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 “일기를 안 썼다면 시니컬한 사람이 됐을 것”
지난 4월 2일, 한비야와 만남이 있던 서울 을지로의 한 강연장은 한비야를 만나기 위한 독자들로 꽉 채워졌다. 『1그램의 용기』 출간 후 처음이자 마지막 독자와의 만남. ‘누구에게나 1그램의 용기가 필요하다’를 주제로 한비야는 청중들을 향해 “불화살을 쏘겠다”며 이야기를 풀었다.
글ㆍ사진 김이준수
201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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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사랑(『그건 사랑이었네』)이야기했던 한비야 작가가 이번에는 용기( 『1그램의 용기』)를 들고 왔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잔뜩 움츠러든 이들에게 불어넣는 ‘응원의 메시지’다.

 

무엇을 하든, 당신은 늦지 않다


‘바람의 딸’부터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세계시민학교 교장, UN 자문위원 등 무수한 타이틀을 갖고 있는 한비야는 이날 왕언니, 왕누나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멘토나 지도자와 같은 타이틀은 부담스럽단다. 책을 쓸 때마다 어떤 한 사람을 생각한다는 그가 『1그램의 용기』를 쓰기 전, 지난 6년 동안의 일기를 살펴봤더니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이 ‘용기’였다. 온기와 용기를 주고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책은 옛날과 좀 달라졌다. 예전에는 내가 좀 셌다(웃음). 용기를 줘도 1톤, 뜨겁고 강렬한 열기와 빛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변했다. 나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침햇살 같은 따스하고 밝은 힘을 주고 싶다. 책에 노란 마크가 많은데, 그게 아침햇살이다.”

 

한비야는 자신을 가장 실패한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사회나 세상이 요구하는 매뉴얼이 있다면 말이다. 매뉴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한 줌, 1그램의 용기가 있기에 가능한 무엇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라고 권했다.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무엇이 내 피를 끓게 하는가. 세상은 20대에 해야 할 일, 30대에 해야 할 일 등 정해진것처럼 강요된 매뉴얼이 있다. 그는 매뉴얼에 따르기 전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해보라고 강조했다.

 

“나라는 꽃을 활짝 피우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하는가?”(『1그램의 용기』 38쪽)

 

“많은 사람들이 내게 너무 늦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나를 봐라. 나이 얘기, 나이 핑계 그만둬도 좋다. 늦었다고 얘기하는 것 지겹지도 않나. 대학 4학년이 대학 1학년을 보고 참 좋은 나이라며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고 말한다(웃음). 웃기지 않나. 나이가 관건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오늘부터 나이 타령을 하지 말기로 하자.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핑계, 어리광, 혹은 하고 싶은 척하는 것이다.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걸 못하는 것이 진짜 나이 때문인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라.”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풀었다. 서른셋까지 그의 인생에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대학에 가기 전 6년 동안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모는 일상다반사였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당시 남자친구가 어머니를 보러 자기 집을 가자고 해서 갔다. 남자친구 어머니가 버선발로 맞아주면서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를 물었다. 대학을 다니고 있지 않다고 답했더니, 그 어머니, 표정이 굳어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한비야가 느낀 뉘앙스는 ‘감히 고졸인 주제에 감히 내 아들을’이었다. 그는 그 얼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일상에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갖은 수모와 치욕을 당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이 일기였다. 어느 날들의 일기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일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굉장히 시니컬한 사람이 됐을 것이다. 일기덕분에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일기장의 최대 수혜자였다(웃음). 여러분도 일기를 써라. 오늘 나를 만난 기념으로 손글씨로 써보라. 당시 내 일기장에는 ‘어떻게든 참고 견디자. 이 고비는 넘길 것이고, 나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라는 글도 적혀 있다. 시련이 나를 키운 것도 사실이다.”

 

한비야는 1등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경쟁 구도 안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길 필요는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비야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자기 자신이다. 자신에게 실망할까봐 그것이 가장 무섭고 두렵다. 그래서 나이 타령은 하지 않는 대신 무엇이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직업만은 아니다. 또 어떨 때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당연히 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무언가 한 가지는 가슴을 뛰게 해야 한다는 것이 한비야의 주장이다. 그것이 취미든 신앙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무엇인가 한 가지!

 

모두에게 사랑받을 순 없다


그러나 용기를 내는 것, 쉽지 않다. 용기를 내서 가려고 해도, 뭔가가 발목을 잡기 일쑤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이때 한비야가 건네는 조언은 무언가 하려는데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라는 것.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순 없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할 순 없다. 페이스북의 ‘좋아요’에 너무 흔들리지 마라. 아무 얘기 안 들으려면 항구에 묶여 있으면 된다.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갇혀 있으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다에 나가야 한다. 배가 바다에 나가는 순간, 파문이 인다. 풍랑이 불어도 그러려니 해라. 풍랑을 헤쳐 이쪽 항구를 떠날 때와 저쪽 항구에 도착했을 때가 다를 것이다. 단단해졌다. 비난이나 비판을 받으면 이리 생각해라. 그래 내가 뭔가 움직이고 있구나. 누군가는 욕을 한다. 나를 봐라(웃음).”

 

문제는 그 이후다. 비판이든 욕을 먹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잔잔한 바다는 노련한 사공을 만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 말에 속이 상했다면, 한비야가 권하는 태도는 이런 것이다. 나는 노련한 사공이 되고 있구나!

 

“제주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이 내 친구다. 이 친구가 제주올레를 만들면서 여러 번 그만 두려고 했다. 시작을 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저 여자가 국회의원 되려고 자리를 잡는구나, 도지사 되려고 그러는구나, 몇 백억 원을 벌었다더라. 욕먹고 오해 받기 싫다고 그만두려다가 꾹꾹 참고 제주 올레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그 성공은 모두의 성공이 됐다.”

 

이른바 ‘좋은 일’한다는 국제구호를 나가서도 그는 온갖 수모를 당했다. 어떤 난민촌에서 작은 아시아 여자가 왔다고 얕보는 시선도 만났었다. 남수단에 갔을 때는 난민들이 그의 앞에 서서 고기를 달라고 소리치며 한 대라도 칠 듯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었다. 그들의 사정이야 이해했지만, 고기 공급이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도 먹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얼굴을 팔아서 잘 먹고 잘 산다며 짱돌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괜찮다. 불이 나면 누군가는 가야 한다. 기술이 있는, 불을 끌 수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하면 가슴이 뛰는 사람이 가야 한다. 이 일이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 나는 현장에서 죽고 싶다. 나는 현장에서 가장 예쁘다. 이런 약속을 해주면 좋겠다. 첫째, 나이 타령 않기. 둘째,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이상이고 허황되다고 생각 않기, 셋째 누가 뭐라고 하면 참조만 하기. 내가 여러분의 한 발 한 발에 1그램의 용기를 보태겠다. 나도 무서울 때가 있고 하고 싶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독자들을 생각한다. 잘 하고 싶다. 그러려면 나도 용기가 필요하다. 내 에너지의 기반은 여러분이다.”

 

“만약 여러분도 꼭 하고는 싶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두 눈 질끈 감고 되는 쪽으로 딱 한 발짝만 내디뎌보시기 바란다. 그럴 용기가 필요하신가? 그 용기, 내가 기꺼이 보태드리고 싶다. 1그램이면 충분하다.”( 『1그램의 용기』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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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DNA를 인정하라


“제2의 한비야는 되지 마라.” 한비야는 자신으로 살 것을 권했다. 각자 가진 DNA가 있고, 자기 DNA에 열등감을 갖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라는 것. 어떤 큰 열정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도 그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 빨라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 고치고 싶어서 이런저런 노력을 해도 잘 안 됐다. 대신 자신을 인정했다. 아, 나는 말 빠른 DNA를 타고 났구나. 자신을 인정하고 포용했다. 그리고 대신 다른 노력을 하면서 발음이 정확해졌다. 그 노력은 아침마다 詩를 읽는 것이었다. 발음도 좋아지고, 詩도 외울 수 있었다. 덕분에 강연을 하면 시적인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굼벵이가 아무리 빨리 달리고 싶다손 몸의 구조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신 굼벵이는 구르는 재주가 있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구르는 것에 더 몰두하면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는 말 빠른 DNA를 타고났으니 그 유전자에 저항하지 말고 순응하는 게 상책이라고. 대신 발음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여고생이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매일 시 한 편씩을 큰 소리로 읽고 있다. 덕분에 수백 편의 시를 외우게 되었고 그 시들이 일상생활이나 글에 자연스레 배어나면서 맛과 멋을 더해주고 있다. 말이 빨라서 생긴 예상치 못했던 선물이다.”( 『1그램의 용기』31쪽)

 

“자신이 가진 DNA를 충분히 살피기 위해서라도 일기가 필요하다. 생각의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외부의 공포보다 내부의 두려움이 더 무서운 법이다.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라. 두려움을 느끼면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인데, 제 아무리 두꺼운 안개라도 물로 환산하면 반 컵의 물밖에 안 된다더라. 다른 사람이 생각한 대로 따르면 두려움이 넘쳐나게 된다. 그렇게 평생 흔들리면서 살 순 없잖나. 검색 대신 사색을 해라. 검색을 하는 사회가 사람을 두려움으로 몰고 가는 요소라고 본다. 자기 생각이 없는 거잖나.”

 

“검색을 통해 남이 만든 답을 잘 찾는데 사색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는 데는 영 서툴다.”( 『1그램의 용기』113쪽)

 

책과 공책, 연필. 한비야가 주문한 목록이다. 그것에 자기 생각을 써볼 것을 권했다. 어떤 단어든, 문장도 좋으니 자기 생각을 펜을 통해 써보는 것. 일기장이 없었으면 한비야가 그동안 쓴 9권의 책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일기를 쓰라고 강조했다.

 

“그날 있었던 일 중 한 가지에 대해 될수록 길게 될수록 자세히 글을 쓰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주어와 동사로 된 문장을 쓰는 거다. 그렇게 차분히 일기를 쓰고 있으면 생각이 저절로 정리되면서 나와 내가 겪은 상황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1그램의 용기』117쪽)

 

직장이든 관계든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는데, 어떻게 이를 이겨내면 좋을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한비야는 매일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도 구호활동이 15년 차다. 기복이 있다. 그럼에도 이 일은 누군가에게 떠밀려 한 일이 아니다. 좋아서 한 일이다. 하고 싶은 일과 좋아하는 일이 맞아떨어져서 15년 동안 할 수 있었다. 물론 귀찮고 괴로울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런데 그건 모기에 물린 정도?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일이 힘들고, 오해 받는 것이 힘들고, 관계가 힘들다고 하면 그러면 그만둬, 누가 시켰어?(웃음) 내 안에서 내가 묻는다. 왜 이 일을 하는 거지?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한다. 나는 그렇게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있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만둘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자연 혹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리 바빠도 산에 간다. 혼자 있는 시간도 확보하고 자연과 더불어 있어야 마음도 맑아지고 생각이 난다. 꽃도 보고, 달도 보고, 그리고 하늘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꼭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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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램의 용기한비야 저 | 푸른숲
두려움, 외로움, 불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언제나 무소의 뿔처럼 당당해 보이는 한비야는 어떨까? 그녀 역시 우리처럼 끊임없이 길을 잃고, 헤매고, 길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을 그만두고 6년 전 훌쩍 미국으로 떠났던 한비야가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세계시민학교 교장’, ‘UN 자문위원’으로 돌아와 들려주는, 잔뜩 움츠러든 이들에게 전하는 ‘1그램의 용기’이자 ‘응원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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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1그램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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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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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지구촌(global village)가 아니라 지구집(global hom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른나라의 다른 민족들도 진정한 한 공동체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발전기를 부착한 에너자이저. 30대에 육로 세계일주를 떠났고, 40대에 한국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으로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에서 일했다. 50대에 인도적 지원학 석사학위를, 60대에 국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1년의 절반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머지 절반은 국제구호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1958년 산이 많은 나라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태어나 숭의여자고등학교 졸업을 했다. 대학입시에서 떨어지고 클래식 다방 DJ, 번역 등의 경험을 쌓으며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다 6년 뒤 특별장학생으로 홍익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제 홍보회사 버슨 마스텔라 한국 지사에서 3년간 근무, 타고난 능력으로 고속 승진의 길을 밟을 수 있었으나 15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약속한 '세계일주'의 꿈을 접지 못해 사표를 내던지고 세계여행길에 오른다. 7년. 세계 오지 마을을 다니며 겪은 여행 경험을 책으로 펴낸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전4권)과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우리 땅을 걸어다니며 쓴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등이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 저자로 단숨에 급부상한다. 그렇게 정말 '바람'처럼 지구를 걸어다니다 2002년 3월을 기점으로 국제난민운동가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비극의 땅'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딛게 된 이유도 첫 시작은 오지를 다닐 때 지키는 육로 이동의 원칙을 지키려던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전쟁의 한가운데 있던 아프가니스탄, 그 곳에서 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와 오른팔을 잃은 여자 아이가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건넨 '귀한' 빵을 한입 덥석 베어 물어 난민촌 아이들의 친구로 거듭나던 순간, 그녀는 그간의 오지 여행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발견해 내었다. 2001년부터 2009년 6월까지 국제 NGO 월드비전에서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하면서 전세계 구호현장에서 전문 구호 활동가로 일했으며, 네티즌이 만나고 싶은 사람 1위, 여성특위가 뽑은 신지식인 5인 중 한 명, 대학생이 존경하는 인물, 평화를 만드는 100인 등에 선정되었고, 2004년 'YWCA 젊은 지도자 상'을 수상했다. 이후 이론을 갖춘 구호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해 2009년 8월 미국 터프츠대학교 국제관계 및 국제법 전문대학원 '플레처스쿨'에 진학해 인도적 지원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그녀가 받은 광고료와 인세로 자신의 문제와 고통뿐 아니라 지구촌의 어려움까지 대처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민 의식 배양을 위해 '세계시민학교 지도밖 행군단'을 구성하였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헤라트의 한 긴급구호 현장에서 처음 알게 된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과 멘토, 친구, 연인 관계를 거쳐 만난 지 15년 만에 부부가 되었다. 1년에 3개월은 네덜란드에서 산다. 남편 안톤을 만나 미리 하기와 아무것도 안 하기의 기술을 배워가고 있다. 저서로는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6인 6색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그건, 사랑이었네』 등이 있으며, 남편 안톤과 함께 쓴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는 그녀의 첫 번째 공저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