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끄바, 도스또예프스끼의 생가를 가다
모스끄바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다. 지하철 도스또예프스끼 역에서 내려 역 뒤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이곳에 도스또예프스끼 생가가 있다.
2012.02.23
작게
크게
공유
위대한 작가의 유년 시절로 떠나는 여행
모스끄바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다. 지하철 도스또예프스끼 역에서 내려 역 뒤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이곳에 도스또예프스끼 생가가 있다. 현재 도스또예프스끼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19세기 당시, 제법 규모가 큰 병원의 부속 건물이었다. 모스끄바 마린스끼 빈민구제 병원이다. 생가 옆에는 병원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현재 이곳은 모스끄바 의학아카데미 산하 결핵 과학실험연구소 외과병동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왜 병원에 딸린 부속 건물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의 아버지가 이 병원에 근무했던 의사였기 때문이다.
생가 앞 병원 정원에는 커다란 도스또예프스끼 동상이 있다. 조각가 S. 메르꿀로프의 1918년작이다. 동상은 처음에 모스끄바 중심가에 위치한 쯔베뜨노이 불바르(가로수길)에 서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금은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동상은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선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신을 형상화했다. 모더니즘의 의상을 입은 잔인한 천재의 모습이다. 상체의 일부를 드러낸 채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린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 세계의 비극을 고통스럽게 응시하고 있다.
동생 안드레이의 회상기에 묘사된 생가의 모습
도스또예프스끼 생가의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겁게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칙칙한 조명과 실내장식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어두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년 시절은 동생인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가 남긴 회상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많은 도스또예프스끼 연구자들이 작가의 유년 시절을 언급하면서 이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는 회상기에서 자신의 가족이 살았던 집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기록을 현재 보존되어 있는 도스또예프스끼 생가와 비교하면서 살펴보니 훨씬 더 생생하게 그 모습이 그려진다.
도스또예프스끼 생가를 둘러보니 안드레이가 묘사해놓은 그대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 낡은 생가를 이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복원한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문학박물관, 작가의 생가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단순한 곳은 처음이다. 이곳에 직접 와보니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의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침실의 성화聖畵를 제외하고는 하다못해 그 흔한 장식용 그림 한 점 없었다. 침대도 볼품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니 짙은 코발트색 응접실이 가정 형편?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귀족들이라면 절대 그런 누추한 색으로 응접실을 치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 도스또예프스끼를 이해하는 첫번째 키워드
19세기 유명한 러시아 작가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다. 뿌쉬낀, 레르몬또프,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등이 그렇다. 큰 귀족 집안 출신이 아니더라도 많은 작가들은 성공해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도스또예프스끼는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부유한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가난이다. 그의 첫 작품 제목이 ‘가난한 사람들’ 아니던가. 가난이라는 테마는 이후에도 줄곧 작품의 중심이 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생가에 직접 와서 느낀 것이지만 이는 그의 출생,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어려서부터 물질적 부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작가였다. 웅장한 저택과 잘 다듬어진 정원, 화려한 응접실과 편안한 침실, 실크 드레스를 입고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 부인들, 주인을 따르는 여러 명의 시종들, 황금색으로 칠한 사륜마차, 여름밤을 유혹하는 낭만적인 야회, 입맛을 다시게 하는 진기한 요리들, 향수, 고급 포도주와 보드까. 이런 디테일을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생가에서 놓치지 않고 봐야 할 두 가지
생가 안에는 두 개의 전시홀이 별도로 있다. 작은 홀 전면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M. 빠노프(1836~1894)가 1880년 6월 9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도스또예프스끼는 뿌쉬낀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모스끄바에 체류하고 있었다. 빠노프는 모스끄바에서 활동한 유명한 사진가였다. 특히 인물 사진을 잘 찍었는데,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I. 끄람스꼬이는 1881년 『예술잡지』3월호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초상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빠노프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 사진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죽기 반년 전에 찍은 것이다. 마지막 대작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채 완성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바로 전날 수많은 청중 앞에서 뿌쉬낀에 대해 연설했다. 작가의 말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열광적인 환호를 받자 그도 극도로 흥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진기 앞에 섰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제의 흥분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사진기 앞에 앉아 있다. 위대한 작가이자, 간질 환자, 순교자, 죽음에 직면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도스또예프스끼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것이 또하나 있다. 그의 친필 서명과 평소 사용하던 펜촉이다. 친필 서명은 복사본으로 1881년 도스또예프스끼의 장례식 행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어준 것이다. 친필 서명 위에 뾰족한 펜촉이 달린 나무펜대가 놓여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필적은 매우 독특하다. 아주 명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사롭지 않은 힘이 느껴진다. 서명을 ??리하는 장식체가 현란하다. 펜촉은 공중에서 한 바퀴, 다시 내려오면서 급하게 꺾인다. 병적으로 예민했던 작가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모스끄바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다. 지하철 도스또예프스끼 역에서 내려 역 뒤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이곳에 도스또예프스끼 생가가 있다. 현재 도스또예프스끼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19세기 당시, 제법 규모가 큰 병원의 부속 건물이었다. 모스끄바 마린스끼 빈민구제 병원이다. 생가 옆에는 병원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현재 이곳은 모스끄바 의학아카데미 산하 결핵 과학실험연구소 외과병동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왜 병원에 딸린 부속 건물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의 아버지가 이 병원에 근무했던 의사였기 때문이다.
생가 앞 병원 정원에는 커다란 도스또예프스끼 동상이 있다. 조각가 S. 메르꿀로프의 1918년작이다. 동상은 처음에 모스끄바 중심가에 위치한 쯔베뜨노이 불바르(가로수길)에 서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금은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동상은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선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신을 형상화했다. 모더니즘의 의상을 입은 잔인한 천재의 모습이다. 상체의 일부를 드러낸 채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린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 세계의 비극을 고통스럽게 응시하고 있다.
|
동생 안드레이의 회상기에 묘사된 생가의 모습
도스또예프스끼 생가의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겁게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칙칙한 조명과 실내장식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어두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년 시절은 동생인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가 남긴 회상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많은 도스또예프스끼 연구자들이 작가의 유년 시절을 언급하면서 이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는 회상기에서 자신의 가족이 살았던 집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기록을 현재 보존되어 있는 도스또예프스끼 생가와 비교하면서 살펴보니 훨씬 더 생생하게 그 모습이 그려진다.
나와 동생들이 태어난 시기에 아버지가 살고 있던 집은 (……) 모스끄바 마린스끼 병원의 오른쪽에 있는 독립가옥으로 3층짜리 석조 건물 중 1층이었다. 요즘 관사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방에 비해 옛날의 관사 방은 훨씬 검소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미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당시 네댓 명의 자식이 있었던 아버지는 영관領官급이면서도 현관방과 부엌을 빼고 방이 두 개밖에 없는 집에 살고 있었다. 추위를 막을 수 없는 현관 입구에는 여느 집처럼 (깨끗한 정원으로 난) 창이 하나뿐인 현관방이 있었다. 그 안쪽에는 천장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널빤지 칸막이가 쳐진 어둠침침한 아이들 방이 있었다. 다시 그 안쪽에는 거실이 있었는데, 두 개의 창문이 길 쪽으로 나 있고 세 개의 창문은 깨끗한 정원을 향해 나 있는 꽤 넓은 방이었다. 그다음은 길 쪽으로 난 창이 달린 응접실인데, 부모님의 밝은 침실은 널빤지 칸막이로 그 응접실과 구분되어 있었다. 이것이 집의 전부이다! (……) 집의 모양은 극히 검소했다. 아이들 방이 딸린 현관방은 짙은 진주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거실은 밝은 카나리아빛이고, 응접실은 거기에 딸린 침실과 함께 짙은 코발트색이었다. 그 당시 벽지는 사용하지 않았다. |
도스또예프스끼 생가를 둘러보니 안드레이가 묘사해놓은 그대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 낡은 생가를 이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복원한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문학박물관, 작가의 생가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단순한 곳은 처음이다. 이곳에 직접 와보니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의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침실의 성화聖畵를 제외하고는 하다못해 그 흔한 장식용 그림 한 점 없었다. 침대도 볼품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니 짙은 코발트색 응접실이 가정 형편?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귀족들이라면 절대 그런 누추한 색으로 응접실을 치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
|
가난, 도스또예프스끼를 이해하는 첫번째 키워드
19세기 유명한 러시아 작가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다. 뿌쉬낀, 레르몬또프,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등이 그렇다. 큰 귀족 집안 출신이 아니더라도 많은 작가들은 성공해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도스또예프스끼는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부유한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가난이다. 그의 첫 작품 제목이 ‘가난한 사람들’ 아니던가. 가난이라는 테마는 이후에도 줄곧 작품의 중심이 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생가에 직접 와서 느낀 것이지만 이는 그의 출생,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어려서부터 물질적 부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작가였다. 웅장한 저택과 잘 다듬어진 정원, 화려한 응접실과 편안한 침실, 실크 드레스를 입고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 부인들, 주인을 따르는 여러 명의 시종들, 황금색으로 칠한 사륜마차, 여름밤을 유혹하는 낭만적인 야회, 입맛을 다시게 하는 진기한 요리들, 향수, 고급 포도주와 보드까. 이런 디테일을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생가에서 놓치지 않고 봐야 할 두 가지
생가 안에는 두 개의 전시홀이 별도로 있다. 작은 홀 전면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M. 빠노프(1836~1894)가 1880년 6월 9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도스또예프스끼는 뿌쉬낀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모스끄바에 체류하고 있었다. 빠노프는 모스끄바에서 활동한 유명한 사진가였다. 특히 인물 사진을 잘 찍었는데,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I. 끄람스꼬이는 1881년 『예술잡지』3월호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초상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빠노프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 사진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죽기 반년 전에 찍은 것이다. 마지막 대작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채 완성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바로 전날 수많은 청중 앞에서 뿌쉬낀에 대해 연설했다. 작가의 말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열광적인 환호를 받자 그도 극도로 흥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진기 앞에 섰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제의 흥분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사진기 앞에 앉아 있다. 위대한 작가이자, 간질 환자, 순교자, 죽음에 직면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
도스또예프스끼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것이 또하나 있다. 그의 친필 서명과 평소 사용하던 펜촉이다. 친필 서명은 복사본으로 1881년 도스또예프스끼의 장례식 행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어준 것이다. 친필 서명 위에 뾰족한 펜촉이 달린 나무펜대가 놓여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필적은 매우 독특하다. 아주 명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사롭지 않은 힘이 느껴진다. 서명을 ??리하는 장식체가 현란하다. 펜촉은 공중에서 한 바퀴, 다시 내려오면서 급하게 꺾인다. 병적으로 예민했던 작가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
6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 영화, 공연, 음악, 미술, 대중문화,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클라이스테네스
2012.09.30
달의여신
2012.09.21
좋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번역을 읽는 것은 맛이 떨어지죠. ( 우리나라 문학이 세계에서 약간 이해 못하는거랑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 정말 까르마조프형제들은 볼때마다 읽고 싶은 작품이지만, 언제 한번 번역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많이 망설여지는 작품입니다.
천사
2012.03.08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