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 SF’ 장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세계 3대 SF 문학상 중 하나인 필립 K. 딕상 최종 후보작 『너의 유토피아』의 정보라 작가가 말하는 생존과 애도, 투쟁의 이유.
글 : 신연선 사진 : 표기식
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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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표기식


정보라 작가의 『너의 유토피아』가 2025년 필립 K. 딕상 최종후보작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24년 <타임>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한 이 소설집에는 슬프고, 끔찍하고, 화가 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굽히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정보라 작가는 “아무리 끔찍한 삶에도 웃기는 순간들이 있고, 아무리 행복한 삶에도 끔찍한 순간들이 있다”고 말하는데요. 그중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은 끔찍한 삶에도 존재하는 유머의 순간입니다. 지리멸렬한 순간을 비틀고, 극도로 분노하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고, 뜬금없는 말장난을 해 보이는 이야기들에서 끝내 생존하려는 태도와 애도하는 마음의 강인함을 되새기게 되거든요. 『너의 유토피아』에 수록된 신판 작가의 말 제목은 “계속 싸우는 이야기”이고요.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우리는 모두, 여전히, 다 같이, 싸우고 있다.” 이 문장을 따라 읽은 뒤 한 마디를 보태고 싶습니다. 우리는 싸운다. 투쟁. 


 

때를 정말 잘 만났다고 생각해요”


4월에 있을 필립 K. 딕 상 시상식에 데모 현장에서 받은 무지개띠를 가져간다고 하신 걸 봤어요. 너무 멋있을 것 같아요.(웃음) 

얼마 전에 있던 ‘여성의날’ 집회에서 하늘색, 분홍색, 하얀색으로 된 삼색 트랜스젠더 띠도 얻었고요. 보라색 민주노총 띠도 얻었어요. 다 휘날리면서 시상식에 갈 거예요.(웃음) 

 

먼저 후보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시상식에 가는 기분은 어떠신지, 소감도 들려주세요. 

1박 3일로 다녀오는 일정이에요. 너무 짧아요. 시상식은 노웨스콘의 SF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열리는 건데요. 짧은 일정이지만 그곳에 가서 다른 SF 작가님들을 만나고 싶고요. 분위기가 어떤지 보고 싶어요. 미국에서 하는 SF 행사들은 대부분 개방적이라서 재미있을 것 같아요. 또, 제가 변희수 하사님에 관한 부분을 낭독해도 되는지 물었어요. 지금 미국 정권이 트랜스젠더 공격에 굉장한 압박을 가하고 있는데 너무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겠느냐고요. 그랬는데 페스티벌 총괄 디렉터 분이 트랜스피플은 우리 노웨스콘에 참가도 하고 자원봉사도 하면서 언제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한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SF는 정치적일 때가 많으니 괜찮을 거다,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것도 참 좋았어요. 

 

특히 멋진 점은 작가님의 작품이 여섯 개 후보작 중 유일한 번역본이고, 1983년부터 지금까지 번역작이 상을 받은 건 일본의 이토 사토시 한 명뿐이라는 사실인데요. 2021년 『너의 유토피아』의 구판인 『그녀를 만나다』를 출간한 것부터 시작해 2025년 현재까지의 시간이 새삼 다시 해석되기도 했을 것 같아요. 

엄청 많은 게 변했죠. 21년에 『그녀를 만나다』가 나오고 그해 연말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책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학교를 그만둘 거라는 생각은 못 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밖에 저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21년에 김보영 작가님이 『종의 기원담』으로 전미도서상 1차 후보에 오르셨고요. 그러니까 팬데믹 전후로 여러 장르에서 한국 작가들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라든가 영화 <기생충>도 그렇고요. 문화 산업이라는 게 생각해 보면 같이 손잡고 가는 것 같은데요. K팝이 K드라마를, K드라마가 K영화를 끌어주고 그러면 거기에 들어갔던 노래가 다시 알려지는 식이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저는 때를 정말 잘 만났다고 생각해요.  


이 이야기의 결론은, 나라가 문화 예술 산업을 지원해 줘야 된다는 거죠. 어떤 산업도 이 정도의 부가가치를 이처럼 폭발적으로 만들지 못하거든요. 그러면서 매연은 덜 나오잖아요. 친환경적, 미래지향적인 사업이 문화 산업이고요. 거기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까지 받으셨으니까요. 지금이 문화 산업에 돈을 쏟아부을 때예요. 계엄 할 때가 아니고요. 

 

수상에 관련한 질문을 많이 받으실 텐데요. 무엇보다 작가님은 쓰는 이유에 대해 “상을 타거나 독자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믿는 가치와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하시죠. 그래서인지 『너의 유토피아』에 담긴 소설들을 집필하셨을 때, 다른 작품을 쓸 때와는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해져요. 

「영생불사연구소」를 2010년에 쓰고, 「그녀를 만나다」를 2021년에 썼으니까요. 정확히 제가 연세대학교에 재직하던 기간 동안에 쓴 이야기들이에요. 그중에서도 2013년에서 2021년까지 봄 학기마다 진행한 SF 수업에서 다루었던 이야기들을 많이 넣었어요. 한편 2020년에 결혼을 했고요. 팬데믹 때문에 20년 1학기에는 동영상으로 전부 수업을 대체해서요. 하루에 12시간씩 영상을 만들곤 했어요. 실시간 비대면 수업을 하면 청각장애 학생들에게는 가르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동영상 제작을 결심했는데 자막 넣는 법을 몰라서 결국 대본을 썼거든요. 대본 쓰는 데 서너 시간이 걸렸고, 영상을 편집하는 데 또 서너 시간이 걸려서 50분짜리 수업 하나를 만드는데 하루가 다 지나갔어요. 하루에 수업이 2개나 3개 있는 날이면 진짜 새벽까지 계속 그걸 해야 했어요. 

 

너무 힘드셨겠어요. 

학교에 청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자막 솔루션을 구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들어주지 않더라고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어깨도 아주 안 좋아졌고요. 20년에 그 모든 것이 응축돼서 일어났던 것 같아요. 당시 장애 학생 동아리에서 장애 학생들의 수업 접근권이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학교가 책임지라는 기자회견을 했는데요. 총학생회에서 비장애인 학생들이 기자회견 한 건 뉴스에 나고 장애 학생 동아리에서 이들의 인권에 대해 기자회견 한 건 아무 곳에서도 보도를 안 했어요. 그런 여러 이유로 2020년 한 해 동안 학교에 진짜 실망을 많이 했고요. 학교가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개인적인 일이 겹치면서 학교를 그만둔 거예요. 


사진 : 표기식


유머, 기운을 내는 방식 


사실 작가님 작품을 읽으면 먼저 화내주는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거든요. 그 와중에도 절망하거나 좌절만 하는 게 아니라 힘이 되기도 해요. 특유의 유머 말인데요. 작가님의 작품뿐 아니라 칼럼이나 『아무튼, 데모』도 읽으면 예상하지 못하게 웃어버리게 되는 흐름이 있어요.

데모 현장이 대부분 그래요. 요즘은 경찰이 폭력을 그렇게 많이 쓰지 않지만요. 투쟁 현장에서는 도발을 하게 되면 굉장히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거든요.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경험 많은 지도자들이 적시, 적소에서 유들유들하게 대응하시는 측면이 있어요. 그게 견디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기운을 내는 방식이기도 해요. 쓸데없이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그런 태도가 작가님 안에도 쌓인 거군요. 

그렇겠죠, 그런 분들을 계속 봐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원래 집회를 하면 힘들어요. 일단 몸이 힘들고요. 그곳에서 일상적으로 보지 않았던 상황들을 마주치게 되니까 굉장히 힘들죠. 데모는 원래 힘든 거예요. 그러니까 투쟁을 하시더라도 자신을 잘 돌보시면 좋겠는데요. 그것 역시 해 봐야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단편 「그녀를 만나다」를 쓰실 때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한국 독자로서는 떠오르는 사건이나 내용이 많은 작품이었는데요. 마지막 문장에 분명하게 돌아가신 변희수 하사님을 언급하셨거든요. 

구판을 묶을 때 단편이 하나쯤 더 들어가면 좋겠다고 출판사에서 제안을 주셨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어요. 책이 2021년 초에 나왔으니까 마감이 상당히 급했는데요. 그러니까 더더욱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어서 그 이야기를 썼어요. 

 

미래에 그녀는 살아남아서 “행복하다”고 얘기하고요.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키우면서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잖아요. 이야기로나마 그런 미래를 주고 싶었던 건가요? 

그분이 살아 계시기를 원했어요. 다 상관없으니까 어쨌든 살아 계시기를 원했어요. 살아있다 보면 좋은 날이 올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는데요. 물론 그런 생각이 제가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마음 편한 소리를 하는 걸 테지만요. 그래도 살아 계시기를 원했어요. 


 

번역은 공부하는 과정이기도


『너의 유토피아』에 수록된 단편들은 각 작품마다 톤도 확연히 다르고요. 그 톤이 정확히 그 이야기에 너무 잘 맞아서 읽는 즐거움이 컸는데요. 쓸 때, 톤은 어떻게 결정하세요? 이야기가 먼저 오고 톤이 따라오는지, 좀 다르게 써보자고 생각한 뒤에 이야기가 오는지 궁금해요. 

그때그때 다른 것 같아요. 「영생불사연구소」는 직장 고충담이기도 하잖아요. 사람이 죽고 사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그래서 문체를 시험해 봐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수업을 하면서 다양한 작가들의 문체를 보면 저런 걸 해보고 싶다거나 어떤 식으로 응용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영생불사연구소」는 주인공이 이런 식으로 말할 것 같다 생각했는데 마침 제가 대학원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여서 대학원에서 배웠던 문체를 응용해서 썼어요. 명확하게 이 작가의 문체를 해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녀를 만나다」도 그랬어요. 러시아 여성 작가를 수업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분처럼 써보고 싶었어요. 그분도 진짜 웃기다가 너무 끔찍한 얘기들을 다 한 군데 뭉쳐서 쓰는데요. 사람의 삶이 원래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끔찍한 삶에도 웃기는 순간들이 있고, 아무리 행복한 삶에도 끔찍한 순간들이 있는데요. 그게 하나씩 오는 게 아니고 한꺼번에 일어나기 때문에요. 그 모든 희로애락이 한꺼번에 언제나 뒤섞여 있는 게 사실적인 것 같아요. 근데 류드밀라 페트루셰프스카야 작가님이 그렇게 쓰시거든요. 

 

수업 말씀을 하셨는데요. 번역도 하시니까, 그 작업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으실 것 같아요. 

지금은 수업을 안 하니까 번역이 훨씬 더 영향이 많아요. 해보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계속 작가로서 쓰다 보면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오겠죠. 번역을 하는 게 저한테는 공부하는 과정이기도 해요. 얼마 전 출간된 『미스트 바운드』라는 어린이 청소년 모험 소설을 번역했는데요. 작가님이 구성을 정말 잘 짜셨어요. 모험 소설이고, 필요한 재료를 하나씩 모아 그것으로 약을 만들어서 할아버지를 살려야 하는 이야기인데요. 이쯤에 위기가 있어야 될 것 같다, 혹은 이쯤에서 반전이 있어야 될 것 같다 하는 기대로 읽는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독자로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위기와 반전이 있었어요. 예측가능한 게 아니고요. 구조를 정말 성실하게 짜서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작품이었던 거죠. 어린이 청소년 모험 소설을 쓰고 싶은 분이면 구조 분석 교재로 삼아도 좋을 정도였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배우고 있어요. 


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다른 번역작은 반대로 구조가 굉장히 산만한 편이에요. 그런데 수미쌍관이라고 할까요. 처음과 끝에서 스토리를 잡아주는 형식이거든요. 보면서 이런 방식도 괜찮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구조라는 것도 딱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이야기에 따라, 또 작가의 성향에 따라서 굉장히 다양하게 가능하다는 걸 번역하면서 공부하고 있어요. 

 

그중, SF라는 장르를 택했을 때 발견되는 것이 있을까요? SF라는 장르의 확장성이랄까, 쓸 때의 이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SF는, 지면이 더 많아서 쓰게 된 거예요. 처음에 쓰기 시작했을 때 단 10만 원이라도 주면서 청탁해 오는 곳이 SF였거든요. 그렇게 쓰는 과정에서 현재 기술이 얼마나 파고들어 와 있는가 혹은 기술이 어떤 식으로 착취 도구가 되는가 하는 점을 많이 보게 됐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본 걸 바탕으로 자료를 찾아본 뒤 쓰는 수준이지, 해도연 작가님이나 이하진 작가님처럼 전공하신 분들이 쓰는 수준에서 상상하지는 못해요. 

 

다양한 SF 작품이 있고, 독자들이 그것을 다양하게 만나면 그 자체로 좋은 거니까요. 저는 작가님의 작품 안에 우리가 겪는 실제 세상이 들어오는 방식이 정말 재미있고, 엄청 눈길이 가요. 

감사합니다, ‘데모 SF’ 장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사실 산업의 구조나 하청과 재하청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다치고 죽는지 역시 다 데모 현장에서 배운 거예요. 데모에 가서 현장 발언하시는 분들께 들어서 아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정확히 말하면, 그분들의 경험인데요. 소설을 쓸 때 제가 당사자인 것처럼 쓸 수는 없지만요. 그런 구조가 있다고 들려줄 수는 있겠죠. 


사진 : 표기식


귀신, 시체, 살인


「여행의 끝」에 나오는 “쌍방향 의사소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101쪽)는 문장에 기대 질문을 드립니다. 소설을 일종의 말걸기라고 한다면, 소설에 오독의 가능성,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게 뻗어 있다는 점은 방해물이자 가능성이기도 할 것 같아요. 관련해서 어떤 생각을 갖게 계신가요? 

일단 그 말을 한 캐릭터는 소시오패스이기 때문에 걔가 하는 말을 믿으시면 안 되는데요. 유리 로트만이라는 러시아 언어학자가 번역 이론을 얘기했어요. 그에 따르면 일단 말을 하는 것도 자기 생각의 번역이래요. 모든 의사소통이 번역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끊임없이 감각을 느끼잖아요. 감각 기관 중 제일 커다란 건 피부인데요. 머리카락, 안경, 옷이나 액세서리 등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피부에 닿는 감각을 계속 느끼는데 그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면 생활을 할 수가 없죠. 그냥 익숙해지는 거예요. 굉장한 데이터가 뇌로 들어오고 있는데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뇌가 그냥 걸러버리는 거거든요. 마찬가지로 뇌 속에 감각과 생각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그중에서 말을 할 때는 골라내는 거죠. 


이처럼 우리는 머릿속에 있는 표현할 수 없이 풍부하고 다양한 감각과 생각들을 언어로 번역하는데요. 상대방 역시 다른 무시무시하게 많은 감각들과 함께 그 데이터를 흡수해서 다시 그 언어의 의미를 번역한 후 뇌에 전달하니까요. 표현을 하면서 한 번, 이해를 하면서 또 한 번 번역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 사이에 오류의 가능성은 굉장히 많죠. 언어의 의미가 궁핍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한 가지 표현이 여러 문맥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즉 풍성하기 때문에 불충분한 거거든요. 감각이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빈곤함이 있고, 번역이 돼서 상대방에게 이해가 될 때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있어요. 의사소통은 그 인물이 말하는 것처럼 항상 폭력적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불충분해요. 언제나 불완전해요. 

 

그렇다면 과연 소설로 소통은 가능할까요?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소설가가 독자가 읽어주기 전에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다면 혹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파괴하고 싶지 않으면 캐릭터를 내세우고 그 인물을 통해 말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소설을 쓰고 싶다면 작가가 앞에 나설 수 없죠. 때문에 작가는 비인간(non-person)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다 독자가 읽어주면 작가는 논퍼슨에서 저자(author)가 된대요. 이때도 여전히 말하는 사람은 캐릭터인데요. 결국 이야기를 이해하고 등장인물을 이해할 권리는 독자에게 있고, 작가는 드디어 누가 읽어줬으니 저자로서의 위치는 가질 수 있지만 여전히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독자의 권한이고 작가는 그 과정에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조금 큰 질문인데요.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가들을 보면서 이 작가는 이런 작품 세계가 있고, 계속해서 이런 시도들을 했다는 것을 후에 해석하곤 하잖아요. 당장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요. 이른바 ‘정보라 월드’가 있다면 그 코어에 무엇이 있을까요? 

귀신, 시체, 살인이요. 일단 재미있어요. 그리고 귀신이 나오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해결할 수가 있어요.(웃음) 또 귀신이라는 존재가 특히 한국에서는 ‘왜 원한을 품어서 귀신이 되었는가’라는 부분에 항상 미스터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해요. 더구나 귀신은 직업이 있거나 할 필요가 없잖아요. 캐릭터로서 굉장히 훌륭한 것 같아요. 쓰기가 훨씬 자유로워요. 대사가 없어도 되고, 있어도 되고, 혹은 신체 일부만 나타나도 되고, 아무 데나 나타날 수 있고요. 너무 훌륭한 캐릭터예요.  


사진 : 표기식


계속 싸우고 있으니까


여러 정체성 중에 소설가란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배명훈 작가님이 항상 말씀하세요. 돈으로 바꾸라고요. “그것을 원고료로 바꾸십시오”라고 항상 말씀을 하시는데요. 저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그러니까 그것이 아무리 괴롭거나 화가 나도 이것을 가지고 소설을 써야지,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아요.  

 

실은 작가님을 집회 현장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어요. 작가님은 스스로를 ‘데모꾼’이라 부르시고요. <여성신문>에 ‘월간데모’를 연재하고 계시기도 하잖아요. 최근 칼럼에서 “노동자가 고공에 오르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아무도 참사 피해자가 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내란과 폭동을 걱정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며 신변 안전을 걱정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전국에서 헌법의 원칙과 민주주의와 평등을 향한 집회들이 계속 진행 중이다. 우리는 싸운다.”라고 쓰신 부분이 책의 ‘작가의 말’과 연결돼 읽히더라고요. “우리는 모두, 여전히, 다 같이, 싸우고 있다.”(368쪽)는 문장을 쓰실 때의 마음을 듣고 싶어요.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이 너무 좋았는데요. 한강 작가님도 나름대로의 싸움을 하고 계시고요. 제가 사랑하는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작가님도 아르헨티나에서 성소수자들을 위한 대규모 안티 파시스트 대행진을 하셨더라고요. 날씨가 너무 찬란한데 활짝 웃으면서 커다란 무지개 부채를 들고 행진하는 사진을 봤어요. 보면 다 그렇게 싸우고 있는 것 같아요. 저만이 아니고요. 제가 이런 성향이니까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거겠지만 그렇게 행진에 나가고, 싸우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제가 그런 분들을 열심히 쫓아다니고 있기도 하고요.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계속 싸우고 있으니까, 그냥 그게 사실이니까 썼어요. 

 

작가님은 부끄럽지 않으려고, 나를 위해서도 계속 싸운다고 하시잖아요. 그런 자기 동력이 있어야 싸움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마음 자체가 무척 귀중한 자기 돌봄의 한 형태라는 생각도 하는데요.  

2013년 12월에 철도민영화 반대 시위에 나갔었어요. 수업 시간에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프로젝트 얘기를 했었는데요. 그런 상황에서 나중에 학생이 그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는데 집에서 손 놓고 있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나갔어요. 세월호 참사의 서명을 받을 때는 진짜 너무 미칠 것 같아서 나갔었는데요. 나중에 같이 활동하는 분들과 단원고 학생 250명, 선생님까지 더해 261분의 생일 동영상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그러면서 부모님들 인터뷰를 되게 많이 했거든요. 보면 집회 현장에서 많이 뵙는 분들은 아이들 얘기를 하면서 즐거웠던 일을 많이 말씀하세요. 반면 활동을 전혀 못 하신 분들을 어렵게 만나서 보면 일단 너무 많이 우시더라고요. 당연히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 아니지만요. 화가 나고, 슬프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일 중 가장 괴로운 일을 겪었을 때는 어느 분이 말씀하신 대로 허공에 대고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것 같아요. 


촛불집회 사진집이 있는데요. 제목이 『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예요. 그런 감정을 다들 느낀 것 같아요. 2015년부터 2017년 그 시기를 겪으면서 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요. 그 질문이 책의 제목으로 나올 정도라면 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상실하면 애도해야 하고, 상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상실된 사람들을 누가 기억해 줄 것인가. 그리고 행동으로 애도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상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362쪽)라는 말씀도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초판 작가의 말 제목이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잖아요. 기억하고, 쓰고, 행동하는 일은 작가님께 왜 중요한 걸까요? 

쓰는 건 사실 별로 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생각의 바탕에 가장 강하게 깔려 있는 건 세월호 서명 운동이었는데요. 나가서 서명을 하나 더 받아야지, 지금 소설 쓴다고 세월호 특별법이 만들어지냐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상실하면 멈추어서 애도해야 한다는 말은 한국학 학술대회에 갔을 때 배운 거예요. 한 독일인 교수님이 이승만 시대부터 세월호까지 국가 폭력 피해자들을 분석하셨는데요. 1950년부터 현재까지 국가폭력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원한 것은 진실 규명, 책임자 처벌, 애도할 권리라고 하시더라고요. 공개적으로 추모를 하면 그것이 국가 폭력이라는 사실을 사회가 알게 되고, 공개적으로 추모하는 걸 허용하면 국가 폭력을 국가가 인정하게 되기 때문에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보다 더 강력하게 탄압한 것이 공개적으로 추모할 권리였다는 거였는데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로 눈앞이 확 밝아지는 기분이었어요. 너무 많은 것이 설명되더라고요. 그래서 추모할 권리는 굉장히 중요한 거고, 어떻게 보면 거기에서 진실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가 기억하겠는가, 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러시아 작가의 단편 소설에서 본 문장이에요. 어머니가 먹을 걸 구하러 나간 사이에 집이 폭격을 당해서 아이 셋이 다 죽거든요. 시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가 됐는데요. 자신이 죽으면 나의 아이들을 기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 소설을 본 게 하필 2014년이었어요. 관련해서 트라우마와 추모에 대해서 논문도 썼는데요. 이런 깨달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쓴 것이었어요. 

 

작가님의 현재 관심 가장 큰 관심사는 뭔가요? 

한국옵티컬하이테크의 박정혜, 소현숙 동지와 세종호텔의 고진수 동지요. 옵티컬 공장은 일단 옥상이 좀 넓어서 걸어 다닐 수 있는데요. 세종호텔 농성장은 환경이 훨씬 열악하더라고요. 고공 농성에 더 나은 환경이라는 게 있을 수는 없죠. 옵티컬도 천막이 맨날 바람에 날아가고, 눈 오면 무너지고 그러니까요. 그런데 고진수 동지가 올라간 곳은 진짜 폭이 좁아요. 그래서 굉장히 걱정돼요. 거기다가 지금의 내란 사태까지 더해서 너무 걱정이 되고 불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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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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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b123

2025.03.23

작가로 산다는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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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e0512

2025.03.23

인터뷰 마지막에 작가님이 언급하신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러시아 작가의 단편소설 제목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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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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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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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아나대에서 러시아문학과 폴란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연세문화상에 「머리」가, 2008년 디지털문학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에 「호(狐)」가 당선되었으며, 2014년 「씨앗」으로 제1회 SF어워드 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국내 최초로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너의 유토피아』는 영문판이 2024년 발간된 이래, 2024년 미국 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고, 2025년 1월 현재 필립 K. 딕상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저주토끼』 『여자들의 왕』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한밤의 시간표』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작은 종말』, 장편소설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붉은 칼』 『호』 『고통에 관하여』 『밤이 오면 우리는』, 에세이 『아무튼, 데모』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거장과 마르가리타』 『탐욕』 『창백한 말』 『어머니』 『로봇 동화』 등이 있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 어둡고 마술적인 이야기,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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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한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팬들에게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2000년대 이후의 신진 SF 작가들에게 여러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말 게임 개발회사에서 개발자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다. 2004년 「촉각의 경험」으로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중편부문에서 수상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7인의 집행관』으로 제1회 SF 어워드 장편부문 대상,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으로 제2회 SF 어워드 중단편부문 우수상, 「얼마나 닮았는가」로 제5회 SF 어워드 중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과학문학상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영화 [설국열차]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으며, 폴라리스 워크숍에서 SF 소설 쓰기 지도를 하거나, 다양한 SF 단편집을 기획하는 등 SF 생태계 전반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5년 미국의 대표적인 SF 웹진 클락스월드(Clarkesworld)에 단편소설 「진화신화」를 발표했고, 세계적 SF 거장의 작품을 펴내 온 미국 하퍼콜린스, 영국 하퍼콜린스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저 이승의 선지자』 등을 포함한 선집 『I'm waiting for you and other stories』가 동시 출간될 예정이다. 둘 다 한국 SF 작가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는 게임 개발팀 ‘가람과바람’에서 시나리오 작가/기획자로 활동했다. 『이웃집 슈퍼히어로』, 『토피아 단편선』, 『다행히 졸업』, 『엔딩보게 해주세요』 등 다수의 단편집을 기획했다. 2021년 로제타상 후보, 전미도서상 외서부문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