 신림동 다락방으로 소환되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칸나바로와 눈물짓는 콸리아렐라를 보며 동정심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수예의 굿나잇 문자에 화답하며 애프터를 기약해야 한다. 수십 통의 문자를 주고받으며 쌓은 교분은 특별한 것이다. 시청 앞 또한 천만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키키봉은 2002년 월드컵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선 홍명보의 마음이 되어 회심의 문자를 보냈다.
‘내일 모레 우루과이랑 하는 한국전 보러 같이 시청 앞에 가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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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봉 서태지가 태어난 다음해인 1973년, 같은 날에 태어났다. 10여 군데의 광고회사를 다니다 매일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호화로운 야근 생활이 싫어 프리랜서 선언을 했다. 독신 탈출을 위해 아파트까지 준비했지만 결혼 직전에 여자에게 차였고, 어느 날 갑자기 홍대 앞에 카페 리앤키키봉을 오픈했다. 이때의 ‘카페 창업 분투기’를 엮어서 『낭만적 밥벌이』를 펴냈다. 평범한 노총각의 독신 생활 고백서 『독신남 이야기』를 두 번째 책으로 펴냈으며, 현재 카페를 접고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키키봉
큰엄마
2010.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