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살해범이다!” -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
지난 1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아름다운 책 이야기’의 강연 현장에서 커피를 다루는 내가 재차 확인한 명제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저자 김용규 선생의 말씀 덕분이었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1.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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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장 지글러가 유엔인권위원회와 세계식량기구 등의 보고서를 인용해 언급한 지구의 현실. 전 세계 인구는 60억이지만 매년 120억이 먹고 남을만한 식량이 생산된다. 그럼에도 세계는 매일 10만 명 이상 굶어 죽는다. 썩은 물과 진흙쿠키를 먹은 5세 미만 아이들이 5초마다 1명씩 목숨을 잃는다.

『21세기의 혁명』의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 최고 부자 3명이 가진 부가 가난한 나라 48개국의 부와 맞먹는다. 다국적 기업 200개의 매출이 세계 총생산량의 1/4에 달한다. 반면 5달러짜리 백신은 차치하고라도 1달러짜리 모기장이 없어 한해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말라리아로 죽어간다. 9억에 가까운 성인들이 문맹이며, 3억이 넘는 학령기 아동들이 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알고 있다지만, 우리의 더 큰 관심은 그것에 있지 않다. 서양철학자 김용규의 지적은 이렇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나 개인의 심리나 취향, 다문화적 요리와 놀이, 주거, 관광, 레저와 같은 탈근대적 이야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다루고 만드는 커피에도 그것은 적용된다. 거대 자본 혹은 거의 획일화된 콘셉트로 운영되는 체인 커피점들은 개인의 취향과 감성에 주로 호소한다. 개성을 들먹이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획일적 강제다. 개별성이라는 탈근대적인 가치를 들먹여 커피를 소비하도록 만든다. 덕분에 원두커피 소비는 크게 늘어났지만, 커피에 대한 담론은 ‘된장녀’ 수준에서 그닥 나아가지 않았다.

커피라는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세계는 의외로 넓다. 커피를 둘러싸고 세계 정치와 경제가 작동하고, 커피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불평등과 부조리가 만연해 있다. 노동의 현실과 땅과 생명의 흐름이 공존하며, 혁명을 추동한 역사도 있다. 커피가 주는 위안과 감성적 발현도 좋지만, 그와 함께 커피를 통해서 가능한 세계의 사유도 있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버무려 커피의 향미를 낸다면, 그것은 더 풍성한 향미를 보장하리라.

지난 1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아름다운 책 이야기’의 강연 현장에서 커피를 다루는 내가 재차 확인한 명제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저자 김용규 선생의 말씀 덕분이었다. 이날의 주제는 ‘새삼스레 왜 다시 신인가? : 가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제안’. 신과 커피? 아무 관계없을 것 같은데, 어떤 이야기가 오갔기에, 저런 호들갑을 떨까? 그 현장을 중계한다.

김용규 씨는 『즐거운 학문』에 나온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언(!)부터 꺼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 당신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해범이다!” 이 담대한 선언은, 16~17세기 과학혁명, 18세기 시민혁명, 19세기 산업혁명을 이뤄낸 당시 서구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신은, 졸지에 동네북이 됐다. 니체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영국의 문인이자 실증주의자인 모티머 콜린스는 “신이라는 헛소리는 이제 사라져다오!”라고 읊기도 했다.

계몽주의, 과학주의, 실증주의를 내세운 인간의 이성이 신을 대체한 이후, 100여 년이 훨씬 지났다. 신은 여전히 뒷전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등 격한 신성비판서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는다.

신, 인류 보편적 가치들의 정점


그렇다면 ‘새삼스레 왜 다시 신인가?’ 김용규는 결론부터 제시한다. “인간은 신이 없이는 필연적으로 난관과 파국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 그러니,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자.” 방점은 ‘신’과 ‘다시’에 있겠다. 신이라고 하니까, 지레 ‘종교적인 절대자를 꺼내서 선교를 하고자 함인가’하고 짐작한다면, 틀렸다.

그가 언급한 신은, 최고의 가치, 절대적 가치를 뜻한다. 즉,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들의 정점을 말함인데, 진리, 선함, 아름다움, 생명, 정의, 위대함 등이 되겠다. 물론 그가 창안한 개념은 아니다. 신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신학전통이 있다. ‘긍정신학’이다. ‘신은 선하다’, ‘신은 최고의 정의다’와 같이 규정한다. 로마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그렇다.

반대로, ‘부정신학’도 있다. 신에게 어떻게 이성판단의 기준을 대냐는 것이다. 그리스정교나 러시아정교 등이 그렇다. 부정신학은 그래서 ‘신은 선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신은 광폭하지 않다’와 같이 얘기한다.

그런데, ‘신은 선하다’에서 ‘선하다’를 오해하지 말라고 김씨는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철수는 선하다”고 말했을 때의 ‘선하다’가 의미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철수가 선한 것은 우리가 선에 대한 어떤 기준을 갖고 판단한 것이나, 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선이나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들의 최고 정점으로서 완벽하고 절대적인 형태로 신의 선을 말할 수 있다.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으되.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면 주어와 술어를 뒤집어 생각하는 게 낫다.”

즉,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치들의 최고 정점을 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최고의 진리, 최고의 아름다움, 최고의 정의, 최고의 생명 등과 같은 ‘최고의 가치들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고 이해해주길 부탁한다.”

돌발 퀴즈. 그렇다면, ‘신은 사랑이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맞다. 이렇게 하면 된다.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다. 최고의 진리는 사랑이다. 최고의 선은 사랑이다. 최고의 위대함은 사랑이다.

그가 좀 전에 언급한 이 말, ‘인간은 신 없이 난관과 파국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진리, 선함, 아름다움, 생명, 정의 등 최고의 가치 없이는 파국을 면할 수 없다. 이런 뜻이다. 예수쟁이 아냐? 기독교 전파하러 온 거 아냐? 이런 게 아니란 뜻이다. (웃음) 인간은 가치를 삶에서 배제해서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건 상식적인 얘기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런 가치의 위기를 겪고 있다. 거의 회복할 수 없는 가치의 위기에 처해있다. 그래서 시급히 가치를 되살리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이와 관련, 그는 이날 세 가지를 알아보자고 언급했다.
우리는 정말 파국적 난관에 봉착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다 그리 됐는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현상부터 원인을 파헤치고 해결 지점을 찾아보자는 말이다. 궁금하지 않은가. 자, 저자의 진짜 강의는 이제부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선 신을 죽이고, 신과 유대를 끊은 근대적 인간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과연 자유를 누렸을까? 고삐 풀린 이성과 함께 마냥 행복하게 살았을까?

물론 그도 인정한다. 근대적 이성의 긍정적 측면. 인류는 이전보다 자연을 더 잘 다스리게 됐고, 적어도 선진국에선 전보다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누렸다. 부분적으론 전보다 정의가 더 고양되고 평등한 사회가 됐다.

그렇다면, 근대인들은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렸을까. 김 선생은 도리도리, 아닌 것 같다고 언급한다. 그리고선 묻는다. 지금 삶이 안녕하고 행복한가? 잘 살고 있나? 우리 사회는 어떤가? 근대인들이 꿈꾸던 자유?평등?박애?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유토피아인가? 혹시 아니라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 같은가?

과연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없다. 대부분 사람의 대답 역시 부정적이거나 절망스러울 것이다. 대체, 이게 사람 사는 곳인가 말인가, 하는 탄식, 어렵지 않게 우리는 접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이 신으로 등극한 뒤, 자연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파멸했다. 사회는 무한경쟁의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세계 곳곳에는 공포가 떠돌아다닌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정확히 써 놨다. 니체가 옳았다. 신을 죽인 후, 인간에겐 한파가 몰아쳤다. 대낮에도 등불을 켜야만 했다. 신에게서 벗어나 고삐 풀린 인간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지구처럼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추락하며 무한한 허무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 니체의 요지다.”

과장이라고? 시대마다 당면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왜 우리만 그러냐고? 김 선생은 그 명확한 차이를 든다. “고대나 중세의 재난과 지금의 파국적 재난은 최소한 성격에서 하나가 다르다. 재난의 원인을 우리 자신이 제공했다는 거다. 우리가 우리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절망과 공포로 만들었다. 우리의 삶의 방식, 사고의 방법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이제 속수무책이다.”


김용규는 더 파고든다. 지난 300여 년 동안 인류가 추구해온 풍요. 허나, 이제는 안다. 물질적 욕망만 채우는 일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전보다 부자가 됐지만 동시에 노예가 됐다. “우리는 우리가 멋을 내기 위해 옷을 사 입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나는 20년 동안 이 양복을 입고 있는데, 이러면 산업체가 돌아갈 수 없지. (웃음) 그러니 유행을 바꾸고, 키 크고 잘 생긴 사람들을 내세워서 새로 사게 만든다. 이렇게 조정되고 있다.”

개성적이고 유행에 민감하다고? 과연 스스로의 사고와 행동으로 빚은 것일까. 그에 대한 의심. 전체적으로 부는 증대했지만, 우리는 그 혜택을 골고루 받았을까? 사회는 왜 더 불안해졌지? 테러와 전쟁의 위험은 왜 더 높아지고?

지금 우리가 처한 위험 역시 언급한다. 구제역과 조류독감 등의 예. “조선시대, 다른 나라에서 조류독감 등이 생겨도 한반도에는 지장이 없었다. 거기 다녀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이런 인플루엔자가 어딘가에 생기면 전 세계로 확산되는데 불과 며칠 걸리지 않는다. 금융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금융위기가 터지면 한국에선 수십만 실업자가 생긴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것을 ‘위험사회’라고 했다. 우리는 위험마저도 세계화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질병의 범세계적인 확산. 이미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한국의 땅과 하늘에는 수백만 마리 생명의 신?이 가득하다. 지하수와 농작물 오염 등 2차 감염이 심각하게 우려된다. 허나, 정부도, 우리도 속수무책이다.

“수평적 유전자전이의 위험도 커진다. 과거에는 돼지 병, 사람 병, 조류 병 등으로 분류돼 있었다. 다른 종끼리는 병이 옮기거나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생명공학자나 유전공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유전자가 종을 넘나들고 있다. 돼지 병, 닭 병이 사람에게도 올 수 있고, 통제 불가능한 질병이 우려된다. 그리고 정치적 열광주의 내지 전체주의의 위험도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것이 이미 상식이 됐다. 그래도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아닌가?”

속수무책. 어쩔 도리가 없어 꼼짝 못함. 속수무책은 자연스레 절망과 공포를 부른다. 공포의 일상화. 가정, 직장, 거리 그 모든 곳에서 공포는 똬리를 틀고 있다. 그는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을 인용한다.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반대로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습니다. 침실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지요. 우리들의 일터에도 공포가 기다리고, 그곳을 오가기 위한 지하철에도 공포가 도사립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 있습니다.”

귀에 익숙하도록 들은 어떤 이야기들이 있다. 인류의 종말을 알리는 운명의 시계가 점점 더 앞당겨지고, 패러다임 대전환만이 인류의 마지막 남은 살 길이라는 경고등이 끊임없이 울린다. 하지만, 냉소주의에 물든 많은 우리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설마. 에이. 아닐 거야. 가령, 이런 생각. “아,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렇다고 어쩌겠어. 당신도 별 수 없잖아. 어차피 속수무책인데,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느니 차라리 그날그날 즐기면서 살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저자는 그런 우리의 속물근성을 언급했다. 적든 많든, 냉소주의와 붙어 다니는 속물근성. 그는 냉소주의가 미계몽이나 미신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이 때문에 우리가 갈 길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말기 폐병환자의 상태, 즉 죽음 직전에 가장 기분이 좋아지고 활기가 생겨서 나은 것처럼 여겨지는 상태라고 그는 진단했다.

“오늘날 우리는 1,000년 전 중세인들이나 300년 전 근대인들보다 더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냉소적이다. 게다가 더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야기하지 않을 뿐 나름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것이 지난 300년 동안 이성을 신으로 삼고, 계몽을 은총으로 믿고 살아온 우리의 초상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라고 명명했다.”

유동하는 공포에 대한 바우만의 치료법은 이랬다. “다가오는 공포, 우리의 힘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공포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의 시작은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뿌리를 잘라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김용규는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유익한 일이란다. 똑바로 뿌리를 보고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 잘라버리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단계, 우리는 왜 여기까지 왔는가!

우리는 왜 여기까지 왔는가!


19세기 말엽,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 신과 그 이름으로 얘기되던 진선미, 아름다움 등 ‘최고의 가치들’ 대신 이성, 인본주의, 과학의 발전, 계몽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들이 등장했다. 허나 당시 사람들의 부푼 기대와 달리 세속적 가치들은 곧 위기를 맞았다. 그 일례.

1904년, 로마. ‘국제 자유사상가 대회’에서 에른스트 헤겔, 홉하우스, 노먼 에인젤 등 당시 서구를 대표하던 지성들은 선언했다.“인간의 미래가 이미 이성의 통제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앞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허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사라예보 사건이 나고, 세계 제1차 대전이 터졌다. 이어 제2차 대전도 일어났고,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로 상징되는 제노사이드가 공공연히 자행됐다. “이성이 가진 칠흑 같은 어둠을 증명했다. 절대적 가치들을 제외하고 인간 중심주의가 낳은 이성, 계몽, 과학, 사회적 진보와 같은 것들이 우리를 행복쿇게 만들었다면, 유토피아를 만들었다면 바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고의 가치가 몰락하니 세속적 가치도 몰락했다.”

김용규는 ‘無虎洞中狸作虎’(호랑이 없는 곳에서 살쾡이가 왕 노릇 한다)는 속담을 꺼냈다. 즉, 신과 신의 이름으로 얘기되던 절대적 가치를 퇴출하고 인간의 세속적 가치들이 올라앉았는데, 결국 세상은 더 무서워지고 나빠졌다. 진화된 정신, 계몽적 이성을 내세웠지만 잔혹한 제노사이드는 20세기에만 백만 명이 넘는 규모만 열 건에 가까울 정도로 처참했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후반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고발한 ‘신으로부터 고삐가 풀린 이성’의 실체다. 어떤 사람은 다 지나간 일이고, 인류는 이미 각성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과연 그런가. 21세기 벽두에 일어난 9?11테러,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 등이 그 반증이다. 언제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트릴 수도 있는 존재다. 근래 우리에게 일어난 ‘천안함 사건’ ‘연평도 해전’ 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들에도 그 불안한 씨앗은 은폐돼 있다.”

그는 전근대를 ‘신중심시대’, 근대를 ‘인간중심시대’, 탈근대를 ‘개인중심시대’로 부르고, 그 가치도 ‘최고의 가치’, ‘세속적 가치’, ‘개인적 가치’로 나눈다. 이어 지금 이야기되는 개인의 심리와 성적 취향, 소수자의 권익, 문화의 다양성,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 일상의 중요성 등 탈근대적 작은 이야기의 필요성을 긍정했다. 그래야만, “신이니, 자기희생이니, 이성이니, 혁명이니 하는 ‘큰 이야기’들이 동반하는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것의 허점도 지목했다. “문제는 그런 작은 이야기만 할 뿐 큰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과 영웅의 이름으로 추구되던 최고의 가치와 그것을 위한 인간의 자기희생과 헌신에 대해선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성과 주체, 그리고 사회적 진보와 혁명 같은 세속적 가치, 그리고 그것들을 위한 인간의 연대와 협동에 대해선 근대적이라며 입을 닫는다. 오직 개인적인 것,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둔다. 이것이 잘못됐다.”

외떨어져, 혼자만 잘 살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지구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아이가 가진 인플루엔자가 당장 내게도 올 수도 있다. 옛날처럼 다른 세계와 차단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인책임의 시대’로 내몰렸다. 자연적?사회적?경제적 재난이 삽시간에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위험사회’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신적인 사랑과 헌신도 없고, 이성적 인류애와 연대가 없는 세상에서 모든 선택과 책임이 개인에게만 전가됐다.

“그런데 위험과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혜, 다른 하나는 신념이다. 지혜는 본디 신에 속한 것으로 전근대적 개념이고, 신념은 이성에 속한 것으로 근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개별적이고 상대적인 탈근대적 이야기에는 두 가지 모두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부모 잃은 아이처럼 허둥대고,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게 됐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저자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생각을 전한다. 바우만은 전근대, 근대, 탈근대를 사는 사람들을 각각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에 비유했다. 이에 전근대의 사냥터지기 임무는 신이 만든 사냥터를 잘 보존하는 것이었다. 근대의 정원사는 정원을 설계하고 적합한 식물을 성장하게 하고, 잡초를 제거함으로써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했다.

지금은? 바우만에 의하면, 사냥꾼의 시대다. 사냥꾼은 하나의 개인으로서 사냥터나 동료는 어쨌든 사냥감만 많이 잡으면 그만이다. 지옥도가 그려진 까닭이다. “바우만은 세계가 지옥이 된 원인이 정원사가 사냥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것을 되찾기를 촉구했다. 그는 정원사로 돌아가 지옥을 강요하는 온갖 압력에 맞서 ?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봤다. 일면 맞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훌륭한 정원사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히로시마를 만들 수는 없다.”

즉, 게으르고, 멍청하고, 추악하고, 아프고, 슬프고, 늙었고, 대항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처단될 수도 있고, 더 무서운 건, 다른 사람들을 같은 이유로 처단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다. ‘적당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사람은 능히 그럴 수 있는 존재다. 김 선생은, ‘믿을 만한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정원사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어서 그가 제시한 방법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들도 함께 하자”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성도 제거할 수 있다.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다. 크고 작은 이야기를 함께 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해야 한다.”

그는 이 맥락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탐욕을 치료하기 위해 내린 처방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교리와 다른 처방을 내렸는데, 인간이 사랑해야 하는 것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신, 둘째는 자신, 셋째는 이웃, 넷째는 아래에 있는 물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교회가 첫째인 하나님 사랑과 셋째인 이웃 사랑만을 강조한 이유는, 둘째와 넷째는 가르치지 않아도 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나 어느 쪽이든 두 가지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네 가지를 다해야 온전한 사랑이 된다고 봤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물질에 대한 사랑은 죄악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데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다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함께 다루는 것이 물론 마냥 쉽진 않다. 그라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가령, 이런 것. 다원성을 인정하되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보편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원성을 살려낼 수는 없을까? 즉, 각각의 성부가 제 소리를 분명히 내면서도 아름답고 통일된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할까와 같은 고민이다.

그는 단호하게 맺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혜와 용기를 모아 새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삶과 세계는 위험에 빠져 공포에 떨고 있고, 삶과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파편화된 가치들을 종합해 되살려내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유력한 방법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세계를 세계답게 만드는 것은 오직 가치이기 때문이다. 먼 길이 되겠지만, 그 첫걸음은 신에 대해서, 그 이름으로 언급되어오던 정의, 진선미, 생명, 아름다움, 위대함 등의 전근대적 가치들에 대한 올바른 담론에서 먼저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새삼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자는 이유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프롤로그의 한 챕터일까. 최고의 전근대적 가치 중 하나인 정의가 이미 언급됐다. 우리는 어떤 담론을 만들고,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일부 사람들이 ‘무엇이 정의인지’ 따져 묻기 시작했고, 공포유발?불안증폭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연대도 꿈틀댄다. 덕분에 나의 커피도 계속 사유한다. 아직 미약하지만, 커피를 통해, 당신과 내가, 당신과 커피생산(노동)자가 이어진 세계를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떤 커피를 마시느냐는 것은 당신이 살고 싶은 세계, 당신이 원하는 사회와도 연결이 된다.





#김용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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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2011.03.05

강연의 내용이 리오타르의 주장과 비슷하네요. 리오타르는 거대서사의 종말을 포스트모던의 조건으로 꼽으며, 더 이상 인간을 지배하는 큰 이야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주장이 나온 게 벌써 40년 전이니... 그 뒤로도 여전하네요. 가치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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