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불안병’이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기 생긴 질환이다. 부모부터 어떤 삶의 가치를 갖고 살아야하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줄 것은 없고, 그저 다그칠 뿐이다. 그래야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이른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말고 다른 가치는 없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한다. 선망하거나 깔본다. 옆집 엄마의 한 마디에 대책 없이 흔들리고, 엄친아ㆍ엄친딸(엄마 친구 아들ㆍ딸)만 들먹인다. 아이만 좀 먹는 것이 아니다. 부모도 좀 먹는다. 함께 살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는 구조.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까지 전이하는 구조.
불안해하니까 부모다? 그 불안 때문에 불행해지고 불쌍해지는 것이 대한민국 부모다. ‘3불’의 조화(?)다. 그렇다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이만 성숙시키고, 나(부모)는 성숙하지 않아도 될까? 성숙하지 않은 부모가 아이를 성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의 답을 내놓자면, 내려놓는 것이다. 즉, 포기. 포기가 어떻게 사람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승욱 공공상담소장. 이 소장은 『대한민국 부모』(이승욱ㆍ신희경ㆍ김은산 지음|문학동네 펴냄)를 통해 그것을 말한다.
지난 8월16일, 서울 마포구 디지털미디어센터(DMC), 이승욱 소장이 진행한 『대한민국 부모』 특별강연회가 열렸다. 당신은 어떤 부모이며, 당신의 아이는 살아있는지를 묻게 만든 시간. 그리하여, 대한민국 부모로서 살아가기. 결혼을 했든, 비혼이나 미혼이든, 인간은 어떻게 성숙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 시간.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것, 신뢰
이 소장,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세 가지 열쇠말 가운데 ‘신뢰’를 우선 꺼낸다. 가족이라고, 부모라고, 다 신뢰할 수 있는 것, 아니다. 부모라고 자식을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 개봉했었던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한 장면(대사)를 살펴보자. 어린 아들(케빈)은 엄마에게 말한다. “익숙한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달라. 엄마는 내가 익숙할 뿐이지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신뢰를 하기 위해서는, 첫째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을 발견해야 한다. 즉,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성인이 되면 스스로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의 첫째 덕목은 일관성, 예측가능성 같은 것이다. 예측가능성과 일관성을 해치는 가장 큰 문제는 부모의 불안이다. 즉, 감정적인 기복이다. 일관성은 다른 말로 원칙이다. 원칙이 지켜진다면 아이는 안정감을 느낀다. 조변석개 같은 사람은 우린 신뢰 못한다.”
우리는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 소장은 아이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로 이것을 든다. “엄마는 만날 거짓말만 해.” 뜨끔하지 않은가? 귀여운 거짓말도 있겠지만, 이 소장은 부모의 소홀함을 질타한다. 부모가 어떻게 원칙을 세워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
그렇다면 그 원칙, 어떻게 세우면 좋을까. 이 소장이 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다. 아이가 어려서 원칙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부모의 오산이다. 아이들의 지혜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아이를 가장 잘 모르는 사람은 부모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부른 재앙(!)이다. 이 소장이 상담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의 하나가 ‘원칙 없는 부모(들)’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곧잘 맹목에 빠진다.
“원칙을 만든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만든 원칙은 아이에게 덕이 되는 원칙인가. 아이의 구강기 때 신뢰의 역사가 시작된다. 태어나서 12개월, 자신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는 시기다. 자존감이라고도 얘기하는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중요하다. 그게 있어야 타인에 향한 신뢰도 가능하다. 내적으로 신뢰를 형성하는 기초가 12개월 안에 이뤄진다. 가령, 예측가능한 수유를 해주는가의 문제. 울 때마다 젖을 주는가, 2시간마다 줄 것인가 등이다. 이게 예측 불가능하게 되는 게 가장 나쁘다. 초기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 다음 중요한 시기는 만 2~3살 무렵. 아이들에게는 탐색의 시기란다.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있던 아이가, 일어서면서 다른 환경임을 인지하는 때다. 혀가 가장 예민한 시기로, 자율성을 배운다. 대소변을 가리면서 조절 능력도 생기고, 뭔가를 탐색한다. 아이는 모든 것이 새롭고 감각하려고 한다. 이 자율성과 탐색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아이가 무기력한 인간이 되느냐, 열정적인 인간으로 되느냐의 틀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이 소장의 설명.
과거 많은 아이들은 동네의 형ㆍ누나에 이끌려 동네로 나가서 놀았다. 방목됐다. 자연스럽게 자율성과 탐색의 과정을 거쳤다. 지금 아이들, 다르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요즘 아이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의 50% 이상이 금지명령어다. 안 돼, 하지 마 등과 같은 말. 이 소장은 큰 염려를 표한다. 자율성이 발현돼야 할 시기, 부정어 때문에 아이는 자율성을 포기한다. 자율성이 주어지지 않으면 아이는 무기력해진다. 지금의 많은 아파트, 아이를 감시감독하기 좋은 구조다. 공동체가 와해돼서 밖에 나가서도 아이는 자율성을 키울 수가 없다.
왜 우리는 불안해하는가!
“인간은 분리된 존재다. 엄마 밖으로 나오면서 육체적으로 분리되고, 엄마 젖을 먹다가 12개월쯤 되면 영양적 차원에서도 분리된다. 12~36개월까지 아이에겐 ‘자기’라는 개념이 발생한다. 인정이라는 키워드와 연결되는데, 이게 심리적으론 인간에게 큰 비극이다.”
왜 비극일까. 어떤 아이든,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엄마’다. 예외가 거의 없다.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건, 개념이 생겼다는 말인데, 엄마라는 말을 처음 한다는 것은 타인이라는 개념이 먼저 생겼음을 의미한다. 타인이라는 개념이 먼저 생긴 뒤, 2~3살 아이는 “내 거야”등과 같은 자기중심적인 말을 많이 쓴다.
즉, 거의 모든 인간은 타인이라는 개념을 먼저 인식하고 타인을 통해 나를 인식한다. 이 소장은 그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왜 인정을 필요로 하는가에 답. 나와 타인이 분리되는 시기를 ‘분리불안과 애착관계의 시기’라고 한다. 즉, 아이와 엄마는 한 몸으로 10개월을 있다가, 아이는 태어나 12개월가량을 엄마에게 온전히 위탁한다. 이후 각각 분리되는데, 여기서 ‘분리불안’이 생긴다. 인간은 누구나 어지간하면 분리불안이 있단다.
“정서적으로 애착관계를 가진 사람과 분리된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이 불안이다. 아이와 엄마의 관계에서 개체 분리가 발생할 때, 아이뿐 아니라 엄마도 불안해한다. 분리는 불안을 가져온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부모가 아이와의 분리를 받아들이기 힘든 건 자명하다.”
불안사회에 대한 심리학적 근거의 제시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불안, 아이보다 부모의 불안이 훨씬 더 크다. 아이의 불안은 부모의 불안이 전이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즉, 부모의 불안일 뿐, 아이의 불안은 아니다. 부모의 불안을 보면서 자란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말하자면, 입시제도에 의한 불안, 부모가 불안해하니 아이가 불안해할 뿐이다. 이 소장은 불안의 근원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분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대상으로 부모가 왜 싸우는가? 시스템이 잘못됐는데, 왜 고치려고 하지 않는가? 불안을 조장ㆍ증폭하는 사회를 왜 용납하는가? 싸워야 할 대상은 아이가 아니다. 시스템을 만든 구조나 국가다. 그것은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돌린다.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인데 부모는 이걸 묵과하고 불안을 아이에게 쏟아 붓는다. 그러니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지 못한다.”
이 소장은 아이들은 똑똑하고, 놀라울 정도로 혜안이 있다고 말한다. 부모만 그것을 모른다는 것. 그가 이 책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도 이것이다. 부모의 불안 에너지를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식으로 옮기면 아이와 부모 모두 살고,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철저히 개인적인 지금 여기의 구호들, “나만 잘 되면 돼” “나만 아니면 돼” 등을 버리자고 요구한다.
인정투쟁,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
따라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보호받고 있구나. 우리는 안전하구나. 우리가 성장해도 되는 곳이구나. 요즘 아이들이 패기가 없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어른들의 생각은 순서가 잘못됐다. 부모들, 어른들이 그런 환경을 못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베이스캠프가 먼저 돼 줘야 한다. 베이스캠프가 불안하고 흔들리니까, 아이들은 베이스캠프에 묶여서 못 떠난다.
“성장은 다른 말로 떠난다는 말이다. 인정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에겐 타인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타인이 인정해줄 때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진다. 슬픈 운명이다. 심리학적으로 인정에 대한 갈망은 태어나면서부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실존한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다. 남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고 목마른 것이 인정이다. 남자들은 다루기 쉽다. (웃음) 인정만 조금만 해주면 참 다루기 쉽다. 인정을 해주지 않는 건 일종의 통제 방식이다. 아이가 아무리 공부를 잘 해와도 인정을 안 해주는 건, 통제를 하기 위해서지. 인간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확인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인정을 갈구한다. 죽을 때까지 인정투쟁을 펼친다.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숙명, 그것을 타고 났다. 부모라고 다르지 않다. 아이의 성적표가 부모가 인정받는 길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아이를 잡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
“부모가 좋은 의미에서 (이런 인정받기를) 포기한다면, 부모의 불안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포기’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상담실에서 다양한 상담을 했는데, 인간의 성찰과 성장이 언제 일어나느냐면 어떤 것을 포기하는 순간이다. 이때 인간은 굉장히 다른 형태로 변태한다. 내적인 형태가 바뀐다. 포기의 다른 말은 수용이다. 포기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즉, 그것이 아니어도 내가 나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 포기의 다른 이름은 그래서 수용이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사회적 자아로서 대기업 부장이 아니고, 의사가 아니고, 검사가 아니어도, 내가 나일 수 있는 것. 이것이 가능하다면, 삶이 달라진다고 이 소장은 강조한다.
“인류의 탄생 이래, 이렇게 시험을 많이 친 시절이 있었을까. 시험이 왜 싫을까.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 불과 100년 전에도 없었다. 자격증, 학위가 많을수록 좋고, 투잡ㆍ스리잡을 추앙하는 시대다. 왜냐, 불안하니까! 이것이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정체성을 분열시킨다. 70~100년 전만 해도, 자기완결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때는 자기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신분을 물려받기도 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우리는 뭘 하면서 살 수 있을지 고민만 한다. 숱하게 많은 진로나 적성 검사를 하지만, 진로를 못 찾는다. 태풍은 진로가 있지만, 우리는 진로 때문에 늘 고민이다. 그러면서 정체성은 분열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회적인 페르소나(가면)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학력 혹은 자격증에 매달린다. 정체성은 분열됐고, 삶은 조각조각 쪼개졌다.
“자유가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우리에겐 자유가 없다. 수도 없이 시험을 치러야 하고, 시험 칠 일이 끊임없이 생긴다. 지금은 배우자까지도 평가한다. 대학, 연봉 등을 통해서. 계속된 평가의 연장선상이다. 가장 우려되는 건, 자신에 대한 평가다. 타인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평가하고,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게 나라고 믿어버린다.”
지금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
아이들을 끊임없이 평가하게 만드는 세상. 그럼으로써 늘 불안해하면서, 가족과 내 문제에만 매달리게 만드는 시스템이자 구조. 이 소장은 단언한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이 원한 것이다. 나와 가족 문제에 빠져서 시스템과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방법은 있다!
“구조와 시스템을 조금만 바꿔도 아이를 안 잡아도 된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잘 살 수 없는 구조는 누가 만들까. 대기업이 만든다. 아이에게 노동교육을 안 시키고 본부장만 시키려 한다. 우리는 거의 다 노동자로 산다. 지금 이렇게 인간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바꾸자. 우리 아이와 우리의 삶을 구하기 위해, 아이에게 쏟는 에너지를 구조를 바꾸는데 쓰면 세상이 달라진다. 이런 아노미 세상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정신일 것이다. 물론 모범적인 답안은 없고, 각자 고민해야 한다.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타인의 인정을 갈급하지 않고 자신을 인정하고 사회적인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정신을 지키는 것이다. 부모이고 국민이기 이전, 실존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인간으로 살 수 있을까, 고민했으면 싶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없애는 것입니다. 저희가 제안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우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비현실적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를 없애고 새로운 현실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p.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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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모’에 대해 묻고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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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아이의 짜증을 견디지 못한다. 내 어린 시절, 원가족과의 관계 등을 통해 단서를 발견했지만,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답답하고 막막하다. 죄책감도 있고. 어떡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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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많이 들이려고 노력한 것 같다.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를 돌봤다면 희생도 컸을 것 같고. 아이가 내 마음에 쏙 들게 크면 내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마음을 가질 법 한데, 아이가 그렇지 않을 때 엄마가 느낄 좌절감, 억울함이 있을 거다. 아이가 주는 실망감이 2~3이라면, 희생까지 했다는 히스토리까지 합쳐 4~5로 증폭할 개연성도 생각할 수 있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면 현대의 엄마가 겪는 딜레마가 있다.(※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엄마가 원하지 않던 아이를 낳은 후 사랑하지 않는지 의심스러운데, 아이가 감옥에 간 이후, ‘살인마의 엄마’라며 린치를 당한다. 엄마는 동네를 떠나지 않고 살면서 아이 면회도 꾸준히 간다. 우리는 사랑한 만큼 절망하기도 하지만, 절망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기도 한다.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 중 하나가 절망한 만큼 사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 부모의 어른스러운 자세 같다. 5살 때가 사실 말을 많이 안 듣는다. 부모는 패주고 싶다. 5살 남자아이라면 아버지가 개입을 많이 해주고 접촉의 면이 많아져야 한다. 부자만 접촉할 수 있는 면을 넓히고, 아버지가 아이만 데리고 외출하고 그러면 좋을 거다. -
20대 중반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신뢰도 없고, 평가 당하는 것도 싫고, 가족 관계도 좋지 않다.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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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개선하려는 노력 때문에 악화되는 경우도 많다. 차라리 거리를 두고 여유를 찾아라. 자신을 지키는 힘이 생겼을 때, 남의 말로부터 덜 흔들릴 수 있을 때, 개선을 시도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부모가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리는 거지. (웃음) 너무너무 많이 본 경우인데, 도망의 방식으로 결혼을 택하지는 마라. 그러면서 결국, 내 발등 내가 찍었네,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디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나오는 건 좋지 않다. 부모가 아직 인정을 안 해줄 수도 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게, 내 삶을 부정당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도 깊은 곳에선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아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끄집어내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도 아이들이 어릴 때, 아이들에게 잘못한 걸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데, 일반인들은 더 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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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정신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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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면, 나이대별로 주요화두를 정리해봤다. 20대는 방황, 30대는 고행, 40대는 성취, 50대는 전수(전승), 60대는 통합, 이렇게 정리했다. 20대 때는 방황을 해봐야 한다. 그게 자원이 된다. 모든 방황을 통해 세상과 더 많이 접촉한다. 20대 중후반이 돼야 인상이 완성된다고 본다. 그래서 20대 때는 여행도 자주 가고 그랬으면 좋겠다.
방황을 하다가 30대쯤 되면 내가 해야 할 것을 찾는다. 고행의 시간이다. 꼭 필요한 스킬을 연마하고 지적인 카리스마도 생긴다. 자기 분야에 대한 사회적 자아가 완성된다. 40대는 그걸 바탕으로 성취의 시기가 된다. 50대가 되면 다음 세대를 걱정해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
문제는 지금 사람들이 모든 다음 세대가 아닌 내 아이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웃음) 스크루지 영감은 나누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정신적으로 협소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20~40대에 얻은 걸 다음 세대에 전수할 의무가 50대에 생기고, 60대에 완성에 가까운 인간이 된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은 정신적으로 굉장히 성숙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아이를 방황하지 못하게 한다. 30대는 고행이지만, 내적 고행이 아닌 모욕을 참는 힘일 뿐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40대에 뭔가를 성취하면 억울해 한다. 어떤 모욕을 참으면서 성취했다며, 성취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만 주려고 하고. 정서적인 스크루지가 되는 거지. 내가 말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정신을 성숙시키고 통합된 인간이 되는 방법이라고 본다. -
20대 중반인데, 대한민국 부모가 되는데, 두려움이 있는데 조언을 해준다면? 또 초등학생을 많이 만난다. 시스템이 쉽게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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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부모가 돼야 한다. 단 부모가 되기 전,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부터 생각해야 한다. 부모가 되면 굉장한 책임이 따른다. 책임을 진다는 건, 어른이라는 얘기다. 지금 어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책임을 아이에게 전가한다는 거다. 부모가 되기 전에 어른이 돼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인지 자신이 생각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해 왔다는 자부심도 좋지만 내가 무엇을 안 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갈등이 발생하면, 대개의 경우, 나는 뭘 했는데, 너는 뭘 안 했다고 얘기한다. 내가 무엇을 안 했는가, 이 상황이 되기까지 나는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책임을 지지 않았는지 성찰하는 사람이 어른이다.
수학문제를 하나 더 푼다고 더 잘 살까? 나만 봐도, 초중고 초지일관 50등 언저리를 했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한다. 지금은 공부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 온종일 공부만 하고 돈벌이 안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좋아해야 한다. 아이에게 확신할 수 없는 얘기를 하지 말자. 교육이 참 공허하다.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확신하는 척하고. 놀라운 건, 아이들은 그것을 다 안다는 것이다.
- 대한민국 부모 이승욱,신희경,김은산 공저 | 문학동네
다양하고 풍부한 상담 사례를 통해 대한민국 가정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태보고서이자 가정을 이끄는 대한민국 부모들에게 아이로부터 독립할 것을 촉구하는 대한민국 부모 독립선언서이기도 하다. 자식을 둔 부모이자, 상담실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픈 이들을 만나온 두 명의 심리학자와 하자작업장학교에서 교사로 아이들을 만났던 한 명의 인문학자는 더 이상 우리 시대 아이들의 아픔을 함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gda223
2012.10.15
다대기
2012.10.15
kth27zz
201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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