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금으로 만든 명함으로 일본인 총독과 만나기도
명함은 방문 기록이었다 - 명함은 중국에서 유래했는데, 춘추 시대 사람인 공자도 명함을 사용했다. 그 시절에는 누구를 찾아갔다가 못 만나면 명함을 놓고 갔다.
201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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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은 중국에서 유래했는데, 춘추 시대 사람인 공자도 명함을 사용했다. 그 시절에는 누구를 찾아갔다가 못 만나면 명함을 놓고 갔다. 그러면 집에 돌아온 주인은 그 명함을 보고 바로 그 사람을 찾아갔다. 이것이 당시 행세하는 사람들의 법도였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정초 세배를 다니다가 어른이 안 계시면 자기 이름을 적은 종이를 놓고 갔다. 이를 ‘세함(歲銜)’이라고 하는데, 명함보다는 연하장 성격이 더 강했다.
중국 명함의 본래 이름은 ‘명자(名刺)’로, 여기서 ‘刺’는 ‘대나무 같은 것을 깎아서 거기에 글씨를 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명?청 시대에는 ‘명첩(名帖)’이라고 해서 종이나 비단에 붓으로 붉은색 글씨를 써서 신분을 밝혔다. 그 시절에는 초면인 사람에게 출신지, 이름, 감투 따위를 적은 명첩을 건네는 게 학문하는 사람의 예의였다.
그러다 서양 자본주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명첩보다는 인쇄해서 쓰는 ‘명편(名便)’이 널리 쓰였고, 그 명편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퍼져 ‘명함’과 ‘메이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실업가 박흥식은 순금으로 만든 명함을 내밀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인 총독과 면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명함은 구한말 민영익의 명함이다. 민영익은 1883년 조선보빙사(朝鮮報聘使, 한 국가를 대표해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 자격으로 공사관 개설차 미국을 방문한 뒤, 아서 대통령 주선으로 6개월간 유럽을 여행했다. 이때 영국에서 청나라 공사를 만나 명함을 건넸는데, 그게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민영익 명함은 미국산 종이에 요즘 명함 크기와 비슷한 가로 5.5센티미터, 세로 9센티미터이며 민영익 특유의 필체로 이름이 쓰여 있다.
서양에서는 ‘비지팅 카드(visiting card)’라고 해서 만나러 간 사람을 못 보고 돌아올 때 명함을 남기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16세기 중엽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던 한 학생이 귀국 날짜를 받아놓고 스승들께 인사하러 다니다가, 아쉽게 못 만난 몇몇 스승에게 자기 이름을 적은 카드를 남긴 데서 비롯되었다. 서양 명함의 시초였다.
오늘날에도 서양에서는 사람을 찾아갔다 못 만나면 명함 한쪽을 접어놓고 가는 경우가 많다. 이때 명함에는 이름, 직업, 주소 따위를 적는 것보다 방문 목적을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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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한쪽을 접는 풍습은 19세기 중엽에 생겨났다. 1882년 출판된 《우리의 행실》이라는 책에서 저자 존 영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명함을 통해 방문 목적을 알릴 수 있다. 명함은 봉투에 넣어 심부름꾼에게 보낼 수도 있고 직접 찾아가 두고 올 수도 있다. 직접 방문해 명함을 두고 오는 경우에는 명함의 한쪽 귀를 접어야 한다. 주인만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 가족 전원 또는 여러 명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얼굴을 보고 명함을 주고받는 게 일반적이다. 명함이 신분을 상징하는 증표로 여겨지면서 아무 데나 명함을 놓고 가는 걸 꺼린다. 또한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네야 연상 작용이 생겨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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