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래와 김해인의 만화 절경
[김미래의 만화절경] 어제 뭐 먹었어?
매일의 일과가 끝난 뒤 저녁 한 끼, 술안주, 하루치의 나른함. 여기에 음식 만화 『술 한잔 인생 한입』, 『어제 뭐 먹었어?』 곁들이기.
글: 김미래
2025.10.27
작게
크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조직에 가입할 일이 생긴다. 금방 탈퇴할 조직이지만 잠깐의 편의를 위해서 신분을 밝히고 입회하는 일도 있다. 간단한 경우,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잠겨 있던 철제 문이 열리고 공간이 개방된다. 그러나 이름이란 무엇의 보증일까? 지난 주말에는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를 오래간만에 보았다.(보고 싶은 영화가 마땅치 않을 때는 아키 카우리스마키나 알렉산더 페인을 틀면 잔잔하니 실패가 없다.) 이름과 기억과 제자리를 잃은 남자. 컨테이너에서 사는 이웃들과 사는 동안 그의 출신과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그는 버려진 강변에 그저 감자 심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수확한 감자는 여덟 개, 씨감자로 이용할 몇 알을 남기고 그는 연인과 이웃과 세 알을 나누어 먹는다. 영화의 여운이 감자를 삶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만화를 들추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뜨거운 감자를 목으로 넘길 때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이 있다. 다른 온도와 질감 가진 것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때만 느껴지는, ‘영혼의 주머니’로서의 나 자신 말이다.

 

이제부터 소개할 책들은 어느 쪽부터 읽어도 상관없고, 다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사실 모든 책들이 그러하고, 이것이 책의 가장 소중한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만화인 경우라면, 우리에게는 ‘장면’을 골라서 시작할 수 있다는 혜택까지 주어진다. 한 손으로 책의 한끝을 받치고 책배를 후루룩 넘겨보면서, 말을 걸어오는 장면 마주치기를 기다리고, 그 장면을 시작점 삼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만화만의 따뜻함. 그중에서도 먹는 만화, 매일을 담은 만화, 감자의 뜨거움을 보존한 만화는 빌리지 않고 사 모으게 되는 것 같다. 대단한 의지 없이도 시리즈가 갖추어지고, 그중 몇 권을 잃어도 크게 상심하지 않는다. 대단한 흡입력이 없는 이 만화들은,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 독자를 소진시키지 않고, 은근한 온기로 채워준다. 



만화가의 이름인 라즈웰 호소키는 트럼보니스트 라즈웰 러드와 출판사 선배(호소키)의 이름을 빌려 만들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뮤지션과 고마운 선배의 이름을 반반 섞어 필명을 만든 것부터가, 지인들과 술 한잔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정다운 아저씨를 떠올리게 한다. 

 

『술 한잔 인생 한입』은 언제나 헌사로 시작된다. ‘서문’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늘 새로 만든 한 권의 책을 “열차 강도 짓이 아니라 정직하게 일해서 번 돈으로 술을 마시는” “그 옛날, 맥주의 뚜껑을 따기 전, 일단 병따개를 세로로 쥐고 병뚜껑의 한가운데를 캉캉 두드린 뒤 땄던” 모든 술꾼에게 바친다고 인사부터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사를 올린 자기 자신의 이름을 그해 연도와 24절기를 밝힌 뒤에 적는다. 2001년 소만, 라즈웰 호소키. 2017년 입동, 라즈웰 호소키 하는 식으로. 小滿이라는 절기도 이 책에서 배웠다. 만물이 생장하여 가득 차기 시작하는 시기. 양력으로 5월 21일경.

 

책의 주인공은 영업부 샐러리맨 이와마 소다츠로, 당연히 애주가다. 한 권에는 대개 사계절이 모두 담겨 있다.(재밌는 건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좋은 계절이 왔구먼.” 한다는 것.) 그는 친구들을 여럿 데리고서, 혹은 혼자서 술집을 찾는다. 혼자 갔을 때도 담소는 쉽게 생긴다. 주인장과는 물론이고, 바에 앉은 다른 손님이나 옆 테이블과도 금세 경계가 허물어진다, 당연히 술의 기운으로. 

 

말이 많고 친절하고 엉성하고 성긴 만화. 말풍선들은 묵직하고, 이야기와 관계없는 정밀한 그림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만화책인 주제에 “여기서 잠깐” 같은 코너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짧지 않은 산문들이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다. 그런데도 방해받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장인의 독보적인 아트워크의 세계 옆에는 손으로 그려낸 생각일 뿐인 만화의 세계도 존재하는 것이다. 만화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만화를 떠날 수도 있는 만화만이, 만화 아닌 것까지 만화로 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흥겨운 술자리의 예기치 못한 합석처럼. 정갈하게 세팅되어 나온 요리를 기분과 습관대로 한 점 한 점 들어가다 보면 생기는 빈틈 가득한 접시처럼 말이다.  

 


“일식이 아니고 마파두부가 듬뿍 있으니까 오늘은 국 하나에 반찬 두 가지! 자~ 먹자~!!”

 

“나는 밥에 듬뿍 얹어서 팍팍 먹어야지~ 

음! 시로 씨! 이거 좋다!! 요 마파두부에 토마토의 신맛이랑 감칠맛이 들어 있는데 그래도 밥이랑 제대로 어울려!”

 

“뭐, 그렇지~ 생각해 보면 칠리새우도 토마토 맛이지만 쌀밥이랑 어울려. 

응, 그래. 토마토로 부드러워질 즈음에 부추가 포인트를 줘서 상당히 맛이 풍부해! 만족해!!” (『어제 뭐 먹었어?』 14권, 53쪽)

 

요시나가 후미가 그린 『어제 뭐 먹었어?』는 내 기준, 몇 번이고 읽어도 질리지 않는 만화다. 제목인 “어제 뭐 먹었어?”라는 물음의 분위기부터가 참 좋다. 상당한 친근감과 다소의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어제를 함께하지 않았으니 물을 수 있는 질문이자, 오늘을 함께하고 있기에 물을 수 있는 질문인 것이다. 물론 이렇듯 평이한 제목도 심오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 역시 작품의 힘이겠지? 

 

작품은 변호사인 중년 남성이 동거 중인 연인과 저녁 식사를 요리하는 일상을 그린다. 요시나가 후미가 그리면 변호사도, 게이도, 요리도 모두 멀지 않게 느껴진다. 일하는 자아, 먹는 자아, 사랑하는 자아가 하나씩 우세하게 등장하는 여느 기세 좋은 일본 만화(소년만화나 소녀만화로 특정되기 쉬울)를 조금 비껴나가며, 작가는 마트에서 장보다가 만난 이웃에게 보낼 문자를 고심하는 주인공과 함께 반찬과 재료라는 정보를 전해준다. 

 

이 만화의 말풍선 역시 아주 널찍하고,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아주 상세하고 친절한데, 독자 대상의 설명이 주가 되는 학습만화라고 느끼게 하지 않는 절묘한 캐릭터 설정이 인간애를 돋운다. 그들은 정말로 한 자 한 자 고심해서 상대에게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영양가와 음식 만들어준 사람에 대한 칭찬과 감사를 무한한 지면에 나누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엄청나게 세세한 정보제공과 가이드에도 불구하고, 여기 나오는 요리를 실천해 본 적은 없다. 분명 세부적이고 요긴한데도, 분명 어렵지 않은데도. 이 게으름에 대해서는 아마 “어제 뭐 먹었어?”의 기분 좋은 거리감이 변명해 줄지도 모르겠다. 같은 요리를 함께 먹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다른 위치에서 다른 요리를, 그래도 각자 끼니를 놓치지 않고 있네, 어제 뭐 먹었다고?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술 한잔 인생 한입 1

<라즈웰 호소키> 글,그림/<김동욱> 역

출판사 | AK(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

Writer Avatar

김미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2010년 문학교과서 만드는 일로 경력을 시작했고, 해외문학 전집을 꾸리는 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총서를 기획해 선보였다. 책을 둘러싼 색다른 환경을 탐험하고 싶어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출판 분야에서 매니저로 지냈고, 현재 다양한 교실에서 글쓰기와 출판을 가르친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사 아닌 곳에서도 교정·교열을 본다. 편집자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만 방침을 만들고 따르는 일에 힘쓰면서도, 방침으로 포섭되지 않는 것의 생명력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레이블(쪽프레스)을 만들어 한 쪽도 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낱장책을 소개한 것도, 스펙트럼오브젝트에 소속되어 창작 활동을 지속해 온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창작자, 기획자, 교육자 등 복수의 정체성을 경유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편집이므로 스스로를 한 우물 파는 사람이라 자부한다.

Writer Avatar

요시나가 후미

『서양골동 양과자점』의 작가 요시나가 후미는 만화가이다. 도쿄에서 태어나 게이오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94년에 『달과 샌들(月とサンダル)』로 데뷔하였으며, 『서양골동양과자점(西洋骨董洋菓子店)』을 발표하기 전까지 주로 BL 만화를 그렸고, 『슬램덩크(Slam Dunk)』와 『은하영웅전설』을 패러디한 동인지와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패러디한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시원시원한 컷 분할과 느슨하고 편안한 펜터치로 자유롭게 스케치한 듯한 요시나가 후미의 그림은,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간단한 표현만으로도 충분한 감정을 담는 그런 스타일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파격적인 사건을 바라보는 관조적이고 일상적인 시선은 작가의 작품을 더욱 깊이있게 만든다. 완벽해 보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캐릭터들로, 상처투성이인 삶을 살아가는 서로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모습을 그리는 그녀만의 화법은 독자들과의 큰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은 만화가로서의 그녀의 입지를 올려준 작품이었다. 이따금씩 숨어있는 개그적 요소와 캐릭터들의 사연을 천천히 풀어가는 스토리라인, 그리고 희망의 메세지를 담은 잔잔한 마무리 등 그녀의 장점이 최대로 발휘된 이 작품은 동성애적 색깔을 머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독자의 마음 속에 부드럽게 침범하여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아직도 건재한 인기를 보여주는 듯 애장판이 발간되고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로,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로 새롭게 탄생하는 등, 작품이 나온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대중 속에 꾸준히 퍼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