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에서 읽은, 간이 시집 두 권
시가 좀더 아무나 즐기고 아무렇게나 쓰여졌으면 좋겠다. 시가 세상의 위엄에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시의 위엄에도 반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시를 쓸 자신은 없지만, 그런 시를 읽고 응원할 자신은 있다.
글ㆍ사진 김소연(시인)
201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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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간이역을 역사만을 그대로 보존해서 사진을 찍을 만하게 조성해놓은 곳들이 제법 많아졌다. 여전히 아무런 보존조차 하지 않고 방치돼 있는 간이역들도 물론 많다. 어쩌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게 되거나, 어쩌다 지방에 방문하게 됐을 때 그런 곳들을 일부러 찾아가보면, 오히려 방치되어 있는 곳에 더 운치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보존이라는 게 너무 간단하고 조야한 이미지로 실행돼 있기 때문에, 되려 방치된 상태가 더 자연스럽고 그윽하다. 방치된 곳에선 철로 주변에 어김없이 잡풀들이 무성하다. 붉게 녹슨 철로 사이 삐죽삐죽 삐져 나온 잡풀들에 기울어가는 늦은 오후의 해가 비치는 게 아름답다. 실은 그 잡풀에 앞서 애초에 그 간이역자체가 아름답다. 작아서, 인적이 드물어서, 꼭 필요하다 할 수는 없지만 있으면 좋은 곳이어서, 작은 마을에 사는 적은 수의 인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서 간이역은 일차적으로 아름답다.

 

이 간이역과 무척이나 닮은 시집이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다. e-book의 형태로. 그 중 첫 시리즈는 김언 시인의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기린과숲). 이 시리즈는 현재 여섯 권이 출간됐다. 『피터판과 친구들』 (유형진),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장석남 이홍섭 진은영 김민정 김중일), 『파문』(주하림 임경섭 박찬세 황현진 박민정), 『코코 샤넬의 아침』 (이근화), 『흐린 브리프의 연대기』 (이승원))이다.

 

이 시집을 나는 헝가리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수많은 간이역을 지나쳤고, 간이역마다 제복을 차려 입고 빨간 모자를 쓴 역장이 지나가는 기차 앞에 서서 경례를 하고 있었다. '글루미  썬데이'와 너무도 어울리는 잿빛 하늘의 부다페스트에서 꽤 자주 집시들이 다가와 돈을 달라고 했고 예상보다 더 짙은 잿빛 하늘을 탄복(?)하며 나는 부다페스트의 방치된 뒷골목에 근친성을 느꼈고, 그랬지만 실은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시간씩거리가좁혀진다   피터판과친구들

 

십 분이면 충분할 이 시집의 정독 시간


기차표를 끊고 기차에 올라탔을 때에 내 예상과 딱 맞게도 여기저기에서 한국 여행자들을 마주쳤다. 한국말이 여기저기서 들리자 조금이나마 내게 장착돼 있던 긴장감들이 완전하게 풀려나갔다. 그렇게 하여, 헝가리 시골 할머니 세 사람과 전혀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눈빛과 간식거리로 친교의 시간을 가지며 국경을 통과하고 있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김언의 이 '간이' 시집을 나는 김언 세계의 뒷골목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알기로 김언은 한 번도 '이 시집에 내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는 식으로 자기 작품을 말하지 않는 사람에 속한다. 이번 간이 시집은 아예 '시인의 말'에 "십 분이면 충분할 이 시집의 정독 시간"이라고 적어 두었다. 십 분이라는 말은 맞기도 하고 좀 틀리기도 하지만, 이 시집은 책으로써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쪽에 가깝다는 말인 것도 같지만, 시집이 언제 그렇게 쓸모가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아니, 시집은 쓸모가 없을수록 아름답다는 본질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집은 어쩌면 김언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감정이 없는, 그래서 마음을 싣지 않아야 하는 쪽으로 독서를 해야 하는 게 김언의 작품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없이 흥미로운 면이 있다. 김언의 표현대로 시인의 삶을 '몸살'이라고 가장할 때, 병가를 낸 시인의 시집 같으니까. 시인은 어떨 때에 병가를 내나.   

 

혼자 놀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서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바쁘지 않아야 한다.
조금 바빠도 좋다.
친구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는데
죽은 사람이 맨 먼저 알려온다.
혼자 놀 수 있는 일을.
- 김언, 「일」


국경에서 제법 오래 정차하면서 헝가리 사람과 크로아티아 사람이 차례대로 여권을 검사하고 스탬프를 찍어주고 나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극찬을 했다는 크로아티아의 석양이 눈앞에 펼쳐졌고, 내가 도착해야 할 자그레브까지는 조금 남았을 시간이었다. 살찐 양떼들이 들판에 있었고, 해바라기밭에서는 수많은 해바라기가 오늘치 마지막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유형진의 페르소나는 이상한 해방감을 준다


라벤더 밭을 지나고 밀밭을 지나고 낮게 깔린 하얀 구름 사이사이로 빨갛고도 노란 노을이 드넓게 펼쳐지고 있을 때, 나는 유형진의 「피터판과 그 친구들」을 읽었다. 유형진의 세계 속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인은 괴물이라고 하지만 내 머릿속엔 어쩐지 귀여운 요정인 것만 같은 인물들이 삼겹살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이 시집에서 유형진은 가장 유형진답게 종알거린다. 제멋대로, 충분히 제멋대로 종알거리는 이의 꼬물꼬물한 표정을 지켜보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시가 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태도이다. 그 어떤 규율 없이 제멋대로 행동해도 한없이 사랑스러운, 동화 속 말괄량이 캐릭터를 만나는 것만 같다.

 

동화 속 말괄량이의 제멋대로인 행동들이 그러하듯, 유형진의 페르소나는 이상한 해방감을 준다. 음울하지 않아도 반역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까불며 노는 것인데, 유형진의 목소리에 그 유일함이 묻어 나온다. 원래 그런 시인이기도 했지만 이 시집에선 더 심하게 그러하다. 아마도 이 시집의 시리즈 자체가 근본적으로 '네멋대로 써라'라는 강령이, 강령이 아닌 채로 깔려 있기 때문일 것만 같다. '실컷' 어떤 것을 하고 있는 자를 목격하는 즐거움을 오래 잊고 있었기에 이 태도가 더더욱 반가웠다. 실컷 하루를 즐겁게 놀다가 깊이 잠든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하루가 지고 있는 풍경 속에서, 시에 대한 무수한 어쩌고 저쩌고들이 다 무용할 지경이었다.

 

이 간이 시집을 유형진은 스스로 '2.5번째 시집'이라고 불렀다. 첫번째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과 두 번째 시집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에 이어 세 번째 시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지금 조금씩 조금씩 세계를 깊고 서늘하게 방향을 틀고 있는 가운데에 출간된 2.5번째 시집에서 유형진은 마치 해가 떨어질 무렵 마지막 기량을 다하며 골목을 뛰어 노는 아이처럼 힘껏 뛰논다. 녹슨 철로가에 삐죽삐죽 삐져 나온 잡풀들처럼 무상하면서도 씩씩하다.

 

꽃잎들은 바람으로부터 와서 사랑을 잃고 슬퍼하는 자의 눈앞에서 놀다가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유형진, 「피터 판과 친구들-에피소드 6」 부분

 

이 시리즈는 어쩌면 시의 위엄을 비웃기 위하여 발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좀더 지켜보아야 알겠지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더 힘껏 이 시리즈를 응원할 테다. 시는 도대체 무엇인가. 시는 도대체 왜 그다지도 어렵고 가파르게 시적이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는가. 발버둥을 칠수록 불모지가 되어 가는가.

 

김언이 "예외를 믿고 법칙을 의심한다"고 적어두었듯이, 시가 좀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으로부터도. 그냥 난장판이면 좋겠다 싶다. 시가 좀더 아무나 즐기고 아무렇게나 쓰여졌으면 좋겠다. 시가 세상의 위엄에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시의 위엄에도 반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시를 쓸 자신은 없지만, 그런 시를 읽고 응원할 자신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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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김언 저 | 기린과숲
김언의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는 기린과숲이 야심차게 기획한 e시선 시리즈를 여는 첫 시집이자, 13편의 시가 담긴 소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그간 시인의 다른 시집에서 볼 수 없었던 비교적 짧은 시들과 시인의 독특하고 재미난 짧은 에세이 두 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우리가 가정과 일에서 겪는 모순 등이 시인 특유의 목소리로 몽환적이고 감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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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판과 친구들 유형진 저 | 기린과숲
유형진의 『피터 판과 친구들』은 기린과숲이 야심차게 기획한 e시선 시리즈의 두 번째 시집. 이 소시집은 총 12편의 시를 담고 있으며, ‘허니밀크랜드’라는 환상적인 공간을 설정하고 이야기를 차례로 전개하는 식의 연작시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시집을 통해 동화적 상상력이 빚어내는 독특한 시의 매혹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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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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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선

2014.07.25

분주함이 삶의 거의 전부가 되다시피한 일상에 쫓기다보니, 시라는 것은 마치 사치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인 것 같네요. 하지만 잠시만 여유를 갖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시간에 시를 읽음으로써 우리에게 더 많은 유익이 있을 것 같아 이 작품들을 한 번 읽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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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jukaki

2014.07.17

또 시인의 유혹에 책을 카트에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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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보석

2014.07.16

병가를 낸 시인의 시집은 어떤 모습일까요? 김언님의 시 감각적이고 몽환적인 것에는 틀림이 없네요. 때론 아름다워 보이는 간이역처럼 아름다운 시집들이 많이 출간되었군요. 오랜만에 시를 읊으며 여름 더위를 물리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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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