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빌딩이 물에 잠긴다고? 대국민 사기극의 전말
1986년은 ‘폭풍 전야의 고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쓰나미 전야의 폭풍’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권력집단은 기존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온갖 명분을 끌어대며 살기등등하게 나왔다. 저항세력 역시 체제를 바꾸기 위해 절박한 몸짓으로 대들었다. 두 집단의 쉼 없는 쟁투 속에서 1986년 내내 폭풍이 몰려왔다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는 1987년의 대격변이라는 쓰나미로 이어졌다.
글ㆍ사진 고경태
201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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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은 안 쓰련다.
아버지의 스크랩은 1987년을 특별대우한다. 보통 한 해에 한 권씩인데, 그 해만 유독 두 권이다. 이해는 한다. 대한민국 권력의 지형을 흔들었던 성난 민심의 6월항쟁. 스크랩에선 전국 방방곡곡의 시위를 전하는 기사들이 시위대처럼 긴 행렬을 이루고 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1987년 7월의 적막하고 텅 빈 서울 변두리 사거리에서 환청처럼 들려오던 구호소리.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하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ㆍ29선언 직후였다. 20여 일간 전쟁처럼 북적거리던 시위 인파들이 깜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데모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주위를 두리번거려보았다. 스크럼 대열은 없었다. 한데도 저 아득한 도로의 끝에서 무언가 윙윙거리는 소음이 내 귓속을 이명처럼 파고들었다. 당시 대학교 3학년. 6월 내내 아스팔트 위에서 시위대의 함성을 과하게 흡수했던 내 청각기관의 일시적 장애였을까?

1987년은 너무 유명한 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략하려고 한다. 대신 1986년을 쓴다. 내 경험과 기억을 중심으로 1980년대를 돌아볼 때, 1986년은 마치 닐 암스트롱과 함께 달에 갔다가 순서에 밀려 두세 번째로 달 표면을 밟은 미국 우주인 같다. 덜 극적이어서 정당한 대접을 못 받는 느낌이다.

1986년은 ‘폭풍 전야의 고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쓰나미 전야의 폭풍’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권력집단은 기존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온갖 명분을 끌어대며 살기등등하게 나왔다. 저항세력 역시 체제를 바꾸기 위해 절박한 몸짓으로 대들었다. 두 집단의 쉼 없는 쟁투 속에서 1986년 내내 폭풍이 몰려왔다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는 1987년의 대격변이라는 쓰나미로 이어졌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18권에서 단 한 권으로 정리된 1986년 폭풍의 언덕을 되돌아본다. 딱 10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본 폭풍들의 핵이다.


1. 개헌



“개헌논의 89년에 가시화”
한번도 정권교체 이룬 적 없어
전 대통령 새해 국정연설
법질서 파괴행위 단호히 규제


전두환 대통령은 16일 “지금은 내외의 비상한 난국을 극복하고 초미의 국가적 과제를 성취하는 데 국력을 총집중할 시기”이라고 전제한 후 “대통령 선거방법의 변경에 관한 문제는 평화적 정권교체의 선례와 서울올림픽 개최라는 긴급한 국가적 과제가 성취되고 난 연후인 오는 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강조했다. 전 대통령은 이날 상오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된 86년도 국정연설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물론 법이나 제도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헌법에 따른 평화적 정권교체를 단 한 차례도 실현치 못한 현 단계에서 헌정제도의 변경을 위한 논의에 골몰하는 것은 국민여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분산시켜 난국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특히 “오는 88년까지 2년 남짓한 기간은 국정을 맡은 본인의 소명을 마무리하는 시기일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우리 세대의 공과와 우리 민족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참으로 중대한 갈림길”이라고 말하고 ▲오는 88년 봄까지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가원수가 소정의 임기를 마치고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해야 할 과제와 ▲같은 해 가을에는 서울에서 우리민족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우리 겨레의 무궁한 정력을 세계에 유감없이 과시해야 하며 ▲그때까지 남북한 관계가 더 이상 전쟁의 공포와 분단의 세기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확고한 기틀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략)

(<한국일보> 1986년 1월17일치)






당시 한국인들에겐 대통령을 뽑을 ‘한 표의 권리’가 없었다. 대통령은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뽑았다. 박정희의 유신헌법 이후 사라진 직선제였다.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은 “박정희에 비하면 내가 양반”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박정희는 유신으로 평생 대통령을 해먹으려고 했다. 그로 인해 제 명에 죽지 못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딱 한 번만 하겠다고 했다. 이를 헌법으로 못 박았다. 대신 임기는 7년으로 길었다. 전두환은 이를 가리켜 ‘평화적 정권교체’라 불렀다. 겉으로만 그럴싸해 보였다. 전두환은 총칼로 집권했다. 주권자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직선제 같은 자유로운 선거 환경은 위험했다. 다음 대통령 자리를 후계자에게 물려줘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싶었다. 어쩌면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위 기사에서 보듯, 전두환은 1986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개헌 논의를 1989년으로 미뤘다. ‘평화적 정권교체’는 그 중에서도 첫 번째 명분이었다.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 수립이 더 급하지 않냐는 거였다. 두 번째는 88올림픽이었다. 이 국가적 과제를 앞에 두고 시시껄렁한 정쟁은 삼가자고 했다. 1986년은 개헌불가로 시작했다. 끝날 때도 개헌불가였다. 개헌의 ‘개’자만 떠들어도 개처럼 두들겨 패던 개같은 시절이었다. 권력자들은 개싸움을 해서라도 개헌논의를 차단해야 했다. 그 처음과 끝을 보여주는 기사 세 편을 보자.






경찰 3,000명 서울대에 투입
‘서명운동’ 학생 252명 연행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경인지역 15개 대학생 1천여명이 4일 정오 서울대에 모여 ‘86전학련신년투쟁 및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결성대회’를 가진 후 시위를 벌이며 교문밖으로 진출하려 하자 서울시경은 정사복경찰 3천여명을 서울대에 투입, 진압작전을 펴 강제해산시키고 15개대생 2백52명(여학생 53명 포함)을 연행했다.

(<동아일보> 1986년 2월5일치)





전국 114개 대학 수색
어제 밤 경찰ㆍ교직원 2,500여명 동원


경찰은 14일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전국 1백14개 대학의 1백29개 캠퍼스를 일제히 수색했다.
치안본부의 지시에 따라 이날 전격적으로 실시된 이번 수색은 전국의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경찰이 전 대학의 모든 캠퍼스를 일제히 동시수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작년 6월29일 새벽에는 서울지역 7개대 등 전국 9개 대학에 대한 수색이 있었다.

(<동아일보> 1986년 2월15일치)





도심서 숨바꼭질 시위
학생 등 1만여명 곳곳 기습
최루탄ㆍ투석 공방…교통 마비


신민당 개헌추진 서울대회는 6만명 병력을 투입한 경찰의 저지장벽과 철저한 예비검속으로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대회에 참가하려는 당원 학생 등 1만여명(경찰추산)의 산발적인 시위로 종로 광화문 서대문 일대 도심지역에서 벌어져 한때 차량과 행인의 통행이 차단되고 교통이 마비됐다.(하략)

(<한국일보> 1986년 11월30일치)




신민당은 1986년 2월12일부터 대통령직선제 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한다. 대학생들은 한 발 앞섰다. 2월4일 1천명이 서울대에 모여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결성대회’를 열자 경찰은 3천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252명을 연행했다. 일주일 뒤엔 전국 1백14개 대학 캠퍼스를 하룻밤새 일제히 수색했다. 기사에서 보듯 “경찰이 전 대학의 모든 캠퍼스를 일제히 동시수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부가 개헌에 얼마나 민감하게 대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3월부터는 ‘학문의 자유와 민주화 보장’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터져나왔다. 개헌운동은 신민당 개헌추진위 경인지부 결성식이 열린 5월3일 인천에서 극단적 양상을 띠기도 했다. ‘5.3 인천사건’이다. 이날 구름처럼 인천 시내에 모인 학생과 재야세력은 민정당사와 신민당 승용차를 불태우며 ‘정권 타도’를 외쳤다. 이민우가 총재였던 신민당의 보수대연합 움직임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공안당국은 학생들이 가스차를 기습해 경찰을 구타하는 장면을 내보내며 ‘폭력시위’를 비난했다.

위 마지막 기사에서 보듯, 11월에도 정부의 태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름에 잠시 여야가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발족했지만, 여당은 의원내각제를 고집해 특위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경찰은 11월29일 신민당 개헌추진 서울대회을 막기 위해 6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아, 6만명! 개헌은 끝까지 안 되는 거였다. 87년 4월3일엔 전두환이 모든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87년 6월의 거리에서 ‘호헌철폐’의 구호가 울려 퍼졌던 이유다.


2. 전방

전방입소는 대학생의 의무였다. 교련은 정규과목이었다. 교련을 이수하기 위해선 두 번의 특별 군사교육을 마쳐야만 했다. 하나는 경기도 성남에 있는 문무대에 일주일간 입소하는 병영집체훈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휴전선 인근의 전방부대에 일주일간 입소해 철책 경계근무 경험을 하는 것이었다. 문무대는 1학년 때, 전방은 2학년 때 갔다.

특혜도 주어졌다. 하나의 입소훈련을 마치면 45일간의 병역 복무일 감축특혜가 주어졌다. 두 가지를 이수하면 90일. 당시 육군 현역복무일이 30개월이었으므로, 문무대와 전방을 다녀온 사람은 군 복무기간이 27개월로 줄어들었다.(18개월 방위복무자는 총 21일의 감축 특혜가 주어졌다.)

당시 대학가엔 NL(민족해방)계열의 운동권이 급부상 중이었다. 한-미관계가 제국주의-식민지 관계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긴 그들은 미국을 먼저 타도해야 할 주적으로 보았다. 국내 독재정권은 미국에 복무하는 허수아비쯤에 불과했다. 반미투쟁을 통해 주적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방입소는 그 적절한 기회였다. “양키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란 구호는 NL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반대 계열의 학생운동 세력도 동참했다. 나라를 지키는 연습을 한다는 전방입소 교육이, 실제로는 미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용병교육이란 논리. 일반 학생들의 민족주의 감성을 자극하는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들이 많았다. 낯설고 생경했다.






서울대 ‘시위진통’ 심각
세 곳서 격렬농성…반미구호 외쳐
본부 유리창 부숴 경찰 투입
일부 학생 수업 전면거부 결의도
전방입소 24명 제외 대부분 출발


전방입소 문제를 둘러싸고 대학가가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28일 서울대생 2명이 분신자살을 기도하고 2천1백여 명이 전방입소훈련을 반대하며 3개소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입소대상인 2학년생을 주축으로 해 벌어진 이날 시위에서는 전방입소 거부 뿐 아니라 반미구호로까지 이어졌다.(하략)


분신자살 기도 둘 중태
3층 건물 옥상서


분신// 서울대생 4백50여명이 오전 9시35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5동 신림동 네거리에서 전방입소를 거부하며, 가두연좌농성을 벌이다 이중 3백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날 시위를 주도하던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 군(22ㆍ미생물학과4년)과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위원장 이재호 군(22ㆍ정치학과 3년 휴학)등 2명이 시위 도중 부근 서광빌딩 3층 건물 옥상에서 분신자살을 기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명 모두 중태다.
김 군 등은 빌딩 옥상 국기게양대에서 “양키 물러가라” “전방입소 결사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다 신나를 몸에 뿌리고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몸에 불이 붙자 이 군은 옥상 뒤쪽으로 달려가 10여m 아래로 뛰어내렸고 김 군은 그 자리서 쓰러졌다. 이 군이 2m 높이의 가건물 천막지붕위로 떨어지자 주민 10여명이 달려가 불을 끈 뒤 끌어내렸다. 이 군은 서울대의대점거 기도사건의 주동자로 수배를 받았었다.(하략)

(<조선일보> 1986년 4월29일치)



서울대에서 ‘전방입소 거부’ 가두시위를 주동하던 학생 두 명이 현장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 그 이름, 김세진 이재호.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는 ‘애국학생’들이 넘치던 1980년대였다. ‘전방을 안 가면 안 가지, 왜 자살까지 해야 하나.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생각하던 나도 당시에 대학 2학년생으로, 전방입소 대상자였다. 우리학교는 6월에 입소했다. 입소 당일 거부시위에 가담했지만, 결국 오후 느지막이 버스에 올라 강원도의 휴전선 인근부대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기간병들의 명령에 따라 오리걸음과 낮은 포복, 선착순 달리기를 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일종의 보복이었으리라.

미제의 용병교육이라는 딱지를 붙이긴 했지만, 일주일간의 전방입소 체험은 나름 재밌었다. 그때가 아니면 언제 휴전선 철책에 서보랴. 그때 만난 현역 군인 세 명이 기억에 남는다.

첫째, 병장이었다. 그는 편지를 구걸했다. 외로움을 호소했다. 이런 비유가 부적절하지만, 새까만 얼굴에 마른 체구였던 그는 며칠 굶은 북한 군인 같았다. 군 복무가 얼마 남지 않은 병장이었음에도 그는 학생들에게 과자 등으로 호의를 베풀며 사회로 돌아가면 편지를 해달라고 했다. ‘남학생들한테 편지를 받아 뭐하려 하지?’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의 메마른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혹시 군대 내 왕따는 아니었을까?

둘째, 상병이었다. 그는 나와 함께 철책 경계근무를 같이 섰다. 근무 중에 흡연을 허락하는 등 친절하게 해주다가도 가끔 부동자세를 강요하며 까칠하게 나왔다. “여기서 너 하나 죽이고 북쪽으로 도망가면 그만”이라는 등의 겁박으로 기를 죽인 뒤에 나오는 말은 “여자 한명 소개시켜 달라”는 썰렁한 요구였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매일 밤 철책에선 북한 초소의 확성기 선전과, 아군 상병의 ‘여자친구 소개’ 강요가 뒤엉켜 되풀이됐다. 결국 아는 동기 여학생 한 명의 이름을 댔고, 학교의 우편함으로 실제 편지가 오기도 했다.

셋째, 일병이었다. 그는 하얀 얼굴에 적당히 살이 올라 ‘우량아’를 떠올리게 했다. 학생들에게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고 존댓말을 쓰며 민주적으로 대해주었다. 그가 한 말,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요새 데모 때문에 시끄럽죠? 아시안게임에 방해가 되면 안되는데….” 한국이 처음 개최하는 86아시안게임은 9월20일 예정되어 있었다. 그 대회를 반대하는 무리에 속해있는 나였지만, 그 일병의 선하고 순수한 눈빛에 눌려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시안게임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아시안게임



김포공항서 시한폭탄 폭발
5명 사망, 30명 중경상


14일 오후3시12분경 서울 김포공항 국제선1층 청사 밖 5번과 6번 출입문 사이의 철제쓰레기통에서 고성능 사제시한폭탄으로 보이는 폭발물이 터져 전송객 부부 등 일가족 4명과 공항관리공단 전공 등 5명이 숨지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폭발참사가 발행했다.
치안당국은 현장상황과 수거한 폭발물의 뇌관선 철사 등을 분석한 결과 이 폭발사건은 ‘아시아’ 경기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북괴의 소행이거나 북괴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의 테러행위로 본다고 발혔다. <2ㆍ3ㆍ4ㆍ5ㆍ10ㆍ11면에 관련기사) (하략)

(<동아일보> 1986년 9월15일치)






어쩌면 좋은가. 전방에서 만난 그 일병의 순수한 표정이 오버랩되는 중대사건이었다. 학생데모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폭탄테러. 아시안게임은 6일 앞이었다. 5명이 죽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치안당국은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했지만 증거는 없었고 잡힌 범인도 없었다. 영구미제사건. <월간조선> 2009년 3월호는 “이 사건이 북한의 청부를 받은 아랍 테러리스트 아부 니달의 소행”이라고 보도했다. 동독의 비밀정보기관인 슈타지 22국의 보고서를 근거로 들었다. 이에 대한 정보기관의 공식 수사발표는 아직 없었다.






‘한국 1위’가 보인다
10아시아드
금92…중공과 극적 타이
오늘 폐막…축구ㆍ육상5종목 남겨


금메달 92-92. 한국이 중공과 동수가 됐다.
한국은 아시안게임 폐막을 하루 앞둔 4일 복싱 12체급서 우승으로 휩쓸고 육상에서 3개, 배드민턴에서 2개, 레슬링에서 2개 등 모두 19개의 금메달을 따내 총 92개를 기록, 이날 7개의 금을 건진 중공과 극적인 타이를 이뤘다.
한국이 최종일(5일) 축구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꺾어 금 하나를 추가하고 중공이 육상 5종목에서 1개의 금도 차지하지 못할 경우, 한국의 종합우승도 가능하게 됐다.
27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16일간 열전을 벌인 아시안게임은 5일 한국-사우디 축구결승전에 이어서 하오 7시부터 잠실 주경기장서 폐회식을 갖고 막을 내린다.

(<한국일보> 1986년 10월5일치)



더 이상의 테러는 없었다. 아시안게임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연일 한국의 승전보가 들려왔다. 내처 1위까지 할 뻔 했다. 최종결과는 중공에 이어 2위. 중공은 금메달 94개, 한국은 93개였다. 한국은 처음으로 일본을 앞질렀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 금메달 28개로 중공, 일본에 이어 3위를 한 종합성적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시안게임 3주 전, 내가 다니던 대학 안에서 작은 집회 하나가 열렸다. 학보사 기자들이 학교쪽의 부당한 원고검열 철폐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행사였다. 뜻밖에도 식순이 시작되자마자 무장한 전투경찰이 학내로 진입했다. 경찰은 “즉각 해산하라”고 종용하다가 이에 응하지 않자 최루탄을 쏘았다. 폭력시위를 할 생각이 없던 학생들은 동요했다. 화염병을 만들려고 학생회관에 모아둔 빈 소주병을 가져와 경찰을 향해 던지며 저항했다. 아시안게임을 코앞에 두고 경찰은 모든 집회를 선제적으로 봉쇄하고 차단했다. 덕분에 아시안게임 동안 대학 캠퍼스는 평온했다.


4. 마르코스

박정희보다 3년 더 해먹었다. 18년이 아니라 21년이다.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마르코스 이야기다. 그는 1986년 2월7일 대통령 선거 부정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을 거스르지 못하고 외국으로 꽁무니를 뺐다. 이승만처럼 미국 망명이었다. 그의 비참한 말로는 한국과 같은 독재국가 민중들을 흥분시켰다. 빛이 안 보이던 개헌서명운동 참여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국제뉴스였다.






마르코스 망명
20년 독재정권 붕괴
어제밤 대통령직 사임 클라크 기지→괌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25일 밤 마침내 사임,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망명했다. 이로써 20년에 걸친 그의 장기독재정권이 무너졌다. 한편 ‘워싱턴’에서 ‘조지 슐츠’ 미 국무장관은 이날 밤 ‘마르코스’ 대통령이 실각했음을 시인하고 미국은 ‘코라손’ 대통령의 새 ‘필리핀’ 정부를 공식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마르코스’ 일가는 이날밤 ‘말라카낭’궁에서 4대의 헬기에 분승 ‘클라크’ 미 공군기지로 갔다. 망명길에 오른 ‘마르코스’ 전 대통령 가족과 측근인 ‘파비안 베르’ 전 군 참모총장 부부를 포함한 일행 55명은 25일 밤을 ‘클라크’ 미 공군기지에서 지낸 후 미 군용기 편으로 26일 새벽 남태평양의 미국령 ‘괌’도를 향해 출발, 이날 오전11시(한국시간 오전10시)경 ‘괌’도에 도착했다.

(<동아일보> 1986년 2월26일치)






한국에 김대중이 있다면, 필리핀엔 아키노가 있었다. 마르코스에게 박해를 받다가 1980년부터 미국 망명길에 올랐던 베니그노 시몬 아키노 전 상원의원. 필리핀 반독재운동의 아이콘이었던 그는 1983년 8월21일 귀국길에 마닐라공항에서 괴한의 총격에 의해 피살당하는 운명을 맞는다. 그를 대신해 1986년 2월 대선에 출마했던 인물이 부인이었던 코라손 아키노. 마르코스의 망명과 함께 대통령직에 올랐던 그녀는 1992년까지 임기를 채웠다. 지금 필리핀엔 또 다른 아키노가 있다. 2010년부터 대통령인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아들이다. 2대째 대통령을 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이 든다. 최소한 독재자의 자식은 아니니까.


5. 스티커



KBS 시청료 거부운동 확산
스티커 5만장 불티…5만장 추가배부
“기독6개 교단 만여교회 3백만 참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각 가정집 대문에 ‘KBS TV를 보지 않습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여주는 등 각 교회를 통해 벌이고 있는 ‘KBS TV시청료 거부 기독교범국민운동’이 크게 확산되고 있다.
‘KBS TV 시청료거부 기독교범국민운동본부’(본부장 김지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는 지난 3월22일 ‘KBS TV를 보지 않습니다’라고 인쇄된 스티커 5만장과 KBS TV 시청료 거부운동에 국민들의 참여를 권유하는 전단 3만장을 제작 배포하기 시작, 스티커 5만장이 10여일사이 모두 소화돼 운동본부측은 오는 7일 스티커 5만장을 추가인쇄, 배포하기로 했다.

( <동아일보> 1986년 4월7일치)





하루 천여명 몰려
거부스티커 받아


KBS시청료납부거부운동본부에 하루평균 1천여명의 시민들이 찾아와 스티커를 받아가는 등 시청료거부운동이 뜨거운 호응 속에 계속되고있다. 이 운동은 이미 기독교 천주교 등 종교단체와 대학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시청료거부운동
20여개대학 참여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서울시립대 건국대 국민대 성신여대 광운대 등의 총학생회에서 시청료거부운동을 전개해나가겠다며 2,2천장씩 스티커를 대량으로 요구해 1차분으로 3백여장씩 받아갔다.

(<동아일보> 1986년 4월11일치)




방송, 심했다. KBS와 MBC는(당시 SBS는 없었다) 관제 홍보방송의 극치였다. 그 가운데 하나를 감상하고 싶으면 인터넷에서 ‘김인규’를 쳐보면 된다. 현 KBS 사장인 그가 정치부 기자이던 시절 어떻게 리포트를 했는지 볼 수 있다.

“비싼 돈 내며 왜 거짓말 방송을 보냐”는 일종의 시청자주권선언이었던 이 운동의 불씨는 기독교계에서부터 퍼져갔다. 일반 대중들 속으로 옮겨붙으면서는 횃불이 되었다. 1970년대에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75년)이 있었다면, 80년대엔 KBS 시청료 거부운동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신문도 같은 제도권 매체로서 왜곡보도를 일삼았지만, 방송에 비하면 덜했다. 신문기자들은 방송기자들처럼 대중들에게 ‘주구’(走狗)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텔레비전에 대해선 아예 기대를 접었던 때다. 신문이라는 종이쪼가리는 뭔가 작은 거라도 건질 수 있다는 기대를 주었다. 위 만화를 보면 그러한 신문의 자부심이 읽힌다. <동아일보> 4컷만화 ‘나대로 선생’이다. 톡 쏘는 은유로 당시 인기 절정의 만화였다.

하지만 신문도 궁극적으로는 거짓말을 일삼는 앵무새였다. 신문과 방송보다 스티커가 더 진실한 미디어로 통하던 시대였다. 집집마다, 사무실마다, 대학 동아리방마다 ‘붙이기 운동’이 벌어졌다. ‘KBS TV를 보지 않습니다’라는 스티커 한 장!


6. 문귀동

문귀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가? 신문엔 ‘부천서 사건’이라고만 나온다. 왜냐하면 정부가 그렇게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를 ‘보도지침’이라고 한다. 청와대 정무비서실 지휘아래 있던 문공부 내 홍보조정실에서 각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내려 보냈던 신문보도와 편집의 가이드라인이었다. ‘문귀동의 성고문 사건’을 반드시 ‘부천서 사건’으로 제목에 표기하도록 했고, 신문사들은 이를 잘 지켰다. (민주언론협의회의 기관지였던 <말>은 1986년 9월호에서 잡지 한 권을 털어 보도지침의 실상을 폭로했다.)

아버지의 스크랩엔 달랑 이 기사 뿐이다. 검찰총장이 국회서 부천서사건에 대한 자료제출을 요구해도 응하지 않을 것!






부천서 사건 검찰 수사기록
국회서 제출요구해도 불응
서총장 “전례 없다”


서동권 검찰총장은 오는 5일부터 열릴 국회법사위에서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자료제출요구가있어도 이에 응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1일 밝혔다.
서총장은 “국회법사위가 성모욕사건에 대한 수사자료제출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나 수사자료제출은 전례가 없으므로 이에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총장은 과거 이철희ㆍ장영자 사건 때도 검찰이 국회의 수사기록 제출요구에 응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한국일보> 1986년 8월2일치)



당시 시중에는 사건의 진상을 담은 얇은 소책자가 유포되었다. 이 사건의 변호인단이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당시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의 증언을 받아 기록한 팜플릿이었다. 권인숙은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이 조사과정에서 어떠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추행하고 모욕했는지를 있는 그대로 밝혔다. 내용을 읽다가 지나치게 상세히 묘사된 대목에 여러 번 어지럼증(?)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1986년 7월3일 권인숙은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했다. 진상규명도 요구했다. 다음날 권인숙은 공문서 변조 및 동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행사, 절도, 문서 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위장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던 탓이다. 문귀동도 권인숙을 명예훼손혐의로 인천지검에 맞고소했다.

검찰은 7월16일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는 요지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발표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문장은 ‘성의 혁명도구화’였다.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흠집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TV 시청료 거부운동’을 열심히 보도했던 신문도 별 수 없었다. 언론사의 사회부장 이상 관련 간부들은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한 7월16일을 전후해 문공부 고위관료의 인솔아래 ‘간담회’ 명목으로 도고온천 등에 놀러갔다고 한다. 이 사건보도에 대한 ‘협조’의 대가로 거액의 촌지도 받아챙기고. 2년 뒤 문귀동은 5년형을 선고받고 파면당했다.




7. 서진룸살롱

일단 사진만 보자. 아직도 이 얼굴들 하나하나는 뇌리에 선명히 박혀있다. 왜 그럴까? 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당히 고개를 쳐든 피의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앞에는 야구방망이와 각종 회칼 등 험악한 ‘작업도구’들이 전시되어있다. 그 유명한 서진룸살롱 사건이다.






국제마약 조직관련 집중수사
조직폭력배 사건 장, 40대 일인과도 접촉 새 사실 밝혀져


서울 강남 룸살롱 폭력배 살해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사건발생 5일만인 19일 오후5시5분경 전북임실군 운암면 용운리 섬진강다목적댐 상류 옥정호수몰지구섬의 외얏골 임동하씨(47) 집 헛간에서 낚싯군을 가장 숨어있던 이번 사건의 주범 장진석씨(25)와 행동대장 김동술씨(24) 등 2명을 검거했다. 또 이사건과 관련, 수배중이던 김모군(17)도 이날밤 경찰에 자수해왔다.
이로써 이번 폭력배 살해사건관련 수배자중 10명의 신병이 확보(자수 7명, 검거3명)됐다. 경찰은 이들 폭력배들의 범행동기, 조직 및 배후, 국제범죄단체와의 연계여부등을 집중 수사하고 있으며 특히 주범 장씨등이 일본 ‘야쿠자’들과 자주 접촉해온 사실을 집중추궁, 국제마약밀매조직과의 연계에 대해 수사촛점을 맞추고 있다.

(<동아일보> 1986년 8월20일치)




사건은 1986년 8월14일 밤 10시30분경,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서진회관 서진룸살롱에서 벌어졌다. 서로 다른 방에서 술을 마시던 목포맘보파 조직원들과 서울목포파 조직원들 사이에 생긴 사소한 시비가 칼부림으로 이어졌다. 둘 다 목포출신의 조폭들이었다. 서울목포파 조직원들의 일방적 승리였다. 그들은 목포맘보파 조직원들을 야구방망이로 때리고 회칼로 난도질한 끝에 4명을 죽였다. 서울 도심에서 일어났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위 신문기사는 국제 야쿠자와의 연계설을 언급했지만, 사실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신문사진 속에 서 있는 10명 중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형 확정판결을, 나머지는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았다. 최근 신문자료를 뒤져보니, 피의자 중 한명이었던 박영진은 20년형을 살고 나와 동료 조직원의 누나와 2010년 11월에 화촉을 밝혔다.

이 사건 이후 영화 속 조폭들의 결투 신은 더욱 잔인해졌다. 적어도 서진룸살롱 사건 정도는 돼야 영화 속에서 조폭의 수준과 품격을 유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990년 노태우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할 때도 이 사건은 뒤늦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또 하나. 이 사건으로 유도대학은 이름을 바꿨다. 살해에 가담한 이들 대다수가 이 학교 선후배였기 때문이다. 유도대학은 대학체육과학대학으로 변경되었다가, 지금은 용인대가 되었다.


8. 건대사태



건대서 26개대 2천명 시위
철야900명 모두 연행키로
“6ㆍ25는 해방투쟁” 대자보 등장
검찰, 주동자 보안법 적용 방침
어제 95명 연행…건대 임시 휴강


검찰은 29일 건국대 교내시위 및 농성사건을 서울지검에서 직접 수사할 방침이며 철야농성을 벌인 학생 9백여명을 이날 중으로 전원 연행,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하략)

(<동아일보> 1986년 10월2일치)




정권으로선 반가운 일이었다. 1986년 10월28일 오후 건국대에서 전국 29개 대학 2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전국 반외세ㆍ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연합집회. 모인 학생들은 당시 학생운동권에서 다수를 점한 NL계열이었다. 집회가 무르익으며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일본 수상에 대한 화형식이 거행될 무렵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학내로 쳐들어갔다. 돌과 화염병으로 싸우던 학생들은 경찰에 밀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은 학교 주변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학생들은 계획에도 없던 무기한 철야농성을 해야 했다. 공안당국은 학생들이 붙인 대자보 중에서 “진달래꽃 머리에 꽂고” “민족의 원수 미제국주의자”등만 골라 불순한 친북ㆍ용공 메시지로 부각시켰다. 10월31일 오전 10시, 집회 3일 만에 헬기까지 띄운 경찰의 ‘황소31 입체작전’이 전개됐다. 8천5백여 명의 병력 투입.



1,274명 영장
건대사태 사법사상 ‘최대구속’기록
주동급 8명 보안급 적용
최 공안부장 “국체수호차원서 수사”


건국대 용공시위 농성사건을 수사중인 검ㆍ경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최상엽 대검공안부장)는 3일 연행된 1천5백25명 중 29개 대학생 1천2백74명(남자 7백92ㆍ여자 4백82)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자수자 8명을 불구속입건했다고 발표했다.(하략)

(<한국일보> 1986년 11월4일치)




세계신기록이다. 1274명 구속! 1천명이 넘는 학생들을 조사하고 처리하기 위해 각 경찰서의 형사들은 잠도 못 자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정권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아니, 어리석은 몸부림이었다. 부작용이 뻔히 보이는 싹쓸이였으니.


9. 금강산댐



“금강산 수전댐건설 중지하라”
이 건설장관 대북한 성명통해 촉구
북한강 물 줄어 생태계 큰 변화
붕괴 되면 수도권 치명적 피해


정부는 최근 북한이 중동부 휴전선 북방 인접지역에 대규모댐건설에 착수, 하류지역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각종 용수손실 생태계파괴 등 심각한 타격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 발전소 건설계획을 즉각 중지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규효 건설부장관은 30일 성명을 발표, 북한측이 지난 21일 착공한 금강산 발전소는 수원확보를 위해 북한강 본류와 금강산의 합류지점 하류에 대규모 댐을 축조하게 됨으로써 북한강 하류 우리측의 화천 춘천 의암 청평 팔당 등 5개댐의 용수를 고갈시키는 등 우리국토에 여러가지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며 이의 즉각 중지를 요구했다.
이 장관은 특히 북한이 추진중인 금강댐이 붕괴될 경우 화천 등 5개 댐을 순식간에 차례로 파괴하면서 한강 하류전역을 급류가 강타, 강원 경기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부분을 황폐화시킬 상황을 초월하는 재해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하략)

(<동아일보> 1986년10월30일치)






건대사건 진압 하루 전의 보도다. 긴 설명이 필요없다. 한마디로 ‘뻥’이었다. 금강산댐에서 남쪽으로 2백억톤의 물을 방류하면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절반이 잠긴다고? 이 뻥이 신문과 방송엔 사실처럼 등장했다. 금강산 물폭탄에 맞서려면 우리도 댐을 지어야 했다. 이름하여 ‘평화의 댐’.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국민 모금운동이 시작됐다. 6개월만에 7백억원의 성금이 걷혔다. 강원도 화천군 비수구미골에 위치한 평화의 댐을 완공하는 데엔 국고까지 합쳐 1천5백억원이 넘게 들었다. 높이 125미터, 넓이 601미터짜리로 국내에서 가장 큰 댐이 되었다.

그런데 3차보강공사를 위해 또 이 댐에 수천억원이 들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뻥은 과거가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10. 김일성

아, 뻥은 계속된다. 1986년 11월16일 <조선일보>는 호외를 통해 김일성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치 다른 신문들도 이를 따라 기사를 썼다.






“김일성 총격으로 사망”
국방부 발표 북한 보도기관서는 공식발표 없어


국방부는 17일 오전 “북괴는 16일 전방지역에서 대남확성기 방송을 통해 ‘김일성이가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방송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이흥식 국방부 대변인은 “그러나 북한의 모든 보도기관은 일체의 공식발표나 논평을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이어 “우리군은 종전과 같이 경계태세에 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열차서 총격받고 사망” 16일 첫 방송
전방부대 경계강화 애도음악 방송
“김정일을 지도자로” 전방 마을 조기…김일성 사망설 근거
북한 내부에 심각한 권력투쟁 있는 건 분명한 듯

(<동아일보> 1986년 11월17일치)



이 사건은 오산 공군기지 미군 통신정보부대(NSA) 감청소에서 근무하던 상황병의 실수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한국말에 서투른 미군 병사의 착각이 여러 우연과 겹치면서 확대되었다. 이 실수를 처음으로 찾아낸 것도 취재력이라면 취재력이다. <조선일보>는 실수조차 특종하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뻥은 또 다른 뻥을 낳는다. 김일성 사망설은 미군 병사의 실수라 쳐도, 다음 보도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암살자 중공피신 보호 받아
일본 관리 발표


【동경로이터특약】북한의 김일성을 암살한 사람들이 중공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한 일본정부관리가 중공소식통을 인용 말했다.
북한에 관한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이 관리는 ‘로이터’ 통신에 자신이 지난 15일 중공소식통으로부터 김일성이 암살되었다는 정보를 들었으며 암살자들이 중공으로 도주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그 사실을 확인할 독자적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김정일 연금설
오진우나 오극렬이 정권 잡은듯


【동경=장성원 특파원】일본의 외교소식통들은 김일성의 사망과 함께 김정일이 연금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외교소식통들은 또 이번사건은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중심으로 친중공 군부에서 일으킨 것이 확실하며 이에 따라 현재 오진우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본의 한 정보소식통은 친중공파인 북괴군총참모장 오극렬이 일으킨 쿠데타 과정에서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김정일은 연금됐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86년 11월17일치)






암살자가 아예 없는데, 그가 중공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아들 김정일은 연금당했다고? 총참모장 오극렬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2012년 7월에도 국내 언론들은 리영호 북한 총참모장이 해임당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총격전은 근거가 없었다. 뻥이었다. 한국의 기자들은 북한과 관계된 사건만 터지면 소설가가 되는 경향이 있다.

1년 뒤.
불가능해 보이던 개헌은 현실이 되었다. 1987년 6ㆍ29선언으로 정부여당은 ‘호헌’을 취소했다. 1986년 신민당과 재야세력과 학생들과 시민들이 바라던 직선제 개헌을 이루게 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단임으로 정했다. 그밖에도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국정감사권 부활, 헌법재판소 설치 등을 골간으로 한 제6공화국 헌법은 1987년 10월27일의 국민투표를 거쳐(지지율 93.1%) 확정되었다. 사람들은 그 뒤 행복했을까.

1년 뒤 많은 이들이 “죽 쒀서 개 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았지만, 그 주인공은 전두환의 육사 동기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노태우였다. 제도 탓을 할 수는 없겠다. 개헌을 한 뒤 25년이나 흘렀다. 이렇게 오랫동안 헌법에 손을 안 댄 것은 처음이다. 지금은 행복한가? 만족스러운가?

스크랩북 맨 앞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시를 읽는다. ‘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흐른다.

지초의 환상

인생은 나그네
꿈을 씹으며 환상에 운다
광야에 돌베개하고
잡초를 씹으며 별을 센다
먼 지구의 원점은 자기 배꼽
인생의 비문은 슬프다

인생은 무지개의 환상
바람을 마시며 한숨을 쉰다
벌거벗은 고뇌의 골짜기
맹물을 마시며 태양을 본다
세월은 긴 노래
인생의 비문은 웃읍다

1986년 2월5일
지초







1987년 개헌으로 이뤄진 권력선출방식과 사회구조는 ‘87년 체제’라 불린다. 그 단점을 보완해 새로운 ‘2013년 체제’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시점이다. 아버지의 시를 바꿔 읽어본다. “광야에 돌베개하고/ 헌법을 씹으며 별을 센다// 헌법은 무지개의 환상/ 바람을 마시며 한숨을 쉰다.” 헌법의 환상?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허무해진다. 아버지의 시만 읽으면 내 마음 속 한 구석에서 바람이 샌다. 헌법은 환상이 아닌데….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1986년 #개헌 #마르코스 #부천서 사건 #건대사태 #금강산댐 #김일성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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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여신

2012.08.16

사진과 함께 글이 게재되니 확실히 뭔가 신빙성이 더해지고 방대한 자료의 느낌이 납니다.
저는 몇번 하려다가..참 부지런하지 못해서 스크랩을 매번 포기하고는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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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al0218

2012.08.14

실제 63빌딩이 잠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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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꾸다스

2012.08.08

언제나 느끼지만, 알찬 글과 알찬 자료들.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파잇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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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