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를 뮤지컬로? 공연을 취재하는 기자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객석에 앉았습니다. 보통 원작인 영화나 드라마가 크게 흥행했거나 치밀하게 잘 만들어진 작품일 경우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무대에서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구현해내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러브레터’는 설원이 그려내는 명장면이나 여주인공의 1인2역을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할지 자못 걱정까지 됐습니다. 그런데 기대가 높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뮤지컬 <러브레터>는 초연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탄탄한 구성과 귀에 감기는 음악으로 잔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내내 극에 몰입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편안하면서도 느낌 있는 배우들의 호연이 눈에 띄었는데요. 여성판 ‘지킬 앤 하이드’로 불리는 여주인공의 1인2역은 어땠을까요? 기자는 꽤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무대에서 히로코와 이츠키로 변신해야 하는 곽선영 배우와 더 자세한 얘기를 나눠보죠.
“일단 밥을 빨리 먹어야겠다. 빨리 소화가 돼야 저녁 공연을 할 수 있거든요.”
주말 낮 공연 뒤에 만난 곽선영 씨. 무대에서 내려온 지 10분 만이라 어떤 마음일지 궁금했는데, 객석에 있었던 기자보다 훨씬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웃음).
“무대가 이츠키로 밝게 마무리되니까 다행히 감정적으로 힘들지는 않아요. 관객들 중에는 아련함이나 어떤 먹먹함을 느끼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는데, 배우들은 공연을 하고 나면 오히려 행복해지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츠키가 웃으면서 행복을 찾고, 옛 기억을 되찾으면서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제작진은 물론 관객들도 가장 염려했던 게 원작 영화가 너무 세다는 거죠. 부담이 상당했을 것 같아요.
“저희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연습을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걱정이 사라졌어요. 연습했던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극장에 들어와 무대, 조명 등과 만나니까 더 좋더라고요. 무엇보다 저희 작품에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고, 또 배우들의 에너지는 영화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해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영화의 잔잔함보다 강하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다들 들어봤을 ‘오겡끼데스까...’ 아마 가장 풀어내기 어려운 장면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맞아요. 저희가 그걸 대사만으로도 해보고, 노래만으로도, 대사와 노래를 섞어서도 해봤어요. 그런데 공연 임박했을 때 최종적으로 결정한 건 그냥 대사로 하자는 거였어요. 그 이상 그 순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변정주 연출이 ‘여성판 지킬 앤 하이드’라고 했는데, 무대에서 직접 1인2역을 소화하기는 어땠나요?
“두 인물의 감정선도 너무 다르고, 원작에서 미호(나카야마 미호) 언니가 무척 잘해주셔서 그 이미지에 대한 부담도 있었고요. 그래서 연습 초반에는 힘들었어요. 히로코로 울고 가슴 아파하다 퇴장하자마자 눈물 닦을 시간도 없이 이츠키가 돼야 한다는 게요. 그런데 익숙해지니까 연기하는 맛이 나더라고요. 오히려 캐릭터보다는 옷 갈아입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그것도 무대 뒤에서 도와주는 분들이 계셔서 이제 퀵체인지의 달인이 됐죠(웃음).”
같은 1인2역이지만 영화와는 환경이 너무 다르잖아요. 무대 위에서 캐릭터에 변화를 주기 위해 가장 노력한 부분은 뭔가요?
“영화보다는 차이를 훨씬 많이 둬야 했어요. 그래서 일단 목소리 톤이나 노래할 때 갭을 많이 뒀고, 아무래도 가장 도움이 된 건 의상이었죠. 의상이 달라지면 거기에 맞는 걸음걸이, 행동, 말투가 나오니까요. 처음에는 인물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나눴지만, 차츰 인물들이 가진 세부적인 스토리를 갖고 풀어갔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한 무대에서 두 인물의 희로애락을 연기하는 게 가능하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스스로는 많이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는 두 인물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깝나요?
“글쎄요, 밝은 성격은 이츠키에 가깝기도 한 것 같고, 내면적으로는 히로코에 가까운 것도 같아요.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 이츠키처럼 기억을 닫아놓고 살지는 않아요. 안 좋은 기억이더라도 회상할 수 있는 성격이고요. 반면 히로코는 남자 이츠키의 죽음으로 일방적으로 이별을 당했잖아요. 그래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픔은 저도 경험해봤기 때문에 사랑에 있어서는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그런 사랑 해봤다고 하셨으니까... 두 여인이 마지막에 갖게 된 마음이 굉장히 다를 것 같아요. 이츠키는 생각지도 못한 풍성함을 얻었다면 히로코는 허무하지 않았을까요?
“히로코는 허무하다기보다는 후련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잊지 못했던 사람인데 우연히 도착한 편지를 통해 조금씩 죽은 이츠키에 대한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츠키 역시 더 이상은 기억을 숨기거나 아픔을 간직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고요. 연출님도 말씀하셨지만, 두 여인의 성장 스토리로 정리할 수 있겠죠.”
지금은 이츠키의 느낌이 물씬 나는데, 두 인물 중에 더 애정이 가는 쪽이 있나요?
“아니에요. 애정은 두 인물이 똑같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스토리가 이츠키 중심으로 흘러가니까 이츠키에 더 가까운가 봐요. 처음에는 히로코를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왜 그 편지에 그렇게 매달리는지. 그런데 영화를 보고 대본을 계속 보면서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일방적인 이별이었으니까 인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작품 준비하면서 배우들끼리 가장 많이 했던 얘기가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는 어떤 사랑을 하고 싶나요? 또는 하고 계시나요?(웃음)
“저는 서로 배려하고 인내하고 존중해주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하고 있고요(웃음). 그런데 그런 사랑을 위해서는 서로 정말 많이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러브레터>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랑과 추억을 나누는 작품인데요. 한편으로는 히로코와 이츠키가 각자 스스로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지금 배우 곽선영에게 편지를 써본다면요?
“이런 건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는데...(웃음) 부지런히 움직이는 배우,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처음을 잊지 않고, 사람이 늘 한결같을 수는 없지만 크게 변하지 않는 그런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 그런 배우가 돼서 무대도 하고 영화도 하고. 연기 잘 하는 배우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기자는 몇몇 작품을 통해 곽선영 씨를 봐왔는데요. 이번 무대를 보니, 그녀의 연기가 분명히 확장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녀에게 딱 필요한, 딱 맞는 작품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올 한 해 공연시장에는 굉장히 화려한 작품들이 많았는데요. 뮤지컬 <러브레터>는 잔잔하지만, 아련한 추억을 떠올려 보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정돈하기에는 제격이 아닐까 합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요. 따뜻함이 묻어나는 목가적인 무대, 초연이지만 익숙하게 들리는 넘버들, 묵직함이 느껴지는 배우들과 발랄한 앙상블, 그리고 흩날리는 눈과 벚꽃. 무엇보다 지금은 뮤지컬 <러브레터>를 보기에 딱 좋은 겨울이네요! 내년 2월 15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됩니다.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앙ㅋ
201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