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수원으로 이사를 했다. 서울을 떠나 살아본 적은 처음이라 한동안 나는 ‘남의 동네’를 구경하듯 흥미로운 마음으로 수원을 관찰했다. 살아보니 수원은 무척이나 독특한 곳이었다. 조선 후기 정조 대왕에 의해 미래형 신도시로 계획된 이곳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그 시대의 숨결을 생생하게 머금고 있다. 정조 대왕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수원에서 나는 조선 시대와 조선의 500년을 살아냈던 임금들을 떠올려보았다.
그 옛날 사관의 붓에 의해 기록된 임금의 모습과, 오늘날 작가의 손에 의해 각색된 임금의 모습은 분명 달랐다. 나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왕조실록』 안에서 역사의 화석처럼 묻혀 있거나 억지로 온갖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느라 고단한 사극 속 임금이 아닌 ‘조선의 임금’으로 한 시대를 살아냈던 왕들의 진짜 얼굴이 보고 싶었다.
5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조선의 임금’ 자리에 앉았던 왕들은 모두 26명이었다. 그들의 진짜 얼굴을 찾는 일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쉽지 않았다. 물론 자료는 무척이나 풍부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으로 열람이 가능했고 역사책들도 넘쳐났다. 하지만 내가 정작 궁금한 것은 ‘조선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임금이 어떤 가계도를 가지고 태어나 어떤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르고, 어떤 여인과 혼인을 했고 어떤 자식을 두었으며, 어떤 업적을 세우고 어떤 문제를 일으켜 결국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였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과연 조선의 임금들은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였다. 그것을 알기 위해 결국 실록과 책들의 행간을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읽고 또 읽다 보니 공개된 정보 속에서 꽁꽁 숨겨놓은 수수께끼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임금이던 아버지가 승하한 후 세자였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그런 정상적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조선의 임금들이 얼마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왕위에 올랐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들의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26명의 임금 중 누군가는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었고 누군가는 ‘왕으로 태어난 사람’이었고 누군가는 ‘왕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성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세종과 성종은 사실은 왕위와 거리가 멀었지만 필요에 의해 왕으로 선택받아 발탁이 되었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몇 년 동안은 아무 실권이 없었다.
왕이지만 실권은 없었던 그 시간동안 이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했을까? 이른바 조선의 국본이라고 불리는 ‘로열패밀리’들의 일상을 들춰보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깜짝 놀랐다. 유교적 가치관과 전통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되던 조선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왕족들의 삶은 오늘날 신문 기사를 도배하는 유명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부부 관계나 여자 문제에 있어서 윤리나 도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뻔뻔하고 파렴치한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곤 했었다.
너무나 임금이 되고 싶었던, 어떻게 해서라도 임금의 자리를 지키고 싶어 고군분투했던 선조와 광해군, 인조는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이들은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운명 속에서 빼앗고 뺏기며 조선의 가장 찬란하면서도 어두웠던 시기를 만들고 이끌었다. 반면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왕위에 올랐다고 해서 모두 성군이 된 것은 아니었다.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연산군과 숙종, 정조는 재위 기간 내내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다녔다.
눈부신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세 명의 세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인과응보의 공식’을 곱씹었다. 떳떳하지 못한 임금의 아들로 태어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각각 아버지를 대신하여 속죄하듯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이와 반대로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던 아들, 효명세자의 이른 죽음에 슬퍼하며 순조가 쓴 비문은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을 만큼 애절했다.
누구보다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9명의 임금과 3명의 세자를 만나면서 나는 비로소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선의 임금이라는 존재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을 생각하며 ‘조선 임금 잔혹사’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임금이 되기 위해, 임금이 된 후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가혹했다. 조선의 임금들은 지엄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했고, 임금의 지위를 누리기 위해 자유와 생명을 담보로 잡혀야만 했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책을 쓰는 내내 500년 동안 조선의 임금과 세자들이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담보로 벌였던 소리 없는 전쟁들을 꼼꼼하게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외에도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선 왕실의 특수한 환경과 문화를 비롯하여, 오늘날 많은 직장인들이 선망할 만큼 놀라운 출세가도를 달렸던 화제의 인물들은 토막 상식 속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아무쪼록 이 책을 읽는 분들께서 조선의 임금과 세자들이 느꼈던 희로애락에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과연 얼마큼 뜨겁게 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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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임금잔혹사 조민기 저 | 책비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왕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승하한 선왕으로부터 예정된 왕위를 물려받은 뒤, 따뜻한 애민정신과 강력한 왕권으로 조선을 다스렸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는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조선의 왕자들과 왕들은 왕위를 둘러싼 치열하고도 냉혹한 세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때로는 목숨을 담보로 왕위에 오르기도 했고, 때로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가며 간신히 버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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