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독주회 맨 앞줄에 앉은 기분을 선사하는 시
서윤후 시인이 소개하는 언제 읽어도 기세를 꺾지 않는, 압도감을 주는 시집 세 권.
글 : 서윤후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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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알고 싶은 시들을 읽을 땐 대체로 이런 기분이었다. 독주회 맨 앞줄에 앉아 난데없이 쏟아지는 연주 속에서 함께 무더기가 되는 일. 그 압도되는 순간을 좋아했던가. 주변은 보이지 않고 오롯이 시인과 내가 독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함께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기분을 선사하는 시들은 언제 읽어도 그 기세를 꺾지 않는다. 어떤 고독을 치솟아 올랐기에 그럴까. 희미해지려고 할 때마다 이 시집들을 찾아 읽으며 그 뾰족함을 매만지곤 한다. 그런 곳에만 자꾸 손이 간다. 독주회를 끝내기 위해선 읽으며 들킨 얼굴을 시인에게 들려주어야만 한다.

 


『사랑의 솔기는 여기』

사이하테 타히 저/정수윤 역 | 마음산책

 

사이하테 타히의 시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게 시라고? 라는 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게 시란다, 하고 일컬어주는 기세는 자신을 찢고 나온 진짜 목소리 같았으니까. 텅 비어 있던 영혼을 들키게 하고, 사랑의 가장 썩어 있는 부분을 기꺼이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혼자 오셨어요? 하고 난 뒤의 민망함을 지우는 여기는 도시에서 가장 빛나는 솔기. 어쩌면 인간에게서 가장 어두운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영원히 모를 것 같다.

모든 동물에게 맛있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잊지 말라고 할 때마다, 너는 나를 잊었다.

꼭 돌아올게, 라는 인사만큼 사람을, 유령으로 만드는 것은 없다.” (「정령마의 시」 부분, 『사랑의 솔기는 여기』 71쪽)

 

그의 시가 스마트폰 케이스가 되어 팔리고, 그의 문장이 티슈 케이스나 어메니티로 새겨져 있는 호텔방이 연일 체크인 중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 실격된 마음에 발언권을 주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영원히 모를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그는 말을 배운 마음들에게 들은 것을 꾸밈없이 들려준다.


 

『점심 시집』

프랭크 오하라 저/송혜리 역 | 미행

 

프랭크 오하라의 독주는 ‘미행’ 덕분이다. (이 책의 출판사 이름이기도 하다) 그를 미행하면서 만나게 된 뉴욕 풍경, 한낮 점심의 뒤섞이는 소음 속에서 발 없는 산책을 하게 된다. 읽고 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분명, 우리는 헤매기도 하고 같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었는데. 없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세월이 없다. 엊그제 뉴욕 출신의 젊은 시인이 쓴 시처럼 읽힌다. 늙지 않는 시의 독주가 두 눈에 모래바람을 일으킨다. 무기력하고도 참혹하게 살아 있는 고독을 보여준다.

 

디저트를 먹을 시간이다 난 여기가 어떤 거리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너도 둘러보자고 말하고 있지 않잖아

나는 어떤 손톱도 발가락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계속 삶처럼 미묘하게 죽어 있고 싶어” (「중국 새해를 위해 그리고 빌 버크슨을 위해」 『점심 시집』 120-121쪽)


 

『우리 모두』

레이먼드 카버 저/고영범 역 | 문학동네

 

이번 독주회가 마지막 무대라면? 다음이 없는 박수갈채라면? 레이먼드 카버의 시집 차례다. 305편의 시가 한데 묶여 있는 『우리 모두』는 그가 남은 삶을 시에 바친 흔적이다. 소설가로 살아온 시간들을 저 건너면 강물에 흘려보내고, 떠내려오는 것들을 주워다 연주하는 시. 그런 의미에서의 마지막 악장이다. 

 

이 강가의 내 자리를 떠나기 전, 나는 여기서

마음껏 오후 시간을 보낼 것이다.

강을 사랑하는 일은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

강의 원천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사랑하는 일.

나를 불어나게 하는 모든 걸 사랑하는 일.” (「물이 다른 물과 합쳐지는 곳」 『우리 모두』 140쪽)

 

너무 두꺼워 한달음에 읽을 엄두가 나지 않고, 깜빡 졸다가 일어나 아무 데나 읽기 시작해도 좋을 이 광활한 마지막 악장은, 누군가에게 시작이 된다. 대자연에서 사랑을 일깨우는, 노년을 맞이한 여느 작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이 시들에게선 강물이 흐른다. 흐른다는 건 속절없이 가버리는 것이기도, 두서없이 오는 것이기도 하니까. 

 

이 모든 것이 침묵에게서 왔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나는 이 독주회를 떠날 수가 없다. 우리……… 맨 앞줄에서 만날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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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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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dong23

2025.09.10

"실격된 마음에 발언권을 주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영원히 모를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그는 말을 배운 마음들에게 들은 것을 꾸밈없이 들려준다." 시에 대한 정의 같아서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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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폐증

2025.09.10

잘 읽었습니다. 스쳐도 치명상인 시집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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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미의관심사

2025.09.10

오.. 다 스치기만 했던 시집인데 제대로 읽어볼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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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솔기는 여기

<사이하테 타히> 저/<정수윤> 역

출판사 | 마음산책

점심 시집

<프랭크 오하라> 저/<송혜리> 역

출판사 | 미행

우리 모두

<레이먼드 카버> 저/<고영범> 역

출판사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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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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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1938년 5월 25일 오리건주 클래츠커니에서 가난한 제재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재소, 약국, 병원 등에서 일하며 틈틈이 문예창작 수업을 받다가 1959년 치코주립대학에서 문학적 스승인 존 가드너를 만나게 된다. 이듬해 문예지에 첫 단편소설 「분노의 계절」이 실린다. 1963년 험볼트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아이오와주로 이사하여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 참여한다. 1967년 그의 작가로서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편집자 고든 리시를 만난다. 첫 시집 『겨울 불면』을 출간하고 이후 UC 버클리,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 등에서 강의를 하지만, 알코올중독, 아내와의 별거, 파산을 겪으며 불행한 삶이 이어진다. 1976년 첫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출간하고, 이듬해 이 작품이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다. 이후 구겐하임 기금, 아트 펠로십 소설 부문 국립기금, 미국 문학예술아카데미에서 수여하는 ‘밀드러드 앤드 해럴드 스트로스 리빙 어워드’를 수상하며 의욕적인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1983년 그의 대표작이라 평가받는 『대성당』을 출간했으며, 이 작품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퓰리처상 후보에 오른다. 미국 문학예술아카데미 회원이었으며, 1988년 암으로 사망한다.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에세이, 단편, 시를 모은 작품집 『정열』, 미발표 단편과 에세이 등을 묶은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시집 『우리 모두』 등을 펴냈다. 레이먼드 카버는 ‘미국의 체호프’라 불리며 1980년대 미국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