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것이 가능한 것이 되고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것이 쓸모를 찾는 것은 모두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172쪽)
상상력 넘치는 마을들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마을 안에서 ‘놀고, 먹고, 모이고, 협동하고, 말하고, 예술하고, 교육하고, 일하’면서 함께 산다.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지금의 교육과는 다른 살아있는 삶을 가르치고 싶어서, 삶의 방식을 공유하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고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언론을 만들려고, 삶의 공간에 예술을 녹이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드물게 역동적이고 정겹다. 차갑고 복잡하기만 한 서울이라는 공간 안에 이런 마을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그곳이 낙원은 아니다. 사람 사이에 갈등도 있고, 이런저런 어려움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마을이라는 의미일 터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에는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멋진 가치들이 살아 숨쉬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들의 모습이 기막히게 매력적이어서 내가 사는 이곳에도 당장 가져오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다.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서울 하늘 아래 멋진 모습으로 자라난 ‘어느 특별한 마을들’ 가운데 내가 살고 싶었던 곳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많은 마을들이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던 뉴스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밥상 위에 오른 이 음식들이 어떤 곳에서 나고 어떤 길을 통해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런 세상에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며, 안전한 먹을거리의 회복은 곧 안전한 삶터의 회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역시 ‘밥상’에서 이뤄졌다. 밥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인 듯, 인터뷰인 듯 다양한 이야기를 두 시간이 넘도록 나누었다. ““밥 한 번 먹자”는 말 뒤에는 식사 한 끼가 주는 신뢰의 공유”(45쪽)를 만끽했던 것이다. 당신도 오늘 저녁, 맛있는 밥을 좋아하는 사람과 꼭 함께 나누길 바란다.
새로운 마을의 싹이 트고 있는 시대
박재동 선생님께는 ‘시사만화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데요. 이번에는 ‘마을’입니다. ‘마을 공동체’에 원래 관심이 있으셨나요?
박재동: 삽화를 그리면서, 즐거웠어요. 내용이 좋으니까요. 마을에 늘 관심이 있었어요. 나 같은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 마을공동체에서 자랐어요. 5, 60년 전 마을은 초가로 된 집들의 공동체였고, 모든 사람들의 직업이 똑같은 곳이었죠. 사람들의 관심사도 같고, 아이들도 다르지 않았고요. 하나의 공동체로 짜여있었어요. ‘마을’이 어떤 것이라는 게 머릿속에 딱 있죠. 그림도 바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요. 초가집, 당산나무, 우물가, 학교, 이런 식으로 말인데요. 마을 전체가 하나의 삶을 사는 느낌이 있었어요. 물론 개개인도 있지만요. 누구네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가서 일도 하고, 울어주고 하는 식이었어요. 도시로 오면서 마을의 단절을 느꼈어요. 새로운 마을의 싹이 트고 있는 시대예요.
이웃, 마을과 단절된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전하고 싶으셨던 메시지가 있다면요?
박재동: 제가 살던 마을은 프라이버시라는 게 거의 없었어요. 투명한 사회죠. 한 번 찍히면 큰일인데, 도시는 그게 돼요. 그게 도시의 강점이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어요. 제가 시골마을에 살다 부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많이 놀랐죠. 전부 뜨내기들이었어요. 여기는 마을이란 개념이 없어진 거예요. 집에서 쫓아내질 않나, 사기꾼들이 있질 않나, 말도 엄청 험하고요. 그 후 서울에 왔는데 여기는 더했어요. 하숙생에게 무슨 마을이 있겠어요. 지금도 살고 있는 곳이 우리 동네기는 하지만 이게 동넨지 모르겠어요. 그러다보니 마을의 개념을 달리 해야겠다 생각이 들어요. 워낙 자주 이사를 가고 오니까요. 지금은 아파트촌도 마을이고, 직장도 마을이죠. 옛날과는 다른 거예요. 인터넷 안에도 새로운 마을이 있더라고요. ‘우리 마을이다’ 말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무조건 예전의 마을을 생각하신 건 아니군요. 도시에도 그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요.
박재동: 어렸을 때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떠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웠어요. 지금은 별을 못 보지만요, 우리끼리 사는 이곳에 별이에요. 자연 조금 잃어버려도 항상 전기도 들어오고 좋죠.(웃음) 옛날엔 밤이 아주 캄캄해서 무섭고 외로웠어요. 특히 어디 갔다가 늦게 들어올 때면 캄캄한 길을 오래오래 걸어서 겨우 집 근처에 다다라요. 방에 켜 있는 조그만 빛이 겨우 보일 뿐이에요. 지금은 천지사방이 빛이잖아요. 지금은 안 걸어도 되지만 걷는 거고요. 예전에는 무조건 걸어야 했죠. 이렇게 만나려면 엄청 오래 걸렸어요. 예전 마을의 좋은 점만 생각하면 돼요.
‘온라인’을 통해 ‘마을’의 가능성을 확인한 사례가 의외로 많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박재동 선생님께서도 온라인 마을을 상상하시고요. 사회가 변화하면 수단을 달리 해서도 기존의 소중한 가치를 이어나갈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어요.
박재동: ‘톡’이 내 마을이에요.(웃음) 괜히 들여다보고, 또 심심하면 보는 거예요. 난 좋게 생각해요. 안 보려면 안 볼 수도 있잖아요. 선택할 수 있어요. 내가 사는 도시에는 ‘우리 동네 놀러와’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음식이 좋은 게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요. 동네 사람들도 사귀었다 싶으면 이사 가잖아요. 별 게 없는 거예요. 내가 떠난다 해서 섭섭할 사람도 아무도 없죠. 온라인도 새로운 마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정신적인 가치를 나누는 사람들은 다 온라인에서 만나거든요. 옆집 사는 사람과 정말 속 깊은 얘기 못하잖아요. 인사하는 정도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게 마을의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것이 없으면 외로운 거죠.
아파트 사례가 가장 처음 소개 되는데,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가요?
김이준수: 의도가 있던 건 아니고요.(웃음) 다만 아파트라는 공간에 대한 고민은 다들 많이 하고 있죠. 서울시에서 커뮤니티 플래너라고 해서 대단지 아파트 안에 커뮤니티를 만들어주는 그런 분들도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요. 아파트 쪽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구조죠. 아파트에 사는 사람의 비율이 50%가 넘으니까요.
대화의 단절이나 공동체 가치의 훼손을 이야기하면서도 상상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이렇게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박재동: 나라를 만들어야겠어요.(웃음) Republic of Human. 온라인상에서 만들면 되거든요. 좀 더 인간답고, 가치 있게 살자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만들면 되는 거예요. 국경을 초월해 정말 사람을 위한 곳이 되는 거죠. 작은 일이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생활이 전부 땅에 있었지만 지금은 달라요. 마을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이번 작업을 통해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하셨잖아요. 특히 ‘마을’이라는 것의 어떤 부분이 영감을 주었는지 궁금해요.
박재동: 사례 하나하나 모두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화를 예고하는 새싹 같아요. 그래서 이 작업할 때 굉장히 즐거웠죠. 김이준수 씨도 글을 잘 썼잖아요. 종일 그림을 그리면 힘든데요,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했어요. 내용이 ‘마을’ 곳곳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주고 있으니까요. 어릴 때 사라졌던, 내게 부족했던 ‘마을’의 모습이 있었어요. 뜨내기가 모인 곳에서 나 자신도 뜨내기인 상태, 마을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던 상태에서 마을을 봤죠.
생업도 예술이 될 수 있어
마을의 힘이라는 것은 곧 ‘이야기’의 힘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각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고, 다른 이에게 의미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박재동 선생님께서 마을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면 “오직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뭔가 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일로 만들어준다”(239쪽)고 한 부분도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박재동: 마을에 좀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동네에 이런 게 있다, 할 수 있는 가치 말이에요. 그런 가치들을 뜻 있는 사람들끼리 하나씩 심고 있기도 하고요. 우리 동네에 어떤 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랑이 되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희망이 되죠.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굉장히 가치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정성스럽게 가치를 심는 것이 무척 소중해요. 또 제가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요즘 음식점이 많잖아요. 스파게티 집, 베트남 쌀국수 집 등등. 미용실도 있고, 커피숍도 있고, 휴대전화 매장, 당구장, 기원도 있죠. 나는 그런 일 자체가 참 가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곳이 존중받는 그런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된 계기라도 있으신가요?
박재동: 한 번은 풀빵을 굽는 아주머니를 봤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풀빵 장사를 하신 적이 있고, 저도 풀빵을 구웠기 때문에 자연히 마음이 갔죠. 그 아주머니를 그리려고, 풀빵을 많이 사면서 허락을 구했어요. 그리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아이들 키우면서 장사하느라 힘드네요. 이렇게 살면 좋은 날이 올까요?” 저보고 그래요. “그럼요.” 하고 그런 이야기를 그림 옆에 썼죠. 다 그리고 아주머니 성함을 물어보니 이름은 쓰지 말라고 해요. 그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 어머니도 이 장사를 해서 나를 키웠고, 나도 풀빵을 구웠는데 왜 저렇게 부끄러워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내가 못 배워서, 좋은 대학 못 나와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정말 부끄러운 일이 뭐예요. 나쁜 짓 안 하고 자기가 벌어서 살면 그게 자랑스러운 거예요.
성공과 실패에 대한 그런 개념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죠.
박재동: 다른 한 번은 언젠가는 또 택시를 탔는데 기사 분이 하얗게 샌 제 머리를 보고 예술가 같다고 해요. 그러면서 “나도 예술가예요.” 하더라고요. “내 차에 타는 사람은 무조건 행복하게 해줍니다. 예술가 아닙니까?” 라고요. 이 사람은 자부심이 있는 거죠. 이 사람은 최고의 직업을 갖고 있는 거예요.
성공이라는 게 뭔가요. 우리에게는 성공과 실패의 프레임이 있어요. 성공이란 사회적으로 알아주는 것, 판사, 교수, 의사처럼 안정되고 고위직이라고 생각하죠. 나머지는 다 루저예요. 루저들이 양산되어 있어요. 내가 아주 소중한 사람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가치를 주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많이 없는 거죠. 우리 사회가 대개 그런 루저를 만들어내요.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는데, 그 안에 “열심히 안 하면 풀빵 굽는다”는 말이 숨어 있어요. 옛날에도 특정 직업을 천시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그런 생각을 부끄러워해야 해요. 새로운 시대는 지금 같은 수직적 가치가 아니라 수평적 가치, 풀빵 굽는 것이나 미용실을 하거나 교수를 하거나 판사를 하거나 상관없이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수평적 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제가 바라는 마을은 그런 거예요. 무슨 일을 해도 뿌듯한 사람들이 있는 동네 말이죠.
그래서 ‘짜장면 배달 대회’, ‘치킨 주간’을 만들자는 재미있는 제안을 하신 거로군요.
박재동: 김밥 장사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한편 공부 많이 한 사람들도 취직이 어렵고요. 이제 정신이 드는 거예요. 저절로 변해가겠죠. 그렇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 별로 없어요. 예술이라는 게 최고의 경지거든요. 정치도 엄청 잘하면 ‘예술이다’ 그러잖아요. 장사도 엄청나게 잘하면 ‘예술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요.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스스로에게 예술적인 일을 한다는 느낌이 올 때 사람은 굉장한 가치를 느낄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부럽지 않죠. 모든 사람들이 음식점을 하면서도 내 영혼이 들어있는 곳이 되기를 바라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요? 우선 다른 사람들이 알아줘야 해요. 보통 사람의 생업 자체를 똑같이 소중하게 해주는 거죠. 어떤 축제 같은 걸 하면 그게 될 수도 것 같아요. 짜장면 배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가는 ‘짜장면 배달 대회’를 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러나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재미를 느끼면 그것 자체에도 가치를 줄 수 있지 않겠나 싶어요. 거기서 하나의 마이스터(meister, 명인)가 배출될 수도 있고요. 수평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어요. 이제 조금씩 그게 가능해지고 있어요.
책에 소개된 사례들이 그런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해줘요. 가치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적게 벌어도 행복하게 살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요.
박재동: 많죠.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됐다는 거예요. 남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 안에 톱니가 되어 사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우리가 주인이 돼서 사는 거죠. 아이들 교육을 우리가 이렇게 하자, 먹을거리를 이렇게 하자, 하고 마을을 만들었어요. 그 안에는 어떤 기쁨이 있겠죠. 기쁨을 확산시키는 거예요. 진정한 즐거움이 새로운 가치가 되어서 퍼지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영감을 많이 줄 거예요. 이럴 수도 있구나 하고요.
누구나 백조인 시대, 오리여도 괜찮은 시대
사람, 삶, 예술과 가치에 대해서 늘 생각하시는 거죠?
박재동: 예술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사랑에서 출발해요. 사랑하는 만큼 일을 하게 돼요. 많이 사랑하면 몸이 부서져라 하잖아요. 사랑하지 않으면 하기 싫어요. 저는 어떤 경우에는 의무감으로 해야 하니까 하는 때가 있는데 그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매일 같이 미치겠다고 생각하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서 조금 한 거죠. 얼마 전 기사를 보니까 제가 너무 훌륭하게 나와요.(웃음)
사람이 내가 있는 곳에서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가까우니까 와 닿는 거예요. 내 일로 생각하게 돼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 아버지가 겪었던 사회적 모순에 대해 관심이 있더라고요. 그걸 벗겨내는 것이 나의 일이에요. 직업의 귀천이라는 주제가 항상 깔려있어요. 어렸을 때 늘 그것에 시달렸으니까요. 직접 당했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죠. 우리집이 만화방을 했는데 어렸을 때 그건 금하는 것이었어요.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 너무 싫었어요. 근데 담임선생님이 우리집에 오셔서 아무 내색을 안 하셨어요. 그때 내가 구원을 받았죠. 지금도 그런 생각을 늘 하고, 따져 봐요. 열심히 사는 사람이 왜 천시 받아야 하나, 아니라는 거죠.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일이 요즘도 많은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늘 갖고 있는 주제가 또 있나요?
박재동: 교육이 그래요. 선생을 하면서 아이들을 봤잖아요. 그 아이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황금 같은 시간을 학교에서 다 보내요. 아이들이 행복해야 하는데 말이죠.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요. 김민웅 교수(성공회대 교수)라는 분이 있어요. 친구예요. 『동화독법』이라는 책을 냈는데요.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를 어떻게 읽느냐면 말이죠. 미운오리새끼가 구박 받다가 자기가 백조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아를 실현했다는 내용이잖아요. 김민웅 교수는 그 뒤를 이야기해요. 결국 백조들은 저들끼리 모여서 세계를 탄탄하게 틀어쥐고 살고, 오리들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도록 계급을 나눠버린다는 거예요. 미운오리새끼는 백조, 즉 ‘갑(甲)’이 된 거죠. 그 말을 듣고 ‘내 얘기다!’ 했어요.
미운오리새끼 이야기가 선생님 이야기라고요?
박재동: 저는 어릴 때 싸움도 못하고 어리바리했거든요. 기죽어 지내다 공부를 잘한다는 걸 알게 됐죠. 명문 중, 고등학교에 서울대를 나왔어요. 백조가 된 거 아니에요?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을 다 오리로 보는 거예요. 나는 백조인 줄 알고 즐기며 살았던 거죠. 서울대니까 갑, 선생 했으니까 아이들에게 갑, 시사만화를 그릴 때는 그야말로 갑이었죠. 드러내진 않았어도 사실 갑을 즐기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저희 자녀들이 공부를 엄청 못하는 거예요. 학교에 불려가고요. 그러면서 주변이 새롭게 보였어요. 치킨집도, 미용실도 내 아이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전엔 내가 백조니까 백조 새끼인 아이들도 백조로 살 거라 생각했던 거죠. 우리 어머니가 풀빵 장사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내가 말로는 민중, 민중 하지만 정말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었구나 깨달았어요. 지금 마을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래서예요. 모두 중요하니까요. 중요하다는 걸 나중에 깨달은 거죠. 누구나 백조인 시대, 오리여도 괜찮은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하나 더 보태자면 분단이에요. 알게 모르게 우리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죠. 그것 때문에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는 말을 아무데나 갖다 붙여요. 그런 걸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그런 것들에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소개된 사례들을 통해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먹는 것의 중요함’이었습니다. “밥은 네트워크, 공동체”라고도 하셨는데요.
박재동: 이탈리아에 갔을 때 로미오와 줄리엣의 생가도 보고, 세계적인 등산가 메스너(Reinhold Messner)도 만났지만 그곳에서 먹었던 전통 화덕 피자가 정말 맛있어서 계속 생각이 나요.(웃음) 꼭 먹어보라고 하고 싶어요. 먹는 게 맛있으면 그렇게 다 모이죠.
밥을 함께 먹는 것은 기본적인 신뢰가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서양에서 유래된 건배의 풍습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술에 독을 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건배를 한 것이다. 그래서 “밥 한 번 먹자”는 말 뒤에는 식사 한 끼가 주는 신뢰의 공유가 있다. (45쪽)
언론의 주인이 돼야 진짜 주인
핵심이 되는 이야기를 압축해 보여주는 박재동 선생님의 그림이 책이 주는 커다란 매력 중 하나인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마을 사례는 어떤 것이었나요?
박재동: 마을 신문 <도봉N>과 마을 방송을 하는 <와보숑> 사례요. 어디 가서 강연할 때도 많이 얘기해요. 이게 새로운 시대다, 라고요.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시대요. 지금까지 언론이나 이런 것들은 수동적으로 받는 형태였잖아요. 자기가 생산해야 해요. 언론의 주인이 돼야 진짜 주인이 되는 거예요. 전에 만난 어떤 분이 생각나요. 싱글맘인데 저를 알아보고 부럽다고 말을 해요. 이유를 물었더니 “선생님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잖아요.”라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고 말이죠. 우리가 자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라요.
사람들은 어쩌면 이야기하기 위해서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걸 이 사례를 보고 생각했죠. 뉴스라는 게 항상 먼 곳, 흘러온 곳의 이야기니까 우리는 주변부 인생, 변방 인생이라는 느낌이 늘 있어요. 하지만 책에서 본 마을은 내 이야기가 뉴스가 되고 방송이 되고 있어요. 동네 아줌마가 아이를 안고 나와서 앵커를 하고요. 누구나 주인이 되는 삶이 꽃피는 것을 보고 이렇게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생각보다 잘한다는 거예요. 확신을 하고 있어요. 학교에서도 아이들 스스로가 방송을 만들어야 해요. 아이들이 PD도 하고, 기자를 하고, 편성해서 자기들을 위한 방송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경기도 교육청에서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어요. ‘꿈의 학교’라고요. 제가 그곳 운영위원장을 지내고 있어요.(웃음)
‘꿈의 학교’에는 어떤 비전을 갖고 계세요?
박재동: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직접 장사를 해볼 수 있어야 해요. 어릴 때 우동집을 해보라는 거예요. 나중에 무얼 하겠다, 가 아니고 지금 해보라는 거예요. 영화감독이 되고 싶으면 지금 영화를 만들라는 거예요. 기획사를 너희끼리 만들어서 돈을 벌어보라고요. 해봐야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망해봐야 진짜 가치와 꿈을 찾을 수 있어요. 해보고 꿈을 찾는 거지, 그냥 앉아서 적성 검사 하는 정도로는 안 돼요. 학교에서 풀빵 굽는 것, 우동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소중한가를, 그 가치를 어릴 때 심어줘야 해요. 공부 잘하는 건 그 중 하나의 길이죠. 의사 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스스로 돈을 벌어서 써보는 맛이 있잖아요. 고소하게 써먹어보고 망하기도 하고요.(웃음)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구르다보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에 성장을 다 할 거예요. 지금은 대학교 나와도 뭘 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렇게 막연하게 꿈을 찾지 말라는 거죠.
책에 소개된 것 외에 집중할 만한 사례가 지역에도 많이 있을 것 같아요.
박재동: 많이 있죠. 서울에 있으면 방 한 칸 얻는 것도 너무 힘들고 경쟁도 심하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서 귀촌을 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도 여기저기 눈에 띄어요. 지역 마을에 들어가서 과외도 하면서 욕심 없이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사는 거죠. 지역 자체에서도 귀촌 마을을 만들어서 군에서 지원을 하기도 해요. 책에서 보듯 자생적인 사례도 있지만 관에서 자구책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어요.
김이준수: 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라는 것도 있고요. 어쨌든 서울에 사람이 많다보니까 이런 마을 공동체 관련해서 센터도 만들고 했기 때문에 사례가 많았고요. 부산도 그렇고 다른 지역도 마을 공동체와 관련한 것들을 벤치마킹도 하고, 서울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탐방도 많이 오시고 해요.
-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박재동,김이준수 공저/서울시 마을공동체 담당관 기획 | 샨티
요즘 같은 세상에 가족도 못 믿는데 이웃은 어떻게 믿느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세상이 그렇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 대문을 열고 골목으로 나와서 혹은 마을의 공유 공간에 모여서 함께 ‘놀고, 먹고, 협동하고, 예술하고, 교육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놓은 책이 나왔다. 바로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 마을에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행복’을 보여주고, 그 방법까지 제안하는 책이다.
[추천 기사]
- 이우혁 “『왜란종결자』는 세계관에 기초를 잡은 작품”
- 말로 “모든 음악은 결국 자기를 찾는 과정”
- 임경선 “사랑은 관대하게 일은 성실하게”
- 김수경 “아들과의 연애는 이제 끝내는 게 좋겠다”
- 소이 “지금도 무언가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연선
읽고 씁니다.
쟈인
2015.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