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햇살이 거기만 더 강한 것처럼, 반짝였다.
태현이도 규성이도 강강이에게는 꼼짝 못한다. 잔뜩 화난 얼굴을 하던 강강이는 급기야 입술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저러다 울겠다.
201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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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오늘의 할 일, 작업실」연재 바로가기
8
“초우야, 너는 여름이 언제라고 생각하니?”
견지 형이 물었다.
“여름이요? 여름방학이요.”
대충 대꾸했더니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럼 여름이 너무 짧잖아. 나는 유월 말부터 팔월. 구월 초도 덥긴 한데 구월은 여름이라 하기엔 좀. 그래서,”
견지 형은 고개를 들더니 모두를 향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이지요, 여름맞이 특별 프로젝트를 하겠어요.”
“우와, 귀여운 척.”
뒤에서 규성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견지 형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올여름 프로젝트는 세 개입니다. 두 개는 해본 사람 많은 거. 일단, 합숙! 팔월에 합숙 갈 거야. 그건 공문 나가니까 부모님 보여드리세요. 그리고 하나는, 알죠? 백 장 프로젝트.”
누군가는 신음하고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머릿속이 바빠졌다. 합숙 때는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이번에도 아빠가 도와줄까?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것도 지시문 줄 거지만 먼저 설명을 하면, 물건을 하나 정해. 그리고 그걸 백 장 그리는 거야. 신발이면 서로 다른 신발을 백 개 그리고 얼굴이면 다른 사람들 얼굴을 백 명 그리는 거다. 자동차, 다 다른 자동차 백 대. 칫솔, 칫솔 백 개. 표현방법은 자유지만 사진은 안 돼. 손으로 그리라는 얘기야. 알겠지?”
견지 형의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어서 엉겁결에 네, 하고 대답했다.
“백 장 프로젝트는 지금부터 시작할 것. 팔월 말에 평가회 할 거야. 한꺼번에 몰아서 하지 말고 꾸준히 해주세요. 그리고 다 알듯이, 백 장은 미니멈이고 더 그리고 싶으면 이백 장 삼백 장 맘대로 하세요. 현재 최고기록은 삼 년 전에 강강이가 그린 이백일흔세 장입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몇 장이라고?
“그리고, 그리고!”
견지 형은 아이처럼 두 손을 마주 쳤다.
“대망의 여름 프로젝트! 아하하. 다들 기대하세요. 팔월 첫 주입니다. 이건 아직 비밀. 하하하.”
견지 형 혼자 신났다. 다들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견지 형이 말을 끝내자마자 강강이에게 달려갔다. 그런 날 보고 아운이가 웃었다.
“뭘 그렸는데, 이백…… 몇 장?”
“이백일흔셋. 삼백 채우려 그랬는데 못 채웠어. 하늘 그렸어.”
강강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하늘?”
“어. 하늘은 자꾸 변하잖아. 구름도 있다 없다 그러고, 색깔도 변하고. 나무 사이에도 있고 건물 사이에도 있고, 그렇게.”
“그걸 어떻게 삼백 장을 그리냐.”
“왜, 쉬워. 하루에 열 장씩 그리면 되잖아.”
쉽다니, 말이 쉽지. 나는 뭘 그리지? 하루 종일 고민했다. 처음엔 나무를 생각했는데 어차피 초록, 재미없고 너무 어렵다. 신발이 재밌을 것 같았는데 견지 형이 예로 든 것을 그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손을 그릴까? 모양을 바꿔가면서 해보면 어떨까.
“좀 단순한 걸 골라. 나 지난번에 핸드폰 그리다가 죽는 줄 알았어. 서른 장밖에 못 그렸어. 나중엔 안 되니까 옆에서 본 거, 뒷면, 이렇게…… 하하.”
이환이 말하고,
“변수가 백 개 이상 나올 수 있는 걸 해야지. 초우 너는 디테일이 있는 걸로 해. 정밀묘사 연습 좀 되게.”
윤샘이 말했다.
계림 언니가 예전 백 장 프로젝트 결과물들을 사진으로 찍어 모아놓은 것을 보여주었는데, 신발에 얼굴, 각종 붓들을 세밀하게 그린 연필 정밀화에 수묵화까지 있었다. 수묵화는 일반부에 다니는 옆 건물 서예학원 원장님 작품이라고 했다. 백 장에 못 미치는 게 더 많아서 살짝 안심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백 장이에요? 너무 많아요.”
“뭐든 모으면 의미가 되거든.”
계림 언니는 질보다 양을 추구했던 쪽이 질적으로도 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는 실험 얘기를 해주었다.
“어느 도예과에서 그룹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작품을 많이 해서 총합이 무거운 순서대로 점수를 준다고 했고 다른 쪽은 가장 잘한 것 하나만 내면 그걸로 평가를 한다고 했어. 그런데 예상과 달리 무게로 점수를 준 쪽에서 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대. 머리로 고민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대신에 손이 가는 대로 많이 만들다보면 좋은 게 나온다는 얘기지.”
정샘은 하나의 주제에서 백 개의 변수를 가지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자기 주제를 찾아내는 집중력을 키우는 것도 백 장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했다. 견지 형이 덧붙였다.
“백 장을 그리기 위해선 한자리에 앉아서는 못하지. 돌아다녀야 돼. 몇 시간 헤매고 한 장 그릴지라도, 그렇게 걷고 관찰하고 찾아다니는 게 중요해. 그럼 네 발이 닿은 곳이 다 네 것이 되는 거야.”
내 발이 닿은 곳이 다 내 것이 된다니. 조금 민망하면서도, 꽤 두근대는 말이었다.
다음 날 저녁때였다.
자초지종은 모르겠다. 작업실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견지 형과 정샘, 계림 언니를 만나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고 올라왔더니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탁자랑 의자는 죄다 옆으로 밀리고 엎어져 있고, 태현이와 규성이가 치고받으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주영이와 아운이는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날 보고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저런 걸 누가 말려. 어쩔 줄 몰라하는데,
“조규성, 김태현.”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내 뒤로 들어온 견지 형이 이름을 부르자 둘 다 얼음, 한 듯 멈췄다. 뒤이어 들어온 계림 언니와 정샘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규성이 코에서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가 얼굴에 번져서 엉망진창이었다. 견지 형이 말했다.
“나가서 싸워.”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견지 형은 총무실로 들어가며 한마디 덧붙였다.
“작업실 치우고 나가.”
당연한 거라고 해야 하나. 태현이와 규성이는 바로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고 엉망이 된 작업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밀쳐진 탁자와 의자를 바로 세우고 흩어진 종이를 모으는데, 강강이가 들어왔다.
태현이가 일부러 강강이에게서 등을 돌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강강이는 태현이나 규성이를 보는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정물들을 보고 있었다. 어제부터 강강이가 그리던 것들이었다.
“어쩔 거야.”
흩어진 정물을 가리키며 강강이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파는 구겨졌고 페트병은 밟혀서 제 형체가 아니다. 이환이 이야기해준 감 에피소드가 딱 떠올랐다.
“어쩔 거냐고. 그리고 있었는데.”
“똑같이 놔줄게.”
규성이가 말하는데,
“어떻게 똑같아, 똑같은 게 어딨어.”
“…….”
태현이도 규성이도 강강이에게는 꼼짝 못한다. 잔뜩 화난 얼굴을 하던 강강이는 급기야 입술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저러다 울겠다. 규성이가 급하게 파와 페트병을 주워올리고 강강이가 그리던 그림을 보며 위치를 바로잡았다.
“아니야, 아니란 말야!”
강강이 발을 구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치는데 견지 형이 총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누가 우리 강강이 울렸어,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어디서 어리광이야!”
강강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태현이와 규성이는 바짝 굳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정물…… 그리던 건데…… 흐윽…….”
“다시 그려, 그럼.”
견지 형은 매몰차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질릴 정도로 차가운 태도였다. 강강이는 서러움이 북받쳐오르는지 팔로 눈을 가리고 흑흑 울었다.
“어유, 울지 마, 응?”
내가 강강이를 감싸안자 규성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강강이의 옷자락을 잡았다.
“강강아, 잘못했어, 미안해. 응? 새 거 구해다 잘 놓을게, 응?”
“울지 마.”
태현이가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졌다. 태현이도 입가가 떨리는 게, 강강이가 계속 울면 따라서 울어버릴 기세였다.
계림 언니가 나서서 다른 거 놓고 다시 하자며 정리를 했다. 눈이 빨개진 강강이는 말없이 새 종이를 꺼내왔다. 규성이는 그제야 피에 얼룩진 얼굴을 씻으러 가고 태현이는 자리에 앉아서 화난 사람처럼 탁자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미안.”
태현이가 중얼거렸다. 강강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태현이나 규성이를 탓하지는 않았다.
견지 형은 그래놓고서는 미안했는지, 나중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돌렸다. 강강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고서는 기분이 다 풀렸고, 다들 늘 있는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 에피소드로 생각한 듯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마음에 걸렸다. 과연 그래서일까. 강강이를 강하게 키우려고 그랬던 걸까. 내가 느끼기엔 그때 견지 형은 꼭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같았다. 싸우든 말든, 그리든 말든 너희 일이니까 너희가 알아서 해, 하는 차가움. 거리감. 그게 견지 형의 방어막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야 든 생각이었다.
여름방학 직전에 지난번에 신청해두었던 실기대회가 있었다. 분위기라도 한번 느껴보라는 계림 언니의 설득으로 신청한 것이었는데 유명한 대학에서 주최하는 거라 사람이 많이 몰린다고 했다. 아운이랑 주영이를 지하철역에서 만나 같이 가는데 이환에게서 어디쯤이냐고 전화가 왔다.
─ 정문 앞에서 만나자.
“굳이 그래야 하나요.”
─ 심심하잖아.
“이럴 때만 찾지.”
─ 내가 언제? 응? 초우야, 내가 언제?
이환이 심심할 만도 하다. 묘은 언니는 대회에 나오지 않았다. 신청기간 내내 이환이 온갖 말로 꾀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 경하도 여기서 보기로 했으니까. 어?
“……알았어요.”
정문에 도착하니 이환이 여기!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경하가 반기듯 웃었다. 햇살이 거기만 더 강한 것처럼, 반짝였다. 햇빛과 잘 어울리는구나. 일부러, 그려야 할 물건을 보고 평가하듯 건조하게 생각했다. 두근거리지 않으려고.
오늘 치르는 실기는 네 시간짜리 정물 수채였다. 아운이와 주영이, 이환은 어제 다른 부문에도 참가했다. 어제는 큰 체육관에서 저마다 탁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그렸다는데 오늘은 강의실마다 서른 명 정도씩 모여 강의실 한가운데 탁자에 놓인 정물을 보고 그리는 거였다. 엄청나게 긴장되고 부산한 분위기였다.
무슨 정신으로 그림을 다 그렸는지 모르겠다. 나오는 길에 이환이 말했다.
“그래도 초우야, 너보다 못 그리는 애도 많더라.”
“……위로 고마워요. 감지덕지예요.”
“자신감을 가져!”
이환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도리어 자신감이 술술 새는 기분이었다. 어려웠다고 하소연했더니 언니 거 괜찮았는데요, 주영이도 말해줬다.
“진짜? 진짜 안 비뚤어졌어?”
“……조금 비뚤어지긴 했는데…….”
“거봐아─ 으아아─.”
나는 진짜 심각하다고, 왜 다들 웃고 난리야.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이환은 먼저 가겠다고 했다.
“난, 내 백 장 프로젝트를 위해 이만 가보겠어.”
“백 장 뭐 할지 벌써 결정했어요?”
“대충, 마음으로는. 근데 내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뭘 그리기로 했는지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던 이환이 먼저 가버려서 아운이와 주영이와 경하와 나만 남았다. 한 사람 빠진 건데도 갑자기 휑했다.
아운이도 주영이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나 혼자 열심히 떠들었다. 유경하는 그래도 잘 받아치기도 하고 얘기를 먼저 하기도 하는 편이지만 아운이나 주영이는 웃기만 하고 별로 말할 생각이 없나보다. 중간에 밀어닥칠지도 모르는 침묵이 진짜 무서울 거 같아서, 나 혼자 말하고, 웃고, 정신없었다. 그러고 나니 나중엔 지쳐버렸다. 나라고 늘 힘이 남아돌아서 웃긴 소리 하는 건 아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아운이가 내리고 주영이가 내리고 결국엔 나와 경하만 남았다. 집이 어디라고? 가는 길 위험하진 않아? 경하가 물어봐주었다.
“아까 초우 너 그린 거, 진짜 괜찮았어.”
이런 말까지 해주었지만 그건 좀 아니잖아.
“음, 그래. 음.”
상대가 이환이거나 견지 형이었으면, 아니 아운이나 강강이만 되었어도 말이 돼? 장난 쳐? 그게 뭐가 괜찮았냐? 이랬을 텐데 그런 말이 안 나왔다. 아까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입이 잘 안 움직였다.
“억울하다니까.”
경하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랑 나랑 그렇게 장난치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너 그림 시작한 지 몇 달밖에 안 됐잖아. 나는 십 년 됐는데. 너무 오래 해서 더 못하나봐.”
“네가 못하긴 뭘 못하는데!”
얌전히 받아넘기려고 했는데, 억울함이 북받쳐올라 목소리가 커졌다.
“보면 잘 그리는 애들이 꼭 그러더라, 자기 못 그린다고 막 그러고. 아운이도 그러지, 가끔은 강강이조차 그래! 그게 말이 돼? 어?”
“하하하.”
경하는 시원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이어진 경하의 말은 정말 의외였다.
“견지 형은 나더러 미술 그만하라는데?”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왜, 왜?
“나한테는 다른 게 더 잘 맞을 거라고…… 그림 말고 다른 거. 나도 가끔 그런가 싶어.”
“무슨 다른 거?”
“그건 잘 모르겠어. 아직은.”
경하는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오랫동안 미술을 했으니까, 이제 와서 다른 뭘 할 수 있을지.”
경하는 자기 이야기를 했다. 중학교 때 작업실을 다녔고, 예고에 가서는 한동안 다니지 않다가 작년 가을부터 아운이와 다시 다니게 되었다는 것.
“우리 부모님이랑 아운이네 부모님이 친한 친구여서…… 대학 동창이셔. 아운이네 부모님도 내가 여기 작업실 다녔던 거 잘 아셨거든. 아운이가 미술을 하게 되었을 때, 여기서 부족한 걸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셔서 작업실 소개해달라고 하셨어. 그 김에 나도 온 거야. 작업실에서 계속 배우고 싶었으니까.”
“그렇구나.”
“그때…… 봄에 우리 마주쳤잖아, 너희 사촌 결혼식 때.”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경하는 그때 일을 설명하고 싶은 것이구나.
“부모님들이 잘 아는 화가분 전시회 오픈하는 날이었어. 아운이랑 나를 그분한테 소개하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아운이는 그런 걸 되게 싫어해서. 부모님들 통해서 사람 만나고, 인사하고 그러는 거. 나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고.”
“너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 말없는 물음표를 느꼈는지 경하가 말했다.
“내가 귀찮나봐. 아운이는 내가 작업실에 다니는 것도 좀 못마땅해하는 거 같아. 불편해하고.”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엄마아빠부터 친구였던 아이들이 어떤 추억을 공유하며 얼마나 친해지는지, 친하다 못해 귀찮다 느낄 정도로 가까운지. 경하가 아운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까슬까슬하게 느껴졌다.
“아운이도 그러지, 견지 형은 자꾸 미술을 아예 그만두라지, 작업실에서 버티기 힘들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경하는 웃었다. 웃으면서 말해서 심각하게 들리지가 않았다. 말하는 것만 듣고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따라 웃으면서도 웃어넘기지 않으려 애를 써야 한다.
“난 네가 없는 작업실은 상상이 안 되는데.”
불쑥 말했다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나 경하는 가볍게 고마워, 하고 받아주었다.
경하가 나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지하철에서 사람 보낼 때 참 어색하다. 역에 도착하면 인사하고, 문 열리면 또 하고, 지하철이 빨리 움직여주지 않으면 멀뚱멀뚱 있다가 움직이면 또 인사하고……. 그런데 한 번 인사하고 싹 가버렸으면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을 거야. 유경하는 지하철이 움직여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걸어오는데, 가방은 무겁고 어깨는 아프고 낸 그림은 엉망이었고,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오늘 그린 그림. 경하와 나눈 이야기. 이상하지, 허탈하면서도 그 빈 곳에 뭔가를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어. 주황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내 그림자는 길었다가 내가 성큼성큼 걸어가면 놀란 듯 서서히 흐려졌다. 가로등을 지날 때면 발자국 밑에 겨우 어른거릴 정도로 작아졌다가 가로등을 지나가면 도로 앞으로 조금씩 자랐다. 커질 만큼 커진 후에는 다시 줄어들고, 또다시 처음부터. 많이 보았던 것인데 오늘은 특별했다. 꼭 나 같구나, 이랬다저랬다 하고 하늘까지 치솟았다가 곧 땅속으로 파고들어가버리는 나.
그래,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를 그리자. 나의 백 장,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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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우야, 너는 여름이 언제라고 생각하니?”
견지 형이 물었다.
“여름이요? 여름방학이요.”
대충 대꾸했더니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럼 여름이 너무 짧잖아. 나는 유월 말부터 팔월. 구월 초도 덥긴 한데 구월은 여름이라 하기엔 좀. 그래서,”
견지 형은 고개를 들더니 모두를 향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이지요, 여름맞이 특별 프로젝트를 하겠어요.”
“우와, 귀여운 척.”
뒤에서 규성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견지 형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올여름 프로젝트는 세 개입니다. 두 개는 해본 사람 많은 거. 일단, 합숙! 팔월에 합숙 갈 거야. 그건 공문 나가니까 부모님 보여드리세요. 그리고 하나는, 알죠? 백 장 프로젝트.”
누군가는 신음하고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머릿속이 바빠졌다. 합숙 때는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이번에도 아빠가 도와줄까?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것도 지시문 줄 거지만 먼저 설명을 하면, 물건을 하나 정해. 그리고 그걸 백 장 그리는 거야. 신발이면 서로 다른 신발을 백 개 그리고 얼굴이면 다른 사람들 얼굴을 백 명 그리는 거다. 자동차, 다 다른 자동차 백 대. 칫솔, 칫솔 백 개. 표현방법은 자유지만 사진은 안 돼. 손으로 그리라는 얘기야. 알겠지?”
견지 형의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어서 엉겁결에 네, 하고 대답했다.
“백 장 프로젝트는 지금부터 시작할 것. 팔월 말에 평가회 할 거야. 한꺼번에 몰아서 하지 말고 꾸준히 해주세요. 그리고 다 알듯이, 백 장은 미니멈이고 더 그리고 싶으면 이백 장 삼백 장 맘대로 하세요. 현재 최고기록은 삼 년 전에 강강이가 그린 이백일흔세 장입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몇 장이라고?
“그리고, 그리고!”
견지 형은 아이처럼 두 손을 마주 쳤다.
“대망의 여름 프로젝트! 아하하. 다들 기대하세요. 팔월 첫 주입니다. 이건 아직 비밀. 하하하.”
견지 형 혼자 신났다. 다들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견지 형이 말을 끝내자마자 강강이에게 달려갔다. 그런 날 보고 아운이가 웃었다.
“뭘 그렸는데, 이백…… 몇 장?”
“이백일흔셋. 삼백 채우려 그랬는데 못 채웠어. 하늘 그렸어.”
강강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하늘?”
“어. 하늘은 자꾸 변하잖아. 구름도 있다 없다 그러고, 색깔도 변하고. 나무 사이에도 있고 건물 사이에도 있고, 그렇게.”
“그걸 어떻게 삼백 장을 그리냐.”
“왜, 쉬워. 하루에 열 장씩 그리면 되잖아.”
쉽다니, 말이 쉽지. 나는 뭘 그리지? 하루 종일 고민했다. 처음엔 나무를 생각했는데 어차피 초록, 재미없고 너무 어렵다. 신발이 재밌을 것 같았는데 견지 형이 예로 든 것을 그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손을 그릴까? 모양을 바꿔가면서 해보면 어떨까.
“좀 단순한 걸 골라. 나 지난번에 핸드폰 그리다가 죽는 줄 알았어. 서른 장밖에 못 그렸어. 나중엔 안 되니까 옆에서 본 거, 뒷면, 이렇게…… 하하.”
이환이 말하고,
“변수가 백 개 이상 나올 수 있는 걸 해야지. 초우 너는 디테일이 있는 걸로 해. 정밀묘사 연습 좀 되게.”
윤샘이 말했다.
계림 언니가 예전 백 장 프로젝트 결과물들을 사진으로 찍어 모아놓은 것을 보여주었는데, 신발에 얼굴, 각종 붓들을 세밀하게 그린 연필 정밀화에 수묵화까지 있었다. 수묵화는 일반부에 다니는 옆 건물 서예학원 원장님 작품이라고 했다. 백 장에 못 미치는 게 더 많아서 살짝 안심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백 장이에요? 너무 많아요.”
“뭐든 모으면 의미가 되거든.”
계림 언니는 질보다 양을 추구했던 쪽이 질적으로도 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는 실험 얘기를 해주었다.
“어느 도예과에서 그룹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작품을 많이 해서 총합이 무거운 순서대로 점수를 준다고 했고 다른 쪽은 가장 잘한 것 하나만 내면 그걸로 평가를 한다고 했어. 그런데 예상과 달리 무게로 점수를 준 쪽에서 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대. 머리로 고민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대신에 손이 가는 대로 많이 만들다보면 좋은 게 나온다는 얘기지.”
정샘은 하나의 주제에서 백 개의 변수를 가지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자기 주제를 찾아내는 집중력을 키우는 것도 백 장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했다. 견지 형이 덧붙였다.
“백 장을 그리기 위해선 한자리에 앉아서는 못하지. 돌아다녀야 돼. 몇 시간 헤매고 한 장 그릴지라도, 그렇게 걷고 관찰하고 찾아다니는 게 중요해. 그럼 네 발이 닿은 곳이 다 네 것이 되는 거야.”
내 발이 닿은 곳이 다 내 것이 된다니. 조금 민망하면서도, 꽤 두근대는 말이었다.
다음 날 저녁때였다.
자초지종은 모르겠다. 작업실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견지 형과 정샘, 계림 언니를 만나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고 올라왔더니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탁자랑 의자는 죄다 옆으로 밀리고 엎어져 있고, 태현이와 규성이가 치고받으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주영이와 아운이는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날 보고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저런 걸 누가 말려. 어쩔 줄 몰라하는데,
“조규성, 김태현.”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내 뒤로 들어온 견지 형이 이름을 부르자 둘 다 얼음, 한 듯 멈췄다. 뒤이어 들어온 계림 언니와 정샘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규성이 코에서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가 얼굴에 번져서 엉망진창이었다. 견지 형이 말했다.
“나가서 싸워.”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견지 형은 총무실로 들어가며 한마디 덧붙였다.
“작업실 치우고 나가.”
당연한 거라고 해야 하나. 태현이와 규성이는 바로 서로의 멱살을 붙잡고 있던 손을 풀고 엉망이 된 작업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밀쳐진 탁자와 의자를 바로 세우고 흩어진 종이를 모으는데, 강강이가 들어왔다.
태현이가 일부러 강강이에게서 등을 돌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강강이는 태현이나 규성이를 보는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정물들을 보고 있었다. 어제부터 강강이가 그리던 것들이었다.
“어쩔 거야.”
흩어진 정물을 가리키며 강강이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파는 구겨졌고 페트병은 밟혀서 제 형체가 아니다. 이환이 이야기해준 감 에피소드가 딱 떠올랐다.
“어쩔 거냐고. 그리고 있었는데.”
“똑같이 놔줄게.”
규성이가 말하는데,
“어떻게 똑같아, 똑같은 게 어딨어.”
“…….”
태현이도 규성이도 강강이에게는 꼼짝 못한다. 잔뜩 화난 얼굴을 하던 강강이는 급기야 입술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저러다 울겠다. 규성이가 급하게 파와 페트병을 주워올리고 강강이가 그리던 그림을 보며 위치를 바로잡았다.
“아니야, 아니란 말야!”
강강이 발을 구르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치는데 견지 형이 총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누가 우리 강강이 울렸어,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어디서 어리광이야!”
강강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태현이와 규성이는 바짝 굳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정물…… 그리던 건데…… 흐윽…….”
“다시 그려, 그럼.”
견지 형은 매몰차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질릴 정도로 차가운 태도였다. 강강이는 서러움이 북받쳐오르는지 팔로 눈을 가리고 흑흑 울었다.
“어유, 울지 마, 응?”
내가 강강이를 감싸안자 규성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강강이의 옷자락을 잡았다.
“강강아, 잘못했어, 미안해. 응? 새 거 구해다 잘 놓을게, 응?”
“울지 마.”
태현이가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졌다. 태현이도 입가가 떨리는 게, 강강이가 계속 울면 따라서 울어버릴 기세였다.
계림 언니가 나서서 다른 거 놓고 다시 하자며 정리를 했다. 눈이 빨개진 강강이는 말없이 새 종이를 꺼내왔다. 규성이는 그제야 피에 얼룩진 얼굴을 씻으러 가고 태현이는 자리에 앉아서 화난 사람처럼 탁자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미안.”
태현이가 중얼거렸다. 강강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태현이나 규성이를 탓하지는 않았다.
견지 형은 그래놓고서는 미안했는지, 나중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돌렸다. 강강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고서는 기분이 다 풀렸고, 다들 늘 있는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 에피소드로 생각한 듯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마음에 걸렸다. 과연 그래서일까. 강강이를 강하게 키우려고 그랬던 걸까. 내가 느끼기엔 그때 견지 형은 꼭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같았다. 싸우든 말든, 그리든 말든 너희 일이니까 너희가 알아서 해, 하는 차가움. 거리감. 그게 견지 형의 방어막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야 든 생각이었다.
여름방학 직전에 지난번에 신청해두었던 실기대회가 있었다. 분위기라도 한번 느껴보라는 계림 언니의 설득으로 신청한 것이었는데 유명한 대학에서 주최하는 거라 사람이 많이 몰린다고 했다. 아운이랑 주영이를 지하철역에서 만나 같이 가는데 이환에게서 어디쯤이냐고 전화가 왔다.
─ 정문 앞에서 만나자.
“굳이 그래야 하나요.”
─ 심심하잖아.
“이럴 때만 찾지.”
─ 내가 언제? 응? 초우야, 내가 언제?
이환이 심심할 만도 하다. 묘은 언니는 대회에 나오지 않았다. 신청기간 내내 이환이 온갖 말로 꾀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 경하도 여기서 보기로 했으니까. 어?
“……알았어요.”
정문에 도착하니 이환이 여기!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경하가 반기듯 웃었다. 햇살이 거기만 더 강한 것처럼, 반짝였다. 햇빛과 잘 어울리는구나. 일부러, 그려야 할 물건을 보고 평가하듯 건조하게 생각했다. 두근거리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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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치르는 실기는 네 시간짜리 정물 수채였다. 아운이와 주영이, 이환은 어제 다른 부문에도 참가했다. 어제는 큰 체육관에서 저마다 탁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그렸다는데 오늘은 강의실마다 서른 명 정도씩 모여 강의실 한가운데 탁자에 놓인 정물을 보고 그리는 거였다. 엄청나게 긴장되고 부산한 분위기였다.
무슨 정신으로 그림을 다 그렸는지 모르겠다. 나오는 길에 이환이 말했다.
“그래도 초우야, 너보다 못 그리는 애도 많더라.”
“……위로 고마워요. 감지덕지예요.”
“자신감을 가져!”
이환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도리어 자신감이 술술 새는 기분이었다. 어려웠다고 하소연했더니 언니 거 괜찮았는데요, 주영이도 말해줬다.
“진짜? 진짜 안 비뚤어졌어?”
“……조금 비뚤어지긴 했는데…….”
“거봐아─ 으아아─.”
나는 진짜 심각하다고, 왜 다들 웃고 난리야.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이환은 먼저 가겠다고 했다.
“난, 내 백 장 프로젝트를 위해 이만 가보겠어.”
“백 장 뭐 할지 벌써 결정했어요?”
“대충, 마음으로는. 근데 내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뭘 그리기로 했는지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던 이환이 먼저 가버려서 아운이와 주영이와 경하와 나만 남았다. 한 사람 빠진 건데도 갑자기 휑했다.
아운이도 주영이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나 혼자 열심히 떠들었다. 유경하는 그래도 잘 받아치기도 하고 얘기를 먼저 하기도 하는 편이지만 아운이나 주영이는 웃기만 하고 별로 말할 생각이 없나보다. 중간에 밀어닥칠지도 모르는 침묵이 진짜 무서울 거 같아서, 나 혼자 말하고, 웃고, 정신없었다. 그러고 나니 나중엔 지쳐버렸다. 나라고 늘 힘이 남아돌아서 웃긴 소리 하는 건 아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아운이가 내리고 주영이가 내리고 결국엔 나와 경하만 남았다. 집이 어디라고? 가는 길 위험하진 않아? 경하가 물어봐주었다.
“아까 초우 너 그린 거, 진짜 괜찮았어.”
이런 말까지 해주었지만 그건 좀 아니잖아.
“음, 그래. 음.”
상대가 이환이거나 견지 형이었으면, 아니 아운이나 강강이만 되었어도 말이 돼? 장난 쳐? 그게 뭐가 괜찮았냐? 이랬을 텐데 그런 말이 안 나왔다. 아까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입이 잘 안 움직였다.
“억울하다니까.”
경하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랑 나랑 그렇게 장난치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너 그림 시작한 지 몇 달밖에 안 됐잖아. 나는 십 년 됐는데. 너무 오래 해서 더 못하나봐.”
“네가 못하긴 뭘 못하는데!”
얌전히 받아넘기려고 했는데, 억울함이 북받쳐올라 목소리가 커졌다.
“보면 잘 그리는 애들이 꼭 그러더라, 자기 못 그린다고 막 그러고. 아운이도 그러지, 가끔은 강강이조차 그래! 그게 말이 돼? 어?”
“하하하.”
경하는 시원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이어진 경하의 말은 정말 의외였다.
“견지 형은 나더러 미술 그만하라는데?”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왜, 왜?
“나한테는 다른 게 더 잘 맞을 거라고…… 그림 말고 다른 거. 나도 가끔 그런가 싶어.”
“무슨 다른 거?”
“그건 잘 모르겠어. 아직은.”
경하는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오랫동안 미술을 했으니까, 이제 와서 다른 뭘 할 수 있을지.”
경하는 자기 이야기를 했다. 중학교 때 작업실을 다녔고, 예고에 가서는 한동안 다니지 않다가 작년 가을부터 아운이와 다시 다니게 되었다는 것.
“우리 부모님이랑 아운이네 부모님이 친한 친구여서…… 대학 동창이셔. 아운이네 부모님도 내가 여기 작업실 다녔던 거 잘 아셨거든. 아운이가 미술을 하게 되었을 때, 여기서 부족한 걸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셔서 작업실 소개해달라고 하셨어. 그 김에 나도 온 거야. 작업실에서 계속 배우고 싶었으니까.”
“그렇구나.”
“그때…… 봄에 우리 마주쳤잖아, 너희 사촌 결혼식 때.”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경하는 그때 일을 설명하고 싶은 것이구나.
“부모님들이 잘 아는 화가분 전시회 오픈하는 날이었어. 아운이랑 나를 그분한테 소개하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아운이는 그런 걸 되게 싫어해서. 부모님들 통해서 사람 만나고, 인사하고 그러는 거. 나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고.”
“너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 말없는 물음표를 느꼈는지 경하가 말했다.
“내가 귀찮나봐. 아운이는 내가 작업실에 다니는 것도 좀 못마땅해하는 거 같아. 불편해하고.”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엄마아빠부터 친구였던 아이들이 어떤 추억을 공유하며 얼마나 친해지는지, 친하다 못해 귀찮다 느낄 정도로 가까운지. 경하가 아운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까슬까슬하게 느껴졌다.
“아운이도 그러지, 견지 형은 자꾸 미술을 아예 그만두라지, 작업실에서 버티기 힘들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경하는 웃었다. 웃으면서 말해서 심각하게 들리지가 않았다. 말하는 것만 듣고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따라 웃으면서도 웃어넘기지 않으려 애를 써야 한다.
“난 네가 없는 작업실은 상상이 안 되는데.”
불쑥 말했다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나 경하는 가볍게 고마워, 하고 받아주었다.
경하가 나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지하철에서 사람 보낼 때 참 어색하다. 역에 도착하면 인사하고, 문 열리면 또 하고, 지하철이 빨리 움직여주지 않으면 멀뚱멀뚱 있다가 움직이면 또 인사하고……. 그런데 한 번 인사하고 싹 가버렸으면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을 거야. 유경하는 지하철이 움직여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걸어오는데, 가방은 무겁고 어깨는 아프고 낸 그림은 엉망이었고,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오늘 그린 그림. 경하와 나눈 이야기. 이상하지, 허탈하면서도 그 빈 곳에 뭔가를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어. 주황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내 그림자는 길었다가 내가 성큼성큼 걸어가면 놀란 듯 서서히 흐려졌다. 가로등을 지날 때면 발자국 밑에 겨우 어른거릴 정도로 작아졌다가 가로등을 지나가면 도로 앞으로 조금씩 자랐다. 커질 만큼 커진 후에는 다시 줄어들고, 또다시 처음부터. 많이 보았던 것인데 오늘은 특별했다. 꼭 나 같구나, 이랬다저랬다 하고 하늘까지 치솟았다가 곧 땅속으로 파고들어가버리는 나.
그래,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를 그리자. 나의 백 장,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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