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란 대체로 몇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리고 미숙하지만 점차 의사로서 성장해 나가는 캐릭터, 화통하고 열정적이며 의사 윤리와 소명 의식에 불타는 캐릭터, 침착하고 이지적이지만 냉정한 캐릭터 등. 어느 쪽이건 점차 의사로서 성장해 나가며, 돈보다는 직업 의식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운 드라마가 있다. 제목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드라마, SBS <용팔이>다.
드라마는 눈을 잡아 끄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다. 용팔이라고 불리는 외과 의사 김태현(주원)이다. 불법 왕진을 다니는 돌팔이지만, 병원에 가면 죽을지언정 태현에게 치료받으면 죽지 않는달 정도로 용해서 용팔이다. 병원보다 조직 폭력배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 탓에 밤마다 배낭을 메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게 일이다. 유명세는 혹독해서 술집 테이블 위에서 술병을 밀어내고 수술하는 일은 부지기수고, 공사판이든 폐건물이든 가리지 않고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든다. 하지만 어머니를 불의의 사고로 잃고 동생은 여전히 투석을 받아야 하는 상황, 그가 짊어진 짐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돈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독특한 의사 캐릭터는 이렇게 탄생한다.
얼핏 인명보다, 의사로서의 소명 의식보다 돈을 쫓는 이 캐릭터는 시청자들에게 거부감을 자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뛰어들고,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기는 것도 서슴지 않는 태현의 모습은 묘한 감상을 자아낸다. 소위 말하는 ‘사’자 면허를 달고서도 태현의 사정은 나아진 것이 없다. 고생하는 엄마와 아픈 동생을 보며 내가 의사만 되면 걱정 없노라 큰소리를 떵떵 쳤던 과거의 태현은 아마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사채 빚을 갚기 위해 목숨 걸고 불법 왕진을 다니고, 경찰을 피하기 위해 한강으로 뛰어내리는 지금의 끔찍한 현실을. 동생을 지키기 위해 용팔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숨긴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현실은 그에게 어떤 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출처_ SBS
설상가상 이 과장(정웅인)에게 정체를 들킨 탓에 태현은 12층으로 강제 이관된다. 한신병원 12층은 병원 속 유리된 이상한 나라이며, 계급 의식으로 쌓아올린 기이한 세계다. 12층에 입원한 사람들은 환자가 아닌 고객으로 불리고, 의사는 의료인의 본분을 버리고 부와 권력을 쫓는 사업가 혹은 정치가가 된다. 12층에선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맹세한 의사 윤리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인 데다 의사라는 이름은 부질없는 허명일 뿐이다. 의사들은 부와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고 기꺼이 범죄의 공모자가 되기도 한다. 태현이 12층으로 불려온 것도 그 때문이다. 한신 그룹 회장인 도준(조현재)의 계략으로 수 년 간 의식을 잃고 자리에 누워 있는 여진(김태희)을 감시하고 계속 잠재우기 위해. 그들의 약속이 부질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태현은 그들의 손을 잡아야만 한다. 그들의 손을 잡는 순간 동생의 생존 확률이 껑충 뛰어오르기 때문이다. 12층의 높은 분들은 동생이라는 키로 태현의 목숨줄을 쥐고 흔든다.
12층에 뚝 떨어진 태현은 더없이 외롭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12층은 태현의 세계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드라마는 내내 여러 이미지를 대비시키는데, 몇몇 장면은 김태현이라는 캐릭터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12층과 그 바깥의 세계, 환자와 고객, 지배층과 피지배층, 기득권과 서민층. 얼핏 태현은 기득권에 진입하고자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보인다. 배경과 집안으로 후배들을 차별하기 일쑤고,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며 보호자에게 노골적으로 사례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언뜻 더없이 속물적인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드라마는 이내 그의 진심을 슬쩍 드러낸다. 돈이든 권력이든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라는 냉소적인 시각은 여러 번 상처 받고 거꾸러진 경험 때문이다. 제때 수술을 받았다면 살아날 수 있었던 어머니는 VIP 때문에 한 번 수술도 받지 못하고 숨을 거뒀고, 아픈 동생은 아직도 제 몸보다 돈 걱정이 먼저다. 정말 기득권의 개가 되고 싶다면 그저 가만히 있으면 그만이련만, 태현은 비겁한 공모자로 남지 않는다. 무연고라 당장 내쫓길 판인 환자를 위해 몰래 수술방으로 숨어들기도 하고, 병원이 폭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환자를 설득하러 나서기도 한다. 이 시점 태현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갑을 관계에 빗대어 두터운 철문을 무기로 삼은 당신의 행동이 또 다른 희생자를 낳을 수 있다는 태현의 일침에 여자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 가만히 있으라던 말이 끔찍한 참사를 낳았던 사회, 도망치지 않고 재앙을 막으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가슴을 울린다. 게다가 재벌 3세의 횡포에 상처 입고 주저앉은 사람에게 공감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단 점에서, 그의 속물적 면모가 가면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태현이 돈을 쫓게 된 이유도 동생 소현 때문이 아닌가.
출처_ SBS
4회 마지막, 태현에게 손을 내민 것이 여진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이복 남매인 도준의 명령으로 이 과장은 수 년 간 여진을 마취시켜 코마 상태를 위장하고 있다.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은 오빠, 오빠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동생. 가진 것이 없는 남자, 대 한신 그룹의 적통 상속녀. 태현과 여진은 그린 것처럼 대비되는 사람들이다. <용팔이>는 돈으로 태현과 여진이 손을 잡을 것임을 명료히 짚었지만, 둘의 인연은 당연히 돈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여진과 태현은 어떤 인연을 시작하게 될까? 여자를 구원한 것처럼, 태현은 끝없는 암흑 속에서 여진을 구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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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