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카메라가 앨비스 허리 아래를 비추지 않은 이유 - 엘비스 프레슬리
1977년 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흔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유산은 여전히 지구촌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글ㆍ사진 이즘
201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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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흔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유산은 여전히 지구촌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지난 2002년에 발표된 이 음반은 로큰롤의 황제가, 미국과 영국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노래 30곡을 모아놓은 작품입니다. 이 앨범만 들어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 인생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시대를 빛낸 위대한 로큰롤 스타의 음악을 만나러 가보시죠.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 30 #1 Hits >(2002)

적어도 미국인한테 엘비스 프레슬리는 음악, 영화, TV 등 대중문화계가 지금까지 배출한 인물 가운데에서는 부동의 정상이다. 그에 견줄만한 사람들로 가수 중에는 비틀스, 밥 딜런, 마이클 잭슨이 있고 배우 제임스 딘, 마릴린 먼로도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비틀스는 영국산(産)이었고, 밥 딜런은 너무 어렵고, 마이클 잭슨은 저항의 이미지가 약했으며 제임스 딘과 마릴린 먼로는 충격의 기간이 짧았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인들은 엘비스 프레슬리만을 ‘왕(더 킹)’이라고 부른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의 살아 꿈틀거리는 가창력일 것이다. 그가 나타나기 전 미국을 인종별로 나누어놓았던 두 음악인 흑인음악 리듬 앤 블루스와 백인음악 컨트리를 목소리 하나로 융합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노래는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며 듣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공감을 창출한다.

특히「Heartbreak hotel」과 「Love me tender」가 웅변하는 것처럼 자신이 백인이면서 흑인 특유의 음을 끊어서 끈적끈적하게 부르는 식으로 강한 ‘블랙 필’을 전한 것은 기념비적이다. 전성기에 엘비스의 공연을 본 미국의 화이트 기성세대들은 “처음에는 그가 검둥이인 줄 알았다”고 한다.

요체는 도무지 흉내가 불가능한 그만의 바이브레이션(떨림)이다. 유명한 미국의 음악평론가 레스터 뱅스(Lester Bangs)가 언젠가 “우리는 (최고라는 점에 대해)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합의해준 것과 같은 그 어떠한 합의도 앞으로 하지 않을 것”라고 한 것도 그 특징적인 떨림을 염두에 둔 언급일 것이다.「Burning love」를 통해 후대 사람들이 엘비스 흉내를 내는 것 또한 그 떨림에 있다.

중저음에서 탁월한 매력을 발하지만 그 음역에서 고음으로 솟아오르는 것도 엘비스만큼 능란한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높은 음역에서의 목소리는 참으로 정갈하다. 그의 진면목은 나폴리 민요 「오 솔레 미오」를 영어로 번안해 크게 히트시킨 「It's now or never」난 후기의 절창 「The wonder of you」로 대번에 확인할 수 있다.

엘비스의 보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분석이 있다. 워낙 가진 소리가 좋은데다 바이브레이션이 더해져 풍요로운 맛을 전해주는 그의 목소리는 2차대전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해 자유진영 최강국이 된 미국의 국력신장 그래프와 닮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엘비스의 풍부한 보이스처럼 미국도 경제적으로 풍성한 나라가 됐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엘비스의 노래는 미국 대중의 포만감, 문화적 만족감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평론가도 있다.

이것은 당대 아시아 국가로 볼 때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1950-60년대에 가난에 시달리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음악 팬들은 마치 육질 좋은 기름진 엘비스 목소리를 듣고 정서적으로나마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님과 함께」로 국내 최고의 인기를 누린 남진이 노래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복장을 연출한 것은 미국에 대한 단순한 선망을 넘어 우리도 언젠가는 배부른 나라가 될 수 있다는 미래가능성을 심어줬다고 볼 수 있다.

엘비스는 노래 부르면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신나게 흔들면서 특히 가수 사상 최초로 허리 아래를 육감적으로 돌리면서 이전 가수의 엄숙함을 폐기처분했다. 그가 무명에서 전국적 스타로 치솟은 1956년에 TV 프로 < 에드 설리번 쇼 >에 출연할 때 시청자의 반감이 두려워 카메라가 그의 허리 아래를 비추지 않은 사건은 이제 전설적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허리놀림이 하도 요란해 골반이란 뜻의 ‘펠비스(pelvis)’는 그의 별명이 되었다.

그의 공격적인 율동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인 층은 당대의 청년세대였다. 이제껏 누구로부터 구경하지 못했던 센세이셔널한 볼거리에 젊은이들은 나이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나른함에서 벗어나 젊음 특유의 약동감을 확인했다. 청춘혁명이었다. 미국은 「Jailhouse rock」, 「All shook up」 「Hard headed woman」과 같은 템포 빠른 로큰롤과 함께 근엄한 이성의 시대에서 보편적인 ‘감성의 시대’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환상적인 노래와 현란한 율동 외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잘생긴 외모였다. 1950년대 초반 미국 내에 방송국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수상기 또한 2700만대에 육박하는 등 듣는 라디오 시대 아닌 보는 ‘텔레비전 시대’와 맞물려 엘비스의 전형적인 양키 미남형 얼굴과 이글거리는 눈초리, 짧은 구레나룻, 와일드한 헤어스타일은 그 자체가 반가운 ‘미디어상품’으로 작용했다.

한 눈에 시선을 끄는 카리스마적 외모를 바탕으로 그는 한창 때 < Love Me Tender >, < Blue Hawaii >, < Girls! Girls! Girls! >, < Viva Las Vegas > 등 무수한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 그는 로큰롤 음악계의 영웅이자 할리우드의 간판이기도 했다. 흔히 현대 무대 연예인의 세 가지 조건을 가창력, 율동 그리고 외모라고 일컫는 것을 감안하면 오늘날 비주얼 시대의 개막을 연 주인공은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가 미국의 대표 연예인으로 사랑받는 것은 단순한 인기뿐 아니라 미국의 역사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2차 세계 대전 후 자본주의 진영을 이끈 미국이 국가적으로 필요로 한 존재로 기록된다. 1950-60년대에 미국은 공산주의와의 이념 대결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자본주의의 약점으로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맹공을 당했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국민들에게 불어넣어야 했다.

그 완벽한 성공사례가 바로 엘비스였다. 1935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투펠로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 무허가주택을 전전하다 가난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등지고 멤피스로 이사했으며 거기에서는 트럭운전사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제는 전설이 됐지만 그가 음반업계로 발을 딛게 된 것은 트럭을 몰다가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멤피스 레코딩 서비스라는 녹음실에 들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남부 촌놈이자 노동계급 출신의 인물이 미국 전역을 흔드는 슈퍼스타로 상승했다는 사실은 미국이 바라던 완벽한 ‘신분상승’ 스토리였다. 1959년 미시시피주 지방의회가 엘비스를 수천만 미국인이 본받을 만한 귀감으로 공식 명문화하는 의회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 한 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우리 미국에서의 성공이 여전히 개인의 창의와 노력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창조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룩할 수 있다는 미국적 사고방식을 재확인해주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엘비스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은 그를 단순한 연예스타로 국한하지 않고, 미국 대중문화의 힘으로 인식한 젊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대에 와서 꽃을 피운다. 공산주의 구소련의 공세에 맞서 ‘자유’라는 기치를 대대적으로 내건 케네디 정부는 엘비스 프레슬리야말로 공산주의에 맞서는 동시에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1세계 유럽에 느껴온 미국의 열등감을 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그를 유럽에 적극적으로 ‘수출’하기에 이른다.

이미 음악에 휘청거린 유럽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직접 접하고 나서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문화적으로 늘 선진의식에 우쭐해하던 영국은 부랴부랴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라는 엘비스 모방(?) 상품을 개발해 도리어 미국을 뒤쫓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 시기에 영국의 청춘세대는 영국 귀족의 기존 질서와 권위에 비판적이었으며 욕구불만에 터질 지경이었다. 이때 수입된 미국의 노동계급 출신 엘비스의 로큰롤은 그들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영국은 엘비스 프레슬리 폭풍에, 듯 미국의 대중문화 침공에 고목이 쓰러지듯 무너지고 말았다.

엘비스는 가수활동을 가늠하는 척도인 빌보드차트로 볼 때 119곡이라는 가장 많은 차트 진입 곡을 냈다. 2?는 94곡의 고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며 비틀스는 5위로 72곡에 불과하다. 히트의 분기점인 40위권 안에 든 곡도 엘비스 프레슬리가 80곡으로 사상 최다(비틀스는 51곡)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대중 가수나 그룹하면 무조건 비틀스를 치지만 사실 비틀스도 엘비스의 영향 아래 성장했다.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는 “우리 음악은 엘비스의 것을 더 세게 한 것뿐”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비틀스의 음악스승은 어디까지나 엘비스 프레슬리다.


이 앨범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의 인기차트에서 그가 거둔 1위 곡, 30곡을 집대성한 음반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곡 「A little less conversation」이 새롭게 리믹스되어 영국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2002년 당시 엘비스 사망 25주기에 따른 재조명 열기가 가져온 앨범이다. 「A little less conversation」는 보너스 트랙으로 포함되었다.

음악의 판도를 바꾼 「Heartbreak hotel」부터 마지막 로큰롤인 「Burning love」와 최후의 히트송인 「Way down」에 이르기까지 그의 빛나는 활동궤적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동안 LP시절 쉬 구하기 어려웠던 「Don't Hard headed woman」 「A big hunk o'love」 등이 있다는 게 이 앨범의 미덕이다.

독일 어린이 민요로 국내에서는 ‘노래는 즐겁다’로 알려진 「Wooden heart」는 미국에서는 싱글로 나오지 않았지만 영국에서 정상을 차지해 여기에 실렸다. 수요자에게는 행운이다. 역시 보석인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에서 나타나는 엘비스의 비트 감은 천재적이며 뮤지컬 < 올 슉 업 >에서 스토리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One night」도 들을 수 있어 반갑다.

엘비스의 음악세계를 알기에 손색이 없는 앨범이다. 단지 히트 곡 30곡의 나열이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엘비스의 보컬 세계의 역사적 전시다. 신세대는 이것으로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에 대한 속성과외가 끝난다. 얼마 전 시사주간지 < 타임 >도 100대 명반 중 하나로 이 컴필레이션 앨범을 선정했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제공: IZM
(www.izm.co.kr/)

#엘비스프레슬리 #로큰롤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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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em

2011.08.20

어릴때 영화에서 엘비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러브미텐더를 부른 유명한 인기가수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네요. 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트럭을 몰면서 홀로 노래를 했을지도요... 그가 어머니를 위해 녹음실에 갔다는 게, 그래서 그가 가수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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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