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에 시달리던 학창 시절에 미국 밴드 이글스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에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졌었다. 특히 곡의 후반부, 마치 혼을 빼앗듯 두 기타리스트가 주고받으며 구사하는 드라마틱한 하모니 연주는 입을 떡 벌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 탁월함이 주는 감동과 ‘이런 연주를 누가 해?’ 하는 경외감은 거의 40년이 흐른 지금도 각별하다.
1977년 「호텔 캘리포니아」가 전미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무렵, 음악의 해석하기와 말하기의 기준을 제공한 한 해외 시사주간지에서 이 곡을 가리켜 ‘아메리칸 드림의 상실이라는 주제의식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대표되는 미국의 뒤안길을 쓰라리게 해부한 노래’라고 정의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정상인 미국 경제가 실은 병들었으며, 미국은 기울고 있는 나라라는 논지였다.
곡의 멜로디와 전개의 미학에 허우적대던 사람에게 이러한 담론은 생경하게 느껴졌고 ‘뮤지션들이 뭐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솔직히 그런 인상들에 앞서 노랫말이 너무 난해했다. 하지만 로버트 힐번과 같은 유명 저널리스트가 “이글스는 1970년대에 만연한 자아도취와 씨름한 몇 안 되는 그룹”이라고 했듯 장밋빛이 사라진 경제현실에 기초한 이러한 비평적 진단은 단지 음악 듣기가 좋았던, 좋게 말해서 음악의 예술성만을 신봉하던 평론가 지망 청년을 점점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글스의 곡 접근을 두고 조금은 인위적이고 어설퍼서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는 누군가의 신랄한 비판이 조금 위로를 주긴 했지만 음악 비평에는 ‘정치와 경제를 포괄한 사회성’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장치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호텔 캘리포니아」에게 주어진 이러한 의미망이 해석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인정해야 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이 음악의 숨겨진 메시지를 푸는 열쇠나 같았다고 할까.
한편 이 또한 난감했다. 미국의 경제 형편이 이전 1960년대와 달리 1970년대 들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쿨 앤 더 갱, 오제이스, 쉭, 펑카델릭, 도나 섬머 등 흑인 펑크Funk와 특히 디스코 가수들의 음악은 세상 좋다는 듯 신나게 리듬을 굴리는 쪽으로 질주해간 것 말이다. 대중음악 역사에서 늘 존재해온 경향이자 지금도 그러한데, 현실과 음악의 지향이 빗나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의 직선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되는 배반의 양상이었다. 이 경우는 상기한 이글스와 역시 당대의 앵그리 펑크Punk 록과 달리 당시 경제에 대한 작용 아닌 반작용의 산물이었음을 깨치는 데 역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상 물정을 등진 무작정의 환희, 주변 정세에 대한 무덤덤함, 나태, 무관심 그리고 조롱과 같이 일반적으로 반작용의 범주에 속하는 정서도 마찬가지로 ‘시대에 대한 개입’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할까.
그러한 관계 풀이가 음악 평론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예술성 그리고 그것으로 획득하는 대중성과 더불어 시대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일깨운다. 그것이 20세기 음악의 역사가 구축한 견고한 음악 정체성일 것이다. 사실 정치사회적 접근은 우리가 음악을 이해하는 데 매우 날렵한 효율 혹은 융통성을 제공한다. 여기서 문제는 시대성이 흔히 정치적 틀에만 갇혀 있다는 점이다. 1960년대의 이상주의, 1970년대의 기업화, 1980년대의 탐욕주의와 같은 표현은 결국 정치적 관념의 언어들이다.
상기한 두 사례,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와 펑크 디스코 사운드인 펑카델릭의 「원 네이션 언더 어 그루브One Nation under a Groove」는 비슷한 시대에 유행한 것이지만 시대에 각기 다른 감정으로 반응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인종적 토양과 천착한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일 테지만 단선적인 정치적 또는 예술적 관점으로는 풀어내기가 시원하지 않다. 최종적인 상이함은 그 속에서 발전한 경제적 시각과 연관 지을 수 있다. 당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을 바라보는, 이글스와 펑카델릭 간의, 어쩌면 흑백 간의 판이한 시점이다. 경제적 맥락에서 볼 때, 이글스는 경기침체를 있는 그대로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작용’이라면 펑카델릭은 불경기를 정반대로 희희낙락 보내는 ‘반작용’으로 임했다고 할까.
시대성은 정치적인 것과 더불어 경제적 분위기가 등권等權의 몫을 가져간다는 생각이다. 살림이 좋으니 즐거운 파도타기(서핑) 음악이 나오고 직장을 못 구해 살기가 팍팍해지니 분노의 펑크 록이 등장하는 것은 확연한 예에 속한다. 두 음악의 경우는 솔직히 정치적인 것보다 경제적 관련성이 더 두드러진다. 그만큼 면면히 흘러온 대중음악의 역사는 정치적 사회 외에 경제적 사회와도 접점을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마치 떼어내듯 이 부분만을 도려내어 거기에 별도의 악센트와 임팩트를 부여하고 싶었다. 어설픈 수준의 대중음악 경제사史에의 도전이라고 할까. 이런 저런 색조의 정서와 시대적 흐름이 덩어리를 이루며 형성되어온 대중음악에서 경제만을 부각한다는 것은 온전하고 객관적인 해석과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도 있다. 견강부회의 소지도 다분하다. 경제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으로서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경제학적 혹은 경제 분석적 접근은 애초부터 될 수가 없는 노릇이었고 단지 해당 시대의 경제적 상황과 현실만을 스케치해 음악을 견주는 수준에서 멈췄다.
이 책은 따라서 음악 자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음악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것이다. 음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규정하는 많은 구조적 요인 가운데 경제라는 측면에 살짝 무게중심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1930년대의 공황기에서 2000년대의 금융위기와 오큐파이 운동Occupy movement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경제 현실 간의 직간접 연관성을 기술했다. 초점이 가끔 흐리고 조금은 편향적인 것 같아서 걱정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음악의 정체성 논란이 극심해지면서 학문적 갈등을 일으키는 예술성과 사회성의 대립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음악학자 니콜러스 쿡의 말대로 음악은 리듬 멜로디 화성의 음악학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연구의 대상임을 믿는다. 창문 닫고 방에 처박혀 오선지의 미학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에 놓인 것이 음악이라는 것을. 미력하나마 너무 숭고한 음악학의 영토에서 음악을 끌어내 음악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또 경제적 현실로 음악을 이해하려는 가상한 노력으로 이 책을 봐주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출판사 아트북스에 감사드린다. 두 편집자 손희경 님과 권한라 님이 지속적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워주지 않았다면 이 책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해의 폭과 깊이가 부족한 탓에 짧은 분량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부끄럽지만 라디오에서 기획한 짧은 특집이 이렇게 근사한 결과물로 나타나니 감개무량이다.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어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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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경제를 노래하다임진모 저 | 아트북스
한 시대는 노래로 기억된다. 과거를 추억할 때 마치 배경음악처럼, 당시에 즐겨 듣거나 유행했던 노래가 함께 떠오르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노래에는 그처럼 개인적인 기억과 시대 상황, 분위기가 섞여 들어간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이 책에서 1930년대 경제공황기부터 2000년대 세계금융위기까지 경제사를 대중음악을 통해 훑어 내려간다.
임진모(대중문화평론가)
학력
고려대학교 사회학 학사
수상
2011년 제5회 다산대상 문화예술 부문 대상
2006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공로상
경력
2011.06~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영상물 등급위원회 공연심의위원
내외경제신문 기자
음악웹진 이즘(www.izm.co.kr) 제작
감귤
201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