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조의 <니 팔자야>를 처음 듣는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몇 년전 용하다는 점쟁이를 만난 기억이었다. 친구 지인의 지인의 잘 모르는 사람인데 어째선지 모든 걸 맞춘다고 했다. 나와 우연히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된 그는 범상치 않은 역학 지식과 예지력과 직관력을 가진 것임에 틀림없는 눈빛과 기세를 하고 내게 딱 잘라 말했다.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나는 즉시 빵 터졌다. 실례였지만 몹시 웃겼다. 아니 오줌 마려운데 누가 참는다고. 용하다는 사람이 겨우 그런 거나 맞추고 앉아있다니.
그런 일이 있고 한참 뒤 나는 기획 프로젝트로 몽골에 여행 갔다가 그 점쟁이의 말을 새롭게 상기해야 했다. 장소는 고비 사막 한복판에 있는 만년 얼음의 신비한 계곡 ‘욜린암’이었다. 말 타고 한참 들어가 계곡입구에 진입했을 때 나는 투어를 진행하는 몽골인 가이드에게 물었다.
“저기, 갑자기 오줌 마려운데 여기서도 자연을 이용하면 되나요?”
가이드가 즉시 정색했다.
“아니오! 절대 싸면 안돼요. 여기서 오줌 싸면 한 달 안에 죽어요. 여긴 굉장히 신성한 장소예요.”
고비 사막과 몽골 초원에서 대자연이 아닌 화장실을 쓴 적이 거의 없었는데 농담인가 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전날 밤 함께 보드카를 마시며 끝없는 저질 농담 레이스를 겨룰 때와는 정반대 태도였다.
“네? 진짜 죽나요?”
“예. 여긴 산양들이 다음 세계로 가는 곳이에요. 전에 한 유럽관광객이 여기서 오줌 쌌다가 갈 때 비행기가 추락했대요.”
“어우 저런!”
요의가 쏙 들어가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계곡에는 빈 PET병이나 담배꽁초가 잔뜩 버려져 있었다. 저런 걸 막 버린 사람은 괜찮나 의문이 들었다. 사실 산등성이에 산양들의 실루엣 같은 바위들이 보이는 것 말고는 신성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저 대자연일 뿐이고 동물들은 거기서 다 볼일 보는데 인간만 규제한다니 샤머니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목숨이 걸릴 정도로 중요한 사항이면 계곡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성인답게 참기로 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그 웃긴 점쟁이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더니 방광에 무한 반복되는 게 아닌가.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이게 뭐야 젠장. 나는 집요한 요의를 잊기 위해 깔끔한 도시인처럼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그런데 재생 목록에서 엘비스 코스텔로의 <쉬(She)>가 나왔다. 아아, 왜 하필… 하필이면. 그 음악을 듣자 갑자기 요의를 참을 수 없어 미칠 것 같았다. 질질 끌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에 안 그랬는데 어쩌다 이런 일을 그때그때 해결해야 하지 않으면 곤란한 사람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유야 모르겠고 가이드를 따라 계곡 안쪽까지 들어가는 동안 나는 방광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계곡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신발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빠져버렸다.
“세상에, 발 시리죠? 말리고 천천히 오세요. 얼음 계곡은 저 모퉁이 끝에 있어요. 우린 거기서 기다릴게요.”
가이드가 말했다. 감각이 없을 만큼 발이 시렸다. 일행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신발을 벗고 양말을 말렸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매우 적절해 보이는 구석진 바위틈이 보이는 게 아닌가. 싸야했다. 아아, 나는 미안하지만 거기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부디 한 번만 자비를, 신성한 곳에서 바지에 싼 다음 울고불고 할 수는 없잖아요.’ 뇌까리며 청바지 단추를 풀었다.
“아아 쌀 것 같았는데 이제야 살 것 같아.”
그런 안 웃긴 언어유희가 바로 생각날 만큼 당장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정상의 인격으로 돌아온 나는 흔적을 남긴 자리에 대한 문명인으로서의 수치심을 느껴 손 바가지로 계곡물을 떠다 몇 번이고 바위틈을 씻어냈다. 손 시려 죽는 줄 알았다. 아, 그런데 그 계곡에선 신기하게도 젖은 양말이 금방 말랐다. 내가 볼일을 본 자리도 몇 분 만에 흔적도 없이 말짱해져 있었다. 그런 곳에서 계곡물이 어떻게 안 마르나 놀라울 지경이었다. 몹시 건조한 곳이거나 몹시 신비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거룩한 곳에서 일을 저질렀으니 가이드가 말한 죽음이라는 낱말이 머릿속에 뚜렷이 명멸했다.
“흥, 인간이란 언젠가는 죽는 거야.” 그런 혼잣말로 무서움을 떨치려 애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게르(유목민의 이동식 집)에서 자는데 곤충의 습격을 받았다. 느낌이 이상해 깨 보니 내 게르 안에 새카맣게 나방 떼가 날아들어 있었다. 나방들은 날갯짓으로 하나같이 나를 힐난하는 것 같았다. 끝없는 초원 어디서 이렇게 많은 나방이 날아왔을까. 이것이 저주의 시작인 걸까. 내겐 바퀴벌레 다음으로 끔찍한 게 나방인데 혼비백산해 게르 문을 열고 달아났다. 어쩐지 나무 문짝이 푹신하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나방이 빽빽하게 달라붙어있어 그런 거였다. 으아아아 손을 털며 캄캄한 어둠속으로 뛰다 나는 내 발에 걸려 자빠졌다.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을 짚었는데 앞에 뭔가 있는 것 같았다. 라이터를 켜 보니 고깔 모양의 뾰족한 원통뿔이었다. 손을 짚지 않았다면 내가 뛴 속력의 관성과 자빠지는 중력을 합친 힘으로 그 뿔에 미간을 폭 찔렸을 것이었다. 어째서 사막에 이런 게 세워져 있지? 왜 하필 거기서 자빠졌지? 신기하고 무서워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저주 때문인지 나방 가루 때문인지, 얼굴을 찔릴 뻔했기 때문인지, 다음 날 나는 눈에 커다란 다래끼가 생겨버렸고 한 쪽 눈을 뜨지도 못하고 눈퉁이 반탱이 상태로 남은 일정을 여행해야 했다. 아무래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일이 내게 일어나는 중인 것만 같았다.
사실 금지된 곳에서의 방뇨라는 중대 잘못을 저질렀으니 고난을 당하며 죽더라도 억울하진 않을 것 같았다. 다만 겁에 질려 죽고 싶지는 않았다. 무서움을 극복할 게 필요했다. 내게 그런 도움을 줄 건 역시 음악뿐이었다. 가져간 음악은 몇 곡 되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 엘비스 코스텔로의 ‘쉬’를 들으면 이상하게 자꾸 오줌 마려운 증상이 반복되었다. 신기했지만 ‘쉬~’ 할 때마다 웃겨서 죽음이나 저주의 공포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웃겨도 꼭 일차원적으로 방광이나 방귀 같은 걸로 웃기는 내 팔자가 한숨 섞인 쓴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웃긴 걸 너무 좋아하며 살아온 나머지, 웃을 때 방광에 힘이 자꾸 들어가서 그 용적량이 계속 작아지나 추론해보기도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만큼 내가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게 더욱 웃겼다.
…아아 어쨌든 그로부터 이제 3년이 지났다. 이렇게 칼럼을 쓰는 걸 보면 아직 안 죽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는 지금도 마음 한 쪽이 불편하고 서늘해지며, 남의 나라 신성한 장소에 볼 일을 본 게 죄송스럽다. 내가 차가운 계곡물을 퍼서 수세식으로 뒤처리를 잘 했기 때문에 영험한 욜린암이 봐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엘비스 코스텔로의 감미로운 음악이 그 일 때문에 자꾸 웃기게 들리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곡은 엘비스 코스텔로가 아니고 얼마 전 신작 뮤직 비디오로 우리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려버린 ‘노라조’ 얘기다.
<니 팔자야> 이 뮤직비디오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도대체 이게 뭐야? 하는 감정에서 출발해 약 빨았나? 드디어 미친 건가? 등등으로 감정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 같은 광팬은 급기야 이 음악을 무한 반복하며 봄을 기다리게 되었다.
노라조는 그동안 내 삶을 웃고 울린 음악들을 만들어왔다.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느낄 때 <형(兄)>을 들으면 매번 눈물이 찔끔 났고, <롹가수>를 들으면 눈물이 펑펑 났고, <슈퍼맨>, <고등어> 등등 그들 특유의 기괴하고 유쾌하며 롹정신 가득한 전위적인 히트곡을 들을 때마다 속이 시원했으며, 가장 좋아하는 곡인 <포장마차>를 포장마차에서 들으며 빚더미에 빠진 나를 달래곤 했다. 그들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샘플링한 이번 신곡은 내게 과연 용한 점쟁이처럼 말한다.
‘가슴 쫙 피고 어깨 쫙 피고 완전 쫙 피는 인생 이것이 바로 니 팔자야 아 대박 왕 대박 또 대박 걱정은 개나 줘’
‘오줌 마려우면 못 참지?’ 에 비하면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언이란 말인가! 내가 노라조의 팬인 건 팔자인가보다. 음악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가공할 뮤직비디오 또한 이렇게 훌륭한 전위예술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줬다. 얼마나 황홀한 보너스란 말인가. (최면에 걸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노라조가 나날이 똘끼를 더해가며 존재감을 자랑할수록 대중음악의 식상한 천편일률에 대한 실망을 잊을 수 있어 나는 노라조가 너무 너무 너무 좋다.
그러고 보니 노라조 음악을 전부 챙긴 다음 쫙 펴진 몽골 초원에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내 잘못을 눈감아준 욜린암에 감사 인사도 할 겸. 빌어먹을 방광 걱정은 개나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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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sindy616
2020.03.10
고비의 저 무지개는 우리팀이 함께 본 무지개 같아서
너무 반가워서
왜 이제서야 이 글을 읽는건지...
함 뵈어요~~~ 몽골추진자 입니다.
rkem
2015.03.06
감귤
2015.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