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사랑에 대한 온갖 편견과 기우(杞憂)가 난무하는 시간
미처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두려움부터 앞서는 것. 진짜 실천하는 시간보다는 미리부터 고민하는 시간이 많은 것. 시작하기 전의 마음과 끝나고 난 후의 마음이 너무 달라, 마치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당혹스러운 신비. 갓 스무 살이 되던 해, 내게 사랑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짝사랑 말고는 해본 적이 없으면서 사랑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기이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느닷없이 닥쳐올 사랑에 대한 어설픈 방어심리였다. 나는 문학 작품 속에 나오는 온갖 사랑의 서사를 알고 있기에, 사랑에 빠지는 마음에도 일종의 ‘경우의 수’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이 오면 저렇게 대처하고, 저런 사랑이 오면 이렇게 대처하리라 하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사랑의 방정식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난 절대로 사랑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거야’라고 결심해버렸다. 스무 살 풋내기에게 사랑은 가장 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천방지축 날라리 여고생이었던 나는 막상 대학생이 되자 집안에서만 반짝반짝 빛나는 공주님이고 집밖에만 나가면 무미건조한 ‘행인1’로 전락해버리는, 전형적인 소심녀가 되어갔다. 사랑은 물론이고 어떤 감정이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사랑이 두려웠을까.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랑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들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리는 축복, 큐피드의 화살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런던 피카딜리 광장에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1년 365일 쉴 틈 없이 ‘큐피드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는 장난꾸러기 소년 에로스. 나는 올림포스의 어떤 신들보다도 말썽꾸러기 소년 에로스(큐피드)가 좋다. 아무리 위대한 존재도 큐피드의 화살에 맞으면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린다니, 이 얼마나 공평하고 우스꽝스러운가. |
진짜 사랑은 오직 3년만 지속된다?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다?
20대의 사랑을 둘러싼 고민 중의 하나는 ‘사랑의 생물학적 지속기간’에 대한 무성한 갑론을박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이야기했다. 진짜 사랑이 지속되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봐야 3년 정도라고. 어떤 선배는 ‘2개월’이라고, 어떤 선배는 ‘4주’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 신기한 건, 그 사람만 봐도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생물학적인 떨림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난 후에도, 새로운 설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 만나게 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물론 손잡을 때마다 가슴이 떨리던 심각한 증상은 없어졌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설렘이 시작되었다.
함께 할 시간에 대한 설렘, 함께 만들어갈 인생에 대한 설렘. 그것이 바로 연애 시절과는 또 다른 사랑의 기쁨인 것이다. 멀리서 그 사람의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뛰던 시절은 지났지만, ‘우리가 함께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시간이 얼마나 풍요로운 가능성으로 넘쳐날까를 생각하면, 그 설렘은 오히려 연애 초기의 설렘보다도 더 애틋해진 것 같다.
오랫동안 인생을 함께 해온 커플들의 특징은, ‘사랑의 유효기간’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연애 기간에는 ‘사랑’에 매진했다면, 결혼 후에는 ‘함께 할 인생’에 매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는 모든 현란한 정의들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것 같다. 그 모든 사랑의 정의는 커플들마다, 인생의 시기마다,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들어갈 ‘사랑’을 넘어서서, ‘우리가 함께 할 미래’에 대한 설렘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진다. 우정이나 의리 때문만은 아니다. 오랫동안 사랑하고 함께 지내온 사람과만 은밀하고 배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설렘. 그것은 연애 초기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인생에 대한 충만한 기쁨이 아닐까.
에로스와 프시케, 영원한 사랑을 연주하다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위대한 아폴론에게도 건방지게 화살을 쏘아, 천하의 아폴론을 ‘외사랑에 빠진 불쌍한 총각’으로 전락시킨 큐피드. 게다가 다프네에게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화살’을 쏘아 그녀는 아폴론에게서 도망치다가 마침내 월계수 나무로 변해버린다. 이렇게 오만하고 철없던 에로스도 막상 자신이 사랑에 빠지자 어쩔 줄 모르고 걷잡을 수 없이 프시케에게 빠져든다. 그 모든 치명적인 금기를 뛰어넘어, 마침내 절대로 용납될 수 없었던 ‘신’과 ‘인간’의 사랑은 마침내 이루어지게 된다. |
사랑보단, 자존심?
사랑이란, 그가 내 아픔의 끝없는 기원임을 기쁘게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설렘보다 두려움이 컸던 나의 20대엔, 항상 사랑보다 자존심이 더 앞서곤 했던 것, 사랑보다 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후회된다. 자존심은 언제든 되찾을 수 있지만, 깨어진 사랑은 되찾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 신중함보다 열정이 앞섰던 20대에는, 사랑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몰랐다. 가장 깨어지기 쉬운 마음의 그릇, 사랑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부끄러워 말고, 사랑받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자. 사랑하기 위해 드는 모든 발품을 귀찮아하지 말자. 사랑이 끝난 후에 다가올 어떤 아픔도, 미리부터 두려워하지 말자. 그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어떤 낯선 공간, 시간,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 가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이고, 그런 사랑을 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실패로 끝난 사랑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신기하게도 우리 인생의 또 다른 에너지가 되어준다. 사랑이 끝나도,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어도, 추억은 마치 사랑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개체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불현듯 한기에 떨고 있는 우리의 삶을 따스하게 밝혀주곤 한다. 어떤 공부보다도, 어떤 경험보다도, 우리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시킬 수 있는 힘. 그건 바로 사랑만이 가진 특별한 힘이니까.
p.s. 다음 주에는 20대에 간직해야 할 소중한 키워드, ‘사랑’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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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정여울은…
타칭 문학평론가, 자칭 글쟁이 또는 글순이.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여행과 음악을 짝사랑하는 사람.
<한겨레신문>에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네필 다이어리1, 2≫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미디어 아라크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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