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령> 개봉과 함께 본 한국공포 영화
매년 장르영화로 수편씩 제작되던 한국 공포영화의 맥이 툭 끊어진 몇 년은 충격과 반전에만 몰두해 혹평 속에 막을 내려야 했던 많은 실패작들 때문이었다
201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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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나의 공간과 생활 속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올 것만 같은 뒷목 간지러운 공포. 밤늦게 켜져 있는 현란한 TV 화면, 종일 눈앞을 떠나지 않는 모니터, 누군가로부터 불쑥 걸려오는 전화벨. 가장 친숙하게 개인의 생활 공간속에 파고들어 있지만, 단 한 번도 위협적인 느낌을 준 적이 없는 것들이 공포의 대상이 될 때, 벽장과 TV에서 사다코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 일본 공포영화 < 링 >은 그렇게 충격을 주며 등장하여, 이후 공포영화의 커다란 그늘이 되었다. < 링 > 이후 수많은 영화들은 그것을 모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변종들을 확대 재생산했다.
하지만 사다코의 짝퉁들은 낡은 클리세로 변이되어 더 이상 무서울 것 없는 이미지로 전락했다. 그럴수록 많은 영화들이 사다코의 이미지를 더욱 비틀어댔다. 관절은 더 비틀어지고, 스멀거리면서 기어 나오는 장면도 다양해졌으며, 젖은 머리카락은 더욱 풍성해졌다. 하지만, 사다코의 관절처럼 삐걱거리는 드라마는 공포 때문이 아니라 그 엉성함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싶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다 < 식스 센스 > 이후 놀라운 반전의 진창에 두 발을 담그려는 영화도 급속히 늘었다. 어느새 < 링 >과 < 식스 센스 >는 많은 공포영화의 강박증이 되었다.
매년 장르영화로 수편씩 제작되던 한국 공포영화의 맥이 툭 끊어진 몇 년은 충격과 반전에만 몰두해 혹평 속에 막을 내려야 했던 많은 실패작들 때문이었다. 소재와 스토리에 집중한 장르영화로 인정받은 < 불신지옥 >의 비평적 성공과 하이틴 공포영화 < 고사 > 시리즈의 흥행성공 이후 조금씩 꿈틀거리던 공포 영화에의 수요가 2011년에 다시 불이 붙었다. <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 >와 <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 >에 이어 < 기생령 >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공포영화라기 보다는 스릴러에 가깝지만 서늘한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 블라인드 >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꼭꼭 숨어라, 사다코가 보일라
: 2011년 한국공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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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첫 공포영화로 개봉한 <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 >는 아이돌을 공포물에 끌어들인 참신한 소재로 주목받았다. 게다가 현역 아이돌인 함은정이 걸 그룹의 멤버로 출연함으로 해서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참신한 소재와 감독에 대한 기대치에 비해 실망스럽다는 평가도 있지만, 상업영화이자 공포영화의 틀 안에서 ‘아이돌’이라는 존재를 허상이 아닌 하나의 실체로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함은정과 다른 주연들의 알찬 연기력은 다소 식상한 화면에도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박민영 주연의 <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 >은 지나치게 친절한 제목만큼 조금은 단선적인 느낌의 영화이다. 고양이라는 소재를 따오긴 했지만, 공포의 대상은 고양이라는 동물이 아니라 동물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는 인간의 이기심 그 자체이다. ‘동물의 한’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부분이 있지만, 역시 수많은 공포영화에 영향을 미친 < 주온 >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두 영화는 흥행 면에서 공포영화에 기대하는 만큼, 평가의 면에서도 중간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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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개봉을 앞둔 < 기생령 >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토속 신앙에 의한 공포가 주된 소재이다. 형과 형수가 참혹하게 살해되면서 조카 빈(이형석)을 떠맡게 된 장환(박성민)은 마침 주식으로 집을 날리고, 아내 서니(한은정), 처제 유린(효민)과 함께 빈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사와 함께 악몽에 시달리게 된 서니는 집에서 무당의 신전(神殿)까지 발견하면서 공포에 질린다. 그녀는 이사를 재촉하지만, 수중에 돈이 없어 부부간의 불화는 점점 더 커져간다. 여기에 빈의 행동도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서니는 실종됐던 빈의 할머니를 찾았다는 소식에 병원을 찾고, 그녀로부터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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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령 >은 민속 신앙을 맹신해 벌인 잔혹한 사건에 의한 원혼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충분히 공포를 줄 수 있는 소재를 선택했음에도 영화는 조금 산만하고, 스토리의 얼개가 세밀하지는 못한 편이다. 여전히 일본 공포영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면들과 지나친 효과음의 지나친 사용은 관객을 무섭게 하기보다는 깜짝 놀라게 한다.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철학적 사유와 고민을 녹여내려고 했던 많은 신인 감독들의 열의에 비한다면 < 기생령 >은 다소 손쉬운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또한 이 영화에서 가장 큰 공포를 선사하는 빈이라는 어린이 캐릭터는 지나치게 잔혹한 행동의 중심에 서 있어서 불편한 순간을 지나치게 자주 만들어낸다. 신인 감독 특유의 의욕 과잉이 장르 영화에 너무 많이 묻어나온다. 소재가 주는 공포 대신, 그 소재를 활용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조금 더 고민이 필요했을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음에도 집중도 높은 배우들의 연기는 다행히도 안정적이다. 한은정과 티아라 출신의 효민이 호러 퀸에 도전했으나, 그 영예를 거머쥐기에는 영화의 완성도가 아쉬운 편이다. 하지만 공포영화의 청각적 자극을 즐기고 여전히 사다코의 혼령을 무서워하는 관객이라면 < 기생령 >도 즐길만한 공포영화가 될 것이다. 게다가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답게 스플래터 무비 못지않게 살을 잘라내고 피가 튀기는 잔혹한 정면들은 시각적인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단지 전체 영화는 예고편과 스틸 이미지보다는 조금 덜 무서운 편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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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령 >에 이어 < 령 >과 < 므이 >를 연출한 김태경 감독의 < 미확인 동영상 >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저주에 걸린 동영상이 떠돈다는 소재만으로도 얼핏 떠오르는 수많은 전작들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는 조금 더 치밀한 계산이 필요할 것 같다.
< 링 >의 동영상이 비디오 테이프였다면, 지금은 스마트폰과 CCTV, 인터넷 등 보다 동영상을 손쉽게 공유하고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 미확인 동영상 >의 공포는 보다 현실적인 수위를 담아내리라 기대해 본다. 세 번째 공포영화를 연출하면서 장르 영화의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김태경 감독이 당연히 비교 대상이 될 < 링 >의 소재와 공포를 뛰어넘을지 기대하는 것으로 2011년 한국 공포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본다. 2008년 < 과속스캔들 > 이후 4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박보영의 복귀작이다.
장르영화의 발견과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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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 여고괴담 >은 한국형 공포영화의 새로운 장을 연 작품이었다. 입시지옥을 만들어내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괴담이라는 형식에 담아낸 < 여고괴담 >은 장르영화와 시리즈 영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이후 공포영화가 흥행 가능한 장르영화로 정착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지금 보면 조금 촌스럽지만, 당시 획기적이었던 점프 컷의 공포와 신인 여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신선한 연기, 동질감을 얻은 여고생들의 단체관람이 이어지면서 지금까지도 가장 성공적인 공포영화의 하나로 남았다.
< 여고괴담 >이후 유사한 영화들이 뒤를 이었고,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는 퀴어 코드를 담아내면서 시리즈 영화로 정착할 수 있었다. 1999년 공포영화의 부흥에 기여한 < 스크림 > 덕분에 우리는 유명배우가 초반에 죽는 스플래터 무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 사이 장진영이라는 배우를 새롭게 발견하게 만든 서늘한 공포 < 소름 >은 낡은 아파트와 그 사이에 사는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에 천착한 수작으로 기억되었고,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김명민이라는 배우를 발견하게 된다.
딱히 진정한 승자가 없는 공포영화들이 이어지던 중 2003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는 공포영화의 중흥기라 불릴만한 작품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었다. 공포라는 소재가 아니라, 장르 영화가 가지는 매력에 세밀한 이야기를 녹여내면서 철학적 사유를 하는 젊은 감독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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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한국 공포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로 대표되는 가족 멜로(부르주아적 남편과 부인 사이에 끼어든 여성)으로서의 스릴러(< 장화, 홍련 >, < 4인용 식탁 >), 피가 섞이지 않은 대체가족 사이를 맴도는 원혼의 이야기(< 아카시아 >), 거울에 비친 자아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아냈지만 그 깊이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던 < 거울 속으로 >, 전작들이 보여준 새로움을 걷어버리고 수많은 이미지를 차용하고 짜깁기하는 가벼운 구성 때문에 시리즈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유보하게 만든 < 여우계단 > 등 전작들과 달라지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영화들이 많았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경향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전이 기대 효과를 배반하자, 흥행한 전작들의 이미지를 따오기 시작했고 사다코의 짝퉁들은 마룻바닥에서 천정에서 교실에서, 때론 인형의 탈을 쓰고 부지런히도 화면 속을 기어 다닌다. 게다가 < 식스 센스 > 이후 공포 영화들은 영화의 스토리를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놀라운 반전의 진창에 두 발을 담가 버렸다. 결국 < 링 >과 < 식스 센스 >가 우리 공포영화의 강박증이 되어버린 셈이다. 관객들은 조금 스멀거리는 느낌만 들어도 끼긱거리는 사다코의 짝퉁들이 나오겠거니 기다리게 되고, 그러는 사이 심리 속으로 파고들어야 할 서늘한 공포는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결국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여름 한철 잠시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사라지는 계절 영화의 이미지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여름 한철 적은 제작비로 수익을 올리려는 한탕주의에 빠졌다. 과열된 양상 속에 쏟아져 나오는 공포영화는 여고라는 폐쇄된 공간을 공포의 공간으로 환치시킨 < 여고괴담 > 시리즈가 갈수록 삐걱거렸던 것처럼, 초심을 잃은 수많은 공포영화들이 반전 강박증과 물귀신처럼 따라붙은 사다코의 잔영에서 한발도 진보하지 못한 표현방법들로 서서히 대중들의 관심에서 비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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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도 경성시대를 배경으로 심미적인 화면을 만들어낸 2007년 < 기담 >이나, 신념과 계급의 소동 속에서 공포의 근원을 찾았던 2007년의 < 궁녀 >, 종교의 광신에 대한 공포를 담아낸 2009년 < 불신지옥 > 등 빼어난 공포영화들이 장르 영화로서의 자존심을 세워준 영화로 기억된다. 그 사이 영화적 완성도와 상관?이 하이틴 공포영화로서의 위용을 세운 < 고사 > 시리즈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공포영화는 다시 여름 시즌을 겨냥한 상품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2011년에 다시 많은 공포영화가 제작되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각각 자극적인 소재와 내용으로 차별화된 2011년 공포영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아쉬움을 남기며 절반의 성공으로 기억될 것 같다. 10대를 겨냥한 공포는 기본 이상의 흥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결국 영화의 승패는 공포 그 자체가 아니라, 공포를 자아내기 위해 세밀하게 직조되어야 할 이야기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이미 자극에 너무 익숙한 관객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조금만 잘못해서 허점을 찾아내기 쉬운 장르 영화의 특성 때문에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장르이기에 보다 세밀한 세공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장르영화의 특성상, 그 표현에 있어서 유달리 특별한 변화를 담아내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익숙함을 무기로 그 속에 누구도 하지 않았던 얘기를 담아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최근 한국 공포영화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승부수는 테크닉이 아니라 관객과의 심리전이라는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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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의 여러 가지 관습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재바르게 < 장화, 홍 련 >은 화려한 포장지 한 겹을 덧씌움으로 해서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색다른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 기담 >은 경성이라는 이국적인 시대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공포의 순간 보다 심미적인 아름다움에 주목했고, < 불신지옥 >은 공포의 효과 보다 공포스러운 상황, 그 속에 종교적 맹신이 만들어낸 인간의 이기심과 잔혹함에 주목했다.
오락영화의 범주에 넣고 본다면 철학적 사유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잔혹하고 잔인한 스플래터 영화든, 스멀스멀 기어오는 심리적 공포 영화든 그 기능에 충실하다면 공포영화는 기본 이상은 할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하지만, 똑같은 롤러코스터를 반복해서 타다보면 공포의 순간은 어느새 식상한 변주에 불과해 진다.
롤러코스터가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적 선로가 필요하듯, 기본에라도 충실하려면 정말 기본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미 십 수 년이 지난 사다코의 잔영이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는 몇몇 영화를 보자면, 사다코를 털어내기 위해 살풀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글/ 최재훈
트위터@culturebohem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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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댓글
필자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앙ㅋ
2011.11.21
player0302
2011.08.21
하늘처럼
2011.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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