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타서 세상에 못 나올 뻔 했던 명작 - L. M. 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1908>
서른 살의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오래된 수첩을 뒤적였다. 어릴 적부터 이야깃거리가 생각날 때마다 끼적여놓은 수첩이었다. 그녀는 주일 학교 신문에 실을 이야기의 소재를 찾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원석을 발굴해내길 기대하며 낡은 종잇장을 한 장 한 장 넘겼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오래 전에 적어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201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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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오래된 수첩을 뒤적였다. 어릴 적부터 이야깃거리가 생각날 때마다 끼적여놓은 수첩이었다. 그녀는 주일 학교 신문에 실을 이야기의 소재를 찾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원석을 발굴해내길 기대하며 낡은 종잇장을 한 장 한 장 넘겼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오래 전에 적어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가애
‘어느 노부부가 고아원에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신청서를 낸다. 그런데 중간에 어떤 착오가 생겨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보낸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상상력이 발동했다. 드디어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 소재를 발견한 것이다.
이 짤막한 사연은 몽고메리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그녀의 외가 쪽 친척어른인 피어스 맥닐과 동료 농부가 일손을 거들 남자아이 두 명을 입양하기로 하고 절차를 밟았는데, 막상 아이들이 오기로 한 날 역으로 마중을 나갔더니 황당하게도 기차에서 세 살짜리 여자애와 다섯 살 소년이 내리는 게 아닌가. 일이 복잡하게 꼬이긴 했지만, 맥닐은 여자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엘렌이라는 새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그 후 소녀는 몽고메리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캐번디시의 농장에서 자랐다.
캐나다 작가인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의 시작도 그 수첩 속의 사연과 비슷하다. 농장 일을 도와줄 사내아이를 원했던 나이 든 남매의 집에 어쩌다 열한 살 소녀 앤이 들어와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 속의 빨강머리 고아소녀가 친척동생 엘렌의 복사판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극구 부인했다.
몽고메리는 ‘앤’이라는 인물이 엄연히 상상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 소녀를 떠올렸던 순간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소녀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소녀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e까지 포함해서 말이다’(소설 속 앤은 ‘Ann’이라는 이름이 낭만적이지 않아 싫지만 끝에 ‘e’라는 철자가 붙으면 발음이 똑같아도 그나마 견딜만하다면서 ‘Anne’이라는 이름의 철자에 집착한다-옮긴이).
그때 몽고메리의 상상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소녀는, 작가가 이전까지 창조했던 허구의 인물들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몇 해 전 몽고메리는 《골든 캐롤Golden Carol》이라는 소설을 썼다. 하지만 상냥한 아가씨가 주인공인 이 소설을 책으로 내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다. 원고를 보냈다가 거절당하기를 숱하게 반복한 끝에, 작가는 결국 출간을 포기하고 원고를 불태워버렸다.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작가는 주인공의 밋밋한 성격이 《골든 캐롤》의 문제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번 소설의 주인공 앤은 전작의 주인공과 180도 다른 인물로 그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빨강머리 앤은 상상력과 호기심이 풍부하고 배짱이 두둑한 소녀로 탄생했다. 앤은 학교신문에 한 번 등장하고 사라져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특별한 소녀였다. 1905년 봄, 몽고메리는 갓 피어난 꽃들과 싱싱한 초록색 풀밭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다락방 창가에 앉아 본격적으로 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빨강머리 앤의 모델이 된 ‘이블린 네스빗’ [출처: 위키피디아] >
몽고메리는 박공지붕 밑에 자리한 다락방 벽에 어느 모델의 사진을 붙여두었다. 사진 속 십대 소녀의 시선은 카메라가 아닌 먼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틀어서 오뚝한 콧날과 작고 섬세한 입술이 한층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그리고 이마를 가로지른 리본과 양쪽 귀를 덮은 커다란 국화가 마치 환상의 세계에서 온 요정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몽고메리는 종종 그 사진을 올려다보며 ‘저 모델 소녀가 앤의 탄생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기나 할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이 사진은 원래 미국 잡지 <메트로폴리탄 매거진>에 실려 있었고, 이 아름다운 모델의 이름은 ‘이블린 네스빗’이었다. 빨강머리 미인 네스빗은 20세기 초에 활약한 유명모델로, 미모에 걸맞게 숱한 염문설을 뿌리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집필 당시 몽고메리는 사진의 모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순전히 그 몽환적인 얼굴에 매료되어 작품에서 앤의 외모를 묘사하는 데 참고했다.
작가가 옛 기록을 뒤적이다 소설의 소재를 발견한 지 약 1년이 지난 1906년 1월, 마침내 《빨강머리 앤》 원고가 완성되었다. 몽고메리는 오랫동안 방치했던 고물 타자기를 꺼냈다. 손으로 쓴 원고를 타자원고로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타자기가 하도 낡아서 대문자를 치는 데도 애를 먹고 ‘w’는 아예 종이에 찍히지도 않았지만, 몽고메리는 끈기 있게 자판을 두드려가며 깔끔한 타자 원고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완성한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내봤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다섯 번째 거절편지를 받고 나서, 몽고메리는 원고를 오래된 모자 상자에 넣어 안 보이는 데로 치워버렸다.
《골든 캐롤》에 이어 《빨강머리 앤》까지 출판사에게 외면당했으니 작가의 실망감이 오죽했을까. 그래도 천운이 작용했는지, 《빨강머리 앤》 원고는 작가의 전작처럼 화형으로 생을 마감하는 수모를 겪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작가는 이야기의 분량을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팍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탈고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몽고메리는 창고에 처박아둔 모자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자기 작품의 독자가 되어 이야기를 다시 읽는 동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앤의 세계에 정신없이 빨려들었다. 새삼스레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흘렀으니 이제 출판사 사람들도 이 작품을 새롭게 볼지 몰라. 내가 봐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다시 한 번 도전해볼 가치는 있잖아?”
몽고메리는 원고를 포장해 보스턴의 L. C. 페이지 앤드 컴퍼니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일기장을 펼쳐 감격의 순간을 기록했다.
‘드디어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원고를 책으로 내겠다고 한다!’
ⓒ정가애
‘어느 노부부가 고아원에 남자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신청서를 낸다. 그런데 중간에 어떤 착오가 생겨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보낸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상상력이 발동했다. 드디어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 소재를 발견한 것이다.
이 짤막한 사연은 몽고메리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그녀의 외가 쪽 친척어른인 피어스 맥닐과 동료 농부가 일손을 거들 남자아이 두 명을 입양하기로 하고 절차를 밟았는데, 막상 아이들이 오기로 한 날 역으로 마중을 나갔더니 황당하게도 기차에서 세 살짜리 여자애와 다섯 살 소년이 내리는 게 아닌가. 일이 복잡하게 꼬이긴 했지만, 맥닐은 여자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엘렌이라는 새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그 후 소녀는 몽고메리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캐번디시의 농장에서 자랐다.
캐나다 작가인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의 시작도 그 수첩 속의 사연과 비슷하다. 농장 일을 도와줄 사내아이를 원했던 나이 든 남매의 집에 어쩌다 열한 살 소녀 앤이 들어와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 속의 빨강머리 고아소녀가 친척동생 엘렌의 복사판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극구 부인했다.
몽고메리는 ‘앤’이라는 인물이 엄연히 상상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 소녀를 떠올렸던 순간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소녀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소녀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e까지 포함해서 말이다’(소설 속 앤은 ‘Ann’이라는 이름이 낭만적이지 않아 싫지만 끝에 ‘e’라는 철자가 붙으면 발음이 똑같아도 그나마 견딜만하다면서 ‘Anne’이라는 이름의 철자에 집착한다-옮긴이).
그때 몽고메리의 상상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소녀는, 작가가 이전까지 창조했던 허구의 인물들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몇 해 전 몽고메리는 《골든 캐롤Golden Carol》이라는 소설을 썼다. 하지만 상냥한 아가씨가 주인공인 이 소설을 책으로 내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다. 원고를 보냈다가 거절당하기를 숱하게 반복한 끝에, 작가는 결국 출간을 포기하고 원고를 불태워버렸다.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작가는 주인공의 밋밋한 성격이 《골든 캐롤》의 문제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번 소설의 주인공 앤은 전작의 주인공과 180도 다른 인물로 그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빨강머리 앤은 상상력과 호기심이 풍부하고 배짱이 두둑한 소녀로 탄생했다. 앤은 학교신문에 한 번 등장하고 사라져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특별한 소녀였다. 1905년 봄, 몽고메리는 갓 피어난 꽃들과 싱싱한 초록색 풀밭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다락방 창가에 앉아 본격적으로 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빨강머리 앤의 모델이 된 ‘이블린 네스빗’ [출처: 위키피디아] >
몽고메리는 박공지붕 밑에 자리한 다락방 벽에 어느 모델의 사진을 붙여두었다. 사진 속 십대 소녀의 시선은 카메라가 아닌 먼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틀어서 오뚝한 콧날과 작고 섬세한 입술이 한층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그리고 이마를 가로지른 리본과 양쪽 귀를 덮은 커다란 국화가 마치 환상의 세계에서 온 요정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몽고메리는 종종 그 사진을 올려다보며 ‘저 모델 소녀가 앤의 탄생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기나 할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이 사진은 원래 미국 잡지 <메트로폴리탄 매거진>에 실려 있었고, 이 아름다운 모델의 이름은 ‘이블린 네스빗’이었다. 빨강머리 미인 네스빗은 20세기 초에 활약한 유명모델로, 미모에 걸맞게 숱한 염문설을 뿌리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집필 당시 몽고메리는 사진의 모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순전히 그 몽환적인 얼굴에 매료되어 작품에서 앤의 외모를 묘사하는 데 참고했다.
작가가 옛 기록을 뒤적이다 소설의 소재를 발견한 지 약 1년이 지난 1906년 1월, 마침내 《빨강머리 앤》 원고가 완성되었다. 몽고메리는 오랫동안 방치했던 고물 타자기를 꺼냈다. 손으로 쓴 원고를 타자원고로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타자기가 하도 낡아서 대문자를 치는 데도 애를 먹고 ‘w’는 아예 종이에 찍히지도 않았지만, 몽고메리는 끈기 있게 자판을 두드려가며 깔끔한 타자 원고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완성한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내봤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다섯 번째 거절편지를 받고 나서, 몽고메리는 원고를 오래된 모자 상자에 넣어 안 보이는 데로 치워버렸다.
《골든 캐롤》에 이어 《빨강머리 앤》까지 출판사에게 외면당했으니 작가의 실망감이 오죽했을까. 그래도 천운이 작용했는지, 《빨강머리 앤》 원고는 작가의 전작처럼 화형으로 생을 마감하는 수모를 겪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작가는 이야기의 분량을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팍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탈고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몽고메리는 창고에 처박아둔 모자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자기 작품의 독자가 되어 이야기를 다시 읽는 동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앤의 세계에 정신없이 빨려들었다. 새삼스레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흘렀으니 이제 출판사 사람들도 이 작품을 새롭게 볼지 몰라. 내가 봐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다시 한 번 도전해볼 가치는 있잖아?”
몽고메리는 원고를 포장해 보스턴의 L. C. 페이지 앤드 컴퍼니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일기장을 펼쳐 감격의 순간을 기록했다.
‘드디어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원고를 책으로 내겠다고 한다!’
L. M. 몽고메리 1874년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야기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교직생활과 기자생활을 하다가 대학에 들어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녀의 명작, 《빨강머리 앤》은 수많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끝에 보스턴의 한 출판사에 의해 탄생했으며 결국 큰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 22편중에 10편이 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 ||||
-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실리어 블루 존슨 저/신선해 역 | 지식채널
작가들의 문학적 영감에 대해 늘 궁금해하던 편집자 실리어 블루 존슨은 어느 날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소설의 첫 줄이 탄생하기 이전의 일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우아한 사교계 명사를 창조하기 위해 밟았던 과정을 직접 따라가면서,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문학작품을 품은 작가들의 반짝이는 영감을 캐내보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작가들의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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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실리어 블루 존슨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영미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출판사 랜덤하우스와 그랜드 센트럴 퍼블리싱에서 편집자로 근무했다. 비영리 문예지 「슬라이스Slice」를 공동 설립, 운영하면서 수많은 베스트셀러 작가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평소 많은 작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어떻게 문학적 영감을 얻고 아이디어를 글로 옮기는지에 관심이 많았던 존슨은 《댈러웨이 부인》, 《오만과 편견》, 《노인과 바다》, 《어린 왕자》 등 위대한 문학작품들의 흥미진진한 뒷이야기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을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에 오롯이 담아냈다. 현재는 유명 작가들의 독특한 글쓰기 기술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sind1318
2012.12.31
sung1127
2012.11.30
prognose
20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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