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고정관념이 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팔꿈치에 천을 덧댄 코듀로이 재킷을 입고, 파일럿이라면 레이밴 선글라스를 끼고, 재즈 뮤지션이라면 검은 반팔 셔츠에 검은 재킷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 편견은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어 왔기에, 이제는 공식과 클래식의 단계를 지나 고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그렇지만, 저도 겨울엔 코듀로이 재킷을 입습니다. 하하하).
지난 2주간 본 영화는 <위플래쉬> 달랑 하나다. 고로 <위플래쉬>에 관해 쓸 수밖에 없다. 위플래쉬는 주변에 쏟아진 극찬들에 비해, 영화를 이끌어 가는 두 주인공이 좀처럼 호감을 풍기지 않는 캐릭터들이라 ‘아니, 뭐 이런 영화가 있나’ 하는 심정으로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이 영화의 인력(引力)은 상당해서 ‘어어, 저렇게 드럼을 쳐댔다간 키스 할 때 애인 목을 받칠 힘이라도 있을까’ 걱정하며 봤다(쓰고 나니 심정이 오락가락 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같은데, 아시잖아요. 이런 사람이란 걸).
관객을 짜증나게 하기도 했다가, 몰입시키기도 하는 이 영화는 다른 하나의 복잡한 질문을 던졌는데, 그것은 ‘도대체 왜 플래처 선생은 검은 옷만 입고 나오는가?’하는 것이었다. 헤어스타일까지 스킨 헤드이니 음대 교수인 양반이 밤마다 떼인 돈을 받아오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닐텐데, 그는 왜 ‘검은 양복’만 고집하는 것일까.
나는 영화의 서사 층위를 다면적으로 심도깊게 분석하여, ‘왜 하필 검은 양복인지’ 이해해보려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배경지식과 상상력을 활용해보았으니, 당연히 감독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스테레오 타입, 즉 ‘재즈 뮤지션이라면 검은 반팔에 검은 재킷이지’ 와 같은 도식적 설정은 하지 않았을 거라는 데서 나의 질문은 출발했다. 재즈를 사랑하기에 검은 옷만 입는다는 건,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유치하고, 흡사 ‘아! 메탈하면 긴 머리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닌가(, 라고 하며 나는 지금 ‘다미엔 차젤레’ 감독이 ‘앗! 그 이유였는데’라며 항변할 가능성을 원천차단하고 있다).
하나 나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서사를 통해 검은 복장의 연유를 파악하려했으나, 이 영화에는 서사라 할 법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숲을 보고 나무를 찾으려 했던, 거시적 분석법의 자세를 싫증난 애인처럼 내팽개쳐버리고, 특정 나무에서 단서를 찾아 숲의 전체 생김새를 상상해보는 미시적 분석법의 자세로 역행하기로 했다(나는 이토록 냉정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사내인 것이다).
‘도대체 왜 검은 옷이야!’라며 (속으로) 외치는 내게 플래처 선생은 한 그루의 나무, 즉 단서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울음이었다. 학생들을 혹독히 훈련시키는 그를 보며 ‘사디스트인가’라는 의문이 점차 커져갈 즈음, 플래처 선생은 합주를 할 준비가 된 뮤지션들 앞에서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엄숙히 CD플레이어 안의 음악을 재생한다. 사연인 즉, 오늘 부고를 접한 졸업생이 있는데, 그는 사실 자신이 굉장히 괴롭혔던 제자였고, 그는 자신의 혹독한 훈련 덕에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제자들에게 고인이 된 선배의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던 그 순간, 혼란스러웠던 내 머릿속의 퍼즐은 거짓말처럼 맞아 떨어져버렸다.
주인공을 끊임없이 학대하면서도 영화 후반부에 ‘사실 내가 널 괴롭혔던 건, 네가 제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와 같은 대사도 내 머릿속에서는 ‘사실 널 괴롭힐 때, 나는 사랑을 느꼈어’와 같은 대사로 번역되어 들렸다. 무릇 문학가의 머릿속에선 때론, 일상의 대화도 시어(詩語)가 되어 번역되는 법이고, 이러한 자유는 누구에게나 허락되어 있다(다시 말하지만, ‘다미엔 차젤레’ 감독이 별 생각 없이 대사를 쓰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며, 그가 항변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합해보건대, 플래처는 가학적 애정을 즐기는 사디스트인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검은 옷이냐고? 당연히 재즈 뮤지션은 검은 옷이라는 안이한 설정에 기댄 것이 아니다(다시 말하지만,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그럴 양반이 아니다). 핵심은 바로 매일 검은 옷을 입는다는 데에 있다! 그는 영화의 단 한 장면을 빼고는 줄곧, 검은 옷만 입는다. 그렇다! 그는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회색 셔츠를 입은 단 한 장면, 그 전날에만 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있은 것이고, 그 외의 모든 신(Scene)에서 그는 외박을 한 것이다. 아, 집에 가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사랑에 푹 빠져버린 이 사랑꾼 같으니 라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가학적 사랑꾼인 것이다. 뭐, 로맨틱 사디스트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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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sungkwan
2015.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