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기 위해서, 자신의 한 판 바둑(삶)을 승리하기 위해서 터벅터벅 한 수, 한 수 돌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
|||||||||||||
일과 나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을 묘사하고 싶었다
“이렇게 잘 될 줄 몰랐어요.” 만화가 강풀이 농담 어린 고백으로 말문을 열었다. 앞서 말한 난제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 역시 ‘과연 바둑 만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거의 1년 가까이 연재를 만류했다고 하니, 회의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는 돌파구를 찾아냈고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던 흥행을 이뤄냈다. 강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과연 윤태호의 ‘내공’은 대단했다. 그 내공의 실체를 드러내 줄 강풀 작가의 질문이 이어졌다.
강풀 : 왜 하필 바둑이었죠?
윤태호 : 『미생』의 출판사(위즈덤하우스)에서 제안했던 게 바둑과 샐러리맨의 이야기였어요. 저는 바둑을 10급 정도 두는 데, 바둑을 두는 것 보다 바둑에 관한 에세이나 신문에 실리는 기보 해설을 읽는 걸 좋아해요. 그 중에 내기 바둑꾼들에 대한 이야기를 『타짜』 식으로 그려볼까, 하고 10년 전 쯤에 자료 조사를 했었어요. 제가 연재 제안을 하던 중에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멈췄고요. 샐러리맨과 관련해서는 창업 만화를 준비했었어요. 동네 음식점들이 빠른 속도로 생겼다가 없어지는 걸 보면서 ‘대부분 퇴직금으로 가게를 시작하는데 왜 이 사람들이 이런 안타까운 길을 가지, 돈이란 과연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게 차리는 법이나 벤처 창업, 돈 버는 이야기를 해볼까 싶어서 관련 책들을 많이 봤었죠. 그 유산이 남아 있다가 출판사의 제안으로 미생을 그리게 된 거에요.
강풀 : 『미생』은 너무 판타지 아닌가요. 사람들이 너무 따뜻하지 않아요? 영업 3팀의 팀원들은 굉장히 따뜻해요. 실제 샐러리맨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합니다.
윤태호 : 취재원들에게 들어보니 ‘안영이’ 같은 캐릭터는 가장 재수 없는 캐릭터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다른 드라마나 작품들을 보면 갈등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악역들이 많이 나와요. 저의 목표는 대단히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생기는 갈등을 묘사해 보자는 것이거든요.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악당과 정의로운 사람들 사이의 구도가 아니라, 이들이 무슨 일을 성취하고 싶은데 그것을 이루기 어려운 구도를 묘사해 보자는 거죠. 순수하게 일과 나와의 관계에서요. 그 색깔이 결국 미생의 색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 끌어가는 이야기는 ‘장그래’라는 신입 사원의 눈높이에서 모두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 녀석 입장에서 벌써부터 악당을 보게 된다고 할 수 없을 거예요. 모조리 자신의 선배들이고 고참들이니까요. 그래서 아직까지 악역이 나오지 않았다가 너무 착한 류의 에세이 만화로 가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좀 더 빠르게 악역을 등장시켰죠.
자기 삶의 주체를 발견해 내는 과정이 『미생』의 생명
강풀 : 앞으로 캐릭터 내에서 변화가 생길까요?
윤태호 : 기본적으로 성격은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이 사회적인 룰을 깨트리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 정말 판타지가 되겠죠. 이 사람이 임원이 되거나 『시마과장』처럼 사장이 되거나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 정말 판타지잖아요. 대단하게 무엇을 해내는 것조차 판타지구요. 결론적으로 ‘장그래’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이거 스포일러가 되려나(웃음).
제가 바라는 것은 이 사람이 자기 삶의 주체를 발견해 내는 과정을 그리는 거예요. 그게 이 작품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대리나 과장으로 승진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죠. 사람 자체는 성장하지만 그 자리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강풀 : ‘안영이’ 캐릭터는 정말 완벽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예뻐요. 머리를 그렇게 잘라 놨는데도 예쁘더라고요(웃음). 그 분과 ‘장그래’는 혹시 로맨스가 있습니까.
윤태호 : 아무리 만화 속의 캐릭터라고 해도 제가 그 녀석들의 행복을 두고 볼 사람이 아니죠(웃음). 저는 이걸 묘사하고 싶었어요, 깊은 동료애를 남녀 사이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팀 분위기. 연애는 다른 여자랑 할 겁니다.
강풀 : 갑자기 보기 싫어지는데요(웃음). 이게 바로 윤태호 작가님과 저의 차이인가 봐요. 저는 어떻게든 연애를 시켜서 남자가 꼭 희생하게 만들거든요. (좌중 웃음)
샐러리맨들 한 명, 한 명을 채색하고 싶었다
강풀 작가의 ‘팬심 가득한’ 질문들 덕분에 『미생』의 숨은 이야기들이 독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독자들은 여전히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미생』과 그 안의 작가 윤태호에 대해. 독자가 묻고 작가가 답했다.
-
매 작품마다, 특히 『미생』에서는 묵직한 주제들을 현실감 있게 풀어내시는데요. 주제 선정에 담겨 있는 작가님의 문제의식 또는 고민이 궁금합니다.
-
불만이죠. 분노 또는 불만. 『미생』 같은 경우를 보면, IMF 당시에 돈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환율 때문에 돈 번 사람들도 대단히 많아요. 대부분 피해 본 사람들은 서민들이었거든요. 그런데 IMF를 누가 불러 왔느냐, 서민들이 불러왔느냐. 그건 또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산업화 시대 때 우리 아버지 세대가 자기 같이 살지 말라고 그렇게 밤낮 없이 일하시면서 기껏 길러놨는데, 우리 역시도 아이를 기르면서 밤낮 없이 일하는 거죠. 하나도 나아진 게 없는 이 상황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지, 생각해 보면 몇몇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신문이나 이런 데 나와서 몇몇의 영재들이 모두를 먹여 살리고, 이런 소리들을 한다는 말이죠. 그게 너무나 못마땅하고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큰소리를 치고 살 수가 있나, 이런 지점들이 너무 불쾌했어요.
우리가 종로를 점심시간에 걸어 다니다 보면 샐러리맨들이 나오잖아요. 하나같이 위에는 흰 와이셔츠에 아래는 쥐색 양복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화석화돼서 온단 말이죠. 그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채색하고 싶었어요. 이 사람 한 명 한 명이 다 가정이 있고, 정말 죽고 못 사는 딸 아들이 있을 것 같고, 아내가 있을 것 같고, 그들을 키워낸 부모가 있을 것 같고. 그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데 기업이 사상 최대의 매출을 기록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거죠. 그런 지점에서 『미생』을 시작한 거죠. 그래서 『미생』의 테마는 그런 분들에 대한 연민과 응원, 격려라고 할 수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가정으로 돌아가자, 그런 생각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조각이 구체화되어 캐릭터가 된다
-
『미생』의 캐릭터는 하나 하나가 너무 현실감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작가님의 이해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따로 노력하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
내가 누군가를 볼 때 결국 남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본 나의 뇌가 뭔가를 판단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게 내 머리 안에 있는 거예요. 내 마음이 남을 판단하고 규정짓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제 얼굴 앞에 거울이 하나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항상. 그래서 제가 만들어 내는 캐릭터들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 어떤 조각이 나와서 그것이 구체화된 거라고 생각해요. 제 안에 있는 어떤 면을 극대화시켜서 그려 보기도 하고요. 외부에 있는 특정한 누군가의 성격을 옮겨와서 캐릭터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게 인물을 배치시키는 것이지,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지지는 않죠.
-
작품마다 그림체가 많이 바뀌시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와 표현이 맞아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그림체를 결정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제가 같은 그림 그리는 것을 잘 못하고, 빨리 싫증내고 지겨워하는데요. 작품마다 그림체를 달리 하는 것은 새롭게 들어가는 작품이 어떤 걸 의도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죠. 『이끼』는 부조리한 뭔가를 파헤치는 만화니까 약간 음습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어둡고 회색조의 톤으로 갔다면, 『미생』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제가 갖고 있는 테마가 샐러리맨들에 대한 연민과 위로거든요. 그래서 조금 더 파스텔 톤이나 밝고 하얀 여백이 많이 남아 있는 그림으로 가고 싶었어요. 캐릭터들도 음영을 강하게 집어넣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요. 작품마다 그렇게 다른 그림체를 가져가려고 해요. 저에게 남은 작업 기간 동안 다양한 작업을 하는 게 목표거든요. 지금 성취한 것을 단물 다 뽑아 먹을 때까지 계속 해보자, 이런 생각은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
‘장그래’라는 주인공 이름 자체가 굉장히 긍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작가님께서 의도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
캐릭터 이름을 지을 때 제일 중요한 건 어감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문장을 머릿속으로 읽을 때 가장 쩍 하고 달라붙을 수 있는 이름이요. 『미생』 연재하면서 제일 고민했던 게 주인공 이름인데, 제가 너무 네거티브한 만화를 많이 그려 와서 이번 작품은 좀 밝은 느낌으로 하자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시에 노홍철 씨가 <무한도전>에서 ‘YES!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이 오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저한테 ‘YES’ 라고 적힌 티셔츠가 있어요. 그래서 ‘그래! 장그래! 괜찮은데?’ 갑자기 딱 붙는 거예요. 바로 아내한테 전화해서 ‘주인공 이름 장그래 어때?’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 주인공 이름은 ‘안녕’ 하니까 ‘그래’ 하고 받는 걸 생각해서 ‘안영이’라고 지었어요. 정말 신기한 건 바둑 서지학자 중에 안영이 씨라는 분이 계세요. 이 분이 거의 모든 바둑인들에게 존경받는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주변에서 자꾸 물어봐요, 그 분 염두에 두고 한 거냐고. 저는 꿈에도 몰랐죠(웃음).
윤태호 작가의 작품은 매번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래서 그는 ‘놀라운’ 작가다. 그의 첫 웹툰 연재작인 『이끼』는 인간의 선과 악, 그 본질에 대한 깊이 있고 예리한 성찰로 독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은 『미생』에서도 여전히 이어진다. 『미생』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고단한 직장 생활에 지친 회사원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민’ 그 이상이다. 결코 싱겁지 않은 격려를 실어 보냄과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를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로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바람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쉬는 날이면 아이들 체험학습을 위해 무거운 몸을 밖으로 내쫓습니다. 보다 넓은 아파트를 궁리하고 더 나아 보이는 동네를 꿈꿉니다. TV에서는 꿈대로 살라고 외치는 미담자들이 득세합니다. 꿈대로 못 사는 이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배려 받지 못합니다. 그저 시민, 서민, 대중으로 퉁쳐서 평가받습니다. (p. 5) |
||
- 미생(未生)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새벽같이 일어나 기보책을 보며 혼자 바둑돌을 놓아보던 아이였다. 열한 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고, 7년간 오직 바둑판 위의 세계에서만 살았다. 그리고… 입단에 실패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피하듯 사회에 나왔다. 바둑밖에 모르던 삶에서 철저히 바둑을 지운 삶으로… 차갑고 냉정하지만 혼자가 아닌 일터로… 그렇게,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스기하라
2013.01.10
voler08
2012.11.25
나랑
2012.11.23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