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지(Jay-Z)
대헌장과 성배. 한눈에도 고급스러운 기품의 앨범 타이틀이 오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주인공이 제이지라는 사실은 모든 허세를 자존감으로 바꿔놓는다. 신보가 힙합 역사의 대헌장과 성배와 같은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을 선포하는 것이든, 그 자체로 위대한 자신을 칭송하는 것이든 (Carter는 제이지의 성), 제이지이기에 가능하고 제이지이기에 허락되는 합당한 자기 과시다.
일찌감치 < Watch The Throne >으로 성대한 대관식을 올린 그는 힙합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음악 역사상 손에 꼽히는 거대한 비즈니스 자체가 되었다. 슈퍼 루키의 등장을 알린 < Reasonable Thought >, 새천년 힙합의 청사진을 제시한 블루프린트 시리즈의 성공과 은퇴선언, 번복 등을 거치면서 나왔던 수많은 작품들까지 부진은 없었고, 실패는 생소하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신보의 방향은, 제왕이 된 그의 당당함을 과시하고 쌓아올린 위대한 업적의 일대기를 전하는 것이다.
4년만의 귀환을 위해 수많은 각지 충신들이 부름을 받고 달려왔다. 초기부터 전성기까지 제이지의 영원한 단짝이라 할 수 있는 팀바랜드가 메인 프로듀서의 자리에서 앨범을 전두 지휘했고, 이전부터 함께해왔고 현재 가장 뜨거운 프로듀서들인 스위츠 비츠와 퍼렐 윌리엄스도 함께한다. 여기에 「Suit & tie」로 인연을 맺은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No church for a wild」의 프랭크 오션, 살벌한 디스전을 거쳐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나스까지, 게스트와 프로듀서진만 해도 휘황찬란하다.
앨범은 그보다도 드높은 자존감의 향연이다. 셀레브리티로서의 고충을 토로하는 「Holy grail」에서 그는 커트 코베인이 되었다가, 마이클 잭슨의 < Thriller >가 된다. 수많은 현대 아티스트들의 이름을 통해 자신을 드높이는 「Picasso baby」가 이어지고, 릭 로스와 함께한 「Fuckwithmeyouknowigotit」과 나스와 온 참여진들이 총출동한 「BBC」는 부의 잔치이며 「Part II」 는 그의 왕비 비욘세와 함께하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족스럽게 털어놓는다.
앞서 언급했던 애초 방향이 맞는다면 < Magna Carta...Holy Grail > 은 자전적 이야기들을 충분히 풀어놓는 임무는 완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오직 한 방향으로의 선택은 앨범 전체를 진부하게 만든다. 유명 브랜드를 노린 기획은 신선했으나 무성의한 훅으로 김이 새는 「Tom ford」와 ESPN과 CNN의 단골손님임을 과시하지만 그 이외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Crown」, 짧은 러닝 트랙으로 더 큰 재미를 잃은 「Versus」 와 「Beach is better」 등은 양질의 비트와 신선한 가사들에도 개성이 부재하다.
제이지는 여전히 탁월하다. 강제로 고향을 등지고 바다를 건너야 했던 흑인 선조들의 고통을 노래하는 「Oceans」 와 이뤄낸 성취를 수호하려는 단호한 의지의 「Nickles and dimes」, 종교적 ? 철학적 의의를 함축하고 있는 「Heaven」 과 같은 훌륭한 트랙들은 그를 제왕의 자리로 인도한 가장 기본이면서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고유의 재능이 발현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수많은 쾌락의 향연 속에서 그저 묻혀가는 트랙 정도로만 남게 된다.
변화의 폭은 미미했지만 오토튠에 일갈을 날리고 완벽한 도시 찬가 (City Anthem) 를 빚어냈던 전작에 비해 이렇다 할 인상 깊은 지점을 찾기 힘들다. 강력한 한 방도 없고,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는 향락과 부에 점철되어 심연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다 이루었다' 는 생각이 한 순간도 쉬지 않았던 그의 천재적 창의성을 피로하게 만든다.
이미 거대 기업과의 계약으로 앨범은 나오기도 전에 플래티넘을 수여받았고, 각종 차트에서 순항하는 등 왕으로서의 제이지의 위치는 여전히 견고하다. 허나 현명한 군주란 높은 지위와 막중한 책임에서 오는 고뇌를 견뎌내며 질서를 수호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 < Magna Carta...Holy Grail > 는 고뇌는 있으나, 그것이 혁신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명분을 상징하는 대헌장과 부를 상징하는 성배라는 상징에 눈이 멀어 쾌락의 늪으로 빠지고 만다. 그의 왕국이 만세를 누리기 위해서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강력한 제국의 몰락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성했던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다시금 새겨야 할 것이다.
글/ 김도헌(zener1218@gmail.com)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