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도시 속, ‘낭만 마초’ 탐정 이야기
도쿄 도심의 그늘, 신주쿠에 위치한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중년의 탐정 사와자키. 이 책은 일 년이 넘게 도쿄를 떠나 있던 사와자키가 오랜만에 사무소로 복귀하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구석구석 해묵은 먼지나 쌓여 있을 줄 알았던 그의 예상과 달리, 낯선 노숙자 한 사람이 사와자키의 귀환을 반긴다. 의뢰인의 대리인일 뿐이라는 노숙자의 자기소개가 이어졌지만 사와자키의 매의 눈은 그 또한 굴곡진 사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데…….
2013.11.11
작게
크게
공유
1년 간 사무실을 비우고 떠돌아다니던 탐정 사와자키가 돌아온다. 사무실 앞 노숙자를 통해 들어온 의뢰는 11년 전, 누이의 자살을 조사해달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야구부 선수였던 우오즈미 아키라는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가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아직 경찰에서 풀려나기 전에 누나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다수의 목격자도 있어 자살이 분명하지만 아키라에게는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었다.
하라 료의 『안녕, 긴 잠이여』 는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와 『내가 죽인 소녀』 에 이어 사와자키 탐정이 세 번째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 마무리되는 삼부작의 마지막편이다. 사와자키의 사무실 이름은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다. 전직 경찰이었던 와타나베가 회사를 만들고 사와자키가 직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와타나베가 야쿠자와 경찰을 속이고 각성제와 돈을 가로채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야쿠자와 경찰은 동료였던 사와자키를 추궁하지만 그 역시 와타나베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사와자키는 여전히 야쿠자와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신주쿠 귀퉁이에 있는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에서 홀로 일하고 있다.
하라 료는 미대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취미로 읽던 범죄소설에 탐닉하다가 아예 일을 접고 고향에 내려가 마흔 셋의 나이인 1988년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를 내며 작가로 데뷔한다.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을 들으면 탐정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이 떠오른다. 하라 료는 많은 범죄소설 중에서도 특히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에 푹 빠졌고, 소설을 쓸 때 지향점으로 삼았다. 필립 말로를 일본이라는 시공간으로 보낸다면 아마도 사와자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하라 료의 소설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을 이상향으로 삼으면서, 일본의 ‘하드보일드’를 완성한 작품이다.
이제 40대 후반이 된 사와자키는 언제나 냉정하다. 결코 감정에 휘둘리거나 서둘러 예단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느끼고 인식하지만, 감정적으로 발산하는 것이 일에,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배운 것이다. ‘실패한 당사자에게는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면 잠자코 일어나 다시 한 번 달리는 길 외에 방법이 없다. 불행이니 어쩌니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남의 일일 때뿐이다.’ 사와자키는 자신이 누구인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와 젊은 노숙자는 오늘 밤 각자 맛본 공포 체험을 안주 삼아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리라. 그 이야기 속에서는 나도 하시즈메나 사가라, 젊은 노숙자를 때린 조직원들과 같은 부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와자키는 탐정이라는 ‘잔인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생. 게다가 탐정이란 대체로 환영받지 못한다. 경찰은 탐정이 걸리적거린다 생각하고, 범죄자들은 무시하고 조롱한다. 보통 사람들은, 사와자키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생각한다. 탐정은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캐내야만 한다. 경찰이 찾아내지 않는 사적인 비밀까지 파고들기도 한다. ‘탐정이라는 직업은 남의 기분을 쾌적하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 그 반대다.’ 하드보일드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들은 세계의 선의나 평화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위악을 보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나쁘게 드러내고 싶어하는 취미가 있으시군요.’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하지만 탐정에게는 자신만의 윤리가 있다. 세상에는 어떤 절대적인 도덕과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에 자신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잔혹한 세상에서 홀로 버틸 수가 있다. 사와자키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신만의 규칙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안녕, 긴 잠이여』 에는 경찰과 야쿠자, 노숙자, 전직 야구선수, 일본의 전통예술인 노를 하는 가문 등 다양한 집단이 나온다. 각자의 세계에는 그들만의 룰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규칙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그것이 위협받을 때에는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때로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들은 결코 현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괴물도 아니다. 사와자키도 마찬가지고.
사와자키는 조사를 하다가 노를 보러 가게 된다. 공연은 노와 교겐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노와 교겐을 보면서 사와자키는 생각한다. ‘노는 환상적이며 그에 비해 교겐은 현실적이라는 지적을 하는 이도 있다……교겐도 노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리얼리즘이 아니다. 둘 다 환상의 앞면과 뒷면을 지닌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도 그렇고, 살아가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리얼리즘인 동시에 환상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보고 싶은 세계를 보고,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면 비극이 시작된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탐정이 배우자의 불륜이나 가족의 실종 같은 작은 일들을 조사하다가 ‘거대악’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많다. 『안녕, 긴 잠이여』 는 그러나 거대악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가장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에 걸쳐진 ‘악’을 만나게 된다. 평범성이라고 부를 필요조차 없다. 우리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 악이라는 건 선과 마찬가지로 그저 일상이다. 다만 그 악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충격이 아찔할 뿐.
결국, 제 의뢰가 꼭 필요한 일이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네요……그후 만난 모든 사람이 작은 돌을 옮기려다가 큰 산사태를 일으킨 멍청한 남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어요.
하지만 의뢰는 필요했다. 진실도 중요하겠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수수께끼들에 가끔씩은 답을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간의 마무리를 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니까.
[관련 기사]
-14년간 묻어둔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남자, 그리고… 『64』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 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급 사기
-악성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치명적인 핏빛 분노
-누구나 죽이고 싶은 사람 한 명쯤은 있잖아요
하라 료의 『안녕, 긴 잠이여』 는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와 『내가 죽인 소녀』 에 이어 사와자키 탐정이 세 번째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 마무리되는 삼부작의 마지막편이다. 사와자키의 사무실 이름은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다. 전직 경찰이었던 와타나베가 회사를 만들고 사와자키가 직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와타나베가 야쿠자와 경찰을 속이고 각성제와 돈을 가로채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야쿠자와 경찰은 동료였던 사와자키를 추궁하지만 그 역시 와타나베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사와자키는 여전히 야쿠자와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신주쿠 귀퉁이에 있는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에서 홀로 일하고 있다.
하라 료는 미대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취미로 읽던 범죄소설에 탐닉하다가 아예 일을 접고 고향에 내려가 마흔 셋의 나이인 1988년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를 내며 작가로 데뷔한다.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을 들으면 탐정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이 떠오른다. 하라 료는 많은 범죄소설 중에서도 특히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에 푹 빠졌고, 소설을 쓸 때 지향점으로 삼았다. 필립 말로를 일본이라는 시공간으로 보낸다면 아마도 사와자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하라 료의 소설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을 이상향으로 삼으면서, 일본의 ‘하드보일드’를 완성한 작품이다.
그와 젊은 노숙자는 오늘 밤 각자 맛본 공포 체험을 안주 삼아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리라. 그 이야기 속에서는 나도 하시즈메나 사가라, 젊은 노숙자를 때린 조직원들과 같은 부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와자키는 탐정이라는 ‘잔인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생. 게다가 탐정이란 대체로 환영받지 못한다. 경찰은 탐정이 걸리적거린다 생각하고, 범죄자들은 무시하고 조롱한다. 보통 사람들은, 사와자키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생각한다. 탐정은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캐내야만 한다. 경찰이 찾아내지 않는 사적인 비밀까지 파고들기도 한다. ‘탐정이라는 직업은 남의 기분을 쾌적하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대개 그 반대다.’ 하드보일드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들은 세계의 선의나 평화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위악을 보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나쁘게 드러내고 싶어하는 취미가 있으시군요.’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하지만 탐정에게는 자신만의 윤리가 있다. 세상에는 어떤 절대적인 도덕과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에 자신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잔혹한 세상에서 홀로 버틸 수가 있다. 사와자키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신만의 규칙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안녕, 긴 잠이여』 에는 경찰과 야쿠자, 노숙자, 전직 야구선수, 일본의 전통예술인 노를 하는 가문 등 다양한 집단이 나온다. 각자의 세계에는 그들만의 룰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규칙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그것이 위협받을 때에는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때로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들은 결코 현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괴물도 아니다. 사와자키도 마찬가지고.
사와자키는 조사를 하다가 노를 보러 가게 된다. 공연은 노와 교겐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노와 교겐을 보면서 사와자키는 생각한다. ‘노는 환상적이며 그에 비해 교겐은 현실적이라는 지적을 하는 이도 있다……교겐도 노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리얼리즘이 아니다. 둘 다 환상의 앞면과 뒷면을 지닌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도 그렇고, 살아가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리얼리즘인 동시에 환상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보고 싶은 세계를 보고,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면 비극이 시작된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탐정이 배우자의 불륜이나 가족의 실종 같은 작은 일들을 조사하다가 ‘거대악’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많다. 『안녕, 긴 잠이여』 는 그러나 거대악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가장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에 걸쳐진 ‘악’을 만나게 된다. 평범성이라고 부를 필요조차 없다. 우리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 악이라는 건 선과 마찬가지로 그저 일상이다. 다만 그 악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충격이 아찔할 뿐.
결국, 제 의뢰가 꼭 필요한 일이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네요……그후 만난 모든 사람이 작은 돌을 옮기려다가 큰 산사태를 일으킨 멍청한 남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어요.
하지만 의뢰는 필요했다. 진실도 중요하겠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수수께끼들에 가끔씩은 답을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간의 마무리를 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니까.
[관련 기사]
-14년간 묻어둔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남자, 그리고… 『64』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 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급 사기
-악성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치명적인 핏빛 분노
-누구나 죽이고 싶은 사람 한 명쯤은 있잖아요
- 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 저/권일영 역 | 비채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내가 죽인 소녀》를 잇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세번째 장편소설이다. 고교야구, 승부조작, 인간문화재, 동성애 등 경계가 없는 다양한 테마를 날실과 씨실 삼아 정통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완벽하게 직조해냈다. 일본 출간 당시, [주간 분슌] 미스터리 베스트10 3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5위 등에 오르며 독자는 물론 평단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품격 있는 ‘낭만 마초’ 캐릭터에 목마른 독자라면 그간의 갈증을 단연 해갈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0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