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디자이너 힘의 원천은 잔치국수 - 의류디자이너 진태옥
디자인실에만 들어가면 어떤 고통이든 다 잊을 수 있어요. 잔치국수가 피로를 씻어내 줬고요. 요즘에도 집에서 자주 만들어요. 육수에 멸치와 다시마는 물론이고 소고기를 꼭 넣어요. 고명으로도 소고기를 올리고요. 손자들이 “아이, 오늘 또 잔치국수야” 해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하면서 소고기 고명을 듬뿍 얹어주죠. 살아있는 한 저는 디자인을 할 거에요.
201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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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아 있게 한 잔치국수
옷도 말을 한다는 거 알아요? 옷감을 선택할 때부터 내게는 들려요, 옷의 속삭임이. ‘나를 선택해주세요, 나를 만들어주세요. 최고의 드레스가 되고 싶어요.’ 옷감을 집어든 순간, 제 눈에는 보여요. 어떤 옷이 될지. 그 순간 이후로 선택받은 옷감과 저의 열애가 시작되는 거죠. 옷감을 들고 디자인실에 들어가면서 가만히 쓰다듬죠. ‘이제부터 우리 둘이 뜨거운 밤을 보내보자꾸나.’ 며칠 밤을 보내고 드디어 옷이 됐을 때, 창가에 걸린 행복한 옷의 미소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렇게 옷과 디자인과 열애하면서 46년을 지나왔네요.
제 애인 디자인과 열애에 빠지도록 도와준 게 파리라는 도시에요. 처음 간 게 1971년이었죠. 무역업을 하던 남편하고 같이 갔어요. 그때는 외국의 최신 패션을 일본 잡지나 미 8군을 통해 구한 잡지에서 얻었어요. 책장을 넘길 때마다 크리스천 디올이니 이브생 로랑이니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황홀하게 펼쳐졌죠. 그런데 파리에 가니 정말로 디올의 상점이 있는 거예요. 이브생 로랑도 있고 샤넬도 있고, 잡지에서 보던 옷이 진짜 있었어요. 마치 로켓을 타고 우주에 간 것 같은 희열이었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샹젤리제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있는데, 차가 시동을 걸자마자 아,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 거예요.
아직도 울던 그 순간이 또렷해요. 시동 소리도 귀에 쟁쟁하고요. 옆에서 남편이 “친정 떠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울어” 하고 했죠.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단지 마음속으로 “언젠간 다시 와야지. 내 옷을 보여주러 꼭 와야지” 했던 건 기억나요. 그때만 해도 그런 꿈은 쪽배 타고 토끼 만나러 달나라 가겠다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었죠. 하지만 전 그걸 이루었어요.
제 양장점을 처음으로 연 게 1965년, 이화여대 앞에서였어요. 결혼해서 첫딸 낳고 살림하다가 시부모님 몰래 학원에 다녔는데, 6개월 만에 발각됐죠. 그때 제게는 디자인이 숨 쉴 탈출구였어요.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당연한 수순처럼 서울대 법대 시험을 봤어요. 그런데 떨어진 거예요. 실망도 실망이지만 창피했어요. 얼마 후 도피하듯 결혼을 했는데, 시어머니께서 제가 시집으로 들어간 날 가정부를 내보내시더라고요. 층층시하 시댁 어른 모시고 살림하는 일이 죄다 저한테 떨어진 거죠. 돌파구가 있어야겠다 싶을 때 저를 찾아와준 게 디자인이에요.
옷가게 연 첫날에 딱 일곱 벌 걸어놨는데 그날 다 팔렸어요. 다음날에도 새벽부터 원단 시장에 가서 천을 끊어다가 만들어 걸었는데 역시나 내놓기 무섭게 나갔죠. 디자인이 미치도록 사랑하고 때로는 죽도록 밉기도 한 애인이라면, 옆에서 말없이 묵묵하게 힘을 주고 응원해주는 게 잔치국수예요. 내 평생의 동반자죠.
제 고향이 함경북도 원산인데, 어렸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먹은 게 잔치국수예요. 외가가 100호쯤 되는 씨족 마을에 살았거든요. 한 집만 잔치를 해도 마을 전체가 모였어요. 늘 어느 집에선가 환갑이나 생일, 혹은 혼인 잔치가 열렸죠. 그때마다 잔치국수가 빠지지 않았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열한 살 때 어머니하고 남한으로 왔더니 피란민이라고 미국에서 원조 받은 밀가루를 나눠줬어요. 어머니가 그걸로 또 매일 같이 잔치국수를 끓여주셨어요. 밥보다 자주 먹었죠. 그러면서 어느 샌가 제 안에 그 맛이 새겨져 있었나봐요.
잔치국수의 기억이 송두리째 저를 사로잡은 건 결혼하고 나서였어요. 첫 아이 임신하고 한참 입덧을 할 때였죠. ‘ㅁ’자로 생긴 한옥에서 살았는데, 옆방 사는 분이 소반에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담아 방으로 가져가는 걸 본 거예요. 아, 저걸 먹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어요. 야속하게도 옆방에서는 나눠줄 기미가 없었고요. 훔쳐서라도 먹고 싶더라고요. 좀 지나니까 눈물이 날 정도인 거예요. 보다 못한 남편이 그 집에 가서 한 그릇 얻어왔어요. 가져오기가 무섭게 받아들고 먹었는데, 애쓴 남편한테 한번 먹어보란 소리도 안 하고 정신없이 한 그릇을 비웠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더라고요. 이번에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어요. 그제야 살 거 같고, 기운이 나면서,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솟았어요.
나를 사로잡은 잔치국수의 힘을 그제야 알게 됐죠. 그저 부담 없이 즐겨 먹는 요리가 아니라 나를 살아있게 하는 음식이라는 걸요. 시부모님 몰래 명동에 있는 학원 다니면서 학원 근처에서 사먹었던 것도 잔치국수였죠. 솜씨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그 맛이 투지를 불사르게 했죠.
잔치국수는 꿈의 도시 파리에서 내 쇼를 성공하게 도와준 최고의 친구이기도 해요. 떠나는 차의 시동 소리조차 서럽게 느껴졌던 그곳에서 20여 년 만에 쇼를 하게 됐는데, 막상 도착하니 몸이 매우 피곤했어요. 쇼하기 이틀 전에 도착했는데, 가기 전에 한국에서 며칠 밤을 새운 데다, 비행기 타고 열두 시간 만에 도착하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죠. 하지만 그때부터 쉬지 않고 작업을 해야 무대 준비가 가능했어요. 먹고 힘을 내야겠다 싶어서 열 명쯤 되는 직원들 데리고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갔어요. 불고기를 잔뜩 시켰는데 영 당기지가 않았어요. 식당 사장님께 “미안하지만 잔치국수 될까요?” 물었더니 어떻게 아셨는지 “대한민국의 대표 디자이너가 오셨는데 당연히 해드려야죠” 하셨어요. 한 그릇 먹으니 땀이 쫙 나면서 발끝에서부터 주욱주욱 힘이 충전되는 느낌이 오지 뭐예요.
아름드리나무를 옮겨 심으면 시름시름 앓는다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국(異國)에서 적응하려면 수액과 같은 음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게는 그게 잔치국수였던 거고요. 이틀 동안 삼시세끼 잔치국수만 먹었어요. 쇼? 당연히 성공했죠. 이런 디자인 처음 봤다고 현지 언론에서 난리였어요.
파리의 성공은 뉴욕 진출로까지 이어졌죠. 최고의 백화점인 버그도프굿맨에 들어가게 됐으니까요. 물론 단박에 뚝딱 이뤄진 건 아니었어요. 1984년에 처음 문을 두드렸죠. 내 옷을 트렁크에 가득 담고서 무작정 담당 바이어를 찾아갔어요. 사무실 앞에 앉은 비서가 약속했느냐고 물었어요. “아마 잡혀 있을 테니 찾아보라”고 하고는 비서가 확인하려는 찰나에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어요. 깜짝 놀라는 바이어가 뭐라고 대응하기 전에 트렁크 지퍼를 촤악 열고 옷을 하나씩 꺼내서 바이어 눈앞에 던져줬어요.
혹시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 보셨나요? 주인공 개츠비가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옷장을 보여주면서 색색 가지 셔츠를 허공에 날리거든요. 데이지가 셔츠에 얼굴을 묻으면서 ‘이렇게 예쁜 셔츠는 본 적이 없다’고 감탄하는데, 그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였죠. 개츠비가 데이지를 아무리 사랑했어도 그 순간의 나만큼 절박하진 않았을지도 몰라요.
바이어가 한참을 보더니 “옷은 예쁜데 얼마냐”고 물었어요. 도매가로 198달러라고 하니까 “한국 제품이 뭐가 그렇게 비싸냐”는 거예요. “나는 한국 제일의 디자이너니까 디자인 값을 받아야 한다”고 쏘아붙여 주고는 다시 싸갖고 왔죠. 첫 도전은 장대하게 실패했지만 결국 들어갔어요. 파리 쇼 끝나고 버그도프굿맨이 주문을 한 거였죠. 자그마치 30만 달러어치를요. 이세이 미야케, 꼼므데가르송, 장폴고티에 등과 나란히 제 옷이 걸렸어요. 결과는 니트 몇 개만 빼고 완판. ‘드디어 내가 한국 패션의 깃발을 뉴욕에 꽂았구나’ 싶어서 진정 뿌듯했어요.
한때는 천지가 내 것이었죠. 세상에 디자이너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고 ‘아, 역시 나는 똑똑한가봐’ 교만이 하늘을 찔렀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요. 하지만 곧 쓰디쓴 날들이 닥쳤어요. 계산 없이 사업을 벌이기만 하고 수습을 못 하니까 어느 날부터는 돈 회전이 안 되는 거예요. 직격탄은 IMF 구제금융사태였어요. 다 정리해야 했어요. ‘베베프랑소와즈’며 ‘진태옥옴므’며 자식 같은 브랜드를 전부 접었어요. ‘진태옥’ 브랜드 하나만 남기고.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자식들 있는 데서 울 수도 없고,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기 세게 틀어놓고 물줄기 맞으면서 엉엉 울던 날이 며칠이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안 되면 운전을 했어요. 음악을 틀어놓고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질렀어요.
그때도 디자인이 피난처이자 은신처가 돼줬어요. 디자인실에만 들어가면 어떤 고통이든 다 잊을 수 있어요. 잔치국수가 피로를 씻어내 줬고요. 요즘에도 집에서 자주 만들어요. 육수에 멸치와 다시마는 물론이고 소고기를 꼭 넣어요. 고명으로도 소고기를 올리고요. 손자들이 “아이, 오늘 또 잔치국수야” 해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하면서 소고기 고명을 듬뿍 얹어주죠. 살아있는 한 저는 디자인을 할 거에요. 제 평생의 열애를 완성해야죠. 간혹 지치고 힘들 때는 저의 동반자 잔치국수가 도와줄 테지요.
옷도 말을 한다는 거 알아요? 옷감을 선택할 때부터 내게는 들려요, 옷의 속삭임이. ‘나를 선택해주세요, 나를 만들어주세요. 최고의 드레스가 되고 싶어요.’ 옷감을 집어든 순간, 제 눈에는 보여요. 어떤 옷이 될지. 그 순간 이후로 선택받은 옷감과 저의 열애가 시작되는 거죠. 옷감을 들고 디자인실에 들어가면서 가만히 쓰다듬죠. ‘이제부터 우리 둘이 뜨거운 밤을 보내보자꾸나.’ 며칠 밤을 보내고 드디어 옷이 됐을 때, 창가에 걸린 행복한 옷의 미소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렇게 옷과 디자인과 열애하면서 46년을 지나왔네요.
제 애인 디자인과 열애에 빠지도록 도와준 게 파리라는 도시에요. 처음 간 게 1971년이었죠. 무역업을 하던 남편하고 같이 갔어요. 그때는 외국의 최신 패션을 일본 잡지나 미 8군을 통해 구한 잡지에서 얻었어요. 책장을 넘길 때마다 크리스천 디올이니 이브생 로랑이니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황홀하게 펼쳐졌죠. 그런데 파리에 가니 정말로 디올의 상점이 있는 거예요. 이브생 로랑도 있고 샤넬도 있고, 잡지에서 보던 옷이 진짜 있었어요. 마치 로켓을 타고 우주에 간 것 같은 희열이었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샹젤리제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있는데, 차가 시동을 걸자마자 아,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 거예요.
아직도 울던 그 순간이 또렷해요. 시동 소리도 귀에 쟁쟁하고요. 옆에서 남편이 “친정 떠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울어” 하고 했죠.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단지 마음속으로 “언젠간 다시 와야지. 내 옷을 보여주러 꼭 와야지” 했던 건 기억나요. 그때만 해도 그런 꿈은 쪽배 타고 토끼 만나러 달나라 가겠다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었죠. 하지만 전 그걸 이루었어요.
제 양장점을 처음으로 연 게 1965년, 이화여대 앞에서였어요. 결혼해서 첫딸 낳고 살림하다가 시부모님 몰래 학원에 다녔는데, 6개월 만에 발각됐죠. 그때 제게는 디자인이 숨 쉴 탈출구였어요.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당연한 수순처럼 서울대 법대 시험을 봤어요. 그런데 떨어진 거예요. 실망도 실망이지만 창피했어요. 얼마 후 도피하듯 결혼을 했는데, 시어머니께서 제가 시집으로 들어간 날 가정부를 내보내시더라고요. 층층시하 시댁 어른 모시고 살림하는 일이 죄다 저한테 떨어진 거죠. 돌파구가 있어야겠다 싶을 때 저를 찾아와준 게 디자인이에요.
옷가게 연 첫날에 딱 일곱 벌 걸어놨는데 그날 다 팔렸어요. 다음날에도 새벽부터 원단 시장에 가서 천을 끊어다가 만들어 걸었는데 역시나 내놓기 무섭게 나갔죠. 디자인이 미치도록 사랑하고 때로는 죽도록 밉기도 한 애인이라면, 옆에서 말없이 묵묵하게 힘을 주고 응원해주는 게 잔치국수예요. 내 평생의 동반자죠.
제 고향이 함경북도 원산인데, 어렸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먹은 게 잔치국수예요. 외가가 100호쯤 되는 씨족 마을에 살았거든요. 한 집만 잔치를 해도 마을 전체가 모였어요. 늘 어느 집에선가 환갑이나 생일, 혹은 혼인 잔치가 열렸죠. 그때마다 잔치국수가 빠지지 않았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열한 살 때 어머니하고 남한으로 왔더니 피란민이라고 미국에서 원조 받은 밀가루를 나눠줬어요. 어머니가 그걸로 또 매일 같이 잔치국수를 끓여주셨어요. 밥보다 자주 먹었죠. 그러면서 어느 샌가 제 안에 그 맛이 새겨져 있었나봐요.
잔치국수의 기억이 송두리째 저를 사로잡은 건 결혼하고 나서였어요. 첫 아이 임신하고 한참 입덧을 할 때였죠. ‘ㅁ’자로 생긴 한옥에서 살았는데, 옆방 사는 분이 소반에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담아 방으로 가져가는 걸 본 거예요. 아, 저걸 먹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어요. 야속하게도 옆방에서는 나눠줄 기미가 없었고요. 훔쳐서라도 먹고 싶더라고요. 좀 지나니까 눈물이 날 정도인 거예요. 보다 못한 남편이 그 집에 가서 한 그릇 얻어왔어요. 가져오기가 무섭게 받아들고 먹었는데, 애쓴 남편한테 한번 먹어보란 소리도 안 하고 정신없이 한 그릇을 비웠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더라고요. 이번에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어요. 그제야 살 거 같고, 기운이 나면서,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솟았어요.
나를 사로잡은 잔치국수의 힘을 그제야 알게 됐죠. 그저 부담 없이 즐겨 먹는 요리가 아니라 나를 살아있게 하는 음식이라는 걸요. 시부모님 몰래 명동에 있는 학원 다니면서 학원 근처에서 사먹었던 것도 잔치국수였죠. 솜씨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그 맛이 투지를 불사르게 했죠.
잔치국수는 꿈의 도시 파리에서 내 쇼를 성공하게 도와준 최고의 친구이기도 해요. 떠나는 차의 시동 소리조차 서럽게 느껴졌던 그곳에서 20여 년 만에 쇼를 하게 됐는데, 막상 도착하니 몸이 매우 피곤했어요. 쇼하기 이틀 전에 도착했는데, 가기 전에 한국에서 며칠 밤을 새운 데다, 비행기 타고 열두 시간 만에 도착하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죠. 하지만 그때부터 쉬지 않고 작업을 해야 무대 준비가 가능했어요. 먹고 힘을 내야겠다 싶어서 열 명쯤 되는 직원들 데리고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갔어요. 불고기를 잔뜩 시켰는데 영 당기지가 않았어요. 식당 사장님께 “미안하지만 잔치국수 될까요?” 물었더니 어떻게 아셨는지 “대한민국의 대표 디자이너가 오셨는데 당연히 해드려야죠” 하셨어요. 한 그릇 먹으니 땀이 쫙 나면서 발끝에서부터 주욱주욱 힘이 충전되는 느낌이 오지 뭐예요.
아름드리나무를 옮겨 심으면 시름시름 앓는다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로 이국(異國)에서 적응하려면 수액과 같은 음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게는 그게 잔치국수였던 거고요. 이틀 동안 삼시세끼 잔치국수만 먹었어요. 쇼? 당연히 성공했죠. 이런 디자인 처음 봤다고 현지 언론에서 난리였어요.
파리의 성공은 뉴욕 진출로까지 이어졌죠. 최고의 백화점인 버그도프굿맨에 들어가게 됐으니까요. 물론 단박에 뚝딱 이뤄진 건 아니었어요. 1984년에 처음 문을 두드렸죠. 내 옷을 트렁크에 가득 담고서 무작정 담당 바이어를 찾아갔어요. 사무실 앞에 앉은 비서가 약속했느냐고 물었어요. “아마 잡혀 있을 테니 찾아보라”고 하고는 비서가 확인하려는 찰나에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어요. 깜짝 놀라는 바이어가 뭐라고 대응하기 전에 트렁크 지퍼를 촤악 열고 옷을 하나씩 꺼내서 바이어 눈앞에 던져줬어요.
혹시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영화 ‘위대한 개츠비’ 보셨나요? 주인공 개츠비가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옷장을 보여주면서 색색 가지 셔츠를 허공에 날리거든요. 데이지가 셔츠에 얼굴을 묻으면서 ‘이렇게 예쁜 셔츠는 본 적이 없다’고 감탄하는데, 그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였죠. 개츠비가 데이지를 아무리 사랑했어도 그 순간의 나만큼 절박하진 않았을지도 몰라요.
바이어가 한참을 보더니 “옷은 예쁜데 얼마냐”고 물었어요. 도매가로 198달러라고 하니까 “한국 제품이 뭐가 그렇게 비싸냐”는 거예요. “나는 한국 제일의 디자이너니까 디자인 값을 받아야 한다”고 쏘아붙여 주고는 다시 싸갖고 왔죠. 첫 도전은 장대하게 실패했지만 결국 들어갔어요. 파리 쇼 끝나고 버그도프굿맨이 주문을 한 거였죠. 자그마치 30만 달러어치를요. 이세이 미야케, 꼼므데가르송, 장폴고티에 등과 나란히 제 옷이 걸렸어요. 결과는 니트 몇 개만 빼고 완판. ‘드디어 내가 한국 패션의 깃발을 뉴욕에 꽂았구나’ 싶어서 진정 뿌듯했어요.
한때는 천지가 내 것이었죠. 세상에 디자이너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고 ‘아, 역시 나는 똑똑한가봐’ 교만이 하늘을 찔렀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요. 하지만 곧 쓰디쓴 날들이 닥쳤어요. 계산 없이 사업을 벌이기만 하고 수습을 못 하니까 어느 날부터는 돈 회전이 안 되는 거예요. 직격탄은 IMF 구제금융사태였어요. 다 정리해야 했어요. ‘베베프랑소와즈’며 ‘진태옥옴므’며 자식 같은 브랜드를 전부 접었어요. ‘진태옥’ 브랜드 하나만 남기고.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자식들 있는 데서 울 수도 없고,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기 세게 틀어놓고 물줄기 맞으면서 엉엉 울던 날이 며칠이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안 되면 운전을 했어요. 음악을 틀어놓고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질렀어요.
그때도 디자인이 피난처이자 은신처가 돼줬어요. 디자인실에만 들어가면 어떤 고통이든 다 잊을 수 있어요. 잔치국수가 피로를 씻어내 줬고요. 요즘에도 집에서 자주 만들어요. 육수에 멸치와 다시마는 물론이고 소고기를 꼭 넣어요. 고명으로도 소고기를 올리고요. 손자들이 “아이, 오늘 또 잔치국수야” 해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하면서 소고기 고명을 듬뿍 얹어주죠. 살아있는 한 저는 디자인을 할 거에요. 제 평생의 열애를 완성해야죠. 간혹 지치고 힘들 때는 저의 동반자 잔치국수가 도와줄 테지요.
- 맛있다, 내 인생 신정선 저 | 예담
맛은 추억이고, 위로이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어릴 적 먹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기어이 찾아다니며 먹는다. 추억을 음미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이순재 신경숙 이승철 에드워드권 김대우 윤대녕 패티김 배병우 김수영 황주리 강수진 박찬일 이원복 하성란 이지나 배한성 서상호 이진우 진태옥 문훈숙 이왈종 장석주 조태권 이희 승효상 전무송 정끝별 안효주 김윤영 조은과 같은 이 시대 최고의 명사들과 함께 한 끼 식사를 나누며,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간절한 맛의 기억을 함께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8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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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신정선
1974년 3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언어학과를 어렵게 입학해 간신히 졸업했다. 2001년 8월 수습 41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날마다 책상에 머리를 찧으며 기사를 쓴다. 2011년 12월 현재 문화부에서 공연을 담당한다.
inee78
2013.05.30
만다
2013.03.20
yerim49
201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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