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일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그 일을 하는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는 게 그 증거다.” 로마의 철학자 시리우스 진저는 이런 말을 했다, 면 나도 좋겠다. 이건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다. 덧붙이자면, 시리우스 진저라는 인물도 없다. 시리우스는 뭔가 진지해보이고 싶어서(serious -> 시리우스) 생각한 것이고, 진저는 생강을 좋아해서 갖다 붙였다. 당연히, 나는 저런 말이 존재하길 애타게 원하고 있다. 내가 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과연 나 따위 비루한 작가의 말을 누가 들어줄까 싶어 꾸며냈다. (오랜만입니다. 이 칼럼은 이런 식입니다.) 만약 신이 애틋한 내 바람을 듣고 로마시대로 돌아가 시리우스 진저란 인물을 태어나게 했다면, 나는 그의 격언을 차용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글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당연히 글을 쓰는 모든 인간은 죽기 때문이 아니고, 영화 <머니볼> 때문이다.
<머니볼>은 메이저리그의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 제목 그대로 야구는 돈으로 하는 스포츠라는 서슬 퍼런 사실을 인정하고 펼치는 이야기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빈이 출루율을 기반으로 해서 값싼 선수들을 사와, 바닥에 추락한 팀을 재기 시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선수들이 출루율이 높다고 해서 안타를 잘 치거나, 홈런을 잘 친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선수는 볼넷으로 자주 출루하고, 어떤 선수는 몸에 맞는 공으로 자주 나간다. 출루율은 높지만 수비는 엉망이다. 당연히 팀은 엉망진창이 되고, 감독은 불만이 쌓인다. 이런 선수들로는 시즌 중 재기는커녕, 시즌 중 완벽한 추락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빌리빈 단장의 모험은 시즌 중후반을 거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영화의 매 장면도 선수들처럼 출루에 성공하기 시작한다.
사실 거의 모든 스포츠 영화는 ‘재기’라는 목표점을 향해 달려간다. 재기가 아니라면 성장을 다루지만, 그 과정 중에는 당연하다는 듯 추락이 동반되고, 영화는 언제나 기다렸다는 듯 ‘재기’를 꾀하며 끝난다. 이것이 스포츠 영화의 공식이다. 머니볼 역시 이것을 피해갈 순 없지만, <머니볼>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은 그들이 그저 승승장구한 후에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았다’는 고전적 방식을 답습하지 않기 때문이다(담배 피는 호랑이가 등장하지 않는 한, 이런 이야기는 곤란하다). 그들은 결국 다시 실패한다. 우승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이들은 월드시리즈에 나서지 못하고, 포스트 시즌에서 지는 것으로 더 이상의 야구시합을 보여주지 않는다. 빌리빈 단장인 브래드 피트 역시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 자리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지고 있는 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돌아온다. 그렇게 시합은 계속되고, (거창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어느새 화면은 검게 변하고, 하얀 자막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주장이 아닌 정보로 가득 찬 자막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그 자막을 보며 어느덧 생각하게 된다. ‘저들은 올해도 같은 방식으로 꾸준히 시합을 하겠군’ 하고. 자막은 단지 시간을 함께 할 뿐이지만, 영화에서 스스로 말하지 않은 것을 관객을 통해 말하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글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현실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10월까지만 야구를 한다. 영화에서처럼 값싼 이들로 구성된 오클랜드의 ‘선수들’(애슬레틱스)은 마치 유통기한이 정규시즌까지만이라는 듯, 포스트 시즌에서는 비싼 선수들의 팀에 져버리고 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3년 10월 9일 현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포스트 시즌에서 자신들의 연봉 총액보다 2배를 뛰어넘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상대로 2승 2패를 기록했다. 마지막 단 한 경기만 이기면 챔피언십에 진출해, 리그 우승팀이 될 수 있다. 글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값싼 선수들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또 한 번의 기적을 일으켜 이길 수도 있지만, 역시 지금껏 결승의 문턱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또 한 번의 패배를 더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언제나 마지막으로 졌던 게임이 최종 단계의 숙제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러면 다음 시즌에는 그 마지막 한 단계의 문을 기어코 열어내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 과정에 얻은 시행착오를 새로운 승부욕의 자양분으로 삼을 것이다. 역시 챔피언십에 진출하고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다면, 몇 해 동안 겪었던 시행착오를 다시 자양분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도 결코 마지막 문은 이들에게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선수들은 ‘값싼 선수들’이니까. 그래서 애초부터 다른 팀들과는 말 그대로 달랐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지금 유통기한이 끝날 수도 있고, 연장될 수도 있는 글을 쓰고 있다. 어쩌면 또 한 번 이들이 실패해버린다면, 어느 누구도 이런 글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어느 누구도 이런 글을 읽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선수들’은 지더라도 다음해에도 다시 배트를 잡고, 다시 공을 쥐고, 역시 야유를 듣더라도 몸에 맞는 공을 감수해서라도 출루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질지도 모를 팀을 위해, 승패에 상관없이 나도 글을 쓰고 있다. 대부분 읽지 않더라도 다시 노트북을 펼치고, 대부분 찾지 않더라도 혼자 이야기를 구상하고, 대부분 사지 않더라도 혹시나 살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후회하지 않을 글을 쓰려는 것이다. 그래서 <머니볼>은 괜찮은 영화다. 각자의 게임을 펼치고 있는 누구에게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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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cherrybe15
2013.10.24
늘 그렇게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zentlekimbba
2013.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