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서영은 작가강연회
살다보면 한번쯤은 찾아온다는 고비의 순간,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어 좌절감이 생길 때면 떠오르는 곳.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혹은 그 좌절감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다녀왔다는 바로 그곳,
201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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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한번쯤은 찾아온다는 고비의 순간,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어 좌절감이 생길 때면 떠오르는 곳.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혹은 그 좌절감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다녀왔다는 바로 그곳, 산티아고의 길(camino de santiago)을 가슴에 노란 화살이 박히던 그날, 유언장을 쓰고 말없이 떠나 끝없이 걷고 온 작가가 있다. 바로 서영은 선생이다. 2008년, 선생의 나이 66세였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건졌다는 생애 가장 뜨겁고 성스러운 이야기를 실어 책을 펴냈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산티아고의 길을 걸으면서 처음부터 마음에 담아둔 제목이었다. 산티아고 길 곳곳에 보일 듯 안 보일 듯 숨어있는 그 ‘노란 화살표’가 어떻게 선생의 마음으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점점 더워지는 날씨로 지쳐가던 때,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독도서관에서 있었던 서영은 선생의 강연은 그 어느 때보다 꽉 들어찬 독자들로 붐볐다. 문득 다들 나름대로 힘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선생의 책을 읽으면 누구나 위로를 받아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조금 늦게 도착한 서영은 선생은 숨을 돌릴 시간도 없이 단상에 올라 숨찬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다. 이 시간에 해주고자 했던 강연의 내용은 선생이 그동안 지나온 인생의 갈림길, 혹은 고비에 나타난 ‘산티아고’들에 관한 것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필자나 글을 읽는 독자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인생의 ‘산티아고’들이다. 솔직담백한 선생의 경험담이 소설 속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졌고, 선생은 자신의 경험담이 각자의 ‘산티아고’를 찾아가는 길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를 출간하고 산티아고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가지 않던 길을 어떻게든 더듬어 찾다가 어느 날 문득 ‘정말 떠나는구나!’ 느낄 때가 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강연을 들으러 오기까지 아마 마음에 참고 있던 ‘산티아고’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분에겐 며칠 후에 떠날 길이고, 어떤 분에겐 내년 혹은 몇 달 후에 떠날 길일 수도 있다. 또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며 설마 ‘내’ 삶이 이렇게 끝날 것인가, 하는 심정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산티아고’는 스페인 서쪽의 어느 도시가 아니라 여러분들에겐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싶다는 욕망의 결정체가 될 것이다. 나 역시 산티아고 길을 걷기까지 그 이전에 가지 않았던 수많은 길을 걸어왔지만 방황하고 허무해하거나 부질없음을 모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과 인생의 마지막 어떤 희망을 기어이 찾겠다는 욕망 하나로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각자의 ‘산티아고’ 길을 찾아가는 데 내 경험이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나의 ‘산티아고’에 대해 말해주려 한다.”
내 인생 첫 번째 ‘산티아고’의 길
19살 때 사범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형편이 어려웠기에 졸업과 동시에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길을 생각할 수도 없는 당연한 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와 동생, 선생까지 셋을 거느리고 살아가기에 혼자된 엄마로선 현실적으로 너무나 힘든 삶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사가 될 수 있는 일은 가족 모두를 살리는 길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가르치는 일이 싫었단다. 개인적인 상황도 싫었고 사범학교라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조건들이 선생을 옥죄어왔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누구나 붙는 임용고시에 일부러 떨어진 것이다. 그때 나타났던 거부의 마음이 선생 앞에 나타난 최초의 ‘산티아고’라고 했다.
“누구나 받는 교사 발령을 유일하게 받지 못한 사람이 되고 가족을 곤경에 빠뜨렸다. 속으론 시험에 떨어지고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상황이 시원했지만 다른 동창들이 임용되고 월급을 받아 부모님에게 빨간 내의를 사다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만 이상한 아이가 되었고 그건 내가 마땅히 부러워해야 할 일로 치부했었다.”
교사가 되지 못한 선생은 가족들과 서울로 이사를 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일협정 데모가 일어나 학교 수업은 연일 휴강이었다. 직장에라도 나가야 했다. 그때 간신히 얻은 일이 수도국의 타이피스트였다. 선생은 타이피스트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전에 임용고시 실기 시험에서 파트너였던 선배가 교사가 되기 위해 혼신을 다해 춤을 췄듯이, 처음 보는 수도국의 과장 앞에서 열심히 타이핑을 했다. 생각해보면 온통 오타투성이었지만 그 자세가 진지했는지 합격을 했고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월급을 받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독립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가족을 두고 세상 속으로 혼자 걸어 간 것이다.
마침내 어머니는 체념하셨고, 그것이 미안해진 나는 스스로 꿍꿍이속을 열어 보였다. “엄마, 나는 작가가 될 거예요.” 사실 나는 그때까지 책 읽고 뭔가를 끼적거리는 것이 좋았을 뿐이지, 꼭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말함으로써, 불확실하던 나의 미래엔 하나의 이정표가 꽂히게 되었다.(『일곱 빛깔의 위안』 중에서)
혼자 살게 되면서 선생은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직접 연탄불을 갈고 밥을 해 먹으며 출퇴근을 했다. 돌아오는 길엔 만원 버스에 시달리느라 녹초가 되었지만 집에 오면 자신을 찾았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선생에게 ‘산티아고’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던 거다.
선생은 그 후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에 작품 응모를 하였고 단편 「교橋」가 당선되어 작가로 등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두고 카프카의 작품을 닮았다고 했단다. 세계적인 대작가들의 책을 읽는 것이 작가수업의 모두였던 선생으로선 당연한 결과였다. 가족 간의 소통과 이해의 단절을 보여주는 카프카의 『변신』에 빠져들면서 그 문제를 파고 들어가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나온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찾아온 ‘산티아고’
스무 살, ‘산티아고’에 가까이 갔지만 여전히 선생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등단은 했지만 원고를 실어줄 만한 잡지가 그 당시엔 많지 않았다.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다. 타이피스트를 그만두고 ‘한국문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문학’에서의 일은 선생이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하는 일터로 들어온 것이며 다른 작가들을 만나게 되는 ‘문학적인 환경’으로 들어오게 된 일이다. 그렇지만 그 또한 2년여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재정적인 압박이 심한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몇 달 후 이번엔 ‘문학사상사’에 취직을 했다. 그곳은 선생에게 현실적 입지를 강화해준 직장이었는데 그곳에서 3년여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럴싸한 성공의 자리에 와 있다고 착각하며 보낸 시간이기도 했다. 50~60명의 필자들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였고 그런 만큼 우쭐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작가에겐 ‘독’이 잵는 자리였다. 그걸 느끼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잡지가 나오기로 한 날이었다. 발행일에 책이 나오지 않자 주간에게 불려가 혼이 난 것이다.
일을 마쳤다는 홀가분함도 없이 사무실을 나와, 땅거미 지는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노라니, 잡지
이 과정 역시 선생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그 길의 윤곽이 좀 더 뚜렷해진 또 다른 ‘산티아고’였다. 그때 직장을 그만둔 선생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히스테릭하고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건강을 찾아야했다. 또 자신을 찾기 위해 걸어야 했다.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집을 나섰다 한 걸음 걷고 나서, 쉬고, 하는 식으로 우면산까지 갔다. 그날 이후 매일 산행과 명상을 지속했다. 그러는 사이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었고, 피폐해진 몸에 다시 맑은 기운이 되돌아왔다. 정신도 ‘가장 세련된 수준으로 조율된 의식’(수전 손택) 상태가 되었다. 나는 글쓰기에 몰두했다. <황금깃털> <산행> <먼 그대> 등의 작품이 이 무렵에 쓰였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그리고 그해 10월, 선생은 단편 「먼 그대」로 ‘1983년 이상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청탁과 인터뷰들이 물 밀듯 들어왔다가 나갔다. 마음은 지치고 힘들었다. 그동안 글 쓰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들어오는 청탁의 원고들은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작가로 인정받는 것은 좋았지만 7~8군데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도 2~3개의 글을 고작 써낼 뿐이었다. 어느 날, ‘이게 무슨 작가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선생의 마음에 가지 않을 수 없는 그 길이 또 한 번 찾아오게 되었다. 선생은 그 이후 청탁을 받기보다는 본인이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나라 문예잡지 특성상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하게 그 많던 원고 청탁이 줄어들었고 내부적으로 고독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성공의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걸 버린 셈이다. 선생의 마음에는 소신대로 하겠다는 신념이 강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이라크 대사의 초청으로 바빌론 축제에 초대받아 바그다드로 떠나게 되었다.
작품 중에 「사막을 건너는 법」이 있다. 실제로 사막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마치 다녀온 사람처럼 작품을 썼다. 한데 그 이미지를 형상화한 곳에 직접 가게 된 것이다. 아득하기만 한 지평선이 수평선처럼 휘어져 있는 사막에서 선생은 이대로 실종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단다. 덥고 무시무시한 황무지였지만 어떤 극한적 상황 속에서 오히려 생명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느낌을 가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때 그 바그다드가 이름만 바그다드이지 사실은 또 다른 ‘산티아고’였던 것 같다고 했다.
“그 여행을 시작으로 한 달이 멀다하고 해외로 나갔다. 세상을 발로 겪고 보니 그동안 대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았던 인생의 허무와 한계, 부질없음과 같은 삶의 깊이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작가라는 이름은 얻었으나 국경을 하나 넘으면 그 유명세는 사라지고 무력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도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은 골목을 걸으면서 자기 존재의 자리가 이전의 명성과 실제의 삶하고 전혀 닿지 않으며 도움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연약한 존재로서 먼지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 간판에 쓰인 글자를 읽지 못해 유명한 곳을 모르고 지나쳐도 그저 산이구나, 이건 강이네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 다니다 보니 세상에 대해 겁이 없어지고 평소에 닫혀 있던 고정관념들이 무너졌단다. 그런 경험을 작품으로 썼으면 좋았을 텐데, 선생에겐 또 한 차례의 현실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생기고 만다. 바로 결혼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산티아고의 길(camino de santiago)
결혼 생활은 선생이 피해갈 수 없는 길이었지만 김동리 선생이 떠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 현실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고 결국 선생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에도 나오듯이 ‘산티아고’로 떠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떠난 여행,
산티아고는 길이고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 걷기는 자연과 대지의 신비를 탐색하는 모노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는 수고와 기쁨의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리가 수고하면 가슴에는 기쁨이란 이슬이 맺힌다. (…) 길을 걷다보면 한 걸음 이전과 한 걸음 이후가 변화 그 자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산티아고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관련한 책을 읽지도 않았고 방송을 본 적이 없었다. 죽을 만큼 고독하다는 것 외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혼자 알아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떠나는 날이 가까워져 짐을 꾸리면서 그동안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에 얽매어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최대한 가벼운 배낭을 들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매번 무거웠다. 선생은 문득 세상을 살면서 버리지 못하는 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하게 되었단다. 이 정도의 짐조차도 버리지 못해 정리조차 하지 못한다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수많은 관계들 자체가 짐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짐은 나 자신을 위해 가볍게 하되, 다른 사람의 짐까지 질 자리를 비워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똑같은 사물이지만 양면성을 가지게 되면 그 양면성 자체를 보듬어야 한다. 이것이 옳다거나 저것이 옳다고 정의 내리며 한쪽을 택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명징하게 깨달았다고 했다.
우리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짐을 싸서 방안에서 걸으니 너무 무거웠다. 무거울 때마다 하나씩 짐을 뺐다. 그러다 보니 짐이 무거워진 것이 짐 자체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어딜 떠나면서도 남을 의식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 길을 갈 때 정말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인간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하게 되면서 짐을 꾸리니 너무나 간단해졌다. 그 짐 한 덩어리는 밖에 나두고 거지가 뒤져도 가져갈 게 없을 정도로 꾸려졌다. 그런 상태에서 유언을 쓰게 되었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그렇게 떠난 산티아고의 길에서 가장 힘든 일은 동행과의 생각의 차이였다. 선생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에서 꽤나 리얼하게 동행과의 생각 차이에 대해 적었다.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나도 귀국 후 그분과의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대부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적은 이유는 동행을 통해 선생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유언장까지 쓰면서 길을 떠난 이유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며 만나지 못할 때는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까지 가지고 떠난 길이었다. 그런 절박한 이유를 가지고 떠난 여행인데 동행이 가진 속세에서 버리지 못한 현실들이 발목을 잡았다. 수박처럼 자신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의 차이가 선생은 동행에게, 동행은 선생에게 폭력이 될 수밖에 없었단다.
참는 것도 처음엔 힘들었지만 몇 번 겪다보니 편안해졌다. 육체의 힘든 상황조차도 의지할 것은 자신의 몸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격이 다른 동행과의 문제는 해답을 찾으면서 길을 걸었다. 스스로 격려하고 그 짐을 지고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들, 처음엔 힘들었지만 그걸 통해 대지가 말을 걸어오고 숲과 바람, 나무들이 그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경이로움을 경험하면서 ‘아, 이런 것만으로 행복한데 왜 자꾸만 나를 덮고 삶의 뼈저림을 보이면서 살았나’ 생각했다. 섭리 속에 안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단다.
산티아고는 그렇게 선생의 삶을 바꿔 놓았다. 자신을 옭아매고 고통을 주었던 온갖 인연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짐을 벗어버렸다. 믿음과 사랑, 섭리 안에 들어 있는 우주의 절대 질서를 알게 된 것이다.
한 시간이 넘는 강연이었기에 지칠 법도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의 목소리는 커졌다. 열정적인 강연이었다. 선생의 인생에서 어떤 변화들이 선생을 산티아고로 점점 다가가게 하고 결국 다녀오게 했는지, 그 이후의 삶이 또 얼마나 변했는지 알고도 남음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강연 마무리에 이날 이 자리에 모인 독자들이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혹은 머뭇거리다가 일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꼭 산티아고를 찾아 떠나길 고대한다며 선생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는 말로 강연을 끝냈다. 선생 덕분에 나도 점점 다가오는 산티아고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나도 떠나게 될 것이라 자신감과 함께.
인생의 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 태반이다. 짐을 지는 것으로 사랑이 가늠되기도 한다. 아무 짐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의무도 책임도 안 지려는 태도이다. 때문에, 짐을 무조건 가볍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일 뿐,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영육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짐을 벗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정독도서관에서 있었던 서영은 선생의 강연은 그 어느 때보다 꽉 들어찬 독자들로 붐볐다. 문득 다들 나름대로 힘든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선생의 책을 읽으면 누구나 위로를 받아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조금 늦게 도착한 서영은 선생은 숨을 돌릴 시간도 없이 단상에 올라 숨찬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다. 이 시간에 해주고자 했던 강연의 내용은 선생이 그동안 지나온 인생의 갈림길, 혹은 고비에 나타난 ‘산티아고’들에 관한 것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필자나 글을 읽는 독자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인생의 ‘산티아고’들이다. 솔직담백한 선생의 경험담이 소설 속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졌고, 선생은 자신의 경험담이 각자의 ‘산티아고’를 찾아가는 길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를 출간하고 산티아고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가지 않던 길을 어떻게든 더듬어 찾다가 어느 날 문득 ‘정말 떠나는구나!’ 느낄 때가 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강연을 들으러 오기까지 아마 마음에 참고 있던 ‘산티아고’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분에겐 며칠 후에 떠날 길이고, 어떤 분에겐 내년 혹은 몇 달 후에 떠날 길일 수도 있다. 또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며 설마 ‘내’ 삶이 이렇게 끝날 것인가, 하는 심정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산티아고’는 스페인 서쪽의 어느 도시가 아니라 여러분들에겐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싶다는 욕망의 결정체가 될 것이다. 나 역시 산티아고 길을 걷기까지 그 이전에 가지 않았던 수많은 길을 걸어왔지만 방황하고 허무해하거나 부질없음을 모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과 인생의 마지막 어떤 희망을 기어이 찾겠다는 욕망 하나로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각자의 ‘산티아고’ 길을 찾아가는 데 내 경험이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나의 ‘산티아고’에 대해 말해주려 한다.”
내 인생 첫 번째 ‘산티아고’의 길
19살 때 사범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형편이 어려웠기에 졸업과 동시에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길을 생각할 수도 없는 당연한 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와 동생, 선생까지 셋을 거느리고 살아가기에 혼자된 엄마로선 현실적으로 너무나 힘든 삶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사가 될 수 있는 일은 가족 모두를 살리는 길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가르치는 일이 싫었단다. 개인적인 상황도 싫었고 사범학교라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조건들이 선생을 옥죄어왔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누구나 붙는 임용고시에 일부러 떨어진 것이다. 그때 나타났던 거부의 마음이 선생 앞에 나타난 최초의 ‘산티아고’라고 했다.
“누구나 받는 교사 발령을 유일하게 받지 못한 사람이 되고 가족을 곤경에 빠뜨렸다. 속으론 시험에 떨어지고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상황이 시원했지만 다른 동창들이 임용되고 월급을 받아 부모님에게 빨간 내의를 사다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만 이상한 아이가 되었고 그건 내가 마땅히 부러워해야 할 일로 치부했었다.”
교사가 되지 못한 선생은 가족들과 서울로 이사를 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일협정 데모가 일어나 학교 수업은 연일 휴강이었다. 직장에라도 나가야 했다. 그때 간신히 얻은 일이 수도국의 타이피스트였다. 선생은 타이피스트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전에 임용고시 실기 시험에서 파트너였던 선배가 교사가 되기 위해 혼신을 다해 춤을 췄듯이, 처음 보는 수도국의 과장 앞에서 열심히 타이핑을 했다. 생각해보면 온통 오타투성이었지만 그 자세가 진지했는지 합격을 했고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월급을 받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독립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가족을 두고 세상 속으로 혼자 걸어 간 것이다.
마침내 어머니는 체념하셨고, 그것이 미안해진 나는 스스로 꿍꿍이속을 열어 보였다. “엄마, 나는 작가가 될 거예요.” 사실 나는 그때까지 책 읽고 뭔가를 끼적거리는 것이 좋았을 뿐이지, 꼭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말함으로써, 불확실하던 나의 미래엔 하나의 이정표가 꽂히게 되었다.(『일곱 빛깔의 위안』 중에서)
혼자 살게 되면서 선생은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직접 연탄불을 갈고 밥을 해 먹으며 출퇴근을 했다. 돌아오는 길엔 만원 버스에 시달리느라 녹초가 되었지만 집에 오면 자신을 찾았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선생에게 ‘산티아고’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던 거다.
선생은 그 후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에 작품 응모를 하였고 단편 「교橋」가 당선되어 작가로 등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두고 카프카의 작품을 닮았다고 했단다. 세계적인 대작가들의 책을 읽는 것이 작가수업의 모두였던 선생으로선 당연한 결과였다. 가족 간의 소통과 이해의 단절을 보여주는 카프카의 『변신』에 빠져들면서 그 문제를 파고 들어가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나온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찾아온 ‘산티아고’
스무 살, ‘산티아고’에 가까이 갔지만 여전히 선생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등단은 했지만 원고를 실어줄 만한 잡지가 그 당시엔 많지 않았다.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다. 타이피스트를 그만두고 ‘한국문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문학’에서의 일은 선생이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하는 일터로 들어온 것이며 다른 작가들을 만나게 되는 ‘문학적인 환경’으로 들어오게 된 일이다. 그렇지만 그 또한 2년여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재정적인 압박이 심한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몇 달 후 이번엔 ‘문학사상사’에 취직을 했다. 그곳은 선생에게 현실적 입지를 강화해준 직장이었는데 그곳에서 3년여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럴싸한 성공의 자리에 와 있다고 착각하며 보낸 시간이기도 했다. 50~60명의 필자들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였고 그런 만큼 우쭐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작가에겐 ‘독’이 잵는 자리였다. 그걸 느끼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잡지가 나오기로 한 날이었다. 발행일에 책이 나오지 않자 주간에게 불려가 혼이 난 것이다.
일을 마쳤다는 홀가분함도 없이 사무실을 나와, 땅거미 지는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노라니, 잡지
와 25일이란 날짜에 그토록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나 자신이 몹시 우스꽝스러워졌다. 그들은 내 어깨를 스쳐 가면 반문하는 것 같았다. “잡지라구요? 그게 뭐죠?” 또는 “잡지가 25일에 나오든 30일에 ?오든, 또는 아주 안 나오든,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다구요.” 그러고 보니, 일을 그만두면 잡지의 일은 나의 삶에서도 그 의미가 반감되거나 잊혀질 그 무엇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그와 동시에 내 마음은 내 존재와 더불어 시작된 어떤 본연의 두려움 없고 흔들림 없는 중심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일곱 빛깔의 위안』 중에서)
이 과정 역시 선생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그 길의 윤곽이 좀 더 뚜렷해진 또 다른 ‘산티아고’였다. 그때 직장을 그만둔 선생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히스테릭하고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건강을 찾아야했다. 또 자신을 찾기 위해 걸어야 했다.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집을 나섰다 한 걸음 걷고 나서, 쉬고, 하는 식으로 우면산까지 갔다. 그날 이후 매일 산행과 명상을 지속했다. 그러는 사이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었고, 피폐해진 몸에 다시 맑은 기운이 되돌아왔다. 정신도 ‘가장 세련된 수준으로 조율된 의식’(수전 손택) 상태가 되었다. 나는 글쓰기에 몰두했다. <황금깃털> <산행> <먼 그대> 등의 작품이 이 무렵에 쓰였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그리고 그해 10월, 선생은 단편 「먼 그대」로 ‘1983년 이상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청탁과 인터뷰들이 물 밀듯 들어왔다가 나갔다. 마음은 지치고 힘들었다. 그동안 글 쓰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들어오는 청탁의 원고들은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작가로 인정받는 것은 좋았지만 7~8군데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도 2~3개의 글을 고작 써낼 뿐이었다. 어느 날, ‘이게 무슨 작가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선생의 마음에 가지 않을 수 없는 그 길이 또 한 번 찾아오게 되었다. 선생은 그 이후 청탁을 받기보다는 본인이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나라 문예잡지 특성상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하게 그 많던 원고 청탁이 줄어들었고 내부적으로 고독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성공의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걸 버린 셈이다. 선생의 마음에는 소신대로 하겠다는 신념이 강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이라크 대사의 초청으로 바빌론 축제에 초대받아 바그다드로 떠나게 되었다.
작품 중에 「사막을 건너는 법」이 있다. 실제로 사막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마치 다녀온 사람처럼 작품을 썼다. 한데 그 이미지를 형상화한 곳에 직접 가게 된 것이다. 아득하기만 한 지평선이 수평선처럼 휘어져 있는 사막에서 선생은 이대로 실종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단다. 덥고 무시무시한 황무지였지만 어떤 극한적 상황 속에서 오히려 생명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느낌을 가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때 그 바그다드가 이름만 바그다드이지 사실은 또 다른 ‘산티아고’였던 것 같다고 했다.
“그 여행을 시작으로 한 달이 멀다하고 해외로 나갔다. 세상을 발로 겪고 보니 그동안 대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았던 인생의 허무와 한계, 부질없음과 같은 삶의 깊이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작가라는 이름은 얻었으나 국경을 하나 넘으면 그 유명세는 사라지고 무력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도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은 골목을 걸으면서 자기 존재의 자리가 이전의 명성과 실제의 삶하고 전혀 닿지 않으며 도움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연약한 존재로서 먼지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 간판에 쓰인 글자를 읽지 못해 유명한 곳을 모르고 지나쳐도 그저 산이구나, 이건 강이네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 다니다 보니 세상에 대해 겁이 없어지고 평소에 닫혀 있던 고정관념들이 무너졌단다. 그런 경험을 작품으로 썼으면 좋았을 텐데, 선생에겐 또 한 차례의 현실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생기고 만다. 바로 결혼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산티아고의 길(camino de santiago)
결혼 생활은 선생이 피해갈 수 없는 길이었지만 김동리 선생이 떠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 현실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고 결국 선생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에도 나오듯이 ‘산티아고’로 떠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떠난 여행,
산티아고는 길이고 숲이고, 낙엽이며 바람이다. 걷기는 자연과 대지의 신비를 탐색하는 모노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는 수고와 기쁨의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리가 수고하면 가슴에는 기쁨이란 이슬이 맺힌다. (…) 길을 걷다보면 한 걸음 이전과 한 걸음 이후가 변화 그 자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산티아고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관련한 책을 읽지도 않았고 방송을 본 적이 없었다. 죽을 만큼 고독하다는 것 외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혼자 알아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떠나는 날이 가까워져 짐을 꾸리면서 그동안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에 얽매어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최대한 가벼운 배낭을 들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매번 무거웠다. 선생은 문득 세상을 살면서 버리지 못하는 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하게 되었단다. 이 정도의 짐조차도 버리지 못해 정리조차 하지 못한다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수많은 관계들 자체가 짐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짐은 나 자신을 위해 가볍게 하되, 다른 사람의 짐까지 질 자리를 비워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똑같은 사물이지만 양면성을 가지게 되면 그 양면성 자체를 보듬어야 한다. 이것이 옳다거나 저것이 옳다고 정의 내리며 한쪽을 택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명징하게 깨달았다고 했다.
우리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짐을 싸서 방안에서 걸으니 너무 무거웠다. 무거울 때마다 하나씩 짐을 뺐다. 그러다 보니 짐이 무거워진 것이 짐 자체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어딜 떠나면서도 남을 의식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 길을 갈 때 정말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인간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하게 되면서 짐을 꾸리니 너무나 간단해졌다. 그 짐 한 덩어리는 밖에 나두고 거지가 뒤져도 가져갈 게 없을 정도로 꾸려졌다. 그런 상태에서 유언을 쓰게 되었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그렇게 떠난 산티아고의 길에서 가장 힘든 일은 동행과의 생각의 차이였다. 선생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에서 꽤나 리얼하게 동행과의 생각 차이에 대해 적었다.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나도 귀국 후 그분과의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대부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적은 이유는 동행을 통해 선생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유언장까지 쓰면서 길을 떠난 이유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며 만나지 못할 때는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까지 가지고 떠난 길이었다. 그런 절박한 이유를 가지고 떠난 여행인데 동행이 가진 속세에서 버리지 못한 현실들이 발목을 잡았다. 수박처럼 자신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의 차이가 선생은 동행에게, 동행은 선생에게 폭력이 될 수밖에 없었단다.
참는 것도 처음엔 힘들었지만 몇 번 겪다보니 편안해졌다. 육체의 힘든 상황조차도 의지할 것은 자신의 몸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격이 다른 동행과의 문제는 해답을 찾으면서 길을 걸었다. 스스로 격려하고 그 짐을 지고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들, 처음엔 힘들었지만 그걸 통해 대지가 말을 걸어오고 숲과 바람, 나무들이 그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경이로움을 경험하면서 ‘아, 이런 것만으로 행복한데 왜 자꾸만 나를 덮고 삶의 뼈저림을 보이면서 살았나’ 생각했다. 섭리 속에 안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단다.
산티아고는 그렇게 선생의 삶을 바꿔 놓았다. 자신을 옭아매고 고통을 주었던 온갖 인연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짐을 벗어버렸다. 믿음과 사랑, 섭리 안에 들어 있는 우주의 절대 질서를 알게 된 것이다.
한 시간이 넘는 강연이었기에 지칠 법도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의 목소리는 커졌다. 열정적인 강연이었다. 선생의 인생에서 어떤 변화들이 선생을 산티아고로 점점 다가가게 하고 결국 다녀오게 했는지, 그 이후의 삶이 또 얼마나 변했는지 알고도 남음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강연 마무리에 이날 이 자리에 모인 독자들이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혹은 머뭇거리다가 일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꼭 산티아고를 찾아 떠나길 고대한다며 선생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는 말로 강연을 끝냈다. 선생 덕분에 나도 점점 다가오는 산티아고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나도 떠나게 될 것이라 자신감과 함께.
인생의 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 태반이다. 짐을 지는 것으로 사랑이 가늠되기도 한다. 아무 짐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의무도 책임도 안 지려는 태도이다. 때문에, 짐을 무조건 가볍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일 뿐,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영육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짐을 벗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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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