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강연장에서 만난 한 여성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주로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는데 곡의 제목을 기억하진 않아요. 그냥 스쳐가는 풍경처럼 듣는 거죠. 그렇게 들어도 괜찮은 거죠?” 그때 제가 뭐라고 답했을까요? 저는 그분한테 “안 됩니다!”하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렇게 듣던 음악 중에 가슴을 흔드는 곡이 하나도 없었나요? 만약 그렇게 감동으로 밀려온 곡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 곡의 이름을 알고 싶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게 사랑의 시작이거든요. 질문하신 분과 그 음악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제목이 궁금했던 곡이 하나도 없었다면, 음악을 향해 가슴을 열고 다가가지 않은 거죠. 그냥 인터넷으로 틀어 놓고 있기만 했던 겁니다. ( 『더 클래식』, 7~8쪽)
문학수는 책의 프롤로그에서부터 단호하게 ‘제목도 모른 채 스쳐가는 풍경처럼 음악을 듣는 것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는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더 클래식』은 독자들이 클래식을 향해 가슴을 열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는 문학수의 마음이 담긴 ‘음악편지’다. 이 음악편지에는 클래식 음악을 벗하기 위해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34곡의 걸작과 100여장의 추천 음반이 담겨있다. 8월 20일, 철학박사 강신주와 함께한 <클래식 토크>에서도 문학수는 시종일관 직접 듣고 몸에 저장하는 음악을 강조했다.
위대한 바흐, 칸타타와 마태 수난곡
강신주: 길을 가다가 음악 소리가 들릴 때가 있죠. 집에서 라디오를 켜놓고 있는데 음악이 들릴 때가 있죠. ‘소리가 나네’가 아니라 정말 음악이 ‘들릴 때’가 있다는 말이에요. 우울할 때는 우울한 음악이 자신에게 확 들어오죠. 기쁜 상태라면 우울한 음악은 잘 들리지 않아요. 이처럼 첫 단계는 ‘운’이에요. 그런데 더 나아가 음악을 들으면서 작곡가가 전달하려고 했던 감정에 젖어 드는 단계가 있어요.
정말 기쁜 상태에 있었다가도 바흐를 딱 듣는 순간 눈물이 떨어지는 거죠. 이것이 정말로 음악을 향유하는 두 번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클래식 음악은 어려운 게 아니다. 지나가다가 어디선가 들리는 음악이 ‘용케도’ 내 감정 상태를 통과할 때, 그래서 작곡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감정이 내게 다가올 때, 음악이 들린다. 그리고 나중에는 음악을 들으면 감정이 내게 밀려오는 단계까지 이른다.’
문학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흐의 이름 앞에 다양한 수식어를 붙이는데, 저는 ‘위대한’ 바흐라는 표현을 씁니다. 음악가에게는 거대한 산맥 같은 작곡가라고 할 수 있죠. 특히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은 정말 근사한 곡입니다. 바흐가 세상을 떠나기 9년전 작품인데도 ‘말년성’이 드러나는 작품이죠. 음악이 굉장히 단순한데, 그 안에 모든 게 다 들어있습니다. 이게 예술가의 ‘말년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생의 후반에 접어들면 예술가들은 음악으로 부귀영화를 누린다거나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많이 내려놓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음악 그 자체에 굉장히 정직한 자세로 접근해 들어가기 때문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거죠. 욕망이 만들어내는 불필요한 장식이 사라지는 겁니다.”
이 날 <클래식 토크>에서는 바흐의 음악 중 칸타타 140번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있어(BWV.140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와 <마태수난곡(BWV.244 St. Matthew Passion)>에서 39번째 곡으로 등장하는 <나의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 mein Gott)>를 잠시 접했다. 강신주는 바흐의 종교 음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강신주: 루터교가 성서주의인데, 그 당시 독일 사람들의 95%가 문맹이었어요. 사람들이 성경을 못 읽으니, 한계에 봉착한 거죠. 그래서 바흐가 루터교의 종교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합니다. 음악은 들으면 다 아니까요.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과 같은 음악들이 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죠. 성경 구절에서 ‘기독교를 이렇게 들었으면 좋겠다’하는 것을 뽑았어요. 기독교를 믿지 않더라도 살아 가면서 ‘죄를 짓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어요. 내가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군 날 있죠? 나의 존재가 죄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은 가슴에 사무쳐 들어와요.
문학수: 오늘 마감이 가장 많은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 바흐를 꼭 들어야 해요. 오늘 가슴이 들끓고 생각이 복잡한 하루를 보내고 왔어요. 저는 이런 때 바흐를 듣거든요. 바흐의 음악은 저를 내려놓게 만듭니다. 바흐의 음악은 우리를 차분하게 만들어주고, 화나거나 분노한 마음을 다스려주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바흐의 종교음악을 들으면 진정성을 많이 느낍니다.
문학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예로 들며 ‘클래식은 어렵다’는 생각은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어렵다’는 느낌은 음악을 몸으로 익히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에서 온다는 것이다.
클래식은 어렵다? 관념으로 생각하지 말고 몸으로 들어야
문학수: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선입견 중 하나가 ‘어렵다’는 거죠. 그런데 대중 음악도 안 들으면 어렵습니다. 음악은 몸으로 듣는 것이죠. 머리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와서 몸 속에 저장이 되는 것인데요, 그래서 몸으로 접촉해보지 않으면 음악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음악이 몸에 저장이 되면 그때부터 듣는 재미가 생기고, 콘서트에 찾아 가는 것도 즐겁게 됩니다. 물론 그 단계가 클래식 음악의 경우 대중음악보다 능동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 저기 강의를 들으면서 ‘클래식 음악이 어렵다고들 하시는데, 이 음악을 듣고 다시 생각해봅시다’ 말한 뒤 꼭 바흐의 <마태수난곡>의 일부를 틉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선율미가 아주 뛰어납니다. 한 2번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죠. 그래서 <마태수난곡>을 들은 뒤, ‘이 음악이 정말 어렵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다 이렇게 어렵지 않은 곡들입니다. 그런데 듣지 않고 관념으로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수는 시간을 들여서 음악을 듣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 클래식 음악 자체가 난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문학수: 클래식 음악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시간 때문입니다. <마태수난곡>의 경우 지휘자에 따라서 템포를 빠르게 잡으면 2시간 30분, 조금 느린 경우 3시간 30분 이렇게 연주시간이 길죠. 그래서 우리가 시간을 투자하고 가만히 앉아서 이 곡을 듣기가 어려운 거죠. 결국 시간을 들여서 음악을 듣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 음악 자체가 난해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마태수난곡>은 교회의 수난주간에 연주되는 음악으로, 예수가 로마 군대에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지상에서 겪은 고난을 담고 있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극적인 음악이죠.
강신주: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들을 때는 연주 시간이 좀 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까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고, 조금 더 지나니까 ‘좀 더 변주했으면 좋았을텐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닷가에 가서 파도 소리를 들을 때, 바람을 맞을 때, ‘3분이면 깔끔하게 맞지’ 이런 거 아니잖아요? ‘아, 더 있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죠. 클래식 음악을 듣는 건 바로 그런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음과 음 사이 ‘여지’를 남겨둔 모차르트
바흐의 음악에 이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Concerto for Clarinet and Orchestra in A major)가 이어졌다. 강신주는 바흐로 대표되는 ‘죄 지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정신과 죄의식 없이 나를 분출하는 쇼팽의 정신 사이에 모차르트가 존재한다고 비유했다. 한 마디로 강신주에게 모차르트는 ‘순진무구함’이다.
강신주: 연주자들에게 ‘모차르트는 어떤 사람이에요?’ 물어보면 항상 이렇게 말씀하세요. ‘모차르트는 음이 부족하다.’ 음이 꽉 차있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음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에 여지가 많다는 거죠. 그래서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참 쉽다고 생각하는데, 한참 피아노를 하다 보면 모차르트의 음악이 들쑥날쑥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대요.
제게 모차르트를 물으면, 저는 항상 이렇게 설명해요. ‘아주 슬픈데 웃는 것 혹은 눈물이 나는데 웃는 것.’ 모차르트의 순진무구함이 바로 여기서 오는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제 상태에 따라 다 들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주 밝은 음악으로 들리지만, 제가 우울할 때는 슬픔으로도 들릴 수 있는 거죠. 즉, 감정이 분화되기 직전의 아이의 상태로 모차르트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수는 모차르트의 음악밖에 들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문학수: 몸에 음악이 저장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 상황에 맞는 음악이 떠오르기 마련이죠. 저희 어머니가 예전에 뇌수술을 받으셨는데, 수술을 들어가면서 의사가 ‘확률이 50:50입니다’ 이러더라고요. 병원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데 왜 이리 모차르트의 음악이 떠오르는지요. 몸으로 모차르트를 기억하면서 그 때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수술이 끝난 후 어머니가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뇌 수술의 충격으로 한달 간 이런 상황이었는데, 그 동안은 정말 다른 곡을 들을 수가 없더군요. 그 때는 베토벤도, 바흐도 듣지 못했고 모차르트의 음악말고는 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 이유를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모차르트의 음악은 슬프지만 죽음의 노래는 아니거든요. 어떤 생기를 품고 있습니다. 내가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그 노래를 찾은 건, 아마 위로의 선율 같은 것이 모차르트의 음악에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클래식 토크>의 끝에서 문학수는 클래식 음악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열정’을 강조했다.
문학수: 열정이라는 말 많이 쓰지 않습니까. 요새는 열정도 상품화되고 포장되어 마치 이것이 일상과 연결되지 않는 어떤 큰 일인 것마냥 여겨지는 것 같은데, 사실 열정은 대단히 크고 관념적인 게 아닙니다. 오늘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잠깐씩 들었는데, 이렇게 접촉해본 음악을 집에 가서 직접 찾아 듣는 노력. 일상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바로 열정입니다. 오늘 여기서 들으셨던 음악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강신주와 문학수가 함께한 이번 <클래식 토크>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시간을 갖고 직접 클래식 음악을 들어보는 열정으로 이어주는 힘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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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래식 문학수 저 | 돌베개
인문주의자의 글쓰기와 실용성이 결합된 클래식 길잡이 『더 클래식. 하나』. 시리즈의 첫 권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부터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6번 F장조》까지 바로크 후기에서부터 낭만주의 초입에 놓인 클래식 걸작 34곡을 담고 있다. 전작이 클래식은 낯설고 어렵다는 오랜 편견을 허물려고 시도했다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어떤 곡, 어떤 음반을 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독자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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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는중인데 클래식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들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가요나 POP은 듣는 그 순간의 느낌이 중요한데 비해 클래식은 몇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