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기>를 사랑해주시는 소수의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런 말은 좀 우습지만, 저는 사실 소설가입니다. 이 칼럼에서처럼 주로 시시콜콜한 산문을 쓰지만, 가끔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소설을 씁니다. 그럴 때면 머리에 띠를 매고 ‘자, 어디 한 번!’, 하며 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으로 슬쩍 들어가 겨울잠 자는 곰처럼 조용히 글을 씁니다. 이번에는 태국에 왔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철저히 혼자라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합니다. 혹시 ‘이 양반 태국 갔다는 핑계로 철 지난 영화 이야기만 왕창 하는 거 아니야’하셨다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오기 전에 개봉영화를 잔뜩 보고 왔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영사기를 위해서 보고 왔습니다. 한 달 정도는 밑천 걱정 없이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염려마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어색한 존대는 접고 이번 회 <영사기> 본격적으로 돌리겠습니다. 영차.
방학숙제를 미리 하는 심정으로 개봉영화를 몰아서 봤는데, 그 중에 <용의자>도 끼어 있었다. ‘이 아저씨, 공유 팬이었던 거야?’하고 놀라진 마시길. 예전에도 몇 번 밝힌 적 있지만, 첩보물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봤다. 실제로 어렸을 적인엔 몇 번인가 장래희망란에 ‘첩보원’이라고 쓰기도 했다. 결국 그 후 수십 년이 흘러 지금은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처럼 소설가이자, 첩보원인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원고 마감에 치여 살고 있다. 그러므로 대리만족이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용의자>를 봤다.
첩보물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상업영화라면 결코 벗어나지 않는 두 가지 전제 같은 게 있다. 일단, 첩보물 이야기의 줄기는 ‘사건이 어떻게 발생해서, 어떻게 해결되는지’맞춰져 있다. 당연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추격 신이 슬쩍 등장한다. 마치 ‘안 기다렸어?’ 하듯이 나온다. 따라서 보는 입장에서도, 추격 신이 빠지면 어딘가 섭섭하다. 꼭 기다린 건 아니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안 나와 버리면 ‘뭐야, 정말 안 나온 거야’ 하는 심정이 된다. 주연배우의 발목이라도 부러진 게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조금 과장하자면, 억울한 느낌마저 든다. 어떤 막무가내가 추격 신이 없는 첩보물을 보고나서, 환불을 요구해도 ‘음, 그럴 만하지’하고 여길 정도다. 말하자면, 키스 신이 없는 로맨스 영화 같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나도 모르게 <용의자>를 보며 추격 신을 눈여겨보게 됐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 이제 우리도 이런 장르가 가능하구나’ 하며 즐겁게 보았다.
그나저나 나는 첩보물 못지않게 B급 영화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B급 첩보영화는 그다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만약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감독이라면, 꼭 넣고 싶은 추격 신이 있다. 일단, 배경은 태국이다(물론, 내가 지금 태국에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예전부터 태국 뒷골목에서 찍고 싶었다). 주인공 이름은 편의상 ‘공육’. 공육은 어느 날 과도한 첩보 업무에 지쳐 마사지 숍에 들른다.
- 오일 마사지, 플리즈.
공육은 웃옷은 물론 바지까지 벗고 침대에 엎드린다. 그런데, 공육을 빤히 바라보던 마시지사가 직업적으로 말한다.
- 테이크 오프, 유어 언더웨어.
(이하 작가 맘대로 한국어로)
공육: 헉. 왜 그런 거죠?
아줌마: 오일 마사지는 원래 그런 거야. 자자, 시원하게 벗으라고.
공육은 첩보원의 자존심이고 뭐고, 본시 그렇다 하니 시킨 대로 훌러덩 벗고 마사지를 받는다. 한 삼십분 쯤 지났으려나. 그간 목숨을 건 임무에 과중한 부담을 느꼈던지 공육은 간만에 해방감에 젖어 스르르 잠에 빠져버린다. 자고로 방심은 금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소리 없이 나타난 적국의 요원이 공육을 향해 칼을 날린다. 말 그대로, 칼바람을 일으킨 칼의 바람소리는 잠들었던 공육의 본능을 일깨우고, 공육은 지옥에서도 살아온 자답게 잽싸게 몸을 피한다. 그리고 곧장 도주를 하는데,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서였을까. 공육은 지금 자신이 알몸 상태라는 것을 잠시 망각해버렸다. 허나, 곧장 추격자가 뒤따라오니, 달릴 수밖에. 이렇게 하여 한류스타 공육은 태국의 세련된 치앙마이 카페 골목에서 희대의 스트리킹을 하게 된다. 마치 그리스 고대 올림픽 육상선수처럼. 물론, 화면은 스쿼트로 다져진 공육의 육감적인 엉덩이로 가득 찬다. 꿈틀꿈틀. 이 장면은 특히 심혈을 기울려 3D IMAX로 제작될 참이라, 관객들은 손을 조금만 뻗으면 공육의 엉덩이가 찌릿하게 닿을 듯한 착각에 빠진다. DVD 버전에는 이 장면이 30분짜리 특별영상으로 따로 담겨져 있기에,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나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이 장면이 추격 신 역사상 명장면이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연출할 생각이다. 참고로, 영화 제목은 ‘꿈틀대는 도주자’, 부제는 ‘잡고 싶은 도주자’. 물론 이 추격 신은 예고편에 대대적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특히, 일본어, 태국어, 베트남어, 중국어 버전으로 제작되어 아시아 전역에 꼼꼼하게 소개할 계획이다. 어떤가요? 관객들이 많이 올 것 같나요.
끝으로, 예고편의 자막은 이러하다.
- 앞모습은 극장에서 확인하자!
*
다시 못 볼 거대 스케일의 육체적 블록버스터, ‘꿈틀대는 도주자’.
관심 있는 제작자는 연락주시길.
-‘않더라도’의 자세 - <머니볼>
-나의 첫 차에 대해 - <러시>
-인류의 미래 - <칠드런 오브 맨>
-여권은 어떻게 발급되는가 - <친구 2>
-사라진 택배의 행방 <갬빗>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언강이 숨트는 새벽
2015.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