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김동규 “아이가 생겼을 때,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8월 12일, 미국 철학계의 거장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도런스 켈리 하버드대 철학 교수가 쓴『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되었다. 최근 들어 열정적으로 독자들과 만남을 가지고 있는 정혜윤 PD와 『모든 것은 빛난다』를 옮긴 김동규 번역가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201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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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는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을 밤하늘의 별이 환히 밝혀주는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라고 썼다.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지 않게 된 시대, 별이 사라진 시대를 사는 인간들에게 세계는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 문득, “결국은 별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오리라. 그러면 이상도 잃을 것이다.”라고 한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 하루하루 불안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대다. 이 책을 쓴 두 철학자는 고전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찾아간다. 철학에 깊게 발을 담그고 있지만 어렵지는 않다.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근원적인 고민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단테의 『신곡』, 허먼 멜빌의 『모비딕』 등 고전을 따라 진행되지만 미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을 예로 들며 현실감도 유지하고 있다.
대담을 시작하자 정혜윤 PD는 “어떻게 허무와 무기력을 딛고 빛나는 삶을 빚어갈 수 있을까요?” 하고 큰 질문을 던졌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줄기를 잡고 나아가려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김동규 번역가는 한국은 성취하려는 목표가 하나뿐인 것 같다는 인도 유학생의 말을 빌려 답했다. 돈과 같은 가치들 앞에서 사람은 쉽게 수치화된다. 이에 비해 인도는 신이 많은 나라다. 그들이 믿는 신이 2억이나 되는데 거의 사람마다 신 하나를 모시는 셈이 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설명하자면 여기서 신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믿는 가치를 뜻한다. 『모든 것은 빛난다』에도 ‘다신주의’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 역시 삶의 방향과 목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의 허무주의가 도래한 이유 중 하나로 획일화, 즉 일신화를 꼽고 있다.
‘다신주의’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호메로스의 세계다. 여러 신들이 서로 다른 가치를 대변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던 시대. 김동규 번역가는 이 책의 저자들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세계를 동경하는 듯 보인다고 말하며, 호메로스가 쓴 ‘헬레네’와 단테가 쓴 ‘프란체스카와 파울로’ 를 비교했다. 자식과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랑을 찾았던 헬레네에 대해 호메로스는 멋지게 기술한다. 모두에게 비난받을 만한 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그리스적 다신주의가 숨어있다. 가정을 지키는 신인 헤라도 있지만, 아름다움의 신인 아프로디테도 있다. 헬레나는 바로 이 아프로디테의 가호를 받은 여인이었다.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인 세계. 그 세계에서라면 남편을 두고 사랑에 빠진 여인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기독교전통과 헬레니즘 전통이 합쳐지는 단테의 시대를 보면 간통은 지옥에 가야 하는 아주 큰 죄다. 사기 결혼을 당한 프란체스카와 그녀에 대한 연민 혹은 죄책감 속에서 형수를 사랑하게 된 파울로의 이야기는 현대의 시각으로도 이해해줄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단테는 가차 없이 이들을 지옥에 보낸다. 커다랗고 단단한 단 하나의 법에 따르면 이들은 죄를 지었고, 어쩔 수 없이 지옥에 가야 하는 운명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 부분에서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누구나, 언제나 따라야 하는 당연한 법률을 쉽게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던질 질문은 아래와 같다. “그렇다면 신이 죽은 시대에, 우리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살게 되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행복해졌나?” 중세 이후, 근대로 접어들면서 데카르트는 신을 의심했고, 자율적 인간이 등장한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만이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자율성 안에서 우리는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과 선택의 짐 앞에서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허무주의로 빠져든다. 단테는 이미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해서 생기는 문제들을 어느 정도 예감한 듯하다. 『신곡』을 보면 단테는 신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가장 큰 죄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중세에는 허무주의가 없었을까? 허무는 근대의 발명품일까? 김동규 번역가는 단테의 『신곡』에서 능동적 허무주의를 본다. 단테가 육화된 신으로 표현되는 베아트리체와 함께 천상으로 올라간 뒤, 신을 만나게 될 때를 주목해보자. 이제까지 단테에게 소중한 존재였던 베아트리체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사라지고 단테에게는 오로지 단 하나의 절대자 만이 자리한다. 더 이상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런 식의 허무주의를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정혜윤 PD는 누군가 자식의 죽음 앞에서 슬프게 우는데 “사람이 저렇게 우는 건 신을 몰라서야.”하고 말하던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며 신 때문에 남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상태도 바로 능동적 허무주의가 아니겠냐고 했다.
계속해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성스러움을 내 일상, 내 밥상에서 찾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정혜윤 PD는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단테의 시를 인용해 답을 찾았다. “천상을 향하던 눈이 그대를 향한다.”라는 말이었다. 김동규 번역가는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손을 잡고 신 앞에 함께 갔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하며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끄집어냈다.
한나 아렌트는 성서에서 예수가 한 말 중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이웃에, 우리가 사는 바로-여기에 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웃과 신과 같으면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을 소중히 여길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웃과 신의 격이 다르다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종교전쟁을 보면 신을 위해 이웃을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신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유일하게 증명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은 우리 일상에 있을 터이다. 일상의 성스러움, 그건 대체 뭘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멜빌의『모비딕』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고래에 대한 정보다. 이 고래학은 분명하지 않고, 끊임없이 늘어난다. 내용 역시 변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바로 이 ‘변하는 가능성’을 성스럽다고 본다. 소설 속 고래가 우주의 비밀, 세계의 비밀을 뜻한다면 고래를 잡으려는 광기에 사로잡힌 에이해브 선장은 비밀과 진리를 움켜쥐려는 사람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진리를 잡고 알아내려는 사람. 하지만 이슈메일은 다르다. 그는 매번 그 상황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 동일한 규칙으로 삶을 이끄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바로 이 이슈메일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성스러움이 드러난다. 저자들이 주목한 것은 이슈메일처럼 그때그때 자기 자신을 변모시키는 사람이다. 자기가 가진 단단한 삶의 규칙이 아니라 상황의 요구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 바로 이런 역동적인 변화 안에 허무를 극복할 씨앗이 들어있다.
『모비딕』을 보면 고래를 잡으려 같은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 사이에는 ‘공동체의 정조’가 강하게 유지된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하면서 서로에게 서로를 맡기고 있는 셈이다. 이 배에서 개인적 차원의 의미는 작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교감할 때 일의 의미가 증폭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함께 살고 있고, 어떤 상황 속에서 이런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누리는 것,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과거에 천제는 신이 돕는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이것이 개인의 것이 된 건 근대 이후다. 그러니 외부에서 오는 힘을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모든 것이 나라는 자아의 내부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다.
자율성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사실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역으로 우리에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내가 선택했으니 내가 책임진다는 식의 ‘자기 책임론’의 강도가 세진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외부의 힘을 인정하고 모든 일의 책임이 온전히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책임의 짐’에서 조금은 빗겨갈 수 있다. 우리는 선택하기 이전에 상황을 통해 이미 선택 당한다. 주변 세계가 정해준 것이 수없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인식한다면 삶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을 거다.
삶이 의미를 가지는 데에는 공동체 안의 경험이 중요하다. 저자들은 한 명이라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삶의 의미가 지속 된다고 말한다. 정혜윤 PD는 모디빅에서 선원들이 향유 고래 기름을 녹이며 함께 서로의 손과 손을 맞닿는 장면이 인상 깊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루쉰의 제자가 쓴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고 했다. ‘우리는 노력한다. 우리는 서로서로 부축한다. 그것으로 족하지 아니한가.’ 이 문장은 주어에 나는,을 두었을 때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늘 만나는 세계에 감사하고 경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스 작품들을 보면 사람이 어떤 감정에 빠져들 때는 신이 찾아와 곁에 머물기 때문이다. 내가 화가 나서 화를 내고,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신들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감정에 빠져드는 것이다. 온전히 내 것이라 생각했던 감정마저도 내 것이 아니다. 외부의 수많은 힘에 따라 판단하고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극복할 만큼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예술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순간을 열렬히 즐기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제공하는 이야기는 앞선 두 가지 방법들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을 높이 세우며 나아가는 길이 아닌, 매 순간 더불어 빛나는 길이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한 독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아들에게 책을 사주려고 합니다. 이 책을 꼭 사야 하는 이유 한 가지만 말씀해주세요!” 꽤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독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김동규 번역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 아이가 생겼을 때,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커서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좋은 선물이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번역가가 자기 아이를 위해 번역한 책입니다. 대답이 됐을까요?” 그러니까, 아이를 위해 번역한 아빠의 마음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좋은 책이라는 어떤 설명보다도 명쾌한 답이었다.
- 모든 것은 빛난다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 공저/김동규 역 | 사월의책
『모든 것은 빛난다』는 우리들 현대인의 실존 상황, 우리의 문화적 위기를 저 어두컴컴한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내어 성찰한 책이다. 튼튼하게 고정된 닻 하나 없이 부유하는 우리의 일상, 우리들이 매일처럼 겪고 있는 삶의 불안과 무기력증과 허무―즉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고전적인 철학서와 문학작품들의 빛 속에서 삶을 경험함으로써 자기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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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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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연빈
북극곰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을 거닐다.
어지러운 방에 돌아와 글을 씁니다.
공우민
2013.08.26
"내가 화가 나서 화를 내고,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신들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감정에 빠져드는 것이다. 온전히 내 것이라 생각했던 감정마저도 내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