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 - ‘라이벌 잔혹사’
우리 가요계도 적지않은 라이벌이 있었다. 시야를 좀 더 넓혀 대중가요사를 통틀어 존재했던 위대한 라이벌들을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때마침 KBS 해피 FM(106.1㎒)의 <즐거운 저녁길 이택림입니다> 제작진이 지난 8월 2~27일 동안 공식 홈페이지 방문객 802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통해 최고의 라이벌 10쌍을 선정했다.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201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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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 김영삼과 김대중, 펠레와 마라도나, 강호동과 유재석…… 시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는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라이벌 구도는 당사자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허락하는 듯하다. 제3자의 입장인 대중도 선의의 경쟁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가요계도 적지않은 라이벌이 있었다. 시야를 좀 더 넓혀 대중가요사를 통틀어 존재했던 위대한 라이벌들을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때마침 KBS 해피 FM(106.1㎒)의 <즐거운 저녁길 이택림입니다> 제작진이 지난 8월 2~27일 동안 공식 홈페이지 방문객 802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통해 최고의 라이벌 10쌍을 선정했다.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이 같은 결과가 산출된 여러 가지 요인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순위에 오른 라이벌들의 활동 시기가 1990년대 초반 이후로 쏠려있다. 아직까지 대중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라이벌 스타들이 선택을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울랄라세션과 버스커버스커의 경우는 아직 라이벌 구도라고 할 만한 경쟁기간을 이어오지 못했음에도 7위에 선정된 것이 단적인 예다.
또한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부상한 아이돌 그룹의 전성기가 이 같은 편중현상을 유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큰 호응을 얻은 드라마 < 응답하라 1997 >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폄훼된 감이 없지 않았던 아이돌 문화를 복권시켰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요인이다.
사실 리스트를 보면서 “그때 그랬지”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도 있겠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거나 세대가 어긋나는 탓에 쉽사리 공감하기 힘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언론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열기가 어땠는지 체감해보는 것도 이해를 돕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할 듯싶다. 주목할 만한 몇몇 사례 등을 눈여겨보자면…
★ 에이치오티(H.O.T) VS 젝스키스
두말할 필요 없이 아이돌 대립 구도의 절정인 시대였다. 앞으로 이러한 경쟁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교실 안에서 사춘기 여학생들은 철저하게 두 파로 나뉘었다. 좋아하는 그룹이 달라서 갈라진 건지, 원래 쟤가 싫어서 상대 그룹으로 붙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상파 음악프로그램을 방송한 다음 날 교실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우리 오빠들 무대를 보고 난 뒤 얻게 된 감동과 환희의 간증이 이어진 뒤, 상대방 그룹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혹시라도 거슬리는 말이 상대방 진영의 귀에 들어가게 되는 날에 터질 수 있는 고귀한 성전(聖戰)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남학생들조차 조용히 교실을 떠나기도 했다.
성전은 교실 밖 PC통신상에서도 이어졌다. 1997년 9월 6일자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그래도 이런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다. 한겨레는 1999년 1월 1일자 보도에서 ‘12월 31일 방송사에서 쇼를 본 뒤 귀가하던 중 H.O.T 팬클럽 회원들과 말다툼을 벌여 이들을 때린 젝스키스 팬클럽 회원 배아무개(18ㆍ고3)양 등 2명을 불구속입건했다’고 전했다. 아이돌 그룹을 둘러싼 팬클럽 회원들의 대립을 보도한 당시 매체들은 ‘입시의 중압감에 눌려 있는 10대들이 연예인들에게 왜곡된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표하기도 했다.
★ 신승훈 VS 김건모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1990년대 초반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과 ‘댄스의 황제’ 김건모가 있었다. 당시 가요계를 양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인기였다.
당시 하루 400여 통의 펜레터를 받은 김건모의 인기비결에 대해서 1994년 4월 20일 동아일보는 ‘그동안 신세대 가수들이 댄스 뮤직바람을 타고 대부분 요란한 몸짓 등 노래외적 요인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김건모는 가수의 본질인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김건모가 손가락 두 개를 펴서 흔들며 부드럽게 추는 ‘무척추 춤’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옷이 허리에 겨우 걸리는 ‘헐렁이 패션’이 홍대 앞과 압구정동 등 신세대 밀집지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김건모 열풍을 전했다.
반면 신승훈은 1992년 발표한 ‘보이지 않는 사랑’이 방송 인기순위는 물론 DJ연합회, DJ친목회, DJ클럽 등 다운타운 인기차트에서도 ‘보이지 않는 사랑’이 14주 이상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폭발적인 데뷔를 시작으로 승승장구했다. 당시 매체들은 신승훈의 인기가 10대와 20대 청소년 팬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점을 약점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현재 신승훈이 한국을 넘어서 일본에서까지 한류스타로 인기를 얻고 있는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른 모습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김건모와 신승훈이 거국적으로 한 판 붙게 된 이벤트는 1996년 5월이었다.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운명’ 등이 수록된 신승훈의 5집과, ‘스피드’, ‘빨간 우산’, ‘미련’이 담긴 김건모의 4집 < Exchange >가 충돌한 것이다. 결과는 신승훈의 판정승. 김건모가 183만장을 판매하며 선전했지만, 신승훈이 무려 248만장을 팔아치우며 개인 최고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두 라이벌 전쟁이 신승훈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역대 음반 판매량 1위는 김건모의 3집 < 잘못된 만남 >(286만장)이기 때문이다. 밀리언셀러가 뉴스가 되지 않던 시대였다.
★ 남진 VS 나훈아
좀 더 거슬러 가보자.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라이벌 구도는 남진과 나훈아가 세웠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꼬마 시절 아버지들의 술자리에 쪼르르 불려나가 ‘너는 남진이냐, 나훈아냐’는 질문에 분위기를 잘 파악해서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선호하는 가수에 따라 한반도가 반으로 쪼개졌을 정도였다.
당시 두 라이벌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안티팬들은 서로 나훈아에게는 ‘소도둑놈’, 남진에게는 ‘돼지’라는 원색적인 비난과 야유를 퍼부으며 대립했다. 양자 간의 긴장은 1972년 6월 서울시민회관 무대에서 나훈아가 괴한에게 깨진 사이다병으로 얼굴을 피습당하며 극대화됐다. 당시 범인이 남진의 사주를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지속됐지만 결국에는 한 망상자의 단독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남진 측은 매니저의 통솔 하에 ‘꽃다발부대’, ‘박수부대’, ‘피켓부대’등의 조직적인 팬클럽을 보유했다고 전해지지만, 반면 나훈아는 조직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자발적이고 열광적인 팬들을 많이 확보했었다고 한다.
라이벌전의 열기는 어느 아이돌 그룹보다 못지않았다고 한다. 1982년 5월 1일 동아일보는 라이벌 구도에서 흘러나온 에피소드들과 소문들을 전하며
옛 시대라고해도 가수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빚은 웃지 못 할 해프닝은 늘 존재했던 셈이다. 현재 나훈아가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있지만 최근까지 왕성하게 대중들과 호흡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며 윈-윈 관계를 달성한 긍정적인 본보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 가요계도 적지않은 라이벌이 있었다. 시야를 좀 더 넓혀 대중가요사를 통틀어 존재했던 위대한 라이벌들을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때마침 KBS 해피 FM(106.1㎒)의 <즐거운 저녁길 이택림입니다> 제작진이 지난 8월 2~27일 동안 공식 홈페이지 방문객 802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통해 최고의 라이벌 10쌍을 선정했다.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이 같은 결과가 산출된 여러 가지 요인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순위에 오른 라이벌들의 활동 시기가 1990년대 초반 이후로 쏠려있다. 아직까지 대중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라이벌 스타들이 선택을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울랄라세션과 버스커버스커의 경우는 아직 라이벌 구도라고 할 만한 경쟁기간을 이어오지 못했음에도 7위에 선정된 것이 단적인 예다.
또한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부상한 아이돌 그룹의 전성기가 이 같은 편중현상을 유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큰 호응을 얻은 드라마 < 응답하라 1997 >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폄훼된 감이 없지 않았던 아이돌 문화를 복권시켰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요인이다.
사실 리스트를 보면서 “그때 그랬지”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도 있겠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거나 세대가 어긋나는 탓에 쉽사리 공감하기 힘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언론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열기가 어땠는지 체감해보는 것도 이해를 돕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할 듯싶다. 주목할 만한 몇몇 사례 등을 눈여겨보자면…
★ 에이치오티(H.O.T) VS 젝스키스
두말할 필요 없이 아이돌 대립 구도의 절정인 시대였다. 앞으로 이러한 경쟁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교실 안에서 사춘기 여학생들은 철저하게 두 파로 나뉘었다. 좋아하는 그룹이 달라서 갈라진 건지, 원래 쟤가 싫어서 상대 그룹으로 붙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상파 음악프로그램을 방송한 다음 날 교실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우리 오빠들 무대를 보고 난 뒤 얻게 된 감동과 환희의 간증이 이어진 뒤, 상대방 그룹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혹시라도 거슬리는 말이 상대방 진영의 귀에 들어가게 되는 날에 터질 수 있는 고귀한 성전(聖戰)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남학생들조차 조용히 교실을 떠나기도 했다.
성전은 교실 밖 PC통신상에서도 이어졌다. 1997년 9월 6일자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PC 통신에는 ‘H.O.T의 강타가 찐빵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꽂았는데 다음날 젝스키스의 강성훈이 그대로 따라했다. 젝스키스의 김재덕이 쓰는 모자도 H.O.T의 토니가 1집 발표 당시 썼던 것이다’ 등 항의성 글이 올라있다…… ……H.O.T 팬들은 지난 7월 H.O.T가 4개월여 만에 방송활동을 재개할 때 젝스키스 팬들이 방송국에 몰려와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고 주장한다. 젝스키스 팬들은 H.O.T를 ‘개초티’라고 부르는가 하면 ‘이제 H.O.T의 시대가 갔다.’ ‘H.O.T는 라이브에 약한 그룹’이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 ||
그래도 이런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다. 한겨레는 1999년 1월 1일자 보도에서 ‘12월 31일 방송사에서 쇼를 본 뒤 귀가하던 중 H.O.T 팬클럽 회원들과 말다툼을 벌여 이들을 때린 젝스키스 팬클럽 회원 배아무개(18ㆍ고3)양 등 2명을 불구속입건했다’고 전했다. 아이돌 그룹을 둘러싼 팬클럽 회원들의 대립을 보도한 당시 매체들은 ‘입시의 중압감에 눌려 있는 10대들이 연예인들에게 왜곡된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표하기도 했다.
★ 신승훈 VS 김건모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1990년대 초반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과 ‘댄스의 황제’ 김건모가 있었다. 당시 가요계를 양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인기였다.
당시 하루 400여 통의 펜레터를 받은 김건모의 인기비결에 대해서 1994년 4월 20일 동아일보는 ‘그동안 신세대 가수들이 댄스 뮤직바람을 타고 대부분 요란한 몸짓 등 노래외적 요인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김건모는 가수의 본질인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김건모가 손가락 두 개를 펴서 흔들며 부드럽게 추는 ‘무척추 춤’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옷이 허리에 겨우 걸리는 ‘헐렁이 패션’이 홍대 앞과 압구정동 등 신세대 밀집지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김건모 열풍을 전했다.
반면 신승훈은 1992년 발표한 ‘보이지 않는 사랑’이 방송 인기순위는 물론 DJ연합회, DJ친목회, DJ클럽 등 다운타운 인기차트에서도 ‘보이지 않는 사랑’이 14주 이상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폭발적인 데뷔를 시작으로 승승장구했다. 당시 매체들은 신승훈의 인기가 10대와 20대 청소년 팬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점을 약점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현재 신승훈이 한국을 넘어서 일본에서까지 한류스타로 인기를 얻고 있는 ‘국민가수’의 반열에 오른 모습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김건모와 신승훈이 거국적으로 한 판 붙게 된 이벤트는 1996년 5월이었다.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운명’ 등이 수록된 신승훈의 5집과, ‘스피드’, ‘빨간 우산’, ‘미련’이 담긴 김건모의 4집 < Exchange >가 충돌한 것이다. 결과는 신승훈의 판정승. 김건모가 183만장을 판매하며 선전했지만, 신승훈이 무려 248만장을 팔아치우며 개인 최고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두 라이벌 전쟁이 신승훈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역대 음반 판매량 1위는 김건모의 3집 < 잘못된 만남 >(286만장)이기 때문이다. 밀리언셀러가 뉴스가 되지 않던 시대였다.
★ 남진 VS 나훈아
좀 더 거슬러 가보자.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라이벌 구도는 남진과 나훈아가 세웠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꼬마 시절 아버지들의 술자리에 쪼르르 불려나가 ‘너는 남진이냐, 나훈아냐’는 질문에 분위기를 잘 파악해서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선호하는 가수에 따라 한반도가 반으로 쪼개졌을 정도였다.
당시 두 라이벌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안티팬들은 서로 나훈아에게는 ‘소도둑놈’, 남진에게는 ‘돼지’라는 원색적인 비난과 야유를 퍼부으며 대립했다. 양자 간의 긴장은 1972년 6월 서울시민회관 무대에서 나훈아가 괴한에게 깨진 사이다병으로 얼굴을 피습당하며 극대화됐다. 당시 범인이 남진의 사주를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지속됐지만 결국에는 한 망상자의 단독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남진 측은 매니저의 통솔 하에 ‘꽃다발부대’, ‘박수부대’, ‘피켓부대’등의 조직적인 팬클럽을 보유했다고 전해지지만, 반면 나훈아는 조직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자발적이고 열광적인 팬들을 많이 확보했었다고 한다.
라이벌전의 열기는 어느 아이돌 그룹보다 못지않았다고 한다. 1982년 5월 1일 동아일보는 라이벌 구도에서 흘러나온 에피소드들과 소문들을 전하며
……남진의 매니저가 술집에 갔다가 나훈아 노래만 나왔다하면 술집을 박살냈다든지 MBC TV가 해마다 ‘가수왕’을 뽑는데 남진 쪽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여 세 번이나 가수왕이 됐지만 나훈아는 손을 못 써 항상 2등에 머물러 언제는 가수왕이 틀림없이 될 거라고 믿어 나이트클럽 하나를 전세 내놓고 기다리다 끝내 떨어져 울었다든지 하는 얘기들이 다 그렇다. …… ……방송국 앞에 작곡가 박춘석 씨가 차를 세워두면 양쪽의 팬들이 아주 자동차 보니트에 걸터 앉아 “나훈아한테 남진보다 더 좋은 곡 주세요”, “남진한테 더 좋은 곡 주세요”하고 승강을 한다든지 하는 것도 그런 것…… | ||
옛 시대라고해도 가수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빚은 웃지 못 할 해프닝은 늘 존재했던 셈이다. 현재 나훈아가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있지만 최근까지 왕성하게 대중들과 호흡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는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며 윈-윈 관계를 달성한 긍정적인 본보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글 / 홍혁의 (hyukeui1@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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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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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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