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뒤집어보기 “어휴, 언니, 고생 많이 하셨구려”
빨강 머리 앤은 나의 친구는 아니었지만 슬픔과 고통을 차근차근 견뎌 가며 제 앞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훌륭한 여자였다. 멋진 여자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제 몫의 행복도 기쁘게 환영하지만 제 몫의 불행도 고개 돌리지 않고 견뎌내는. 내 나이면 앤은 네 번째 아이쯤 낳았을 텐데, 자꾸만 내 몫의 고생과 불행에서 도망치려 하는 나는 앤에게서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201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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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울의 그림으로 읽는 책 중 ‘책장에서 날 기다리는 <빨강머리 앤>’
그 때부터 앤과 나의 사이는 썩 좋지 못했다. 아마 나는 앤의 친구들 중에서 고르자면 퉁퉁하고 샘이 많은 조시 파이와 닮은 꼴인가 모양이다. 따귀의 기억이 생생해서 빨강머리 앤을 tv나 동화책에서 마주칠 때마다 ‘가라’ 염색약을 써서 초록색으로 변한 머리털이 영원히 그대로이길 바랬고, 주근깨가 더 크게 나서 아예 곰보가 되어 버려라! 하고 빌었다.
그런데 아니, 아니 이게 웬걸, 어렸을 때는 주근깨에 빨간 머리에 빼빼 말랐다고 그렇게 칭얼대더니 어른이 되자 이 모든 게 장점이 되어 버린다. 주근깨는 코끝에만 두세 개 남았고, 몸매는 호리호리해서 살이 잘 찌는 체질인 다이애너가 부러워할 정도에 길버트와 사귄다는 풍만한 미녀를 관찰하고는 ‘저 애는 살이 잘 붙는 체질이군. 중년이 되면 뚱뚱해질 거야. 몸매는 내가 더 낫군’ 하며 의기양양하게 혼자 분석을 마치는 장면을 보자니 아주 살이 잘 붙는 체질인 나는 더더욱 이 여자를 안 좋아하게 된다. 빨갛던 머리? 나중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들 금갈색이라고 하는 머리색이 된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몇 년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이었던 걸 몇 년 째 우려먹는군, 흥이다, 하고 인상을 쓸 수밖에.
게다가 마슈 아저씨와 머릴러 아줌마! 이 사람들은 노인이 되어가는 마슈 아저씨의 농사일을 도울 건강한 소년을 원했지만 잘못 배달된 이 소녀가 훌쩍훌쩍 우는 바람에 집에 들여놓게 되고, 그 때부터 이 가문에는 몰락의 기운이 감돈다! 어느새 딸처럼 사랑하게 된 앤의 상급학교의 학비를 대기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마슈 아저씨는 죽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머릴러 아줌마는 ‘앤, 너를 공부시키는 것이 마슈 아저씨의 꿈이었다’며 앤의 최고 학부 학비를 대기 위해 집을 줄인다. 수다쟁이 린드 아주머니와 한 집에 살면서 학비를 마련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도 이 놈의 계집애는 투덜투덜하면서 ‘왜 나만 민자 소매옷을 입어야 하나요, 아이들은 전부 다 부푼 소매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하면서 유행하는 옷을 내놓으라고 칭얼칭얼.
앤을 이렇게 생각할 만큼 성격이 삐뚤어진 걸 보니 나는 조시 파이 가문의 일원이 맞는 것 같다. 제목을 <마슈와 머리러 남매 수난기>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고아 하나 데려왔다 살림 거덜> <마슈(성을 까먹었다)가의 몰락> 도 괜찮을 듯, 앤 쪽에서는 여성수기 느낌, 혹은 자기계발서로 <이젠 의사 사모님이 되고 싶어요> <확실히 입양되는 방법 best10> 등이 있을 수 있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심술궂게 빈정거리던 내가 비로소 앤과 화해하게 된 것은 어른이 되어 읽은 앤 전집의 뒷부분에 나오는 앤이 성인이 되고 난 다음이었다. 물론 졸업 후 학교에서 근무하며 늘 부루퉁한 동료 교사에게 세상에 빛나는 것이 많이 있다고 감화시키려는 것 따위는 싫었다. 아마 내가 앤한테 걸렸다가는 제일 먼저 감화의 대상으로 찍힐 것 같아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앤은 어린 시절 친구인 길버트와 결혼하고, 그가 의사 자격을 얻을 때까지 몇 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다 집에 들어앉는다. 여기서도 나는 투덜거렸다. 그 좋은 공부 하겠다고 양부모 신세를 망쳐놓고 집에 편히 들어앉아?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를 네다섯씩 낳아 놓은 것이다. 길버트, 그렇게 안 봤는데 당신, 저격수였나…?
그리고 젊은 주부가 된 앤은 아이를 낳은 후 갓 태어난 딸을 빨리 안아 보고 싶어 ‘환희의 하얀 길’을 보았을 때보다 더 들뜨지만 어미가 제 자식을 보았을 때 천금처럼 귀한 첫 딸은 이미 싸늘했다. 사산이었다. 하필 출산을 지휘하고 아내에게 죽은 아이가 태어났다고 잔인한 통지를 해야 하는 것은 남편 길버트의 몫이었다. 그렇게 앤과 길버트의 첫 딸은 앤이 신혼생활을 시작한 첫 집 한 켠의 조그만 무덤 속에 영원히 누웠다. 다른 곳으로 부임지가 바뀌면서 앤과 길버트는 그 집을 떠나지만 앤의 마음 한 조각은 언제까지나 그 무덤 속에 함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끝 권까지 다 읽어간 다음에는 ‘흥, 말라깽이 좋아하네, 어른 되면 날씬하다고 잘난 척 하잖아’, 하고 편협하게 쳇쳇거리던 처음과 달리 ‘어휴 언니, 고생 많이 하셨구려, 언제 순대국에 소주나 한잔 하십시다’, 하는 마음이 되었다. 빨강 머리 앤은 나의 친구는 아니었지만 슬픔과 고통을 차근차근 견뎌 가며 제 앞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훌륭한 여자였다. 멋진 여자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제 몫의 행복도 기쁘게 환영하지만 제 몫의 불행도 고개 돌리지 않고 견뎌내는. 내 나이면 앤은 네 번째 아이쯤 낳았을 텐데, 자꾸만 내 몫의 고생과 불행에서 도망치려 하는 나는 앤에게서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공상이라는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까딱하면 망상이 되어 버리니 주의하는 것도 어른 여자가 갖춰야 할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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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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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현진(칼럼니스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
하나
2014.02.25
휘연(徽淵)
2013.08.22
요새 빨강머리앤 보기 시작했는데~ 글 읽으면서 혼자서 낄낄거리면서 웃었네요
sind1318
201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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