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스마트폰을 때려 부숴라
셸리 케이건 교수(예일대)가 1995년부터 진행해온 교양철학 강좌 ‘DEATH’를 재구성한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출간 기념 대담회가 열렸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죽음’ 바로 알기‘라는 주제로 철학, 의학, 예술 등의 분야에서 바라보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의 사회로 철학자 강신주, 의사 윤영호(국립암센터), 시인 심보선이 대담자로 참여했다.
글ㆍ사진 김이준수
201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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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태어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탄생과 죽음은 한 쌍이다. 그럼에도 둘은 동등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탄생에 대한 찬사와 관심은 넘쳐나도, 죽음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되레 나쁘거나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것처럼 취급받는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죽음은 탄생과 동등하게 다뤄져야 한다. 기실 죽음은 머나먼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 하루하루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며, 내일은 죽음과 하루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관통한다.

하나 지금-여기, 약한 사람들에게만 가혹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는 고약하다. 이 사회가 지닌 악취가 유독 노동자나 약한 사람에게만 침투한다. 이 사회가 연결돼 있지 않고 분리나 배제를 작동의 원리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이 말을 꺼내야할 이유는 분명하다. “오직 연결하라(Only connect)!” 20세기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E.M.포스터의 《하워즈 엔드》에 나온 유명한 경구(警句). 한 회사에 일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 24명이 죽어가도, 이 사회는 무덤덤하다. 아니, 정치적 리더들은 무기력하거나 일부러 눈을 감는다. 죽음에 대해 공론화 하지 않는 무책임이다. ‘시민 보기를 아픈 사람 대하듯이 하라’는 시민여상(視民如傷)이 정치인의 덕목이건만, 그들은 그러지 않는다.


죽음은 어떤 모습, 어떤 경험으로 다가왔는가?

(강신주, 이하 신) 죽음은 1, 2, 3인칭이 있다. 나의 죽음이 1인칭이고, 문제는 2인칭이다. 2인칭, 즉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3인칭이다. 2인칭이 죽으면 자살하기도 한다. 이 책은 ‘너’를 다루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나와 너의 관계 때문에 죽음이 힘들다.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2인칭적 죽음의 강도가 중요하다. 그게 피드백 돼서 내가 죽으면 주변이 힘들 거라는 고통으로 파생된다. 죽음이 힘든 건, 사랑이 지워지는 느낌 때문이다. 옆에 손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자살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죽을 때 우리는 아프다. 사랑하지 않는 대상이 죽을 때 무관심하다. 죽음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영원한 이별의 고통이다. 극단적인 얘기지만 보험에 드는 인간이 나의 죽음을 숙고한다. 문제는 ‘당신’의 죽음이다. 그 사람이 내 손을 놓고 떠나는 사태, 내가 떠날 때 손을 놓을 것인가의 문제, 이것을 더 숙고했다면 이 책은 우릴 더 울릴 것이다. 노숙자는 무관심 속에 버려진 사람이다. 사회가 그런 조건을 만드니까 아프다. 자살은 인간에겐 사회적으로 타살이다. 너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을 죽고 떠나는 나를 숙고했으면 좋겠다.

(윤영호, 이하 영) 내 경우, 죽음에 대한 고민은 중학교 때였다. 20대의 누나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나가 떠났다는 사실도 나중에 들었다. 의사생활하면서 지켜본 죽음은 실재의 문제였다. 죽음 이후 유족들이 만나는 상처를 어떻게 풀 것인지, 제도적인 측면에서 국가에서 말기암 환자에게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나름대로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심보선, 이하 보) 중요한 건 ‘너’의 죽음이다. 3인칭도 때론 너의 죽음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 것 같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아는 사람의 죽음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거기서 이상한 인칭이 생긴다. 1.5인칭? (웃음) 나는 죽음을 굉장히 자주 생각한다. 망원동에서 태어났는데, 수해를 3번 겪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죽는다. 홍수가 났을 때, 온갖 것이 뒤섞인 물을 잘 모를 것이다. 어릴 때 놀이터가 한강이었다. 그땐 모래사장이거나 잡초들이 우거졌는데, 한강에 시체가 떠내려 오면 거죽으로 덮는다. 나는 시체는 못 보지만 삐져나온 발을 본다. 익사한 시체의 발은 묘하다. 그런 이미지에서 죽음을 많이 접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내 죽음까지 다다랐다. 밤마다 가위눌리고 울면서 깨어나고. 어머니가 한의원에 데리고 갔는데, 신경쇠약에 걸렸다고 했다. 어머니가 왜 그러냐고 묻는데, 죽는 게 무서워요, 죽음이란 뭘까요, 이럴 순 없잖나(웃음). 끙끙 앓다가 내가 다니던 기독교계열 중학교에서 예배하면서 해답을 찾았다. 구원이라는 게 있구나 싶어서 교회를 나갔다. 교회에 나간 첫날, 예배드리다가 뒤에 앉은 사람에게 뭔가 물었는데, 날 때리더라. 선배에게 반말한다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첫발을 디딘 순간, 폭력사태가 일어난 거지(웃음). 이후 반전이 있다. 얼마 후 그 선배가 한강에서 아이를 구하다가 죽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고민했었다. 부조리한 것이었다. 죽음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계시처럼. 그때 내게 죽음은 판단중지의 영역이었다. 물론, 내게도 너의 죽음이 많다.

존엄사, 안락사 등 직업적 고뇌도 있을 것 같은데, 존엄사와 완화치료에 대해 말해 달라.

(영) 말기암 환자를 많이 만났다. 환자가 그 사실을 모르고 적극적인 치료를 안 해주냐고 하거나 가족들도 최선을 다해달라고 한다. 그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의학적으로 1초라도 연장하는 게 최선인가. 그렇게 되면 연명치료를 하게 된다. 인공호흡을 하고 중환자실에 가는 거지.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죽는데, 가족에게 한 마디도 못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죽음을 맞닥뜨리는 거지. 미국에선 60~70년대 연명치료가 의미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법제화까지 된 상태다. 우리나라는 효도문화가 있어서 죽음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자신과 가족 모두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의사와 가족이 다 결정하고 환자는 받아들일 뿐이다. 의사결정과정에 배제된다. 연명치료보다 삶을 잘 마무리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호스피스 제도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호스피스에 가면 죽으러 가는 걸로 생각해서 중환자실로 가는 쪽이 많다. 오래전부터 존엄사에 대한 주장을 했지만, 아직 요원한 상태다. 환자를 케어해주는 것이 가족을 위한 복지다. 그런 것을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부탁한다.

(신) 영미철학은 이익계산이 상당히 빠르다. 서양의 논리나 추론은 우리 정서엔 안 맞다. 삶의 대부분은 논리로 되지 않는다. 인생의 대부분은 모순 덩어리다. 영미철학은 너무 논리만 중요시해서 하나만 다룬다. 죽음도 논리적으로 접근 안 된다. 이 책의 시작에 카프카의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를 인용했는데, 개소리다. 보험회사만 좋아할 말이다. (웃음) 나의 죽음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옆 사람의 고통과 죽음이 안 들어온다. 너의 죽음을 왜 자꾸 강조하느냐면 거기에 죽음의 온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만 숙고하는 순간, 자기 관념에 빠진다. 잡념을 갖지 말고,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나? 악취를 풍기는 사람도 있다. 죽는다고 모든 게 소중한 것은 아니다. 독재자가 죽으면, 나는 ‘왜 이렇게 늦게 죽었지?’라고 생각한다. 삶이 아름답고 사랑받은 사람의 죽음만이 안타깝다. 꽃 지는 거, 개 죽는 거, 아이 아파하는 거 봐라.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랑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 내가 감당해야 한다. 사랑하면 그래서 서로 경쟁하면서 오래 살려고 한다. 너의 죽음을 숙고하고, 카프카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진 마라. 진짜 소중한 삶을 살았고, 사람을 사랑했고, 사랑받은 사람이 질 때 아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는가이다.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 삶을 꽃피워야 예쁘고 안타깝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시간을 놓친다는 것이다. 나 죽는 것만 안타까워하면 안 된다. 모든 죽음을 동등하게 보지 말자. 나의 죽음을 숙고하다보니 에피쿠로스학파에 근접한다. 저자의 테마는 철학적으로 단순하다. 동양에서 두 사람만 이야기하겠다.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이야기하겠느냐”고 했고, 장자는 “태어나는 것은 깨어나는 듯 태어나고, 죽을 때는 잠들 듯 죽는다”고 했다. 저자는 이걸 모른다. 나의 죽음을 무서워말고 타인의 죽음을 더 고민하면 좋겠고, 서양철학에서 죽음의 대가는 하이데거다. 죽음에 대해 예리하게 설명한다. 죽음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숙고지점을 볼 수 있다. 서양논의는 그렇게 보충이 된다. 동양은 유학이나 불교, 장자 등을 보면 죽음을 숙고하는 게 많다. 동양에서는 대체로 죽음은 별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최근 몇 해 동안 한국에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단어가 횡행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왜 이토록 쉽게 죽고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보)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자살률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최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24명이 자살 혹은 사망에 이르렀다. 대한문 앞에서 해고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고, 평택의 송전탑에서도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운동권의 투쟁으로 보는 분들도 많은데, 생각해보라. 한 공장의 동료 24명이 죽었다. 해고의 명분이 기업회생을 위한 정리해고였는데, 그것이 회계조작으로 인한 기획파산이었다. 부당한 이유로 3000여 명의 사람들이 해고됐고, 그 결과 24명이 죽었다. 이런 자살률은 유래가 없다. 단순히 해고 문제만은 아니다. 그때 경찰이 77일 동안 농성중인 노동자를 토끼몰이 하듯 진압한 장면을 보면, 몸이 부르르 떨린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압했고, 그게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돼서 자살에 이른 경우도 있다. 지금 노동자들에게 국가, 자본이 유래 없는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윤과 성장의 이름으로. 그 희생의 강요가 부당하고 정의롭지 않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사회적 타살’은 사회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건데, 나는 그 언어는 아닌 것 같다. 너무 멀게 느껴진다. 사회분위기, 막연한 실체가 사람을 자살로 내몰았다고 비판할 때 적절할진 몰라도, 사회가 나와 연결돼 있다는 상상을 하는데 사회적 타살이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다. 더 깊이 들어가면 거기에는 IMF이후 한국사회의 변화, 기업구조의 변화, 가족의 변화, 생활의 변화, 관계의 변화가 있다. 그 변화는 파괴적이다. 사람을 분리시키고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나에게 남은 것이 없다는 고립감이 강화되고 있다. 개인의 마음의 어두운 풍경이다. 헌데 어두운 풍경을 보고 직시해야 한다. 나와 네가 연결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죽음에 골몰하다보니 사회와 삶과 인간관계가 바뀌면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태, 그로 인한 마음의 어두운 풍경이 포착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가 우리와 연결돼 있다는 말씀인데, 죽음은 나쁜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신) 조화와 꽃의 비유를 하겠다. 조화는 지지 않는다. 죽음, 나쁘지 않다. 열심히 산 사람에게 죽음은 안심으로 다가온다. 탐욕스럽게,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산 사람만이 죽음을 연장하고 싶어 한다. 가난하고 힘들게, 타인을 위해 살 때만 죽음은 안식이 된다. 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IMF 이후 우리는 탐욕스럽게 길들여져서 자기 보험만 든다. 안식의 의미를 잃었다. 의사는 땡큐지. 검사하고 또 검사하고. 산에 갔다 오면 나는 곯아떨어지는데, 죽음의 느낌이 그랬으면 좋겠다. 삶을 어깨에 무겁게 메고 살다보면 눈 감을 때 편해진다. 주변에서도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한다. 이젠 그만 쉬세요, 이 말을 들어야 한다. 여전히 해답은 삶에 있다. 남루하게 살면 죽음은 무섭게 다가온다. 인간답게 살지 못해 생명연장을 꿈꾸고 탐욕으로 변한다. 벚꽃이 계속 피어 있으면 힘들 거 같지 않나. 떨어질 때 떨어져야지. 삶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 나의 죽음에 너무 집중하지 않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건강해야 한다.

(영)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다. 죽음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원하지 않아도 떠날 수가 있다. 그게 인간이다. 내가 만약 먼저 떠난다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뭘 해줄까 고민하는 게 인간이다. 며칠 내 떠나게 된다면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 뭘까. 첫째가 가족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다. 그 다음이 경제적 책임감이고, 나 없이도 남은 이들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쥐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의 문제로 돌아간다. 그렇게 보면 실존적인 고민도 있다.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가족, 경제, 사랑하는 사람, 삶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내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웃을 사랑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보) 이 책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면,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비존재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고, 비존재라는 하나의 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비존재는 내가 소유할 수가 없다. 내가 그것을 움켜쥘 수가 없다. 하이데거는 자살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위대한 승리라고 했다. 나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데, 죽음이 나에게 오기 전에 죽음에게 가겠다는 거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장 숭고하게 발현되는 것이 자살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다른 철학자는 죽음은 내가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도 늘 누군가를 떠올린다. 자살할 때 유서를 쓰는 것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후배가 유서를 분석한 『자살, 차악의 선택』을 썼는데, 이 책에 쓰인 어떤 노인의 자살을 잊을 수가 없다. 노인은 유서에서 가족이야기를 계속 한다.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을 지금 손자에게 알리지 말고, 기말고사 끝나고 알리라고 한다.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까지 손자의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마음은 뭘까. 이 마음은 죽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관계 속에,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 죽음은 슬프지만,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의 동물과 다른 점은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다. 내 죽음뿐 아닌 타인의 죽음,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고, 그런 능력이 유지돼야 한다.

자살은 나쁜 것일까. 우리는 자살에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신) 사람은 자존감이 붕괴될 때 자살한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 모두 책임이 있다.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사랑하는 게 있고,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안 죽는다. 외로운 사람은 개나 화초, 혹은 수석을 키워도 된다. 사람은 하소연할 곳이 없을 때, 가장 가벼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등에 업고 해운대 백사장을 거니는 무게감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뭐든 상관없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있을까, 그렇게 물으면 죽음에 대한 핵심에 이를 수 있다. 사랑과 관심이야말로 인간을 애드벌룬처럼 뜨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랑은 공중에 뜨지 않을 만큼의 무게감을 준다. 자살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픈 게, 나도 부끄럽다. 댓글이라도 한 마디 달았으면. 같이 사는데, 우리는 무한 책임을 갖는다. 나와 너, 관계의 복원이 필요하다. 자살을 문제 삼을 때는, 이렇게 되물어라.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누가 나를 사랑하는가. 영화를 좋아하면 영화를 봐야 하니까 안 죽는다. 사랑의 밀도에서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찾아야 한다. 자살이라는 단어에 빠지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게 있는가, 충분한 노력을 했는가, 그렇게 되묻고 찾아야 한다.

(영) 공리주의 목적,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서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 못한다. 이 책은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고 본다. 자살 유혹을 가장 느끼는 때가 암 진단을 받고 일주일이다. 그 기간을 넘기면 충동이 떨어진다.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두려움이 닥치는데,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해결책이 있음을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자살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에게 공감해주고,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공동체적인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살문제를 함께 풀어가려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보) 한국사회의 자살은 많은 경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최선의 선택처럼 말한다. 그럼에도 그 순간,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최종적으로 죽는 게 낫다고 떨어지는 순간에도,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인간이다. 문제는 그런 죽음이 늘어나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감옥이기도 하다. 살고 싶은 마음은 옆에 누가 있으면 절로 나온다. 자살은 도와달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이 책에 의하면, 공리주의에 의해 총량을 계산한다. 행복은 쾌락 빼기 고통이라고 한다. 플러스가 나오면 행복이고, 마이너스면 불행이다. 불행의 총량이 한국에서는 명백하게 크다. 불행한 사람이 넘친다. 그러면 행복의 총량을 늘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물론 정책 중요하다. 경제적 보상을 해주면 자살률이 낮아질 거라고 오해한다. 감옥에서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음을 알면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관계망의 회복, 공동체의 회복,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지금, 여기저기 농성촌이 많다. 이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경찰의 진압이 아니고, 잊히는 것이다. 혼자 있다는 고립감이 무서운 거다. 그 뒤, 좋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Q&A

선과 악의 경계는 무엇인가?

(신) 자본주의에 의해 현재가 희생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피폐화시키고, 순간의 행복을 앗는다. 자본주의는 지금을 희생하자고 말한다. 미래의 행복을 약속한다고.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미래에 행복할 수 없다. 미래에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구조가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구조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선과 악은 없고, 좋음과 나쁨만 있다.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은 목숨 걸고 지키고, 나쁜 것은 버려라. 죽음에서 근본적으로 해방되는 것은 현재의 꽃핌이다.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확장해라. 좋은 선생, 좋은 관계가 아니면 나와라. 선악 관념이 아닌 좋은 관계인지, 나쁜 관계인지 판단을 내려라. 삶을 충만하게 보내는 방법은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다. 선악은 외부에서 붙여진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리스트를 작성해보라. 좋음과 나쁨. 좋음의 관계가 많을수록 좋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 좋은 것은 지혜보다 용기일 수 있다.

용산, 쌍용차, 해답은 돈이 아닌가 싶은데, 심보선의 해답은 무엇인가.

(보) 부를 통한 것은 해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닌 관계다. 불행의 총량이 많은 공간에서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을 때, 살 의지를 충분히 발현하고 살아낸다. <쇼생크 탈출>을 보자. 주인공 직업이 은행원인데, 감옥에서 수용소장의 행복을 보장해준다. 회계장부를 조작해서 경제적 소득을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지? 그런데 정작 주인공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동료다. 명장면이 있는데, 감옥에서 <피가로의 결혼>이 흘러나온다. 피해볼 것을 감수하고, 방송실에 들어가 모차르트의 아리아를 감옥 동료들에게 방송한다. 그게 주인공의 행복이었고, 피수감자들의 행복이었다. 지금 우리 삶이 감옥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끔찍한 삶의 환경이다. 행복의 총량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어떻게 행복할 것이냐. 연결돼라. 내가 할 말은 이 말밖이다. 글과 詩를 읽어주고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작은 출발이라고 본다.

사회적 연대에 대한 말씀, 한편으로 공허하다. 사회적 죽음은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대를 만들 수 있을까. 죽음 이후 타자에 의해 추도되고 싶은가?

(신) 스마트폰을 때려 부숴야 한다. 세계와 연결돼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둘이서 만나도 둘 모두 스마트폰을 한다. 앞사람과 소통하지 않는다. 반드시 발로 걷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 직접 자기 눈으로 봐야 한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니까. 온 감각이 총동원돼야 한다. 그래야 리얼리티가 생긴다. 매체가 발달할수록 우리는 세계와 단절된다. 직접 가보고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만나야 다음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른 사람이 날 기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나는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한다.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선생을 만들지 마라. 잠시 여행지처럼 머물렀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면 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사유를 해야 한다. 나는 글을 쓰다가 죽으면 좋겠다.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들뢰즈의 자살을 이해한다. 그는 아프다가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돼서 투신해서 죽었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

(영) 의학적인 측면과 인문학적인 측면 두 가지다. 세포는 분화돼 커져서 기능을 유지하다가 다시 분화되다가 새로 생긴 세포가 커지면서 자리를 내주면 전 세포는 소멸한다. 그래야 생명이 유지된다. 세포가 죽지 않는 게 암이다. 정상적인 세포의 탄생과 소멸의 과정이 우리 생명을 유지한다. 죽은 세포는 없어진 것일까. 아니다.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 나는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 나는 내 시체를 내가 공부한 해부실에 기증하기로 했다. 의학지식을 그곳에서 받아 의사가 됐고, 세상을 떠나도 내 삶의 의미를 넘겨주고 싶다. 그렇게 생명은 연속될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보) 죽음은 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압도될 것인가. 아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늘 구체적으로 느끼고 살아가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 그것이 詩를 쓰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다. 살 때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 내 삶에는 죽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이 있고, 관계가 있다. 詩와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한테만 해당되는 사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나야 한다. 만나서 무엇을 나눌 것이냐. 먹을거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관계 속에서 나도 바뀌고, 어떤 부분이 죽는다. 타인이 죽을 때, 마음의 세포가 잘려 나간다. 개인의 이야기를 사회로 확장할 수도 있다. 죽음이 늘 이 사회에 있고, 고통이 있다. 그걸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지금은 느끼지 못하는 쪽으로 사회가 작동하고 있다. 나는 웃으면서 죽고 싶다. 그 미소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마지막 표정으로 남겨졌으면 좋겠다. 나중에 죽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웃으며 죽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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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저/박세연 역 | 엘도라도
이 책은 셸리 케이건 교수가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온 교양철학 정규강좌 ‘DEATH’를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DEATH’는 하버드대 ‘정의’및 ‘행복’과 함께 ‘아이비리그 3대 명강’으로 불리는 강의이며,17년 연속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로 꼽혔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왔던 심리적 믿음과 종교적 해석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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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강신주 #윤영호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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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꼬

2013.05.30

한 번쯤은 다룰만한 주제인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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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2013.02.28

쥭음에 대해서 꼭 생각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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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nta

2013.02.26

죽음을 생각하는 건 삶을 생각하는 또다른 방식이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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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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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 케이건

예일대학교 철학 교수(사회사상·윤리학).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76년 웨슬리언대학교 철학부를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한 뒤, 1979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석사학위와 1982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86년까지 피츠버그대학교, 1995년까지 일리노이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1995년부터 현재까지 예일대학교 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6년에는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회원으로 위촉됐다. 그의 철학은 도덕철학과 규범윤리학 관점에서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두고 삶과 죽음의 문제, 행복과 도덕적 가치, 공공의 선, 인간의 본성, 동물의 권리 등을 다루며, 공리주의로 대표되는 결과주의와 칸트주의로 대표되는 의무론 사이의 논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 대표 저작 《도덕의 한계(The Limits of Morality)》(1989)와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1998)은 전세계 유수 대학에서 철학 교재로 채택하고 있으며, 《응보의 기하학(The Geometry of Desert)》(2012)은 미국출판협회(Association of American Publishers)가 그 해 최고의 연구 결과가 담긴 출판물에 수여하는 프로즈상(PROSE award) 철학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또한 아이비리그 3대 명강으로 널리 알려진 열린예일강좌(Open Yale Course) 최고 인기 강연 ‘죽음(DEATH)’을 기반으로 2012년 출간된 동명의 책은 미국 외 국가로는 최초로 같은 해 가을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한국어판이 출간되면서 국내에 ‘죽음’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2013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케이건 교수는 서울대학교 특강, 네이버 TV캐스트 강연, SBS 〈아이러브人〉 시즌 3에 출연했고, 2014년에는 그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EBS 다큐프라임 생사탐구대기획 〈DEATH〉가 방영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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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서울대학교병원 암통합케어센터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건강사회정책실장, 연구부학장, 서울대학교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장을 역임했으며, 삶의 질 연구 및 완화의료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이자 가정의학 전문의다. 한국건강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89년 말기 암 환자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암 환자와 가족의 건강과 삶의 질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으며, 그 헌신적인 모습이 EBS 「명의」를 통해 소개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의사의 사명은 ‘병’을 치료하는 것만이 아니라 병을 가진 ‘사람’을 치료하는 것에 있다”는 신념으로, 특히 인간의 총체적 행복과 건강에 집중하고 있다. 암 환자들의 곁에서 생존에 관한 사투를 함께하면서도, 치료 후 일상으로 돌아가는 암 경험자들의 건강과 삶 전반의 질을 함께 향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적용하고자 애쓰고 있다.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을 돕고자 국립암센터에 ‘삶의질향상연구과’를 신설했으며,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설립위원으로 활약했다.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법제화에 앞장선 공로로 201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화이자의학상과 보건복지부 장관상도 수상했다. 나아가 국내 최초로 건강에 ‘코칭’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병원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건강 코칭(health coaching)’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급했다. 이 같은 노력은 사회 전체로 확대돼 기업의 ‘건강 경영(health management)’과 ‘건강 가치 창출(creating health value)’ 연구로 이어졌다. 이를 현실로 구현하고자 2019년 ‘덕인원(德人願)’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웰다잉, 말기 환자, 호스피스·완화의료 등에 관한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50편, 국내 학술지에 15편 발표했다. 저술과 강연도 연구 활동의 중요한 축이다. 학교와 병원을 오가는 바쁜 나날에도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암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습관이 건강을 만든다』 등 다수의 저작과 의학 칼럼 연재, 강연 활동을 통해 대중의 곁을 지키는 의사가 되기 위해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