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잔디를 경복궁에 심은 일제의 만행 -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2』 쏭내관
구중궁궐. 겹겹이 문으로 막은 깊은 궁궐이라는 뜻이있지요. 임금이 있는 대궐 안을 이르는 말이지만, 구중궁궐에 사는 왕은 때론 신하들에 의해 휘둘립니다.
201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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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 겹겹이 문으로 막은 깊은 궁궐이라는 뜻이 있지요. 임금이 있는 대궐 안을 이르는 말이지만, 구중궁궐에 사는 왕은 때론 신하들에 의해 휘둘립니다. 정작 중요한 백성과 어떤 교감이나 소통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헌데, 중요한 건 그곳엔 임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임금 외에도 많은 사람이 궁궐 안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생활을 꾸립니다. 한편으로 나라 운영을 위한 중요한 결정이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궁궐은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입니다. 단지 임금과 고위 관료들이 먹고 즐기는 그런 공간이 아니란 뜻이지요.… 옛 자료를 살펴보면, 임금님과 그 가족들이 사는 집을 ‘궁宮’ 또는 ‘궁전宮殿’이라 하고, 이런 건물들을 보호하는 담을 ‘궐闕’이라고 합니다. (p.19)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조선의 궁궐은 어떤 곳이었으며, 무엇을 보고 느끼면 좋을까? 특히 궁궐이 단지 건물이 아닌 역사, 그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는 곳이라는 의미는 무얼까? 지난달 20일,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2』와 함께 하는 경복궁 답사 행사를 따라갔습지요. 경복궁은 특히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니만큼 그 속살을 보고 싶었습니다. 구중궁궐에서 엉뚱한 꿈을 꾸는 쏭내관(송용진)의 구수한 입담에 푹 빠진 경복궁 속살 탐사, 함께 가시죠.
경복궁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도로라는 세종로 끝 광화문에 있습니다. 원래는 현재의 청와대 자리까지가 경복궁 영역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축소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의 청와대가 들어선 거지요. 비록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없어졌지만 경복궁은 여전히 조선을 상징하는 궁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p.24)
참,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이 있사옵니다.
☞‘인디아나 전’을 따라나선 서울의 속살탐사 - 전우용과 함께하는 인문학적 서울 탐사기
“광화문은 조선의 5대 궁궐의 하나로 아뢰오~ 조선엔 백성을 교화하고 감화시킨다는 뜻의 ‘화(化)’자 돌림을 쓴 5가지 궁궐이 있습니다요. 돈화문(창덕궁), 홍화문(창경궁), 흥화문(경희궁), 인화문(덕수궁)이 나머지 궁궐이지요. 오늘 행차한 광화문은 복원 1년이 됐는데, 처음 지어진 것은 1395년이옵니다. 허나, 임진왜란 때 무너지고 방치됐다가 1867년 다시 궁궐로 복귀했으나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가 들어서는 오욕을 겪고 말지요. 통탄할 일이옵니다. 마마.”
광화문은 태조대왕 시대에 ‘오문’ 또는 ‘정문’으로 불렀다 합니다. 그러다가 세종대왕 시대에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광화문은 조선의 궁궐 대문 중 유일하게 궐문 형식이랍니다. 즉 돌을 쌓아 세 개의 무지개 문을 만들고 그 위에 문루門樓를 올렸지요. (p.94)
“한국전쟁 때 다시 폭격이 떨어지는 수모를 당했던 광화문은 1968년, 복원이 이뤄지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지게 되지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다시 복원이 이뤄지는데, 돌 색깔이 다른 것도 그런 것을 반영한 결과이옵니다.”
“조선 총독부가 90여 년 이곳에 위치하면서 경복궁을 시야에서 가렸지요. 1990년 경복궁 1차 복원계획이 시작됐고, 1995년 옛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했으며 2006년부터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으로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옵니다. 어쨌든, 어서 행차 하시지요. 주상전하 납시오~”
주인이 떠난 빈 궁궐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다시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정문인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그곳에 조선총독부, 즉 조선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의 관청을 경복궁에 건축합니다. (p.58)
“지금 계신 이곳은 영제교이옵니다. 정문과 중문 사이에, 궁궐로 들어가는 길목에 명당수가 흐르고 다리가 있지요. 그것도 다 이유가 있사옵니다. 임금이나 신하들이 다리를 건너면서 마음을 씻고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룰 것인지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지요. 물이 없어 지금은 제 기능을 못하나, 여길 지나가면서 그런 것을 떠올려보시옵소서. 물을 바라보는 해치도 나쁜 기운을 떨쳐버리기 위함이지요.”
경복궁의 금천교는 바로 ‘영제교’라 부릅니다.… 경복궁의 영제교 양쪽에는 4마리의 서수(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가 놓여 있는데, 이들은 모두 금천에 흐르는 물을 통해 궁궐로 침입하는 나쁜 기운을 감시라도 하듯이 금천 쪽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p.105)
“경복궁의 얼굴 근정전을 향하고 있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이곳이 과거의 ‘청와대’였던 셈이지요. 단순히 궁궐을 둘러본다 생각하지 마옵시고, 궁궐에 살았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느끼면 궁궐이 달라 보입니다. 어여, 들어가시지요. 마마.”
“여기 온 김에, 역사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세종대왕의 이야깁니다. 원래 왕이 되실 분이 아니셨죠. 장남이 아니었고,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으니까요. 허나, 태종은 자신을 닮은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세종)을 선택하지요. 왕세자가 된다는 건, 곧 하늘이 내려주는 것입니다. 세종은 후계자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태종은 속성 재배(?)를 합니다. 세자 책봉 두 달 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왕위 수업을 받게 합니다. 태종은 군사권과 인사권을 쥐고, 상왕 노릇을 하는 거지요.
세종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인재를 뽑고 집현전에서 교육을 시켰고, 그 교육받은 인재들이 조선 문화를 만들고 조선 초기를 안정화시킨 게지요. 세종은 더불어 활자를 만들던 주자소를 통해 엄청난 책을 찍어냈고, 대마도를 공격하고 신기전 등 강력한 국방 체계를 꾸렸습니다. 또 농업 국가였던 조선임을 감안, 장영실을 통해 혼천의를 만들고, 박연과 함께 편경을 제작해 국악을 융성시키고자 했던 욕심쟁이였지요. 우후훗~
그것으로 끝이냐. 천만에요. 세금제도를 정비한 세종은, “세금은 백성이 내는 것이니, 직접 물어봐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여론조사도 펼쳤다고 하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원하지 않으니 행할 수 없다. 이렇게도 하고요, 뭣보다 한글. 세계에서 창제 원리가 정확하게 나와 있는 유일한 문자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1418년, 세종대왕의 즉위식. 세종의 위대함을 생각하면서 어도를 따라 걸으시지요. 세세, 세종대왕 만만세~”
“거기 쇠고리 보이시옵니까. 혹자 중엔 이것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박아놓은 것이라 오해하는 사람도 있사온데, 그것이 아니옵니다. 이것은 즉위식 등 국가적인 행사에 천막을 칠 때 줄을 거는 고리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오해하지 마시옵소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앞마당(조정)을 보면 쇠로 만든 고리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정전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보통 건물의 문을 모두 개방합니다. 그리고 건물 바로 앞에 큰 천막을 친답니다.… 바로 이 천막을 칠 때 천막을 묶은 끈을 고리에 묶어 고정했지요. (p.127)
“근정전이옵니다. 국가적인 결정이 내려지고, 행사가 벌어지는 곳이죠. 그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헤아려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사옵니다.”
경복궁의 상징적인 건물은 바로 근정전勤政殿입니다.… 지금부터 약 600년 전, 정도전은 ‘근정전’이란 이름을 태조대왕에게 지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부지런해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온 백성의 아버지이신 임금님도 부지런함으로(근勤) 이를 다스려야(정政) 할 것입니다.” (p.128)
“이곳은 회랑이옵니다. 신하들이 일하는 장소이자 창고이온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지 않았지요. 지금 보시듯 담이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담을 허물고 전시장으로 쓴 까닭이옵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의 궁궐을 어떻게 희롱하고 파괴했는지는 이곳에도 나와 있는 것입니다.”
“궁궐은 임금만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엄청난 사람들이 궁 안에 있었사옵니다. 신하들이 궁에서 일하는 공간이 궐내각사인데, 역시 일제 강점기에 여기 보이는 수정전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지요.”
조선시대 역시 각 영역별로 담당 기구가 있었답니다. 그중 궁궐 안에 있는 부서들을 궐내각사라 부르고, 밖에 있는 부서를 궐외각사라 불렀답니다. (p.28)
“수정전은 한글 창제 당시 집현전 터로 인재를 기른 산실이지요. 세종대왕의 에피소드가 기억나실 것이옵니다. 자, 눈을 감고 떠올려보십시오. 밤 깊은 시각, 산책을 하던 세종이 불이 켜진 집현전 앞을 거리는 모습을… 신숙주에게 곤룡포를 벗어주는 모습을… 허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신숙주는 그런 세종의 은혜를 입고도, 단종 아닌 수양대군을 선택하지요, 허허.”
그날 밤에도 여전히 집현전의 불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궐 안을 산책하시다 늦은 시각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시고 슬그머니 문을 열어 봅니다. 그곳에는 신숙주라는 학자가 피곤한 나머지 책을 보다가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 당신께서 입고 계시던 곤룡포(임금님의 어복)를 벗어 신하 신숙주에게 덮어주십니다. (p.161)
“자, 제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시옵소서. 잔디밭이죠? 이것은 조선시대엔 없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건물을 없애고 요정을 만들고, 소나 돼지 우리를 만들고 잔디를 깔았습니다. 당시 조선엔 조경이란 게 없었사옵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자연이라, 잔디는 무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거지요.”
원래 궁궐 조경에서 잔디는 절대 쓰지 않는 식물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오직 무덤을 덮는 데에만 사용한 잔디가 국가 최고의 건물이 모인 궁궐 내에 왜 깔려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궁궐 건물을 부수고, 변형시키고, 헐어 팔아버리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 데서 연유합니다. 이렇게 헐리고 나간 건물 터에 자연스레 잔디를 덮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궁궐 안의 잔디밭이 얼마나 이치에 안 맞는지 알 수 있습니다. (p.45)
“이 쏭내관, 가슴이 아프옵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잔디밭으로 알고 있음이 말이옵니다. 여기엔 왕의 최측근이자 정책자문 기관이었던 홍문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건물이 없고, 내의원이 있던 자리도 이 부근이지요. 조선 최고의 의사, 허준이 있던 바로 그곳이요.”
만약 이 기관들의 건물들이 모두 존재했다면 우리는 잔디를 절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헐리고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리에 잔디만 자라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기막힌 사연들을 알고 오는 방문객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냥 경회루가 예뻐서 사진을 찍으러 온 정도이지요.… 사람들이 근정전과 경회루 앞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것이 아니라 궐내각사를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pp.163~164)
“이곳은, 영추문이옵니다. 경복궁을 방문하는 사람이 하루 1만 명을 넘지만 여기엔 사람들이 잘 오질 않고 잘 모르옵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이유지요. 허나, 이곳에 새겨진 역사를 알면 그러지 않을 것이옵니다. 영추문 밖 500m내에 살았던 이방원(태종)과 정도전은 조선을 함께 만들자고 약속을 했으나 둘의 신분이 달랐고, 자연 입장이 달랐지요. 왕권과 신권의 다툼이었는데, 정도전은 태조의 둘째부인인 신덕왕후에게 아들을 왕으로 세워야한다고 부추기지요. 그것을 안 이방원은 정도전을 없앱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이었지요.
그리고선, 신덕왕후의 아들이자 세자였으며 방원의 이복동생이었던 방석이 쫓기듯 이 길을 따라 문을 나서던 차. 이방원의 신하들이 이방석을 죽입니다. 주군을 위해 화근을 없애자는 의도였겠지요. 허허, 세자만 아니었다면, 왕족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경복궁 네 문의 이름이 의미에 대해 살펴볼까요?… 해가 떠오르는 동쪽은 계절의 시작인 봄을 상징하고, 서쪽은 가을 그리고 남쪽과 북쪽은 각각 여름과 겨울을 상징했습니다.… 경복궁의 동쪽 문을 건춘문이라고 하고, 건춘문 아치 천장에는 동쪽을 상징하는 청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서문인 영추문에는 백호가, 광화문에는 주작이, 그리고 겨울을 상징하는 북문인 신무문에는 수호신인 거북이가 그려져 있죠. (pp.102~103)
“영추문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문으로 일제 강점기에 헐립니다. 그러다 다시 짓게 되는데, 이것이 안타깝게도 콘크리트로…”
신하들이 주로 많이 이용했다는 서문인 영추문은 불행히도 일제시대 때 헐리어 지금의 영추문은 1930년대 콘크리트로 급조한 가짜 영추문입니다.… 문루 쪽을 유심히 보세요. 그런 벗겨진 단청 사이로 시멘트가 보인답니다. (p.103)
“자,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곳은 임금이 쉬는 곳, 경회루이옵니다. 왕실만 갈 수 있었고, 국가적 행사의 뒤풀이로 사용된 곳이지요. 그러니 신하들이 보지 못하도록 담이 있었습니다. 역시 일본이 그랬는데요, 담을 허물고 경회루를 유원지로 만들었지요.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꾸리고. 담이 있던 흔적 보이시죠?”
지금의 경회루란 이름도 태종대왕께서 지으신 이름이라고 합니다. ‘경회慶會’는 경사스러운 일이 모이기를 바란다는 의미지만 여기서의 ‘경회’는 ‘똑바른 사람을 만나야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임금님과 신하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 하는군요. 지금 경회루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이 되어버렸어요. 그 이유는… 일제시대 때에는 모든 담이 헐려 나가버립니다. 경회루를 유원지로 만들고 싶었던 일본 사람들은 높은 담은 거추장스러웠을 겁니다. (pp.243~244)
“이곳이라고 왜 비운의 사건이 없겠습니까. 단종과 세조에 얽힌 이야기도 있지요.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이 즉위했으나, 수양대군이 결국 왕위를 빼앗은 사실이야 잘 아실 터이고. 단종이 경회루에서 도승지(비서실장)를 불러 옥쇄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선 수양대군을 경회루로 부르지요. 단종이 내시에게 옥쇄를 주고 이를 수양대군에게 건네주고자 하나, 3번은 거절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허나, 4번째 그 옥쇄를 받지요. 어린 왕은 수양대군을 2층 경회루로 불러 앉혔습니다만, 그 마음은 어땠을까요. 어린 왕의 피눈물이 서린 곳이지요.
그리고 태종이 측근을 불러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한 장소이며, 연산군에겐 이곳이 최고의 유원지였다지요. 온갖 금칠을 하고 흥청(예쁘고 춤 잘 추는 궁녀) 2천 명을 불러 놀았다고 하옵니다. 광란의 장소였던 거지요. 한 임금의 용단이 있었고, 어린 왕의 비극이 서려있으며, 미친 왕의 광란이 있는 곳, 이곳이 경회루이옵니다. 살찐 잉어만 보는 곳이 경회루가 아니옵니다. 마마.”
“이곳은 사정전(思政殿)이옵니다. 성삼문이 수양대군의 즉위를 막고자 모의를 꾸미다 한명회에게 발각돼 피를 토하며 죽은 곳이 바로 사정전 앞이었지요. 세조는 성상문을 인두로 직접 지졌다고 알려졌지요. 한명회는 이에 단종을 엮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보내고, 이도 성에 차지 않아 결국은 죽이고 말지요. 어린 왕의 비극은 경회루에서 끝나지 않은 셈입니다요.”
“이곳은 강녕전이옵니다. 쏭내관이 여기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드립지요.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대단한 중전이라면 정희왕후를 꼽을 수 있겠사옵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부인으로, 세조는 늘 정희왕후를 대동했다지요. 즉, 정치적 동반자였던 것이옵니다.”
경복궁의 연침, 즉 임금님의 침전이 강녕전입니다. 강녕전은 조선이 개국하고 경복궁이 완공될 때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은 이름입니다.… 강녕전은 임금님께서 사적인 공간으로 사용하는 건물이지요. (p.179)
“세조가 왕이 되자마자 큰 아들이 죽습니다. 어미로서 가슴이 찢어질 일이지요. 헌데 남편도 죽습니다. 이어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에 오르나 재위 1년2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지요. 헌데 예종이 죽자마자, 정희왕후는 강녕전에서 측근을 불러 주상자(主喪者)를 정합니다. 헌데, 이것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습니다.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이 있음에도, 정희왕후는 자신의 첫째아들(예종의 형)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의 동생인 자을산군(성종)을 주상자로 덜컥 정하지요. 국왕 승하 당일 즉위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온데, 지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가 아닐까 싶사옵니다. 일찌감치 짜인 각본이라는 냄새가 강하게 나지요.
어쨌든 9대 임금 성종은 예종이 죽은 날, 그렇게 즉위식을 가졌사옵니다.”
“경복궁의 중심을 꼽으라면 중궁전도 될 수 있겠사옵니다. 조선의 여인들을 다스리는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중전마마, 대비마마를 중심으로 조선이 돌아가던 때도 있었던 거지요. 여기 궁궐의 쟁쟁한 여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실 수 있겠사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사온데, 경복궁 밖으로 고층건물이 보입니다. 여기는 저 고층건물이 있는 곳과 다른 시간인 걸까요? 당시에 여기 있던 사람들은 궁궐 밖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퇴궐하는 길에 그들은 어떤 하루를 되돌아봤을까요?”
“저기 지붕위에 있는 조각상도 궁금하시죠?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요? 건물 지붕마다 자리를 잡고 있으니 궁금할 만 하죠? 잡상입니다. 잡상.”
궁궐 지붕을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바로 지붕 위의 조각상들입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이 없는 건물은 거의 없답니다. 그 ‘무엇’이 바로 ‘잡상’들입니다.… 잡상은 생긴 것이 짐승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도깨비 같기도 하지요. 보통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이 대표적인 잡상입니다. 이들은 장식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잡귀 등이 접근 못하도록, 그러니까 건물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pp.40~41)
“대비는 유일한 여자죠. 임금에게 인사를 받는. 대비전은 그런 대비마마가 사는 곳이옵니다. 물론 이곳에도 어떤 역사가 자리잡고 있지요. 중종은 신하들에 의해 왕이 돼서 그런지, 신하들에게 놀아나는 경향이 있었지요. 허나, 아들인 인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종은 중종의 둘째부인인 장경왕후의 아들이었는데, 중종의 셋째부인인 문정왕후를 지극히 모십니다. 문정왕후는 삼십대 후반에 아들을 낳으면서 인종과 멀어지지요. 인종은 그래도 최선을 다해 모시나, 야사에선 문정왕후가 떡을 먹여 인종을 독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문정왕후는 인종을 좋아하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겁니다.
실록에선 인종이 죽자, 광화문에 천민들까지 모여 통곡을 하는 등 전국이 울음바다가 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작 아홉 달 왕위에 있었는데도 말이죠.”
“이곳은 인종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청회루.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겠죠. 인종은 즉위 9개월 동안 왕권을 살리고 개혁을 추진했습지요. 허나 인종이 죽은 뒤 조선 왕권은 약화됐지요. 이런 왕을 독살했다고 야사에 나온 문정왕후는 조선 500년에서 가장 악한 왕후가 아닌가 싶사옵니다. 슬픈 청회루입니다.”
“저어~기, 불탑이 보이시나이까. 조선시대에 있던 것이 아니옵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인데, 불탑을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이지요. 원래는 역대 왕들의 초상을 모신 곳이었사온데, 1972년 엉뚱하게 저런 불탑을 세우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지요. 지하에 계신 왕들이 대노할 일이옵니다. 흑…”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의 중심인 궁궐에 불교 유물이 있으니까요. 이것 또한 일제가 궁궐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전국의 사찰에서 불상이나 석탑을 가져와 이곳 궁궐에 전시를 해놓았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제자리로 되돌려야 할 것입니다. (pp.45~46)
“오늘의 마지막 코스, 동궁전 이옵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불행했던 왕을 꼽으라면 문종이온데, 문종이 이곳에서 28년을 보냈다 하옵니다. 문종은 28년을 세자로, 아버지 세종과 비교 당하면서 살았지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요. 그런 그가 정작 즉위하고선 얼마 살지 못했으니, 허. 인종 때 이곳에 불이 나기도 했었지요. 인종의 효심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경복궁 내 조그만 경복궁으로 세자가 머무는 곳이자, 왕권 수업을 받는 곳이랄 수도 있습니다.”
“어찌 2시간30여 분에 걸친 경복궁 탐험을 즐기셨는지 모르겠나이다. 소인이 생각건대, 역사도 이렇게 배우면 잘 했을 텐데요. 역사를 선택과목에 넣니 마니, 논란이 있는 뎁쇼,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해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경복궁 무사들의 씩씩한 발걸음처럼 우리도 뚜벅뚜벅. 궁궐에도 임금 아닌 사람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뚜벅뚜벅.”
궁궐은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입니다. 단지 임금과 고위 관료들이 먹고 즐기는 그런 공간이 아니란 뜻이지요.… 옛 자료를 살펴보면, 임금님과 그 가족들이 사는 집을 ‘궁宮’ 또는 ‘궁전宮殿’이라 하고, 이런 건물들을 보호하는 담을 ‘궐闕’이라고 합니다. (p.19)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조선의 궁궐은 어떤 곳이었으며, 무엇을 보고 느끼면 좋을까? 특히 궁궐이 단지 건물이 아닌 역사, 그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는 곳이라는 의미는 무얼까? 지난달 20일,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2』와 함께 하는 경복궁 답사 행사를 따라갔습지요. 경복궁은 특히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니만큼 그 속살을 보고 싶었습니다. 구중궁궐에서 엉뚱한 꿈을 꾸는 쏭내관(송용진)의 구수한 입담에 푹 빠진 경복궁 속살 탐사, 함께 가시죠.
경복궁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도로라는 세종로 끝 광화문에 있습니다. 원래는 현재의 청와대 자리까지가 경복궁 영역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축소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의 청와대가 들어선 거지요. 비록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없어졌지만 경복궁은 여전히 조선을 상징하는 궁궐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p.24)
참,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이 있사옵니다.
☞‘인디아나 전’을 따라나선 서울의 속살탐사 - 전우용과 함께하는 인문학적 서울 탐사기
“광화문은 조선의 5대 궁궐의 하나로 아뢰오~ 조선엔 백성을 교화하고 감화시킨다는 뜻의 ‘화(化)’자 돌림을 쓴 5가지 궁궐이 있습니다요. 돈화문(창덕궁), 홍화문(창경궁), 흥화문(경희궁), 인화문(덕수궁)이 나머지 궁궐이지요. 오늘 행차한 광화문은 복원 1년이 됐는데, 처음 지어진 것은 1395년이옵니다. 허나, 임진왜란 때 무너지고 방치됐다가 1867년 다시 궁궐로 복귀했으나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가 들어서는 오욕을 겪고 말지요. 통탄할 일이옵니다. 마마.”
광화문은 태조대왕 시대에 ‘오문’ 또는 ‘정문’으로 불렀다 합니다. 그러다가 세종대왕 시대에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광화문은 조선의 궁궐 대문 중 유일하게 궐문 형식이랍니다. 즉 돌을 쌓아 세 개의 무지개 문을 만들고 그 위에 문루門樓를 올렸지요. (p.94)
“한국전쟁 때 다시 폭격이 떨어지는 수모를 당했던 광화문은 1968년, 복원이 이뤄지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지게 되지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다시 복원이 이뤄지는데, 돌 색깔이 다른 것도 그런 것을 반영한 결과이옵니다.”
“조선 총독부가 90여 년 이곳에 위치하면서 경복궁을 시야에서 가렸지요. 1990년 경복궁 1차 복원계획이 시작됐고, 1995년 옛 조선 총독부 건물을 철거했으며 2006년부터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으로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옵니다. 어쨌든, 어서 행차 하시지요. 주상전하 납시오~”
주인이 떠난 빈 궁궐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다시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정문인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그곳에 조선총독부, 즉 조선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의 관청을 경복궁에 건축합니다. (p.58)
“지금 계신 이곳은 영제교이옵니다. 정문과 중문 사이에, 궁궐로 들어가는 길목에 명당수가 흐르고 다리가 있지요. 그것도 다 이유가 있사옵니다. 임금이나 신하들이 다리를 건너면서 마음을 씻고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룰 것인지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지요. 물이 없어 지금은 제 기능을 못하나, 여길 지나가면서 그런 것을 떠올려보시옵소서. 물을 바라보는 해치도 나쁜 기운을 떨쳐버리기 위함이지요.”
경복궁의 금천교는 바로 ‘영제교’라 부릅니다.… 경복궁의 영제교 양쪽에는 4마리의 서수(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가 놓여 있는데, 이들은 모두 금천에 흐르는 물을 통해 궁궐로 침입하는 나쁜 기운을 감시라도 하듯이 금천 쪽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p.105)
“경복궁의 얼굴 근정전을 향하고 있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이곳이 과거의 ‘청와대’였던 셈이지요. 단순히 궁궐을 둘러본다 생각하지 마옵시고, 궁궐에 살았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느끼면 궁궐이 달라 보입니다. 어여, 들어가시지요. 마마.”
“여기 온 김에, 역사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세종대왕의 이야깁니다. 원래 왕이 되실 분이 아니셨죠. 장남이 아니었고,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으니까요. 허나, 태종은 자신을 닮은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세종)을 선택하지요. 왕세자가 된다는 건, 곧 하늘이 내려주는 것입니다. 세종은 후계자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태종은 속성 재배(?)를 합니다. 세자 책봉 두 달 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왕위 수업을 받게 합니다. 태종은 군사권과 인사권을 쥐고, 상왕 노릇을 하는 거지요.
세종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인재를 뽑고 집현전에서 교육을 시켰고, 그 교육받은 인재들이 조선 문화를 만들고 조선 초기를 안정화시킨 게지요. 세종은 더불어 활자를 만들던 주자소를 통해 엄청난 책을 찍어냈고, 대마도를 공격하고 신기전 등 강력한 국방 체계를 꾸렸습니다. 또 농업 국가였던 조선임을 감안, 장영실을 통해 혼천의를 만들고, 박연과 함께 편경을 제작해 국악을 융성시키고자 했던 욕심쟁이였지요. 우후훗~
그것으로 끝이냐. 천만에요. 세금제도를 정비한 세종은, “세금은 백성이 내는 것이니, 직접 물어봐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여론조사도 펼쳤다고 하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원하지 않으니 행할 수 없다. 이렇게도 하고요, 뭣보다 한글. 세계에서 창제 원리가 정확하게 나와 있는 유일한 문자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1418년, 세종대왕의 즉위식. 세종의 위대함을 생각하면서 어도를 따라 걸으시지요. 세세, 세종대왕 만만세~”
“거기 쇠고리 보이시옵니까. 혹자 중엔 이것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박아놓은 것이라 오해하는 사람도 있사온데, 그것이 아니옵니다. 이것은 즉위식 등 국가적인 행사에 천막을 칠 때 줄을 거는 고리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오해하지 마시옵소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앞마당(조정)을 보면 쇠로 만든 고리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정전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보통 건물의 문을 모두 개방합니다. 그리고 건물 바로 앞에 큰 천막을 친답니다.… 바로 이 천막을 칠 때 천막을 묶은 끈을 고리에 묶어 고정했지요. (p.127)
“근정전이옵니다. 국가적인 결정이 내려지고, 행사가 벌어지는 곳이죠. 그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헤아려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사옵니다.”
경복궁의 상징적인 건물은 바로 근정전勤政殿입니다.… 지금부터 약 600년 전, 정도전은 ‘근정전’이란 이름을 태조대왕에게 지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부지런해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온 백성의 아버지이신 임금님도 부지런함으로(근勤) 이를 다스려야(정政) 할 것입니다.” (p.128)
“이곳은 회랑이옵니다. 신하들이 일하는 장소이자 창고이온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지 않았지요. 지금 보시듯 담이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담을 허물고 전시장으로 쓴 까닭이옵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의 궁궐을 어떻게 희롱하고 파괴했는지는 이곳에도 나와 있는 것입니다.”
“궁궐은 임금만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엄청난 사람들이 궁 안에 있었사옵니다. 신하들이 궁에서 일하는 공간이 궐내각사인데, 역시 일제 강점기에 여기 보이는 수정전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지요.”
조선시대 역시 각 영역별로 담당 기구가 있었답니다. 그중 궁궐 안에 있는 부서들을 궐내각사라 부르고, 밖에 있는 부서를 궐외각사라 불렀답니다. (p.28)
“수정전은 한글 창제 당시 집현전 터로 인재를 기른 산실이지요. 세종대왕의 에피소드가 기억나실 것이옵니다. 자, 눈을 감고 떠올려보십시오. 밤 깊은 시각, 산책을 하던 세종이 불이 켜진 집현전 앞을 거리는 모습을… 신숙주에게 곤룡포를 벗어주는 모습을… 허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신숙주는 그런 세종의 은혜를 입고도, 단종 아닌 수양대군을 선택하지요, 허허.”
그날 밤에도 여전히 집현전의 불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궐 안을 산책하시다 늦은 시각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시고 슬그머니 문을 열어 봅니다. 그곳에는 신숙주라는 학자가 피곤한 나머지 책을 보다가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 당신께서 입고 계시던 곤룡포(임금님의 어복)를 벗어 신하 신숙주에게 덮어주십니다. (p.161)
“자, 제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시옵소서. 잔디밭이죠? 이것은 조선시대엔 없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건물을 없애고 요정을 만들고, 소나 돼지 우리를 만들고 잔디를 깔았습니다. 당시 조선엔 조경이란 게 없었사옵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자연이라, 잔디는 무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거지요.”
원래 궁궐 조경에서 잔디는 절대 쓰지 않는 식물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오직 무덤을 덮는 데에만 사용한 잔디가 국가 최고의 건물이 모인 궁궐 내에 왜 깔려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궁궐 건물을 부수고, 변형시키고, 헐어 팔아버리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 데서 연유합니다. 이렇게 헐리고 나간 건물 터에 자연스레 잔디를 덮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궁궐 안의 잔디밭이 얼마나 이치에 안 맞는지 알 수 있습니다. (p.45)
“이 쏭내관, 가슴이 아프옵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잔디밭으로 알고 있음이 말이옵니다. 여기엔 왕의 최측근이자 정책자문 기관이었던 홍문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건물이 없고, 내의원이 있던 자리도 이 부근이지요. 조선 최고의 의사, 허준이 있던 바로 그곳이요.”
만약 이 기관들의 건물들이 모두 존재했다면 우리는 잔디를 절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헐리고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리에 잔디만 자라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기막힌 사연들을 알고 오는 방문객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냥 경회루가 예뻐서 사진을 찍으러 온 정도이지요.… 사람들이 근정전과 경회루 앞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것이 아니라 궐내각사를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pp.163~164)
“이곳은, 영추문이옵니다. 경복궁을 방문하는 사람이 하루 1만 명을 넘지만 여기엔 사람들이 잘 오질 않고 잘 모르옵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이유지요. 허나, 이곳에 새겨진 역사를 알면 그러지 않을 것이옵니다. 영추문 밖 500m내에 살았던 이방원(태종)과 정도전은 조선을 함께 만들자고 약속을 했으나 둘의 신분이 달랐고, 자연 입장이 달랐지요. 왕권과 신권의 다툼이었는데, 정도전은 태조의 둘째부인인 신덕왕후에게 아들을 왕으로 세워야한다고 부추기지요. 그것을 안 이방원은 정도전을 없앱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이었지요.
그리고선, 신덕왕후의 아들이자 세자였으며 방원의 이복동생이었던 방석이 쫓기듯 이 길을 따라 문을 나서던 차. 이방원의 신하들이 이방석을 죽입니다. 주군을 위해 화근을 없애자는 의도였겠지요. 허허, 세자만 아니었다면, 왕족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경복궁 네 문의 이름이 의미에 대해 살펴볼까요?… 해가 떠오르는 동쪽은 계절의 시작인 봄을 상징하고, 서쪽은 가을 그리고 남쪽과 북쪽은 각각 여름과 겨울을 상징했습니다.… 경복궁의 동쪽 문을 건춘문이라고 하고, 건춘문 아치 천장에는 동쪽을 상징하는 청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서문인 영추문에는 백호가, 광화문에는 주작이, 그리고 겨울을 상징하는 북문인 신무문에는 수호신인 거북이가 그려져 있죠. (pp.102~103)
“영추문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문으로 일제 강점기에 헐립니다. 그러다 다시 짓게 되는데, 이것이 안타깝게도 콘크리트로…”
신하들이 주로 많이 이용했다는 서문인 영추문은 불행히도 일제시대 때 헐리어 지금의 영추문은 1930년대 콘크리트로 급조한 가짜 영추문입니다.… 문루 쪽을 유심히 보세요. 그런 벗겨진 단청 사이로 시멘트가 보인답니다. (p.103)
“자,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곳은 임금이 쉬는 곳, 경회루이옵니다. 왕실만 갈 수 있었고, 국가적 행사의 뒤풀이로 사용된 곳이지요. 그러니 신하들이 보지 못하도록 담이 있었습니다. 역시 일본이 그랬는데요, 담을 허물고 경회루를 유원지로 만들었지요.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꾸리고. 담이 있던 흔적 보이시죠?”
지금의 경회루란 이름도 태종대왕께서 지으신 이름이라고 합니다. ‘경회慶會’는 경사스러운 일이 모이기를 바란다는 의미지만 여기서의 ‘경회’는 ‘똑바른 사람을 만나야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임금님과 신하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 하는군요. 지금 경회루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이 되어버렸어요. 그 이유는… 일제시대 때에는 모든 담이 헐려 나가버립니다. 경회루를 유원지로 만들고 싶었던 일본 사람들은 높은 담은 거추장스러웠을 겁니다. (pp.243~244)
“이곳이라고 왜 비운의 사건이 없겠습니까. 단종과 세조에 얽힌 이야기도 있지요.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이 즉위했으나, 수양대군이 결국 왕위를 빼앗은 사실이야 잘 아실 터이고. 단종이 경회루에서 도승지(비서실장)를 불러 옥쇄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선 수양대군을 경회루로 부르지요. 단종이 내시에게 옥쇄를 주고 이를 수양대군에게 건네주고자 하나, 3번은 거절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허나, 4번째 그 옥쇄를 받지요. 어린 왕은 수양대군을 2층 경회루로 불러 앉혔습니다만, 그 마음은 어땠을까요. 어린 왕의 피눈물이 서린 곳이지요.
그리고 태종이 측근을 불러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한 장소이며, 연산군에겐 이곳이 최고의 유원지였다지요. 온갖 금칠을 하고 흥청(예쁘고 춤 잘 추는 궁녀) 2천 명을 불러 놀았다고 하옵니다. 광란의 장소였던 거지요. 한 임금의 용단이 있었고, 어린 왕의 비극이 서려있으며, 미친 왕의 광란이 있는 곳, 이곳이 경회루이옵니다. 살찐 잉어만 보는 곳이 경회루가 아니옵니다. 마마.”
“이곳은 사정전(思政殿)이옵니다. 성삼문이 수양대군의 즉위를 막고자 모의를 꾸미다 한명회에게 발각돼 피를 토하며 죽은 곳이 바로 사정전 앞이었지요. 세조는 성상문을 인두로 직접 지졌다고 알려졌지요. 한명회는 이에 단종을 엮어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보내고, 이도 성에 차지 않아 결국은 죽이고 말지요. 어린 왕의 비극은 경회루에서 끝나지 않은 셈입니다요.”
“이곳은 강녕전이옵니다. 쏭내관이 여기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드립지요.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대단한 중전이라면 정희왕후를 꼽을 수 있겠사옵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부인으로, 세조는 늘 정희왕후를 대동했다지요. 즉, 정치적 동반자였던 것이옵니다.”
경복궁의 연침, 즉 임금님의 침전이 강녕전입니다. 강녕전은 조선이 개국하고 경복궁이 완공될 때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은 이름입니다.… 강녕전은 임금님께서 사적인 공간으로 사용하는 건물이지요. (p.179)
“세조가 왕이 되자마자 큰 아들이 죽습니다. 어미로서 가슴이 찢어질 일이지요. 헌데 남편도 죽습니다. 이어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에 오르나 재위 1년2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지요. 헌데 예종이 죽자마자, 정희왕후는 강녕전에서 측근을 불러 주상자(主喪者)를 정합니다. 헌데, 이것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습니다.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이 있음에도, 정희왕후는 자신의 첫째아들(예종의 형)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의 동생인 자을산군(성종)을 주상자로 덜컥 정하지요. 국왕 승하 당일 즉위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온데, 지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가 아닐까 싶사옵니다. 일찌감치 짜인 각본이라는 냄새가 강하게 나지요.
어쨌든 9대 임금 성종은 예종이 죽은 날, 그렇게 즉위식을 가졌사옵니다.”
“경복궁의 중심을 꼽으라면 중궁전도 될 수 있겠사옵니다. 조선의 여인들을 다스리는 곳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중전마마, 대비마마를 중심으로 조선이 돌아가던 때도 있었던 거지요. 여기 궁궐의 쟁쟁한 여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실 수 있겠사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사온데, 경복궁 밖으로 고층건물이 보입니다. 여기는 저 고층건물이 있는 곳과 다른 시간인 걸까요? 당시에 여기 있던 사람들은 궁궐 밖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퇴궐하는 길에 그들은 어떤 하루를 되돌아봤을까요?”
“저기 지붕위에 있는 조각상도 궁금하시죠?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요? 건물 지붕마다 자리를 잡고 있으니 궁금할 만 하죠? 잡상입니다. 잡상.”
궁궐 지붕을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바로 지붕 위의 조각상들입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이 없는 건물은 거의 없답니다. 그 ‘무엇’이 바로 ‘잡상’들입니다.… 잡상은 생긴 것이 짐승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도깨비 같기도 하지요. 보통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이 대표적인 잡상입니다. 이들은 장식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잡귀 등이 접근 못하도록, 그러니까 건물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pp.40~41)
“대비는 유일한 여자죠. 임금에게 인사를 받는. 대비전은 그런 대비마마가 사는 곳이옵니다. 물론 이곳에도 어떤 역사가 자리잡고 있지요. 중종은 신하들에 의해 왕이 돼서 그런지, 신하들에게 놀아나는 경향이 있었지요. 허나, 아들인 인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종은 중종의 둘째부인인 장경왕후의 아들이었는데, 중종의 셋째부인인 문정왕후를 지극히 모십니다. 문정왕후는 삼십대 후반에 아들을 낳으면서 인종과 멀어지지요. 인종은 그래도 최선을 다해 모시나, 야사에선 문정왕후가 떡을 먹여 인종을 독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문정왕후는 인종을 좋아하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겁니다.
실록에선 인종이 죽자, 광화문에 천민들까지 모여 통곡을 하는 등 전국이 울음바다가 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작 아홉 달 왕위에 있었는데도 말이죠.”
“이곳은 인종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청회루.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겠죠. 인종은 즉위 9개월 동안 왕권을 살리고 개혁을 추진했습지요. 허나 인종이 죽은 뒤 조선 왕권은 약화됐지요. 이런 왕을 독살했다고 야사에 나온 문정왕후는 조선 500년에서 가장 악한 왕후가 아닌가 싶사옵니다. 슬픈 청회루입니다.”
“저어~기, 불탑이 보이시나이까. 조선시대에 있던 것이 아니옵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인데, 불탑을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이지요. 원래는 역대 왕들의 초상을 모신 곳이었사온데, 1972년 엉뚱하게 저런 불탑을 세우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지요. 지하에 계신 왕들이 대노할 일이옵니다. 흑…”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의 중심인 궁궐에 불교 유물이 있으니까요. 이것 또한 일제가 궁궐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전국의 사찰에서 불상이나 석탑을 가져와 이곳 궁궐에 전시를 해놓았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제자리로 되돌려야 할 것입니다. (pp.45~46)
“오늘의 마지막 코스, 동궁전 이옵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불행했던 왕을 꼽으라면 문종이온데, 문종이 이곳에서 28년을 보냈다 하옵니다. 문종은 28년을 세자로, 아버지 세종과 비교 당하면서 살았지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요. 그런 그가 정작 즉위하고선 얼마 살지 못했으니, 허. 인종 때 이곳에 불이 나기도 했었지요. 인종의 효심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경복궁 내 조그만 경복궁으로 세자가 머무는 곳이자, 왕권 수업을 받는 곳이랄 수도 있습니다.”
“어찌 2시간30여 분에 걸친 경복궁 탐험을 즐기셨는지 모르겠나이다. 소인이 생각건대, 역사도 이렇게 배우면 잘 했을 텐데요. 역사를 선택과목에 넣니 마니, 논란이 있는 뎁쇼,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해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경복궁 무사들의 씩씩한 발걸음처럼 우리도 뚜벅뚜벅. 궁궐에도 임금 아닌 사람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뚜벅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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