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여자, 카르멘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훔쳐간 마성의 남자, 돈 호세가 있다면 그에 필적할 만한 팜므파탈로는 단연 카르멘이 아닐까! 한번 스치기만 해도 그녀에게 사랑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다는 전설적인 섹시함. 카르멘은 프랑스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에의 소설 속 주인공이다.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이번에 국내 초연되는 뮤지컬 <카르멘>은 <지킬 앤 하이드> 등으로 한국에서 유독 많은 인기를 자랑하는 프랑크와일드혼의 뮤지컬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카르멘이라는 캐릭터는 2014년 오늘날 소환해도 매력적이다. 그녀가 많은 남자를 홀릴 수 있는 능력자여서가 아니라, 그녀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기대지 않는, 그래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1875년, 비제가 오페라 <카르멘>을 발표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연기한 카르멘이라는 캐릭터가 당대 사람들에게는 불쾌할 만큼 도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카르멘을 연기한 마리아 칼라스가 “카르멘은 강한 여자죠. 하지만 저는 상당히 여성적이고, 여성적인 역할을 좋아해요.”라며 이 역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100년 전만 해도 이런 분위기였는데, 『카르멘』이라는 원작 소설은 무려 1805년에 나왔으니, ‘카르멘’은 얼마나 시대를 앞선 캐릭터였나.
포스터에서 느낄 수 있다시피, 2014년의 뮤지컬 <카르멘>은 ‘새로움’을 강조했다. 이제까지 무대에서 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고, 단단히 홍보했다. 과연 무대는 어땠을까?
지금 무대에 그대로 소환해도 전혀 어색지 않은 카르멘이건만, 오늘의 카르멘은 오히려 예전보다 온순해진 게 사실이다. 사납다고 느낄 만큼 자유분방하고, 매정하다 싶을 만큼 남자 마음을 울리는 카르멘이었는데, 뮤지컬 속의 카르멘은 자유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순정파인 여자다. 누구에게도 구속된 적 없었지만, 그건 이때까지 진실한 사랑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구나 싶은. 그래서 호세가 진실한 사랑을 주었을 때, 카르멘은 이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원작의 카르멘이 지금의 그녀를 본다면 어쩌면 자존심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머물던 세계를 배신하고 나를 변하게 하는, 그런 사랑
신의와 정의의 상징,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반듯한 청년 호세. 언제나 아빠 그림자 밑에서 착한 딸로 살아온 호세의 약혼녀 카타리나는 카르멘과 정 반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없이 순종적인 태도로 안정적인 세계를 구축해서 산다.
하지만 이 세계는 어쩌면 겉으로만 평온해 보일 뿐, 외부의 도발에 매우 취약한 세계다. 누군가 다가와서 욕망을 감춰둔 옷깃만 흔들어도, 이들은 이제껏 본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도발에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무모함을 가졌다. 늦바람이 무서운 법! 강하게 억압할수록, 겉으로 규율이 잘 지켜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도발할 에너지를 안으로 숨겨두는 거나 마찬가지다.
여기, 우리의 호세 리베라 경위도 마찬가지다. 뒤늦게야 호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카타리나 역시 그렇다. 이들의 외부 압력에 반동처럼 솟아오르는 용기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것처럼 설익고 충동적이다. 그래서 용기는 더 큰 위험과 모함을 부르기도 한다. 호세를 지키겠다고 용기를 낸 카타리나와 카르멘을 지키겠다고 용기를 낸 호세의 용기가 뜻밖의 비극을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카르멘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에 찾아와 모든 것을 뒤흔들어놓는다. 호세 리베라 경위에게 “제복 안에 자기를 가두지 마. 솔직해져 봐.”라고 끊임없이 부추기고 결국, 그가 이제까지 지켜왔던 세계를 배신하고 강렬한 욕망, 불꽃 같은 사랑을 택하게 한다. 무대 위에서 인상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카르멘이 시종일관 대사로, 노래로 부추겨대는 자유, 자유란 말은 관객들까지 들썩이게 하는 구석이 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넌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 좀더 섹시해지고 싶지 않아?” 그저 말로만 자유를 외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카르멘이 얼마나 자유를 지향하는지 만큼은 관객도 느낄 수 있다. 다만, 카르멘 역시 사랑 앞에서 자신의 모든 세계를 배신해버리고, 호세만 바라보는 보통 여자로 변해버리긴 하지만 말이다.
원작을 생각한다면, 혹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카르멘’이라는 캐릭터를 머릿속에 고수한다면, 뮤지컬 <카르멘>은 강렬한 캐릭터들을 살리지 못하고 물에 물 탄 듯 흐릿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나마 우리가 머릿속에 공유하고 있는 카르멘 세계에 적합한 인물은 시종 카르멘을 뜨겁게 괴롭히는 가르시아 정도랄까. (그는 무대 위에서 사자같이 날뛰는데, 얼굴에 칼집까지 박아넣은 에녹은 가르시아를 강렬하게 연기해낸다.)
허나 그런 원래의 인상을 포기하고, 뮤지컬 <카르멘>을 새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그러니까 자신들의 세계에 안녕을 고하고, 사랑 앞에서 변신하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로 봐도 흥미로울 수 있다.
<카르멘>은 이야기보다는 볼거리가 화려한 작품이다. 제작진들이 볼거리에 한껏 공을 들인 게 티가 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서커스에서는 불쇼, 상자에 들어간 여자가 비둘기로 변하는 마술, 아크로바틱 등 가지각색의 볼거리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매혹적인 옷을 입고, 플라밍고를 추는 군무 역시 <카르멘>에서만 즐길 수 있는 볼거리다.
더불어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무엇보다 빛난다. 호세 역의 류정한은 중후하고 낭만적인 목소리로 역시나 안정적인 무대를 선보이고, 카르멘 역의 차지연은 자신의 무대에 모든 것을 쏟아낸다. 차지연의 큰 키와 허스키한 목소리는 카르멘의 섹시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위에서 언급한 가르시아 외에 카타리나, 그녀의 이모 등 주조연들 할 것 없이 모두 훌륭한 기량으로 무대를 이끌어 나갔다. 뮤지컬 <카르멘>은 2월 23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계속된다.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