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라는것은 발 뒷꿈치를 들어 올리는 것"
데뷔 24년차, 국민가수로 불리는 한 남자가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 이야기이다.
억지로 발 뒤꿈치를 들어올려 힘들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려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는 색다른 김건모에 대한 발견이자 삶에 관한 공감과 질문을 던져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아왔던 건모 형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이런 이면에 대해 나는 항상 형에게 이야기 해왔다.
"사람들이 형의 진짜 모습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걸 왜 아무도 모를까요? 왜 아무도 모르게 하세요?"
92년 데뷔 동기, 나이는 6년이 차이 나는 건모 형과 나는 결혼하기 전날까지, 또 불과 어제까지도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음악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나누어 왔고 주위사람들에게 "사귀냐?"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막역한 사이다. 그 사랑은 일종의 동지애이며 형제애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닮아있는 두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작곡가 윤일상과 가수 김건모는 어떻게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걸까?
ⓒ 윤일상홈페이지(http://www.ilsang.com/)
김건모 그리고 소주
내가 살아온 날의 반을 훌쩍 넘긴 기간 동안 가요계에 있어 오면서 수많은 가수와 작업을 했고, 그 만남은 매번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10대 후반에 가요계에 들어온 후, 나의 20대는 바쁜 일정의 연속이었고 이 설렘은 때로는 피곤함에 묻혀 무덤덤해 질 때도 있었다. 특히 1997년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사람들과 약속을 하고 미팅을 하는 시간을 내기조차 빠듯한 시기였다. 그러던 중 걸려온 전화 한통.
"윤일상씨? 저 김건모인데요. 곡 좀 부탁하려고요, 얼굴 한번 봐요."
아...
작업 얘기를 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가슴 설렜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국민가수 김건모에게 전화가 오다니. 나는 단숨에 곡 한곡을 완성해서 건모형의 작업실에 찾아갔다. 어색한 인사를 잠깐 나누고 테잎데크가 플레이 되었다. 나는 두근 반 세근 반의 심정으로 내가 만든 음악을 들었고, 건모 형은 심각한 얼굴로 곡을 끝까지 다 들은 후 특유의 한쪽 입술이 살짝 올라가는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당시 영턱스 클럽의 <타인>이 공전의 히트를 막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 작업 연장선에서 전환을 하지 못한 채 내 색깔에 건모 형을 억지로 집어넣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나에게 얘기를 한 사람은 당시까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곡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후, 그는 나를 믿는다며 색다른 느낌으로 자신과 맞는 곡을 써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다. 뮤지션으로서,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을 정확히 하고 있는 그를 뒤로하고 나의 작업실을 향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설렜던 마음을 가다듬고 건모 형의 무대와 목소리를 떠올렸고 그와 나의 교집합이 될 수 있는 음악형태에 대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갔다.
'내 안에 건모 형을 넣는게 아니라 둘의 소울이 합쳐져야 한다.'
며칠 뒤 '자유에 관하여'라는 곡이 만들어졌고, 나는 다시 건모 형을 찾았다. 전주가 나오면서 씩 미소를 짓더니, 음악을 다 들은 후 형은 활짝 웃으면서 "이제 소주 한 잔 해도 되겠는데요?" 라며 위층에 있는 형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 소주를 형에게 처음 배웠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자연스레 호형호제가 편해졌고 그의 음악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하나 둘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다른 작업이 없는 시간에는 형과 함께 했다. 다른 사람의 곡에 디렉팅 하는 일은 없었던 나였지만, 내 곡 아닌 형 앨범 다른 곡의 보컬 디렉팅까지 도맡았다. 그렇게 5집
잠시 이별
7집 'Goodbye yesterday'가 복선이 되었을까? 그 후로 우리는 3년 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모 형의 작곡 작품인 '미안해요'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나는
“요즘 너무 여기저기서 피쳐링 제의가 많아서…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고 할 수 없어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인데, 그땐 그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해주고라는 말이 정말 모멸스럽게 느껴졌다. 그것도 바로 옆에 있던 형의 입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서 더욱 속상했던 것 같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형을 도왔다고 생각했고, 나는 결코 형에게 그 누구 중의 한명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당시 그렇게 건모 형에게 일방적인 절교선언을 하며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참,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생각이지만 당시의 나는 그랬었다.
형이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3년 동안을 나는 가끔 우연히 형을 만났을 때조차 고개를 돌렸다.
그리움, 그리고 재회
형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였을까? 당시 신인들을 제2의 김건모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지고 이기는 것이 없는 음악에서 형을 꺾기 위한 어이없는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 한 켠에 알 수 없는 공허함과 그리움은 더해져갔다. 내게 손을 들어올리며 인사하던 형을 본체만체했던 영상이 흑백필름처럼 타들어갔고 처음 배웠던 소주가 이젠 익숙해졌지만 함께할 수 있는 형이 없음에 허무했다.
그러다가 내가 네트워크라는 회사를 만들고 작품자 중심의 컨텐츠를 많이 만들려고 노력했던 시기에 당시는 생소했던 디지털 싱글 프로젝트를 위한 곡을 썼는데, 그 곡은 단 한 사람만 부를 수 있었다.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 이 곡은 건모 형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친구가 얘기했다.
“그럼 전화 드려봐."
맨 처음 만남에선 형이 내게 전화를 걸었지만 재회의 전화는 내가 먼저 걸게 되었다.
“형... 일상이에요.”
“그래 일상아, 정말 오랜만이야~"
기대 이상으로 밝게 받아주는 건모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참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재회했다. 그 후 11집 'Jam, 장난감, 한량'을 함께 했고, 형이 회사를 이적한 후 다시 떨어져 지내다가 13집에서 '피아노'라는 곡을 형에게 선물하였다. 또 그 사이 OST음악 '울어버려, 내모습을'으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결혼 전날까지도 함께 소주를 기울였으며, 내 결혼식 부케를 받아주기도 하였고, 내 쌍둥이 아기가 태어나자 조카가 생겼다며 자기 일 같이 기뻐해주기도 했다.
너무나 음악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나 가정적인
건모 형의 살갗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볼까?
흔히 건모 형은 익살맞고 진지하지 않으며 여자관계가 복잡할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이것을 정 반대로 생각하면 건모 형의 실제 본 모습에 가깝지 않나 싶다. 속은 한없이 진지하고 지고지순한 순정파, 게다가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하는 연습벌레에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보약 한 채를 쓱 놓고 가는 남자 중에 남자가 진짜 김건모의 본 모습이다. 거기다 환상적인 요리솜씨와 집안 살림까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다. 정말 건모 형을 데리고 가는 여성은 시셋말로 봉 잡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왜 그리 지독히도 인연이 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준비된 신랑감이자 아빠인 건모 형에게 곧 멋진 형수님이 나타나리라는 희망은 계속 놓지 않고 있다. 건모 형은 절대로 남이 보는 데서 연습하지 않는다. 물론 내 앞에서는 연습곡을 틀리게 연주하며 멋쩍게 웃기도 하고 컨디션 난조의 목소리도 종종 듣지만 내가 아는 연습벌레 가수 김건모는 남이 볼 때 '나 열심히 해요' 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다. 만날 술 마시고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 연습과 음악에 대한 연구는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지지 않으려는 나조차도 존경의 눈길로 바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토록 그는 너무나 음악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
오늘도 우리는 다시 소주 한 잔을 주고받으며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음악으로 놀고 음악으로 웃고 음악 안에 산다.
이제는 발꿈치를 내리고 편안히 걷는 건모 형의 새로운 앨범에는 또 어떤 형의 흔적이 채워질까?
또 나는 어떻게 함께 걸을까?
8년동안 블루스피아노를 공부해오며 단 하루도 빼놓치 않고 노래연습에 매진해온 건모 형의 2015년은 어떤 음악일지, 목소리일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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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상
작곡가 겸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