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사랑
두 개의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햇살 드는 창가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첫 번째라면, 설원에서 처절한 인사를 건네는 여인의 모습은 두 번째다. 이쯤 되면 누구나 눈치 챘을 것이다. 영화 <러브레터>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라는 두 마디의 대사만 듣고도 모두가 떠올릴 수 있는 바로 그 영화다. 벌써 10년도 훌쩍 지난 1999년, 일본 영화로는 최초로 국내에 개봉되었던 작품 <러브레터>가 창작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다. 원작에 충실한 이야기 위로 달라진 장르의 새로움을 덧대었다.
뮤지컬 <러브레터>의 가장 큰 미덕은 원작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새로운 각도에서 인물들을 조명했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이 가진 균형성에 기인한다. 영화 <러브레터>는 두 명의 후지이 이츠키의 지나간 사랑을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중 무대 위에서 연출하기에 어려운 몇몇 장면들은 뮤지컬 <러브레터>에서 생략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선택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뮤지컬 <러브레터>에서는 와타나베 히로코와 아키바의 이야기가 후지이 이츠키‘들’의 사랑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진다. 히로코와 아키바의 사랑에 집중했다기보다, 두 명의 이츠키의 이야기를 덜어내면서 균형을 맞춘 것이다.
2년 전 일어난 사고로 와타나베 히로코는 남자친구인 후지이 이츠키를 잃었다. 이제는 그를 대신해 아키바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히로코는 좀처럼 이츠키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아키바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끝나버린 사랑인 줄 알면서도 애써 그 끝을 붙들고 있는 히로코는 성큼 다가와 있는 새로운 사랑을 짐짓 모른 체 한다.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은 옛 사랑은 히로코와 아키바 모두를 옭아매고 있는 것.
한편, 지나간 사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죽은 이츠키도 마찬가지다. 그는 첫사랑인 ‘여자 이츠키’에게 차마 들려주지 못한 고백을 안고 살아가다, 그녀와 꼭 닮은 히로코를 만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부터 연인이 된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이츠키였을까, 히로코였을까. 이츠키의 첫사랑 그녀가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히로코는 혼란과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마침내 지나간 사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듯 뮤지컬 <러브레터>는 하나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에 대한 기억이 다음 사람에게로 옮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명의 이츠키와 히로코, 그리고 아키바. 비슷한 무게감으로 전해지는 네 사람의 이야기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사랑의 본 모습을 원작보다도 뚜렷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떠나보내는 방법
죽은 이츠키가 첫사랑의 흔적을 따라가다 히로코와 만나게 된 것처럼, 히로코가 지난 사랑의 뒤를 쫓느라 아키바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현재 역시 과거의 시간 끝에 매달려 있다. 옛 연인과 비슷한 사람을 찾는 것도, 그와는 정반대의 사람에게 끌리는 것도, 모두 같은 이유가 아닐까.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흉터처럼 남아버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뮤지컬 <러브레터>의 두 인물, 후지이 이츠키(‘여자 이츠키’)의 엄마와 할아버지는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배우자를 잃고 아들을 잃은 그들은 상처를 묻어둔 채, 마치 그런 상처는 이미 다 잊어버린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오래 전 그 날과 같은 상황이 재현되자 감춰두었던 상처를 드러내 보인다. 감기가 악화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처럼 이츠키 역시 심한 감기로 쓰러진 것이다. 잊었던 그날처럼 때마침 폭설이 내리고, 이츠키의 할아버지는 똑같은 선택을 하겠노라 고집을 부린다. 눈길에 막혀 더디게 오는 구급차를 기다리느니 자신이 직접 업고 병원까지 걸어가겠다는 것. 이츠키의 어머니는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다며 버티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선택은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선택을 하지만 지난날과는 다른 결과를 얻고, 그렇게 상처로 남았던 시간을 떠나보낸다.
비슷한 시각, 히로코는 이츠키를 뺏어간 공간과 마주한다. 그가 조난당했던 산을 향해 소리친다. 잘 지내느냐고. 나는 잘 지낸다고. 흐느끼며 인사를 건네는 것을 끝으로 그녀는 과거의 시간과 작별한다. 지난 밤 아키바와 불아범에게 전해들은 이츠키의 노랫말이 힘이 되어 준 것일까. 이츠키는 찰나의 순간을 살다가 지고 마는 벚꽃에 대해 노래하며 마지막을 맞았다. 어쩌면 뮤지컬 <러브레터>의 모든 인물들은 벚꽃의 마지막을 놓지 못한 채 아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길지 않은 시간 그들의 곁에 머물렀던 사랑, 너무도 짧은 시간에 인사도 없이 떠나간 사람들.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통증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츠키는 꽃이 짐을 아쉬워하지 말라는 한 마디를 남긴 듯하다. 또 다시 봄이 오고 또 다른 꽃이 필 것임을, 이미 져버린 꽃을 아쉬워하다가는 그 모든 것들을 놓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벚꽃이 흩날리는 가운데 모든 배우가 함께 노래하는 피날레만큼이나 뮤지컬 <러브레터>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음악이다. <맘마미아> <오페라의 유령> <명성황후> 등의 작품을 맡은 바 있는 김길려 음악감독과 <인당수 사랑가> <페디큐어> 의 김아람 작곡가가 만나 대중성과 음악적 완성도를 모두 갖춘 작품을 탄생시켰다. 뮤지컬 <러브레터>의 대본을 쓴 윤혜선 작가가 직접 작사에 참여한 만큼 인물들의 생생한 감정 역시 담아냈다. 무대 위의 관현악 연주와 배우들의 가창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힘이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과 오페라 <어린왕자>의 변정주 연출가가 총감독한 이번 작품은 동숭아트센터에서 2월 15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지나간 시간들이 남긴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뮤지컬 <러브레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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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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