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기공룡 둘리를 이렇게 망가뜨렸나?
최규석이란 만화가, 있다. 만화를 조금 읽는다는 사람들은 최규석 알 게다. 경력에 비해 생각보다 굵직굵직한 작품을 많이 내놔 한국 만화계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로 손꼽힌 지 오래됐으니 말이다.
2011.08.05
작게
크게
공유
|
연정
최규석이란 만화가, 있다. 만화를 조금 읽는다는 사람들은 최규석 알 게다. 경력에 비해 생각보다 굵직굵직한 작품을 많이 내놔 한국 만화계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로 손꼽힌 지 오래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그것이 만화라는 매체가 가진 한계(만화는 생각보다 덜 소비되는 매체다) 때문이기도 하고, 최규석 만화가 그리 상업적이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얘기 주절거리는 이유는 최규석이란 만화가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고백을 하자면 난 2004년 그의 첫 단편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길찾기, 2004)를 읽고 그에게 반했다. 이후 내놓는 작품을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르곤 한다. 현실에 천착해, 외면하고픈 현실을 이처럼 치열하게 그려낸 작품이 있을까 싶어서다. 그래서 난 최규석에게 연정(戀情)을 품고 있다.
연정을 품은 사람은 나뿐이 아닌 것 같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최규석과의 관계를 “개인적으로 나와는 ‘존경’ 관계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내가 만화가 최규석을 존경하고, 그의 예술 세계를 동경한다”고 고백한 것을 보니 말이다.1) 왠지 모를 동지를 만난 것 같아 기쁘기까지 하다. 최규석을 좋아하다 보니 그의 만화가 나올 때마다 서평을 써왔다. 그래서 최규석에 대한 이 글은 인물론과 서평이 혼재된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이 점 유념하고, 이제 글을 시작해보자.
단출한 이력 속에 담긴 삼십 갑자 내공
최규석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977년 경남 진주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출생. 2003년 상명대학교 만화과 졸업.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공모전 성인지 부문 금상 수상. 2002년 동아LG 국제만화공모전 극화 부문 수상. 2003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초청 작가,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 대통령상 수상, 독자만화대상 단편 부문과 ‘인디*언더’ 부문 수상. 2004년 첫 단편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길찾기) 출간. 같은 해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축제 단편상 수상,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 수상,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2005년 < 경향신문 >에「습지생태보고서」연재 후 『습지생태보고서』 (거북이북스, 2005) 출간. 2006년 < 한겨레21 >에 「대한민국 원주민」 연재 후 『대한민국 원주민』(창비, 2008) 출간. 2009년 『100℃ -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창비) 출간. 2010년 『울기엔 좀 애매한』(사계절) 출간. 제51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그의 이력은 이처럼 생각보다 단출하다. 그런데 최규석 작품이 주는 무게감은 그 단출한 이력을 넘어선다. 그가 쌓아온 내공은 그가 살아온 세월에 비해 훨씬 중후하고 깊다. 무협지의 주인공은 기연(奇緣)을 만나 삼십 갑자 이상의 내공을 쌓는데 최규석은 그런 기연도 없이 삼십 갑자의 내공을 쌓은 듯한 느낌이다.
그 내공은 삶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한민국 원주민』에 실린, 그가 나중에 태어날지도 모를 자기 자식을 상상하며 읊조린 이런 말에서 삶에 대한 그의 태도를 얼핏 엿볼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란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 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고 아버지는 화려하거나 부유하지 않아도 가끔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는 나름 예술가요,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들 중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인사들이 섞여 있어 그 아이는 그들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기도 할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라 놀림 받지도 않을 것이고 친구들에게 제 부모나 집을 들킬까 봐 숨죽일 일도 없을 것이고 부모는 학교 선생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것이며 어쩌면 그 교사는 제 아비의 만화를 인상 깊게 본 기억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간혹 아버지를 선생님 혹은 작가님, 드물게는 화백님이라 부르는 번듯하게 입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들 것이고 이런저런 행사에 엄마아빠 손을 잡고 참가하기도 하리라. 집에는 책도 있고 차도 있고 저만을 위한 방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을 것이고 고함을 치지도 술에 절어 살지도 않을 것이고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일도 없어서 아이는 아버지의 귀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2)
이 말 속에 담긴 함의를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이토록 엄격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최규석의 이런 태도는 작품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현실에 천착한 만화를 그려내고, 현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출세작 「공룡 둘리」
2003년 상명대학교 만화과를 졸업한 그의 이름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것은 같은 해 5월 격주간 만화잡지 『영점프』에 발표한 「공룡 둘리」 때문이었다.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를 모티브로 전혀 다른 ‘둘리’와 그 친구들을 그려낸 「공룡 둘리」는 ‘둘리’를 아는 이들을 뜨악하게 만들었다. 둘리의 원 창작자 김수정의 말을 들어보자.
“어느 날, 모 잡지에 「공룡 둘리」가 게재되었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만화를 본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공룡 둘리」를 봤냐고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공룡 둘리」는 내가 그린 만화가 아니다. 도대체 둘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까?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공룡 둘리」를 보았다. 아니, 둘리가, 둘리가……? 만화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현기증이 났다. ‘도대체 누가 둘리를 이렇게 만들어놨어? 시간이 흐르고, 다시 한 번 「공룡 둘리」를 생각해보았다.
상상하지 못하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다. 그리고 그 상상력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가 없다면 그 또한 작가가 아니다. 이제 막 만화를 시작하는 최규석 씨는 그 상상력과 용기만으로도 충분히 만화가라는 호칭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다음에 또 누군가가 둘리를 그리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최규석 씨의 「공룡 둘리」는 단 한 번의 예외다.”3)
김수정의 추천사에는 씁쓸함 섞인 흥분이 배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랑만화가가 그린, 한국을 대표하는 명랑 캐릭터를 도대체 어떻게 해놓았길래 이처럼 흥분했던 것일까? 그 해답은 「공룡 둘리」에 있다. 다음은 「공룡 둘리」에 대한 서평이다.
세상은 언제나 명랑할 수만은 없다
『아기공룡 둘리』를 기억하는 분들 많을 게다. 19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라면 둘리, 도우너, 또치, 마이콜, 희동이 그리고 이들의 영원한 숙적(?) 고길동을 모르는 이 없을 게다. ‘호이’, ‘깐따삐야’라는 유행어부터 시작해 ‘라면은 구공탄에~’라는 정체모를 노래까지 유행시킨 『아기공룡 둘리』는 명랑만화였다. 그들의 일상에는 어두움이 별로 없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문제를 갖고 고민하지만 그 문제는 삶을 송두리째 뒤엎을 만한 것은 아니다. 길동이의 구박도 귀엽고 유치할 뿐이다. 이 만화는 1980년대 소시민의 삶을 보여주며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 나는 그저 ‘둘리 패거리들’이 벌이는 짓거리가 좋았을 뿐이다.
2003년에 발표된 최규석의 「공룡 둘리」는 둘리가 출연하지만, 다르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둘리는 더 이상 명랑 캐릭터가 아니다.
공장 노동자 둘리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 손가락이 잘려 더 이상 초능력을 쓰지 못하고, 도우너는 사기꾼으로 변신했다. 또치는 동물원에 갇혀 다른 타조에게 몸을 팔고, 희동이는 ‘스트리트 파이터’로 변신해 소년원에 들락거린다. 길동이는 도우너에게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아 화병으로 죽었고, 길동이의 아들 철수는 교도소행이 분명한 희동이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계인’ 도우너를 우주과학 연구소에 해부용으로 팔아넘긴다. 그것을 애써 말리던 둘리는 길동이 무덤 앞에서 참담한 현실을 원망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이게 「공룡 둘리」의 간단한 줄거리다. 어떤가? 믿겨지는가? 처음 봤을 때 난 이 만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 걸핏하면 ‘깐따삐야’와 ‘호이’를 외쳐대던, 또 왠지 미운 사람이 있으면 ‘길동이 같다’고 수군대던 내게 최규석의 만화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만화를 다 보고 나서야 이 만화가 실린 단편집 제목이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오마주는 슬픈 게 아니다. 절망적인 오마주였다. 이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 둘리가 찾아간 옛 친구들은 모두 절망적인 눈빛으로 둘리를 맞고, 둘리 역시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이들에게 다가간다.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둘리의 뒷모습에서 희망은 볼 수 없다.
둘리의 잘린 손가락을 보면서 슬펐다. 찡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어린 시절의 우상을 이리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을 어쩌랴. 김수정의 둘리가 1980년대의 소소한 일상을 ‘명랑’이라는 틀에다 쏟아 부었다면 최규석은 그 틀을 거부하고 좀더 직설적으로 2000년대를 그려간다. 그것은 다소 과장이 섞였을망정 현실이다.
그래서 감탄하기도 했다. 절망적이면서도, 측은하게 둘리를 쳐다보는 또치의 눈빛이 진정으로 다가와서 감탄했다. 그네들의 한숨이 귓가에 맴돌아서 슬펐고, 이런 만화가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하지만 갑자기 다가온 ‘절망’은 버거운 것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 만화에 감동했으면서도 그 후로 몇 번 펴들지 못했다. 절망이 스며들까 봐!
세상은 언제나 명랑할 순 없다. ‘Always 명랑’은 만화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슬픈 날이 있으면 즐거운 날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게 세상을 바삐 돌아가고, 나 역시 그 세상에서 쳇바퀴 돌 듯 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 한 번의 겨울이 다가오니 또 시니컬해졌다. 문득 차가운 소주와 따스한 청주가 동시에 생각난다. 어찌해야 하나.
『습지생태보고서』로 습지를 탈출하다
「공룡 둘리」는 최규석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놨다. 2003년 독자만화대상 단편 부문과 ‘인디렙蹄椒?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이 단편만화가 뜬 덕분에 단편집도 낼 수 있었다.
「공룡 둘리」가 실린 단편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는 이 만화 외에도 「사랑은 단백질」, 「콜라맨」, 「리바이어던」, ?선택」, 「솔잎」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중 「사랑은 단백질」은 치킨집 사장이 닭이고, 닭이 자기 새끼를 튀겨 판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상당히 충격적인 작품이다. 희화화된 그림체와 대사들로 유머러스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끔찍한 현실을 담고 있다. 최규석이 이 만화를 그리게 된 계기는 무얼까?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아이들이 종일 바느질에 매달려 축구공을 만들지만 소비자는 축구공에만 관심이 있을 뿐, 물건을 만들면서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알지 못한다. …… 「사랑은 단백질」은 완성된 제품 속에 숨어 있는 눈물과 한숨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그렸다.”4)
최규석답다. 첫 단편집을 보면 그의 만화가 주는 무게감이 상당하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만화 모두 한번쯤 곱씹어봐야 하는 현실을 담고 있고 그 여운도 생각보다 길다. 서평에서 얘기했듯 절망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2003년 「공룡 둘리」의 발표와, 2004년 첫 단편집을 낸 것을 계기로 그는 만화계에서 유명해졌고 촉망받는 만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살림은 궁핍했다. 2003년 12월 서울에서 살 방이 없어 부모님이 사시는 창원으로 내려가 입시 미술학원 강사를 하면서 전세방 값을 벌었다. 그리고 2005년 < 경향신문 >에 「습지생태보고서」를 연재하며 전세금을 마련해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습지생태보고서』 로 ‘습지’를 탈출하게 된 것이다. 그 자세한 얘기 들어보자. 다소 길지만 최규석이라는 작가의 일면을 엿볼 수 있기에 인용해본다.
나는 2003년 12월 말에 서울에서 창원으로 이사했다. 이유는 방이 없어서였다. 애니메이션센터라고 서울시에서 지원해주는 아주 싼 작업실이 있었지만 밥 해먹고 빨래하고 잠을 자는 모든 생활을 하기에는 몹시 불편했다. 게다가 계약 기간이 2년이라 그 후엔 어찌될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그제야 ‘아! 사람에겐 집이 필요한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만화가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일단 전세방(월세방은 수입이 일정치 않은 만화가에게는 위험하지 않을까)을 얻기로 결심, 부모님께 얹혀 살며(생활비는 꼬박꼬박 드린다) 입시 미술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학원 월급과 「습지」 고료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통장 잔액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갔고 나의 지갑은 언제나 두둑했다. 실로 30년 평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일이었다. 어딜 가든 마음이 편했고 친구들을 만나도 부담이 없었으며 친척들 앞에서 당당했다. 길에서 파는 팬티만 입고 백화점만 가면 가슴이 갑갑해지던 인간이 고급 브랜드 팬티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 입었고, 백화점을 서성대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처음 목표했던 액수가 모두 모아졌고 나는 연재를 계속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수많은 갈등요소가 있었지만 연재를 그만 뒀다. 어떤 사람은 ‘왜 자꾸 자신을 가난 속에 두려고 애쓰느냐. 가난해야 예술이 나온다는 말을 신봉하는 것이냐? 너무 유치하고 감상적이라고 생각지 않느냐’라고 묻기도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가난을 ‘견뎌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가난이라면 모르겠지만 흔히 얘기하는 궁상 수준의 가난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식일 뿐이다.
이를 악물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퀭한 눈으로 신들린 듯이 펜대를 굴리는 작가의 모습을 꿈꾼다면 그것은 분명 유치한 생각이지만 나는 30년 동안 궁상 수준의 가난에 대해 그다지 괴로워해본 적이 없고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 더 두둑한 지갑이 주는 편안함을 가져봤지만 그 편안함으로 인해 이전의 생활을 다시 상종 못할 것으로 안녕해버릴 생각도 없다. 나는 다만 지갑의 상태와 관계없이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가난해질까 무서워서 해야 할 작업을 못한다면 이 직업을 택한 의미가 사라져버리니까(이거 너무 비장한 느낌으로 흐르는걸?).
어쨌든 「습지」는 나에게 전세금을 마련해주었고, 나의 생각과 행동이 변했다고 느껴지면 그것이 통장의 잔액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5)
최규석에게 전세금을 마련해준 리얼궁상만화 『습지생태보고서』 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내 습지서식기도 떠올랐다. 다음은 『습??좚보고서』 에 대한 서평이다.
내 습지서식기를 떠올리다
이사 첫날 저녁, 이사를 축하하며 친구와 간단히 소주 한잔을 하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던 듯했다. 그런데 얼마 뒤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만 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모기 때문이었다. 귀 주위에서 앵앵거리는 모기를 손으로 쫓아내기를 수십 차례 반복한 끝에 난 몸을 일으켜 곧장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모기약을 사서 뿌려댔다. 약을 뿌려 미끈거리는 방바닥에 몸을 다시 뉘이고 나니 쓴웃음이 나왔다. 이게 반지하방의 위력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반 년 뒤 난 그 반지하방에서 나왔다. 다시는 반지하방에서 생활하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비가 오면 온 땅의 습기가 방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고, 장기하가 ‘싸구려 커피’에서 읊조린 대로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지곤 했다.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는 옵션이었다. 그곳은 만화가 최규석이 『습지생태보고서』 에서 표현한 대로 ‘습지’였다.
단순히 반지하방이 습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빈곤한 주머니 사정은 사람을 궁상스럽게 만들었고 ‘쪼잔’하게 만들었다. 뭘 해야 할지도 분명치 않았고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했다. 도서관에 나가 책을 들여다보면서도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분명치 않았다. 술은 술대로 마셨고 담배는 담배대로 펴댔다. 그러면서도 후배들에게 어줍지 않게 삶에 대해서 얘기했고 사회에 대해 얘기했다. 가진 자에 대해 이 사회를 썩게 만드는 누군가에 대해 비판의 날을 벼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진 자가 되었으면 하는 욕망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말들이 내 입을 빌어 나오곤 했다. 변변찮은 생활이었고 변변찮은 나였다.
반지하방에서 시작된 자취생활은 결혼 전까지 8년간 이어졌다. 그 사이 신문배달로 컴퓨터를 하나 장만했고, 그 컴퓨터로 몇 년간 글밥을 먹고 살기도 했다. 또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하기도 했으며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했다. 연애도 몇 번 했다. 하지만 통장 잔고를 수시로 살펴봐야 하는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습지생태보고서』 에 실린 에피소드 「남들 다하는 것」에 나오는 이런 대사처럼은 아니지만 연애를 하는 것이 과연 내 형편에 맞는 건가란 회의가 아주 잠깐씩 들곤 했다.
“오늘 얼마 썼어?! 아버지 한 달 용돈 4만 원인 거 알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데?”
“이건……그냥…… 그냥 연애야. 죄 짓는 게 아니고 남들 다 하는…… 그냥 연애.”6)
습지에서의 삶은 언제나 곤궁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건들면 욕지기가 바로 튀어나올 듯한 생활이었다. 습지의 삶이 언제 종결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내가 습지에서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20대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 서른 즈음에까지 난 습지에서 서식했다. 방안 가득한 담배 연기만큼이나 몽롱하고 불확실한 삶이었고 숙취에서 해소되지 못했을 때의 머리처럼 맑지 않았던 생활이었다. 습지에서의 삶은 이렇듯 변변찮았지만 그 습지에서 난 아직까지도 진행형인 하나의 꿈을 꾸었다. 『습지생태보고서』 에 실린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에피소드처럼 성공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다.
“밤새 꺼?지 ?는 형광등. 방안 가득 자욱한 담배연기. 때에 절은 이불. 빈틈없이 들어찬 짐들……. 누군가는 비참이라 말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다. 세상의 번잡함과 호화로움에 눈 돌리지 않는 친구들과 나를 이 땅에 서게 해주는 소중한 꿈이 있으니 혹 내 생활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슬퍼할 일은…… 슬퍼할 일은…… 없을……. 잘 데가 없다. c8…… 성공하자! 지평선이 생성되는 방에서 매일매일 1000바퀴씩 굴러다녀 줄 테다!”7)
30대 중반이 된 지금, 난 습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사는 집이 그다지 습하지 않기 때문에, 삶이 더 이상 궁상스럽지 않기 때문에, 또 불확실한 미래지만 누군가와 함께 가야 할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습지에서 서식했다는 것, 기나긴 터널 같았던 습지서식기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리라. 또 습지에서의 생활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습지서식기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비록 그 안에 갖가지 추억이 깃들어 있을지라도 말이다.
촌놈은 없다, 원주민만 있을 뿐!
“구상할 때 ‘원주민’이라는 말만 또렷이 떠올랐어요. 보통 철거 지역에서 쓰는 단어죠. 원주민은 자신들의 과거나 생활방식이 자연스러운 형태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아버지만 해도 다니던 길은 모두 수몰됐고 젊은 날의 추억은 어디 가도 볼 수 없죠. 살아 있는 사람이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박물관에 간다는 건…… 좀 신기한 일이에요. 촌놈과 원주민은 다른 말이에요. 미국을 예로 들면 아메리카 인디언이 원주민이고 텍사스 사람은 촌놈이고. 하하. 한국에는 촌놈이 없는 것 같아요.”8)
한국에 촌놈은 없는 것 같다는 말이 왠지 와닿는다. 최규석은 『대한민국 원주민』을 통해 시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세대 구분이 명확히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자신과 나이는 같지만 전혀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을 보며 거리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대학에 가고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야 그런 거리감을 확실히 느꼈어요. 이른바 386세대와 교류하면서 우리 누나들과 비교가 되더군요. 그분들 데모할 그맘때 딱 누나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친구 아버님들과 얘기가 잘 통해요. 산에서 뜯어먹던 쑥범벅의 추억이라든가. (웃음) 한번은 여자친구가 보리밥 먹으러 가자 그랬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왜 쌀밥 두고 보리밥 먹어! 역사책을 보면 시대 구분이 마디마디 딱딱 나누어지잖아요? 중세 다음 근대, 그 다음 현대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가 비율만 오르내리면서 겹쳐져서 동시에 ?직쳀뾽 것 같아요.
「대한민국 원주민」을 하면서 세상의 상식이 모든 구성원에게 고루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으니 자꾸 21세기만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안 돼요. …… 누군가에겐 옛날 사람이 말한 21세기가 이뤄졌지만 어떤 사람에겐 아닌 거죠.”9)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최규석은 가족들을 인터뷰해 『대한민국 원주민』을 내놓았다. 이 점 유념하면서 『대한민국 원주민』에 대한 서평, 읽어보자.
가슴 서늘한 기억을 떠올리다
내게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일은 과히 좋지 않다. 가족들과 모여 가끔씩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얘기해나가면 항상 씁쓸한 웃음이 배어나온다. 내가 모른 얘기를 동생들은 기억하고 부모님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별 어려움 없이 모두 잘 산 것처럼 느껴진 우리 가족이 그리 잘 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이런 기억 말이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어머니가 시장에서 팥칼국수 장사를 했다. 어머니가 장사하는 게 영 싫던 나는 어머니가 끓여주던 팥칼국수를 잘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동안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던 시절은, 내게 그냥 짜증나는 기억일 뿐이었다.
그런데 동생들에게는 그것이 짜증나는 기억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동생들 얘기를 듣다 보면 가슴이 조금 먹먹해진다. 초등학교에 다니거나 아직 취학 전이던 동생들에게 어머니의 부재는 중학교에 다니던 내가 느꼈던 것보다 컸다. 어머니가 시장에 나갈 때 동생들은 몰래 그 뒤를 따라가곤 했다고 한다. 한 번도 나는 여동생 세 명이 어머니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동생들은 그랬단다. 몰래 따라가다가 어머니의 불호령에 다시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지금 동생들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어릴 적 동생들이 어머니 뒤를 따라가던 모습과, 어깨가 축 처진 채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모습을 상상해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실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었다.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곤궁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미처 모르던, 부모님도 미처 모르던 일들을 그물 엮듯이 엮어나가면 가슴 서늘한 기억이 꽤 된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이런 기억에 대한 만화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자전적이다. 자전적 가족에세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겠다.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최규석은 가족들을 인터뷰해 그것을 만화로 내놓았다. 이 만화에는 나와 비슷한 연배여서 동질감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도 있지만, 전혀 다른 세상을 산 것처럼 느껴져서 놀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아이들은 쉽게 죽었고 쉽게 묻혔고 쉽게 잊혔다. 나물 캐는 엄마를 따라 들어간 깊은 골짝에는 잊힌 아기 무덤들이 많았다. 나는 다만 운이 좋은 생명이었다.”10)
또 있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던 나는 학원을 가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최규석은 누나의 적금으로 미술학원에 다니게 된 얘기를 이렇게 풀어놓는다.
“시골 출신의 없는 집 딸들이 당연히 그랬듯 그녀도 열일곱부터 돈을 벌었고, 그 돈을 모두 가족을 위해 썼다. 적금 다 붓고 나면 예쁜 옷 한 벌 살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화장품도 손가락만 한 거 말고 제대로 큰 병에 든 걸 사고 싶었을 것이다. 어디 옷과 화장품뿐이겠는가. 그것의 존재를 느낄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잘라내버린 그녀의 꿈까지. 내 알량한 재주 아래 어딘가 가만히 묻혀 있을 것이다.”11)
누나의 적금으로 미술학원을 다닐 수 있던 죄책감은 어떻게 보면 그의 만화를 관통하는 감정이다. 그는 흔히 우리가 ‘소외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부채의식이 있는 듯하다. 그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그는 만화를 그려낸다.『울기엔 좀 애매한』도 그랬고 『100℃』도 그랬다. 또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도 마찬가지였고 『습지생태보고서』에 실린 「현장체험학습 1」과, 한불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만화집 .『아미띠에』(길찾기, 2006)에 실린 「가짜 비둘기」에서도 그런 부채의식이 드러난다.
이런 미안함은 그의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슴 서늘한 기억 저편에 담겨 있는 미안함과 죄책감. 그 이야기가 『대한민국 원주민』에 들어 있다.
청소년에게 꼭 해야 하는 소리
작품 곳곳에 이런 부채의식이 숨겨져 있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아픈 단면을 그릴 수밖에 없게 된다. 현실의 작은 모순도 그는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는다. 6월항쟁을 다룬 『100℃ -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도 그 소산이다.
2007년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6월 항쟁에 대한 만화를 그려 달라는 제안을 받고 처음에 거절할 심산이었다고 말한다. 우선은 6월 항쟁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서였고 또 배알이 꼬여서였다.
“1987년 이전 공고를 졸업한 동네 형님들은 20대 후반이면 혼자 벌어서 제 소유의 자그마한 주공아파트에서 엑셀을 굴리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었지만, 지금 내 또래의 친구 중에 부모 잘 만난 경우를 빼면 누구도 그런 사치를 부리지 못한다.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격리된 사람들에게 밥을 해먹였던 철거민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맞고 쫓겨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전태일 이후로 수십 년째 줄기차게 목숨을 버리고 있지만 전태일만큼 유명해지기는커녕 연예인 성형 기사에조차 묻히는 실정이다. ……
이런 것들이 민주화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과 관계가 없는 거라면 그럼 민주주의란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란 말인가. 지배층과 대거리를 할 만큼 똑똑해서 그들의 통치에 대해 훈수나 비판을 던질 수 있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더 이상 황당한 이유로 끌려가지 않게 되는 것이 민주화란 말인가.
민주화란 게 겨우 그런 거라면 할 말 좀 참고 좀더 배불리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이 낫다는 사람들의 흐름을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 사회의 문제로 고통받으면서도 제 탓만 하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20년 전에 이룩한 민주화를 찬양하는 것은 삶의 질과 민주주의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행사장 귀빈석에 앉은 분들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 같은 것으로 만드는 짓이라 생각했다.”13)
그럼에도 그는 작품 제의를 받아들였다. 전국의 중고등학생에게 배포되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얘기라 하더라도 그 대상이 청소년이라면 하나마나 한 소리도 꼭 해야 하는 소리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터무니없이 약하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 삶쟀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안심할 정도로 튼튼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강화하고 보완하려는 노력 없이는 어느날 사람 좋아 보이는 도둑놈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하고 싶었다(이런 얘기는 이 작품이 인터넷에 발표됨과 동시에 집권한 현 정부에 의해 충분히 현장체험을 곁들여 잘 교육되고 있는 중이다).14)
『100℃』는 2008년 1월부터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홈페이지에 실렸고 촛불정국과 맞물리며 인터넷 상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2009년 단행본으로 나왔다. 청소년을 위한 부록 「그래서 어쩌자고?」를 추가해서 말이다. 다음은 서평이다.
당신, 끓고 있는가
후일담 문학이 유행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인데, 그때 공지영의 소설이나 최영미의 시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1980년대 치열하게 살며 독재정권에 항거한 이들의 뒤안길을 그린, 이런 소설이나 시를 두고 참 많은 말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수신문에서는 후일담 문학을 통해 운동권 내부의 불합리성을 비난하기도 했고 일부에서는 패배주의적이라며 이 문학작품을 배척하기도 했다.
난? 사실 잘 몰랐다. 1990년대에 접어들 무렵 고작 중학생이던 내게는 ‘후일담’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나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일종의 ‘살풀이’였다는 것을.
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일까? 25년 전 그날 전국에서 벌어진 변혁의 기운은 201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당시 거리에 있던 사람들과 권좌에 있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2008년 촛불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분명 각기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1987년이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해라는 것이다.
1987년의 6?0 항쟁으로 우리나라는 헌법을 바꾸었고 대통령 직선제로 성글게나마 민주화를 일궈냈다.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던 대학생들과 블루칼라 노동자만이 아닌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비롯한 수많은 국민이 1987년 6월 무렵 거리로 거리로 나왔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일상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너도나도 인내심에 한계가 왔을 터였다. 그리고 임계치를 넘는 압박에 못 이겨 부글부글 끓어 거리로 나왔을 터였다.
최규석의 『100℃ -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은, 그 임계치에 대한 만화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더 불을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15)
사람이 끓는 온도는 누구도 잴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도 분명히 끓는다. 오랜 기간 ‘열을 받으면’ 언젠가는 분명히 폭발한다. 1960년, 1980년, 1987년 그리고 2008년. 모두 그랬다. 역사가 증명하듯 우리가 민주화된 사회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임계치를 넘어선 사람들이 부글부글 끓어서 나온 결과물이다. 1987년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가로 우리는 무얼 받았나?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빼앗긴 젊음과 생명들. 우리는 그것의 대가로 소중한 백지 한 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 받던 이는 고통이 사라지길 바랐고 누울 곳 없던 이는 보금자리를 바랐고 차별받던 이는 고른 대접을……. 그렇게 각자의 꿈을 꾸었겠지만 우리가 얻어낸 것은 단지 백지 한 장이었습니다. 조금만 함부로 대하면 구겨져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잠시만 한눈을 팔면 누군가가 낙서를 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약하면서도 소중한 그런 백지 말입니다.”16)
작가의 말처럼 1987년 6월 항쟁으로 우리는 백지 한 장을 받았다. 때로 구겨지기도 했고, 낙서로 채워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백지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더럽혀지면 지우개로 지워가며, 구겨지면 정성껏 펴가며 여전히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떤 낙서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1987년 당시 권좌에 있던 이는 여전히 사회지도층 인사라며 대접받고 대통령 취임식 때마다 얼굴을 들이민다. 잠시 어느 절에 머물렀고 잶 잠시 ?옥에 머물렀을 뿐 단 한 번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사과도 인정도 하지 않고, 추징금조차 제대로 내지 않고 있다. 그런 이를 정당 지도자들은 새해가 돌아올 때마다 찾아간다.
또 1987년 당시 거리에 있던 이들 중 몇몇은 1987년 전 국민이 일궈낸 민주화의 과실을 저 혼자 따먹으며 변절의 길을 걸으면서까지 권력에 굴종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1987년을 대표하듯 말이다. 그리고 당시 거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은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추측컨대 그들에게 1987년은 ‘추억’ 언저리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변혁에 성공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제대로 된 변화를 이끌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낙서가 추가되는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을지 모른다. 또 1987년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도, 요즘 자신도 모르게 부글부글 끓고 있을지 모른다.
물이 떨어졌다. 주전자 한 가득 물을 가득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는다. ‘따다닥~탁’하는 소리와 함께 곧 불이 올라온다. 그리고 물을 데운다. 잠시 다른 일을 보고 있는 사이 ‘삐~이’ 소리로 주전자가 물이 다 끓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재빠르게 가스레인지 앞에 다가가 불을 끈다. 고소한 보리차 향이 온 집 안에 가득하다.
물이 끓는 온도는 100℃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0℃가 되었을 때 물은 팔팔 끓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끓는 온도는 몇 도일까? 100℃일까? 그럼 당신은 지금 몇 도인가? 아니 그 전에 나는 몇 도일까? 끓기는 하고 있는 것일까?
MB 악법을 고발하다
『100℃』를 펴낸 최규석이 2009년 13명의 만화가와 12명의 논객이 만화와 글을 모아 펴낸 『악!법이라고?』(이매진)에 참여한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이 책에 집시법렉拈暉敾㎲塤秉寗膀煊?대한 「니네 헌법 21조 없애고 싶지?」를 수록한 최규석은 작품을 통해 이렇게 일갈한다.
“솔직히 말해라. 니네 헌법 21조 없애고 싶지? …… 국민들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제 할 일만 열심히 하는 …… 지도자를 굳게 믿고 따르고 물심양면 도와주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지 않겠어? 서울에서 버스 타고 한 시간만 북쪽으로 가면 그런 동네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거기로 가라고 말하지 않겠다. 당신들이 입으로 똥을 토하든 말을 토하든 나는 당신들의 입을 막거나 잡아 가두거나 먼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당신들의 말을 비판할 권리, 당신들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권리, 그것을 원할 뿐이다.”17)
그리고 작가소개 지면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이명박 정권을 이렇게 비꼰다.
“알 만한 분들은 모두 눈치를 채셨겠지만, 나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작품 아이템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걸 그려내기만 하면 한국의 만화판은 르네상스를 맞이할 것이요, 한국은 문화정책 하시는 분들이 바라마지 않는 문화 선진국으로 단번에 올라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 시절 자유민주주의 사상교육을 너무 알차게 받은 나머지 자유와 민주주의가 침해되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걱정이 돼서 만화를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4년 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화를 만들지 못하면 그건 다 그분 때문이다.”18)
4년 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화를 그리지 못한다면 그건 다 그분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최규석은 그분과 무관하게 놀랄 만한 작품을 또 내놓는다. 우리 청소년의 실상을 담은 『울기엔 좀 애매한』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2010년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한국출판문화상 51년 역사상 최초로 만화가 상을 받은 것이다.
다음은 그 서평이다. 이 서평으로 이 글 마무리하자.
정면응시, 필요하다
2004년 최규석의 출세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라는 책 나왔다. 그 책 읽고, 시쳇말로 ‘뻑이 갔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내 반응은 신선함을 넘어선 충격 때문이었다. 그러니 오늘 서평에서 찬양까지는 아니어도 침 튀겨가며 찬사를 늘어놓아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 바란다. 이해 못한다면? 흠, 그냥 이해하시라.
오늘 얘기할 만화는 『울기엔 좀 애매한』이다. 울면 울고, 웃으면 웃었지, 좀 애매한 건 뭐야? 뭐 이런 분들 있겠다. 사람마다 감정선 다 다르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애매한 상황 종종 있다. 상갓집 풍경 한번 보자. 곡을 한다. 그런데 손님도 맞아야 한다. 때로 웃기도 한다. 애매하지 않은가. 마냥 슬플 수도 마냥 기쁠 수도 없다. 분명 슬픔과 기쁨, 울음과 웃음 사이에는 적막감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 이 만화는 그 공간에 대한 얘기다. 딱히 뭐라 꼬집을 수 없는, 때로는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을 중화시키는, 때로는 독방에 갇힌 듯한 그 답답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 만화, 입시미술학원이 배경이다. 이곳에 모여든 인간 군상들은 대체로 추레하다. 대표적인 게 주인공인 원빈과 은수다. 학원비를 못낸 이들이 나누는 대화, 한번 들어보자.
“한겨울에 보일러 기름이 없는 거야. 끓인 물 페트병에 넣어서 끌어안고 자 봤냐? 아침에 그 물로 샤워도 한다.”
“한 달 동안 초코파이만 먹어봤어요?”
“참치캔 헹군 물에 라면 스프 넣고 끓여 먹어봤냐?”
“그거면 석 달은 먹죠. 40평 아파트에서 등교했다가 월세방으로 하교해봤어요? 인생이 자이로드롭입니다.”
“너 졸라 잘 살았구나? 난 모태 빈곤이야. 어디서 깝쳐?”19)
‘모태 빈곤’ 은수는 재수생이다. 대학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어 다시 학원을 다니며 재수를 한다. 원빈은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가 식당 일을 한다. 뒤늦게 학원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가 큰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모태빈곤이든 잘 살았다가 가난해졌든 이들은 가난한 집안에 가난한 학생들이다. 학원비도 밀리는 처지에 대학 등록금을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래서 미술학원 선생이자 작가 자신의 분신인 ‘태섭’은 이들에게 마음자리가 가 있다. 그 역시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태섭의 말이다.
“다른 걸 볼 기회가 없었어. 대학에 가면 뭘 하는지도 몰랐지만 대학에 안 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아무도 가르쳐주질 않았어. 그냥 겁만 줘. 무슨 폭탄 돌리기도 아니고……. 자꾸 다음 단계로 넘기기만 하는 거야. 그리고 나에게는 학자금 대출 채무가 남았지.”20)
이들은 모두 은수의 말처럼 “불가촉 루저”다. 탈출구 없는 루저다. 당장 학원비도 없고 대학 등록금도 없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학자금 대출 채무가 남는 이들. 먼 얘기 같은가. 생각보다 먼 얘기 아니다. 요즘 유난히 증가한 대학생들의 자살, 생각해보라.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다 하다 지쳐, 빚 갚으라는 독촉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 생각해보라. 생각보다 먼 얘기, 아니다. 어느 칼럼 제목처럼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한국 입시제도는 교육정책이 아니라 고용정책”이라는 말, 동의한다. “돈도 재능이야”라는 말 속에 담긴 현실, 동의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도 만화가라는 꿈을 위해 애를 쓰는 은수를 바라보며 그 동생이 한 말 “나한테 꿈이 없는 게 참 다행스럽달까”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그리고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에도 동감한다.
“그게 말이지, 나도 그래서 한번 울어볼라고 했는데……. 이게 참 뭐랄까……. 울기에는 뭔가 애매하더라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고아가 된 것도 아니고…….”
“웃거나 울거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화를 내는 것도 가능하지.”
“누…… 누구한테요?”
“그게 문제지.”21)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쓰고 왠 청승이냐고 스스로를 비웃는다. ‘네가 언제 애들에게 관심 있었어?’ 라고 질문하고, ‘아니’라고 대답한?. ?렇다. 난 관심 없었다. 아니 지금도 그들의 실상, 잘 모른다. 그런데 걔네들이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이란 건 알겠다. 화를 내고 싶은데 화낼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그 상황도 알겠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를 읽고 느낀 그 ‘비상구 없음’, 조금은 알겠다.
이들은 지금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이다. 이상한 공간에 끼어 있다. 그 공간은 적막하고 삭막하다. 그 안에 웃음도 있고 울음도 있지만, 결국 그 공간 안에서만 이뤄지는 일. 탈출구는 없어 보인다. 비상구도 없어 보인다. 비상구 없는 세대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그 적막한 공간에 여전히 끼어 있다. 울 수도 없고, 화낼 수도 없는 그 공간에 그들은 그렇게 끼어 있다. 짱돌을 들기도 힘들어 보인다.
최규석은 그 상황, 누구보다 잘 아는 듯하다. 작가의 말이다.
“내가 어른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내가 겨우 삽 한 자루 가진 사람들을 향해 왜 저깟 산 하나도 옮기지 못하느냐고 터무니없는 책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 깨달았다. …… 사실 어른은, 아니 어른도 별 힘이 없다. 그럼에도 학생들을 볼 때면 당당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은 내가 그들의 자리에 있을 때보다 더욱 냉혹해졌고 누군가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이든 책임감이든 느껴야 했다. 숨만 쉬며 세월을 보냈건 어쨌건 어른이 된 이상 그런 감정들을 피해갈 수 없었다. …… 보지 않으면 나았을 테지만 매일같이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는 상황을 겪고 나니 그들을 위해, 아니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내가 퍼부었던 비난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내가 가진 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만큼을.”22)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2007)의 저자 장 지글러는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라고 얘기했다.23) 또 그는 『탐욕의 시대』(갈라파고스, 2008)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얘기한 수치심의 권력을 설명하며 “나 아닌 다른 인간에게 가해진 고통을 바라볼 때도 나는 나의 의식 속에서 얼마간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내 안에 연민의 감정이 생겨나고, 도와주고 싶은 연대감이 발동하며, 동시에 수치심을 느낀다. 이렇게 되면 내 안에서는 행동하라는 부추김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말은 얼마간 무색해진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누구처럼 짱돌을 들라고 얘기하기도 미안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만은 피하지 말아야지 싶다. 최규석이 ‘불가촉 루저’들이 끼어 있는 그 어두운 공간을 정면으로 응시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정면응시, 필요하다.
|
1) 우석훈, 「만화, 나의 꿈 나의 사랑」, 『씨네21』, 2009년 1월 17일 인터넷판.
2) 최규석, 『대한민국 원주민』, 창비, 2008, 144쪽.
3) 김수정, 「추천사」,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길찾기, 2004, 4쪽.
4) 박광희, 「최규석씨 첫 만화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한국일보』, 2004년 4월 20일, 49면.
5) 최규석, 「습지 이야기」, 『습지생태보고서』, 거북이북스, 2005, 269~270쪽.
6) 최규석, 「남들 다하는 것」, 앞의 책, 139~140쪽.
7) 최규석, 「안분지족(安分知足)」, 앞의 책, 83~86쪽.
8) 김혜리, 「만화가 최규석 : 만화로 사회를 벗기는 노골리스트」, 『씨네21』, 2008년 6월 6일 인터넷판.
9) 김혜리, 같은 글.
10) 최규석, 「죽는 아이 1」, 『대한민국 원주민』, 창비, 2008, 35쪽.
11) 최규석, 「누나의 꿈」, 앞의 책, 17쪽.
12) 차형석, 「넌 남루한 현실? 난 ‘노골리즘’ 만화!」, 『씨네21』, 2008년 4월 8일 인터넷판.
13) 최규석, 「작가의 말」, 『100℃ -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창비, 2009, 208~209쪽.
14) 최규석, 앞의 책, 209쪽.
15) 최규석, 앞의 책, 92쪽.
16) 최규석, 앞의 책, 168~171쪽.
17) 최규석, 「니네 헌법 21조 없애고 싶지?」, 강풀 외 지음, 『악! 법이라고?』, 이매진, 2009, 77쪽.
18) 최규석, 「작가 소개」, 앞의 책, 155~156쪽.
19) 최규석, 『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2010, 50쪽.
20) 최규석, 앞의 책, 129쪽.
21) 최규석, 앞의 책, 111쪽.
22) 최규석, 「작가의 말」, 앞의 책, 5쪽.
23) 장 지글러, 유명미 역,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2007, 170쪽.
6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최을영
2005년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시사인물포커스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에 살다』(2002)와 공저 『환경주의자들』(2001), 『미래를 파는 디지절 상인들』(2001), 『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2001), 『베스트셀러과 작가들』(2001), 『상상력과의 전쟁』(2002), 『한국영화산업 개척자들』(2003) (이상 인물과사상사 펴냄) 등이 있다.
앙ㅋ
2012.04.05
prognose
2011.08.07
랑랑
2011.08.06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