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진이 꼽은, 치유 과정이 가장 고통스러운 치료 분야는 화상이라고 한다. 응급 처치를 할 때부터 완치까지 그 긴 과정에서 단 한순간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란다. 특히 새 살을 돋아나게 하려면 화상 입은 부위를 주기적으로 긁어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무지막지 힘들다고 한다. 제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 마약성 진정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피부를 긁어낼 때마다 진정제 주사를 놓아주다 보면 마약 중독을 걱정해야 할 판이라, 매번 그럴 수도 없다고. 그래서 한 번 진정제 주사를 맞고 긁어냈다면 그 다음엔 제 정신인 채로 긁어내는, 그런 식의 고통스러운 치료가 이어진다고 한다.
이 화상 치료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의 고통에 대한 은유 같다. 너덜거리는 화상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나려면 먼저 그 환부를 긁어내는 아픔을 제정신으로 견뎌내야 한다. 마음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치유를 위해서는 자신의 깊은 상처를 바로 보고 그 부위를 정확히 가늠해내야 한다. 그 과정은 매우 아프고 힘들다. 그러나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내야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넘어져서 무릎을 긁힌 아이는 엄마가 소독약을 바를 때의 그 알싸한 아픔조차 견디기 힘들다고 마구 울어댄다. 그렇게 울어댈 만큼 정말 아프다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알아달라 떼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엄살은 어릴 적에나 통한다.
어른이 되어서, 특히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편리하기 위해 징징거리는 모습은 심히 꼴불견이다. 어른은 담담히 아픔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어른의 조건은 혹독하고 엄정하며, 그래서 어른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자기 상처를 담담히 치유하는, 외롭지만 어엿한 어른을 좋아한다. 몇 번쯤 신음 소리를 낼 법도 한 처지의 사람이 꾹꾹 고통을 참고 있는 장면을 보면, 마음 깊은 곳부터 흔들려 쉽게 눈을 뗄 수가 없다. 고통을 참느라 애써 센 척, 위악적으로 굴어도 쉽게 미워할 수조차 없다.
젊은 시절 본 영화 <블루(Three Colors:Blue)>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여주인공, 줄리가 아주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도 어쩌면 엄살을 싫어하는 내 취향 때문일 것이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slowski) 감독의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 시리즈 중의 자유편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줄리라는 한 여자가 너덜거리는 환부를 북북 긁어내고 새 살을 얻는 과정을, 자유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여행을 가다가 차 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자신만 겨우 살아난 여자 줄리.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 후 비로소 걷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한다. 남편과 아이를 잃은 상처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역꾸역 삼키려던 알약을 토한 후 그녀는 자살을 포기한다.
완쾌되어 병원 문을 나선 줄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아이와 함께 가려 했던 여행의 목적지인 별장을 팔아치우는 일이었다. 가구들을 모두 정리하고 매트리스 하나만 덜렁 남겨진 별장에서의 마지막 밤, 줄리는 사고 현장에서 찾은 손가방을 정리하다가 푸른 셀로판지로 싼 막대 사탕 하나를 발견한다. 영화 도입부, 차 안에서 심심해하던 딸 안나가 빠끔 열린 차창 밖으로 꺼내 들고 가벼운 흔들림을 즐기던 셀로판지가 바로 그 사탕 껍질이었다. 줄리는 딸이 사탕을 한꺼번에 먹지 못하도록 하나만 주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 가방에 넣어두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딸이 마저 먹지 못한 그 막대 사탕을 벗겨 조심스레 혀를 대보다가, 이내 견딜 수 없다는 듯 우두둑 깨물어 먹는다.
곧바로 그녀는 수첩을 뒤적거려 평소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남자, 죽은 남편의 동료였던 올리비에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날 사랑해요?”라고 묻는다. 물론 줄리는 그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안다. 예상대로 올리비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줄리는 한 번 더 확인한다. “언제부터죠?” 줄리의 일방적인 물음에 올리비에는 속절없이 담담하게 고백한다. “당신 남편 패트릭과 일하던 순간부터…….” 그런 순간에 솔직할 수 있는 남자는 어른이다. 줄리는 그 어른 남자, 올리비에에게 당장 별장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룻밤을 함께 보낸 뒤 그녀는, 매트리스 위에서 아직 곤하게 잠들어 있는 올리비에의 코앞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는다. 작은 커피 잔에 절반쯤 찰랑이는 그 커피는 에스프레소일 것이다. 강렬한 커피 향 때문에 올리비에가 눈을 뜨자, 줄리는 어제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난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듯, 단호하게.
혼자 남겨진 올리비에가 언제, 어떻게 그 커피를 마셨는지는 영화에 안 나온다. 하지만 <블루>를 볼 때마다 그 커피 한 잔의 뒷소식, 참 각별하게 궁금해진다. 그 아침, 시트가 벗겨지고 나면 어떤 고급 제품이라도 누추해지는 맨 매트리스 위에 줄리가 조심스레 올려놓았던 그 커피 맛은 어땠을까? 아마 몹시 쓰고 진하지만 뒷맛이 좋은 커피였을 것 같다. 올리비에의 설렘과 기대감을 단번에 무너뜨린, 하룻밤만의 이별에 대한 쓰라림까지 강한 잔향으로 지워주었을 것 같다. 아직 애도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짐짓 센 척하는 여자가 떠나기 전 남긴, 이별 커피 한 잔. 따뜻하고, 안타깝고, 애잔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줄리는 타인의 온기를 빌려 상처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남자 곁을 떠난다. 하지만 홀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무정한 이별 커피까지 남긴 뒤 그곳을 벗어난 줄리의 그 다음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급하게 걸어 나가던 중, 갑자기 돌담에 손등을 들이대 긁어나간다. 손등과 손가락 마디가 드르륵, 피나게 돌담에 긁힌다.
줄리가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 때 택한 두 가지 방식은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방법 중 고른 것이다. 어떤 모습의 자신이라도 사랑해줄 것이라 믿는 사람의 온기에 기대보는 것, 또 스스로를 상처 내서 그 생생한 아픔으로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잠시나마 잊는 것. 어른이 고통을 다루는 방법은 그 두 가지 정도뿐이다. 타인에게 고통 전가하기, 떼쓰기는 통하지 않는다.
팔목에 제법 선명한 담뱃불 자국이 남아 있는 후배를 만난 적이 있다. 반팔을 입고 있어서 그 흉터 자국이 더 두드러져 보였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청춘기의 상흔이었다. 결혼할 사이라 믿었던 첫사랑 여자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고를 받은 뒤, 그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매다가 죄 없는 자기 몸에 그 고통을 풀어냈다. 약한 상대에게 분풀이를 해댄다거나 남에게 힘들어 죽겠다고 무작정 의지하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다. 막무가내로 투정을 부려 주변 사람을 들볶는 것보다는 자신의 몸으로 그 고통을 받아내는 것이 한 수 위가 아닐까.
엄살을 피우지 않고 똑바로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이 어른스럽고 나은 치유 방법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부작용은 따른다. 상처에 매달려 진을 빼고 난 뒤엔 감정마저 푸석하고 거칠어지기 십상이니까. 상처를 긁어내는 과정에서 유연한 마음까지 뭉텅 떨어져나가 버린 듯, 약간은 괴팍하고 무뚝뚝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 <블루>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병원에 입원 중인 줄리에게 인터뷰를 청했다가 거절당한 기자가 이런 말을 한다. “당신 변했군요. 예전의 당신은 이렇게 무례하진 않았잖아요.” 그러자 줄리는 자신의 현실을 되새겨준다. “모르시나본데, 저는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리고 남편과 딸을 잃었지요.”
넘어지지 않으려 휘청거리면서 겨우 무게 중심을 잡아나가는 사람에게, ‘우리 서로 예의는 지키고 살아야지요’ 하고 요구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 그래서 그 무언의 요구를 살며시 즈려밟으면, 영화 속 줄리처럼 단번에 너무나 변해버린 사람, 무례한 사람으로 비난받는다. 그래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병든 짐승처럼 은신처를 찾아 숨는 편을 택한다. 진심으로 그 사람을 믿는 사람, 자신의 퇴행조차도 모두 받아줄 사람과만 겨우 소통한다. 그 과정을 거치며 회복이 되어 세상에 나온 뒤에도, 그런 사람들은 그다지 사교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새 살은 돋았지만, 상처와 함께 긁혀나간 유연함과 여유는 그들에게서 보기 어렵다. 그건 아마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삶의 허무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큰 고통을 털고 일어난 사람에게서는 마르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고통을 치유하고 자유인이 된 줄리, 그런 그녀의 흔적을 계속 좇아가던 올리비에는 후에 담담히 서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게 된다. 같이 하룻밤을 보낸, 자신이 슬쩍 커피를 놓아두었던 바로 그 매트리스를 올리비에가 사들여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줄리는 또 한 번의 성은(!)을 내려주기도 한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좋은 가치들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라도, 사랑이 시키는 유치와 감상에는 즐겁게 반응했다. 전 세계 모든 사랑의 첫 단계는 아마도 감정적인 퇴행마저 서로 잘 봐주고 넘어가자는 합의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 <블루>에는 ‘자유인이 된 줄리와 올리비에는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식의 할리우드표 로맨틱 코미디다운 결말은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어쩐지 줄리와 올리비에는 좋은 친구로, 연인으로 거리를 잘 지켜가면서 함께 늙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올리비에는 절대 줄리의 자장 밖으로 나가지 않고 울타리 역할을 해주었을 것 같다. ‘이게 마지막이다’ 하고 독하게 돌아설 결심을 한 여자가 내린 모닝커피에서 희미한 실금 하나, 그 아름다운 균열을 보아버렸을 테니까. 꽁꽁 마음을 여민 여자에게 얼핏 보이는 가느다란 틈새는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는 커피의 뒷맛처럼, 상처를 한 꺼풀 덮으며 오래도록 진한 향기를 남긴다.
※ 지금까지 <외로워서 완벽한.>의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한방울 한방울 커피를 내리듯 마음을 내려 쓴 글들이 여러분에 사소하지만 소박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 외로워서 완벽한 장윤현 저 | 쌤앤파커스
'하고 싶은 이야기'와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세련된 감수성,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력으로 그려내는 영화감독 장윤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접속」, 「텔 미 썸딩」, 「썸」 등 그의 영화에는 늘 인간의 외로움과 폐쇄된 감정 그리고 상처와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묵직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황진이」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바리스타, 고종과 커피를 둘러싼 삶과 죽음을 그린 웰메이드 사극 영화 「가비」로 돌아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윤현(영화 감독)
1997년 영화 <접속>으로 데뷔해, 지금까지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수수한 회사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외모나 옷 입는 취향, 일상의 습관 모두 평범하다. 한눈에 영화감독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문화인다운 풍모도 없고, 촬영 현장에서의 카리스마가 풍문으로 나도는 사람도 아니다. 재기발랄함, 날렵하고 세련된 감각, 이런 것들하고도 거리가 멀다. 나는 그냥 단순 무식하게 꾸역꾸역 앞만 보고 가는 사람,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언제나 돌아가는 사람, 다만 오래 꾸준히 파고드는 사람이다. 그건 영화를 만들 때도 그렇고, 커피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커피에서 삶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발견했다. 내 주요 관심사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커피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때로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일이었다.
가끔은 삶이 엇나간다는 생각에, 상처 받아 숨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날 위로한 건 한잔의 커피였다.
작품으로는 <접속>(1997), <텔 미 썸딩>(1999), <썸>(2004), <황진이>(2007)…… 그리고 <가비>(2012)가 있다.
천사
2012.06.12
gda223
2012.05.05
prognose
2012.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